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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몽 逆夢
실제 사실과는 반대인 꿈
가라르에서 짧은 만남을 가진 둘은 첫사랑을 했을 때와 같이 서로에게 열정적이었다. 기술의 발달로 시간만 맞으면 수시로 화상 통화가 가능했다. 나누가 밤에 쉬고 있을 때, 순무는 다음 날 아침을 보내고 있었다.
휴대 전화 조작이 서툰 순무는 사용이 편리한 스마트 로토무를 사용해 나누에게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내기도 했다. 나누는 그가 보내 주는 낯선 가라르의 풍경들이 모두 좋았다. 또, 어디서든 손쉽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였기에 둘은 젊을 적에 좋아했던 음악을 공유하기도 했다. 수행밖에 모르던 순무에게 음악 감상이라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가끔은 스타디움의 스태프들이 찍어 줬다며 모의 배틀이나 훈련할 때의 모습들을 보냈다. 순무의 배틀 스타일은 열정 그 자체였다. 파워풀한 기술, 교묘하게 짠 전략,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웃는 얼굴, 자신이 젊을 때 받지 못한 격려를 젊은 트레이너들에게 해 주는 모습.
어느 날은 휴대 전화 사용을 자주 하지 않았기에 젊은 시절을 찍어둔 게 없다며 자신의 팬 사이트를 소개해 주었다. 들어가 보면 순무의 오랜 팬들이 과거부터 정리해서 게시해 둔 사진과 신문 기사, 잡지 인터뷰, 출연 방송, 배틀 동영상이 가득했다. 나누에게는 그야말로 천국과도 같은 곳이었다. 일이 없을 때면 휴대 전화로 연인의 과거 행적을 더듬곤 했는데, 그 표정이 어떻게 보였는지 옛 동료가 휴대 전화로 야한 거라도 보냐며 놀리기도 했다.
결혼하고 싶은 남자 2위로 뽑히셨던데, 결혼 계획은 있으신가요?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연애를 해 본 적도 없는걸요. 지금은 저와 제 포켓몬들에게 집중하고 싶습니다.
인터뷰에서 낯선 가라르 억양으로 그렇게 말한 뒤 귀엽게 미소 짓는 삼십 대의 순무를 보면 씁쓸할 때도 있었다. 나누는 평생 알 수 없을 잃어버린 세월의 큰 조각 덩어리였기 때문이다. 그때 같이 있었다면. 힘들어할 때마다 안아 줄 수 있었다면. 그러면서도 피어나기 힘든 환경 속에서 꽃을 틔운 그가 사랑스러웠다.
틈틈이 알로라 리그를 발전시키기 위해 순무와 그의 동료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봄이 되자 알로라 지방은 섬순례와 더불어 리그 개최 때문에 굉장히 바빴다. 파출소와 나옹들도 거의 옛 동료 둘에게 맡긴 상태에 가까웠다.
그렇게 모든 일정을 소화한 나누는 여름 휴가를 맞아 호연 지방으로 향한다. 순무는 모르겠지만, 나누는 수십 년 만의 방문이라 꽤 들뜬 상태였다. 큼직한 여행용 캐리어도 새로 샀다. 얼굴만 보면 전혀 들뜬 것 같지 않은데, 라는 옛 동료의 농담에 그만이 지을 수 있는 음흉한 미소로 대답한다. 그러면 충분히 기뻐 보인다는 말을 해 준다.
비행기를 타고 시차에 시달리며 순무와 호연 공항에서 만났다. 이미 호연 지방의 유명인이 된 순무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알아보는 사람이 없기에 편안해 보였다. 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항구로 향했다. 이제 나이를 먹어서인지 건강해 관한 이야기가 주로 나온다. 파라섹트의 버섯이 몸에 좋다느니 알로라산은 품질이 영 좋지 않기로 유명하다느니 그런 소리들을 한다.
