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와일드 에리어에 도착한 나누는 드넓은 벌판을 보고 감탄했다. 여기저기서 트레이너들이 풀숲을 헤맸고, 포켓몬이 지나가는 트레이너들을 먼저 공격하기도 했다. 빨간 불빛의 기둥이 새어 나오는 구덩이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낯선 사람이 다가와서 쓸 거냐고 물었다. 빛의 정체가 뭔지 몰라서 고개를 저으면 자기가 쓰겠다고 하며 구덩이 안으로 미끄러지듯이 내려간다. 이건 또 대체 뭔가 싶어서 검색해 보면 포켓몬이 서식하는 굴이라고 한다. 가끔은 모습이 특이하게 변하는 개체들이 있다고.
잠시 후, 굴에서 빛이 사라진다. 쑥 올라온 낯선 사람에게 성공했냐고 물으면 그는 씩 웃으며 몬스터볼을 들어 보인다. 나누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엄지를 세워 보였다. 그러고는 허리춤에서 포켓몬들을 꺼내 마음대로 날뛰도록 내버려 둔다. 페르시온은 제 성질에 맞게 작은 포켓몬을 굴리며 갖고 놀다가 쓰러뜨린 뒤, 기절한 것을 앞발로 툭툭 치고는 관심을 꺼버린다. 앱솔은 원래 숨어 있기를 좋아했기에 금방 몬스터볼 안으로 돌아가 버린다. 깜까미는 낯선 풍경에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다가 호수 쪽으로 달려가서는 돌을 관찰한다.
돈크로우는 가라르에 없는 포켓몬이었기에 모두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다른 트레이너들의 관심받는 걸 즐기던 돈크로우는 어디선가 나타난 야생 아머까오와 으르렁거렸다. 악비아르도 돈크로우 옆에 서서 아머까오에게 경고하는 울음소리를 냈다. 나누는 아이고, 하고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 둘을 몬스터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낯선 광경들을 휴대 전화로 촬영했다. 마기라스를 만난 청년의 말처럼 누군가가 포켓몬에게서 도망치는 듯 헐레벌떡 뛰며 사라져 갔다. 몇 사람이 나무를 흔들어 떨어진 나무 열매를 줍는 것도 재미있어 보였다. 풀숲과 거리를 두고 캠핑을 위해 텐트를 치는 사람도 있었다. 텐트 앞에서 불을 지피며 요리 준비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테이블에 깔아놓은 재료들로 봐선 카레 같았다. 그 또한 생생하게 카메라로 찍으며 이름만큼 거친 이곳의 상황을 담기 위해 돌아다녔다.
슬슬 지칠 때가 되자 나누는 아차, 하고 시간을 확인한다. 아직 여유가 있었으나 포켓몬들을 불러 모으고 엔진시티로 돌아갔다. 그러나 기나긴 계단을 오르는 길은 너무나 힘들었다. 체력 후달리는 사람도 와일드 에리어에 올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건지. 이 도시는 그야말로 포마을 만큼 최악이다.
힘겹게 호텔로 돌아간 후 옷에 붙은 먼지를 탈탈 털고는 격식을 차리기 위해 알로라에서 챙겨온 수트 케이스에서 옷을 꺼낸다. 넥타이까지 하고 정장 위에 회색 코트를 걸친 후 빠뜨린 것이 없는지 찬찬히 살펴본 뒤에 서류 봉투를 들고 나섰다. 전철을 타고 슛시티로 향하면서 서류 봉투를 뒤져 박사가 정리해 준 자료를 다시 읽어 보았다. 그리고 해 볼 만한 질문도 몇 가지 생각해 둔다. 가라르 리그 초창기의 모습, 오락성을 띤 리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들, 리그를 유지시키기 위한 노력 등.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을 때 종점에 도착했다.
역 내의 사람들이 어쩐지 두툼하게 껴입은 걸 보고 한쪽 눈썹을 올렸는데, 밖으로 나오자 그 이유를 알았다. 흐린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누는 손끝까지 시려오는 추위에 코트를 여미며 이곳 또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걸어가는 사람들을 따라 눈 덮인 길을 오르면 드디어 슛시티로 이어지는 길이 보인다. 이 넓은 곳을 두고 굳이 저 추운 언덕 아래 전철역을 세울 건 뭐람. 속으로 툴툴대며 일직선으로 쭈욱 이어진 길을 따라 걸었다.