오후 늦게 잿빛도시에 도착한 둘은 어중간한 시간대에 이른 저녁 식사를 했다. 간만에 맛보는 고향의 맛에 순무는 배불리 먹어도 기분이 좋았다. 순무가 성수기에만 잿빛도시에서 굴뚝산으로 바로 갈 수 있는 관광버스를 운영한다고 알려 주었기에 버스 터미널로 가서 표를 두 장 샀다. 캐리어를 짐칸에 넣은 뒤 한숨 돌리자 금방 굴뚝산에 도착한다. 휴가철이었기에 많은 관광객이 와 있었다. 사람들과 포켓몬들 사이를 빠져나와 케이블카에 타기 위해 이용료를 낸다.
"케이블카 타고 가는 건 여전하구만."
나누가 알로라의 더위보다 혹독한 호연의 더위에 지친 상태로 말하자 순무가 웃는다.
"산기슭 쪽에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이윽고 정상에 도착한 뒤 이제는 잘 포장된 길을 따라서 내려간다. 옛날보단 확실히 오는 게 편해졌다고 하면 순무는 고개를 끄덕인다. 전에 가라르에서 만났을 때 들은 바에 의하면 순무의 부모님은 아직 정정하시다고 했다. 오랜만에 보면 자길 기억이나 할까, 라고 생각하며 용암마을로 들어간다.
마을 또한 당연하게도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나누가 둘러보기도 전에 순무의 제안으로 옷을 맞추기로 한다. 관광객들에게 전통복을 빌려주기도 하고 팔기도 하는 옷가게로 향한다. 입은 채로 가까운 곳까지만 다닐 수 있다는 인식이 있지만, 온천마을인 데다가 작은 곳이었기에 얼마든지 거리를 활보할 수 있다. 둘은 색만 다르고 디자인이 같은 것을 구매한 뒤에 서둘러서 예약했던 여관으로 향한다.
묵을 곳은 젊은 시절을 불태웠던 그곳. 하지만 여관 이름이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나누가 서서 낯선 이름이 적힌 하얀 천을 보고 있자 순무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낸다.
"아버지 쪽 사촌분이 물려받았어. 아버지는 물려받을 나도 없고 일할 맛도 안 나서 다른 사업을 시작하시고는, 그대로 사촌 아저씨께 여관을 넘기셨어."
"왜 말 안 해 줬어?"
선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엔 미안함이 가득했다.
"말하면 실망할까 봐. 우리 추억이 깃든 곳이 변했다는 걸 알면…… 오지 않으려고 할 것 같았어. 미안해."
나누는 검지를 순무의 코앞에 들어 보였다. 그러자 순무는 나누가 화났다고 생각했는지 흠칫했다.
"정답."
"놀랐잖아."
진작 알았더라면 나누는 정말 그랬을 것이다. 둘은 웃고 나서 자동문이 된 여관의 출입문을 열기 위해 버튼을 누른다. 옛날에는 종이 달려 있었는데 지금은 벨 소리가 찌르르 울린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노부부가 둘을 맞이한다. 행색으로 봐선 이들이 주인 같았다.
나누의 이름으로 예약했기에 명단에서 이름을 찾은 뒤 방을 안내받는다. 순무네 친척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순무도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의아해하던 나누가 귓속말로 같은 핏줄 맞냐고 묻자 순무는 몇 번 안 본 사이라고 대답한다. 그럼 괜히 친하게 굴 필요는 없지.
주인장을 따라 복도를 걸으며, 나누는 능청스럽게도 서방의 억양을 섞어 타지방에서 왔는데 여긴 역사가 깊어 보인다는 말을 건넨다. 순무는 웃음을 참으며 나누의 어깨를 살짝 쳤다. 순무의 먼 친척 아저씨는 쉬었지만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자기들도 친척이 하던 걸 인수받았다고 대답했다.
복도 끝으로 가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는 계단을 오른다. 일할 때 가 본 적도 없던 2층은 이미 손님이 많아 시끌시끌했다. 이미 내부 구조를 알고 있기에 미닫이문을 열어 주면 진심으로 감탄한 척을 했다. 널찍한 객실 한편에는 여름 이불이 깔려 있고 중앙에는 큰 원형 탁자와 모시 방석이 놓여 있다. 벽걸이 텔레비전 아래에는 긴 협탁이 있었다. 협탁 위에는 안내문, 메모지, 펜, 리모컨 등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다. 주인장과 식사 준비나 다른 필요한 서비스에 관해 이야기한 후 드디어 쉴 수 있게 된다.
서둘러서 짐을 정리하는데 갑자기 창문 쪽에서 빗소리가 들렸다.
"오자마자 비가 오네."
선글라스를 벗어서 손에 든 순무가 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바닥에 앉아 가지고 온 것들을 정리하던 나누도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비 오는 풍경을 보았다. 열린 창문을 통해 내리 떨어지는 비와 창가에 달린 벽붙이 화분의 식물잎이 비 맞는 걸 구경하던 나누는 담배를 찾았다. 계속 바깥 풍경을 보는 순무의 옆에 서서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들이마신 뒤 밖으로 숨을 내뱉는다. 창틀에 담뱃갑을 두자 순무가 그것을 들었다.
"이게 얼마 만이야. 디자인은 달라졌구나."
여전히 같은 것을 피우는 것에 놀라워하자 나누는 눈웃음을 짓고 순무를 보았다.
"널 잊지 않으려고. 바꿀 수가 없었어."
주름지며 휘어진 눈매와 근질근질한 말에 부끄러워하지도, 성내지도 않는 순무는 은은한 미소로 대답했다. 나누는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고 순무는 손에 든 담뱃갑을 살펴본다.
"이게 딱 나이 지긋한 양반이나 찾을 법한 디자인이잖아. 매대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지고, 찾는 사람만 찾을걸."
그 말에 순무는 호탕하게 웃었다.
"알로라에서도 구할 수 있었어?"
"국제 슈퍼에서 팔어. 거기엔 온갖 지방 공산품이 다 있어. 가라르산 카레도 있는데 사 먹은 적은 없어."
"신기하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맛이 좀 변했어. 그래서 다른 것도 피워 봤는데…… 이것만큼은 안 되겠더라고."
자신이 나인테일 때문에 그리움을 잊어버린 동안 나누는 늘 그리움에 젖어 살았다. 말뜻을 이해한 순무가 아련하게 쳐다보자 나누는 씩 웃는다.
"아직까지 용케 나오는 걸 보면 나 같이 고집 센 노땅이 많단 거겠지."
그걸 구질구질한 미련이라고 부르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나누는 계속해서 담배를 피워댔고 순무는 곁에 서서 손에서 담뱃갑을 놓지 않았다. 둘은 창밖 너머 펼쳐진 마을 풍경을 보며 빗소리를 숨소리 삼아 그 속에서 호흡했다.
짐을 정리 하고 긴 여정의 노곤함에 취해 일찍 잠든 탓에, 새벽이 되자 저절로 눈이 뜨인다. 나누가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는데 옆에 누워 있던 순무가 나지막이 말한다.
"악몽을 꿨어."
그 말에 놀란 나누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순무의 뺨을 어루만졌다. 네가 날 여기 두고 가 버렸다고 말하는 표정은 그가 젊었을 때와 같이 애달팠고, 그때만큼 순무는 청년의 얼굴이었다.
"역몽이라는 말이 있어. 현실과 반대되는 꿈이란 뜻이야."
그렇게 말하면서 거칠어진 손으로 이마에 흘러내린 순무의 앞머리를 쓸어올려 준다.
"난 이제 어디에도 가지 않아. 아니…… 갈 수 없어."
안심이 된 듯한 순무는 웃으며 나누의 품에 안긴다. 나누는 다정하게 등을 두드려 주며 다시는 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여름이라 이르게 해가 떴다. 씻고 나서 제공되는 조식을 먹으러 식당으로 내려가면 추억이 피어오른다. 마주 보며 밥을 먹고 열심히 일을 도우며 장난도 쳤던 그때. 둘은 청년일 때와 같이 마주 보고 앉아서 옛날이야기를 하면서 밥을 먹었다. 나누가 발가락으로 순무의 다리를 간질이다가 매운 손에 맞았었다고 이야기하자 순무는 너무 웃겨서 먹던 것을 내뱉을 뻔했다.