아치형 입구를 통과하자 저절로 발걸음이 멈춘다. 칙칙한 엔진시티와 달리 도시가 전체적으로 알록달록했고 세련된 디자인의 고층 건물도 빽빽했다. 느릿한 걸음으로 주변을 둘러보면서 잘 꾸며진 도시에 위축된다. 아머까오 동상이 장식된 원형 분수의 사진을 찍고 오른쪽으로 가 보면 슛 스타디움으로 보이는 건물이 보였다. 일찍 와서 슛시티나 돌아볼걸, 하고 후회하지만 시간이 없었기에 가까운 포켓몬 센터로 들어가 슛 스타디움으로 가는 길을 묻고 나온 뒤 모노레일에 탑승한다. 이동하는 사이 아까 찍었던 슛시티의 풍경 사진들을 박사에게 보내며 이곳이 진짜 도시다운 도시라는 농담을 한다.
목적지인 슛 스타디움은 피어나기 직전의 꽃봉오리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건물 사진을 몇 장 찍은 후 걸어가자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다. 아직 리그 개최 기간도 아닌데 청년들이 둘러보라고 했던 트레이너 리그 카드를 팔고 있다. 그런 쪽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곧장 앞으로 걸어가 스타디움의 계단을 올랐다. 입구에 서 있는 보안 요원에게 약속을 잡아놨다고 하면 무전으로 확인을 한다. 확인이 끝나면 들어갈 수 있었다.
내부는 널찍했고 역시나 디자인이나 장식이 세련되어서 감탄한다. 당연하게도 개최 기간이 아니기에 사람들은 없었다. 가운데에 놓인 카운터로 다가가 용건을 말하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내리면 회의실이 있다고 설명한다. 넓고 깔끔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에 내리면 복도는 고요했다. 안내판이 없어서 잠깐 헤매다가 겨우 회의실이라는 흰색 팻말이 붙은 문을 발견한다. 휴대 전화로 시간을 보면 약속된 시간보다 조금 일렀다. 나누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노크를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다란 회의용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는 낯선 사람들이 말하던 것을 뚝 멈추고서 그를 쳐다본다. 나누는 이런 것이 너무나 오랜만이었기에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먼 산을 보며 인사를 했다.
"알로라에서 온 울라울라섬의 왕 나누입니다."
그러자 제일 앞자리에 앉아 있던 멀끔한 자태의 남성이 일어나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그에게서 풍기는 향수 냄새가 코를 파고든다.
"반갑습니다. 가라르 리그 위원장 로즈입니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쪽으로."
나누는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친 뒤 로즈가 안내한 자리에 앉았다.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 긴장한 나누는 그저 테이블만 내려다본다.
"시간이 됐으니 시작해 볼까요. 올리브."
그 말에 나누는 고개를 들었다. 약속 시간이 남아 있었는데 자신이 제일 늦게 온 것이다.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로즈의 뒤에 작은 의자를 두고 앉아 있던 올리브가 일어서서 자료가 정리된 종이를 나눠 주었다. 가라르 리그의 역사와 그들만의 독특한 특징들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은 순서대로 자기소개를 했다. 십 대로 보이는 아이부터 노년층까지, 관장들의 연령대에 놀란다. 알로라도 마찬가지였지만 인원이 두 배나 많은데도 다양한 연령이 분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누는 열 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노력했다. 담당하는 도시와 이름 소개가 끝나면 어딘가 허전함을 느꼈다.
로즈는 나누에게 언제 도착했는지, 그리고 올 때 어떤 방식으로 왔는지 물었다. 나누는 알로라에서 비행기를 타고 어제 도착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알로라 지방이 어떤 곳인지를 물었다. 알로라는 네 개의 큰 섬과 하나의 인공섬으로 나누어져 있고 각 섬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존재와 섬 순례라는 문화가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자신은 섬의 왕이기도 하지만 주로 파출소로 출근하는 현역이라고 덧붙인다.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특이한 이력이라고 속닥거린다.
"그런데도 리그가 설립된 지 일 년도 안 되었다고요?"
나누에게 질문을 한 사람은 너클시티의 관장이었다. 알로라도 역사가 꽤 오래된 지방으로 알고 있는데 의외라고 덧붙인다. 로즈는 그가 역사에 빠삭한 분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런 사람 입장에서 보면, 온 지방에서 행해지는 관례와도 같은 리그가 없던 것이 의아할 만하다. 누군가 섬 순례가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나누가 주인 포켓몬을 비롯해 섬 순례가 어떤 문화인지 자세히 설명하면 모두들 종이 위에 그것을 메모한다.