식사 후에는 드러누워서 여유롭게 텔레비전이나 보며 시간을 죽인다. 그렇게 점심시간이 되자 옷을 갈아입는다. 어제 샀던 유카타는 감색과 쥐색이었고 둘 다 민무늬였다. 키가 줄어든 탓에 하늘하늘한 옷자락이 발목까지 내려오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점심을 사 먹기 위해 마을로 내려가서 이리저리 둘러본다. 용암마을은 많이 변했다. 휴일에 함께 밥을 먹었던 곳도 이제는 젊은이들 취향에 맞는 음식점이 되어 있었고 전통과는 거리가 먼 브랜드가 많았다. 슥 고개를 돌린 나누가 뭐 이렇게 변했냐며 놀라자 선글라스를 쓴 순무의 눈이 웃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안 왔어? 언제더라. 겨울 방학?"
"당연하지. 네가 없는데."
말투는 무뚝뚝하지만 귀여운 말에 순무는 말없이 미소를 지었다. 나이를 먹어가며 퉁명스러워지긴 했어도 참으로 나누다운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점심을 먹고 사당에 가 볼까? 하며 그쪽으로 걷는데 순무를 알아본 사람들이 함께 사진을 찍자거나 사인을 해 달라고 요청한다. 어디선가 언론사 기자 같은 사람이 인터뷰 요청을 한다. 갑자기 순무는 선글라스를 벗고 눈을 부릅떴다. 나누는 그 표정이 무서워서 약간 놀란다. 순무는 큰 목소리로 일하러 온 게 아니라 쉬러 왔으니 실례합니다, 하고는 앞으로 척척 걸어간다. 나누가 그 뒤를 쫓아가면서 사람들에게 미안하다는 손짓을 한다. 순무는 다시 선글라스를 쓰고 이걸 썼는데도 나인 걸 알아보겠어? 하고 묻는다. 나누는 누가 봐도 순무 관장님이라며 놀렸다.
"그나저나 너, 목소리가 그렇게 컸던가?"
"트레이너가 되고 나서부턴 발성 연습을 많이 했거든. 체육관이나 리그장은 배틀 필드가 넓잖아. 처음엔 포켓몬들이 내 목소리를 잘 듣지 못했었어."
나누도 그 말에 공감했다. 지난봄에 알로라 리그에 참여하며 이러다 쓰러지는 게 아닐까, 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나이가 더 많은 할라와 달리 비실비실한 체격에다 사무직이었기에 체력이 그리 좋지 않다.
이윽고 윈디를 신의 사자로 모시는 사당에 도착한다. 검붉은 색으로 칠해져 장엄한 분위기는 세월이 지나도 같았지만 운세 뽑기 가판대는 없었다. 꽤 더웠기에 아이스크림과 음료수를 파는 매대에서 시원한 물을 사 마신다.
그늘막이 있는 쉼터에 앉아 오래전, 재미로 뽑았던 운세에 관해 얘기하고 식스테일이 종이를 불태워 준 이야기도 꺼낸다. 어떻게 그게 그리 잘 맞았는지. 어쩌면 정말 운명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심오한 대화를 나눈다.
이제 용암마을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재미를 추구하는 곳이 아니었다. 규모가 작기 때문에 한번 돌아보면 관광도 끝이었다. 사당에서 쉰 뒤, 길을 거닐며 마을을 구경한 둘은 본채로 돌아가기 전에 별채로 올라가 본다. 함께 지냈던 별채는 순무가 어렸을 때처럼 객실이 되어 있었다. 밖에 꽃화분도 놓여 있고 출입문에는 손님이 있다는 팻말도 달려 있다. 순무가 지낼 때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외관을 잘 꾸며놓은 것을 보자 흐뭇했다.
이미 누군가 머무는 중이었기에 들어갈 수 없어서 곧장 뒷길을 오른다. 둘이서 포켓몬 배틀을 하던 곳에 오자 감회가 남다르다. 그때 남긴 발톱 자국이나 불에 탄 자국들은 모두 사라져 있었다. 순무는 나무를 쓰다듬으며 추억에 잠긴 듯 미소를 짓는다.
나누는 겨울방학 때 혼자 쓸쓸히 이곳에 서 있던 때가 떠올랐다. 그러나 지금 순무와 싱그러운 여름 나무 아래 있는 것을 눈으로 보게 되자 웃음이 삐져나왔다.
'현실과 반대되는 꿈이라……. 그땐 네가 있었던 현실이 꿈 같았는데 이젠 네가 없는 현실이 꿈처럼 느껴져.'
그렇게 생각했다.
본채로 돌아가 더위를 식힐 겸 가벼이 씻고는 텔레비전을 보며 시시덕거렸다. 건강 관련 방송을 보며, 순무는 방송 진행자를 따라 나누의 어깨를 주물렀다. 나누는 힘 있는 손맛에 굉장히 아파했다.
너무 어두워지기 전에는 1층에 있는 노천탕에 들어가기로 한다. 나누는 백자 술병과 술잔을 추가로 주문했다. 탈의실에서 느릿한 동작으로 입고 있던 것을 벗자 또 옛날 생각이 났다. 그땐 둘 다 부끄러워서 서로의 알몸을 쳐다보지도 못했지. 문을 열면 아무도 없었다. 둘은 기뻐하며 미끄러지지 않도록 천천히 걸었다.
"젊었을 때 너랑 이렇게 하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어."
"술 마시면서 온천욕 하는 거? 엄청 위험한 짓인데."
"알고 있어. 완전히 들어가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한 뒤 수건으로 하체를 감싸고는 돌 위에 앉아 온천수에 발만 담근다. 순무도 나누를 따라 그 옆에 앉았다. 둘은 건배, 하고 술을 마신다. 나누가 크하, 하고 시원한 소리를 내자 순무가 아저씨 다 됐네, 하고 웃었다.
서서히 해가 지는 여름 하늘을, 저 멀리 펼쳐진 용암마을을 보는 붉은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순무는 그렇게 빛나는 나누의 눈빛이 좋아서 그의 주름진 옆얼굴만을 바라본다. 나누가 고개를 돌리고 말한다.
"이렇게 쉬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
경찰이 된 후부턴 여유 없는 삶을 살았다. 국제경찰로 진로를 바꾼 것도 떠돌아다니면 순무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련한 희망 때문이었다. 열심히 산 탓에 최고의 요원이라는 증거로 아무것도 없는 숫자를 부여받았다.
그러다가 알로라에서 큰 사건에 휘말렸다. 동료와 임무에 실패했다는 후유증이 너무나 컸다. 그러나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나누는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랐다.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면 그 끝에서, 그 정상에서 순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코로 한숨을 내쉰 순무는 벌게진 얼굴로 나도 그래…… 하고 중얼거렸다. 나누는 자기 못지않게 밑바닥에서부터 기어올랐을 순무의 과거를 헤아린다. 작은 체구, 어려 보이는 인상, 딱딱한 태도. 외로움과 더불어 괴로움에도 시달렸을 거라 생각한다. 그럴 때조차 곁에는 포켓몬들만 있었을 것이다.
문득 순무는 아직도 같이 있는 게 꿈은 아니겠지? 하고 묻는다. 나누는 손을 들어 그의 뺨을 쓰다듬는다.
"지금이 꿈이라면 평생 깨고 싶지 않아."
그러자 순무는 살짝 웃으며 그 손에 입술을 붙인다.
"그래. 지금이 꿈이라면…… 깨어나면 네가 없을 테니까."
마주 보는 미소에는 공백의 시간을 뛰어넘은 애정이 깃들어 있다.
발만 담근 채 온천욕을 끝낸 둘은 객실로 돌아갔다. 여관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마당으로 나가 시원한 여름날 밤을 만끽한다. 아이들이 스파클라를 손에 들고 뛰어다니며 신나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본 순무도 해맑게 미소짓고서 여관에서 나눠 준 포켓몬 먹이를 못의 잉어킹들에게 뿌려 준다. 나누는 그 모습을 휴대 전화에 남겼다. 여전히 잘 찍지는 못해도 어디서든 천진한 미소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걸 본 순무가 같이 찍자며 나누의 뺨에 자신의 뺨을 갖다 댄다. 징그럽게 왜 이러냐고 하면서도 몇 장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본 순무가 한마디 한다.
"넌 웃는 게 참 야비해 보여."
자기가 한 말이 웃겼는지 킥킥 웃어대길래 나누는 원래 생긴 게 이렇다며 받아친다. 갑자기 순무가 빨리 사진 전송을 해 달라길래 해 준다.
"젊은 관장들이 알려 줬는데, 사진 위에 글도 넣고 그림도 그릴 수 있대. 이렇게 눌러서 손끝으로……."
순무가 손가락을 휙휙 움직이자 사진 속 나누의 얼굴에 하얗고 길다란 선이 생긴다.
"나옹 나누."
"애도 아니고 이런 짓을 해."
"얼굴이 무서우니까 좀 귀여워 보이라고."
"내가 안 귀여워?"
장난치듯 뾰로통해진 표정을 짓자 순무는 검지로 나누의 코끝을 톡 쳤다. 대답대신 한 행동에 나누도 웃었다.
"이대로 올려야지."
"너 되게 젊게 사는구나."
"잘 다루지는 못해서 아직 배워가는 중이야."
나누는 그가 젊었을 적부터 배움에 흥미를 가졌던 것을 떠올렸다. 아직도 혼자 수행하는 걸 보면 그 버릇 어디 안 간다고 생각한다.
"사진 설명은 우정 여행. 그럴 듯한가?"
"열애설 나면 어쩌려고 그래."
"울라울라섬의 왕과 엔진 스타디움 관장의 염문설 같은 게 날 리가 없지."
"진짜 나도 모른다."
무뚝뚝하게 관심 없는 척을 한 나누였으나, 가라르에서 지내는 순무의 일상이 궁금했기에 하는 방법을 알려 달라고 했다. 회원 등록을 하고,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설정하고, 아는 사람들을 찾고……. 둘은 같은 사진을 거의 동시에 게시한다. 한 명은 우정 여행, 한 명은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나, 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객실로 돌아가서 잠들기 전에는 짐을 정리했다. 맞춰서 산 옷은 짧게 입긴 했지만 가지런히 개어 넣는다. 빈 캐리어의 한구석에 놓인 것이 마치 머릿속에 새로 늘어난 추억처럼 느껴졌다.
짐 정리를 끝낸 뒤 순무는 자리에 누웠지만 나누는 창문에 턱을 괴고 선 채 담배를 피웠다. 작은 등을 바라보던 순무는 언젠가 나누가 담배 연기와 함께 키스했던 때가 떠오른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이름을 알려 주던 그때를.
둘은 아침 일찍 일어나 각자의 현실을 위해 용암마을을 떠난다. 알로라로, 가라르로 가는 길은 너무나 멀다. 짧은 휴가가 아쉽지만 돌아가면 시차에 시달려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나이를 먹으면 그런 것이다.
굴뚝산에서 잿빛도시로 바로 가는 버스에 탔다. 잿빛도시에서 식사를 하고 드넓게 펼쳐진 바다를 배경으로 하여 서로의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우스꽝스러운 사진 설명을 넣어 동시에 게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배를 타고 호연 공항에 도착한 뒤, 순무는 이륙 시간이 더 빠른 가라르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게이트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한 번 껴안고 연말 휴가 때는 관동에 가 보자고 한다. 나누는 꼭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저 멀리서 나누에게 손을 흔들며 걸어가는 순무의 손에는 작고 각진 물체가 쥐어져 있었다. 그것은 이따금 나누가 그리워질 때면 저절로 타들어 가다 재가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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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편에 대한 해설이 있습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면 다시보기 같은 느낌으로 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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