"아까 말씀하신 수호신 같은 존재는 뭔가요?"
어쩐지 물어볼 일이 많은 것은 나누인데 계속 질문당하는 것만 같다. 하지만 우호적인 관계 그리고 알로라 리그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아는 지식을 모두 꺼내 늘어뜨려 놓았다. 막 설명을 끝내는데 갑자기 회의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모두 그쪽을 쳐다보면 어떤 남성이 급하게 와서 숨을 헉헉대고 있었다.
"왜 이리 늦으셨어요?"
로즈가 물으면 그 사람은 광산에서 수련하다 깜빡했다고 웃어 보인다. 모두 그럼 그렇지, 라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누는 누군진 몰라도 그가 꽤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누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색이 바랜 머리칼을 주름진 손으로 쓸어올린 그는 죄송합니다, 하고 제일 끝 빈자리에 앉았다.
"오늘 모시기로 했던 나누 님입니다."
로즈가 나누를 소개하면 그는 올리브에게서 자료를 받으며 위에 걸치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안에는 감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거기까지 본 나누는 다시 자료로 고개를 숙였다.
"엔진 스타디움의 관장 순무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가 인사하리라 생각도 못 한 나누는 퍼뜩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으나, 그는 이미 올리브에게 받은 자료로 얼굴을 내린 뒤였다. 나누는 아까 느낀 허전함에 대해 깨달았다. 그토록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엔진시티의 관장이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 이름을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 묻고 싶었으나 로즈가 다시 회의를 진행하였기에 물어볼 새가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아니겠지. 나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직감을 부정했다.
슬쩍 눈동자를 돌려 보면 옆에 앉아 있는 관장이 엔진시티의 관장에게 작은 말로 무어라 속삭이고 있었다. 나누는 엔진시티의 관장이 가라르인이 아닌 것이 신경 쓰였다. 정말 그가 맞다면 어째서 나누를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냔 말이다.
가라르 리그의 역사를 훑는 로즈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으나 우선 업무에 집중하기로 했다. 설명을 들으며 메모를 했고 준비해 온 질문을 하며 그에 관한 답변을 들었다. 그러나 엔진시티의 관장은 그저 웃는 얼굴로 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쪽으로 쳐다보기가 두려워진 나누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서운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싶지만 일단은 확실하지 않은 현실을 피하고만 싶었다.
기나긴 회의, 상담, 조언의 시간이 끝나면 다들 녹초가 되어 있었다. 로즈는 모두에게 괜찮냐고 물었고 저녁 무렵이었기에 어린 관장들은 집으로 돌려보냈다. 아이들은 어려도 관장직에 앉아 있었기에 꽤 도움이 되었다. 특히 바들바들 떠는 고스트 타입 꼬맹이는 아세로라를 떠올리게 했다. 성격이 정반대인 둘이 친구가 되면 재밌을 거라 생각한다.
로즈는 옆에 있는 연회실에 작은 기념 파티를 준비해 놨다며 나누에게도 참석할 것을 권했다. 당장이라도 그가 순무가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으나, 순전히 알로라에서 온 손님의 환영회인 것을 알기에 나누는 사람들을 따라 회의실을 나섰다. 엔진시티의 관장에게 말을 걸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다른 관장들과 붙어서 이동했기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맛있는 음식과 향긋한 주류로 배를 채워도 마음속은 채워지지 않는다. 당도 높은 파티용 와인을 마시면서 눈동자를 힐끔거려보면 나누의 기억 속에서 시간이 멈춘 남자가 웃으며 주변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머리색도 물이 다 빠지고 눈빛에 힘도 없고 주름이 늘어서 못 알아보는 줄 알았으나 이제는 그가 순무인 것을 인정해야 했다. 대체 무슨 연유로 가라르에서 관장직을 맡고 있는지도 궁금했지만 결국은 그의 실력 때문에 여기 있다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나왔다. 열심히 노력했구나. 아무도 오지 않는 숲길의 공터에서 홀로 수련을 하던 청년은 이제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위치에 서 있다. 그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진다.
한데 나누에게 아는 척을 하지 않는 것은 왜일까. 나누는 힐끗거리기라도 하지만 순무는 전혀 이쪽으로 눈길 하나 주지 않는다. 대화를 하기 위해 적당한 말을 지어내려는데 누군가 나누에게 다가온다. 가라르의 챔피언이라고 당당한 목소리로 자기소개를 하고는 알로라의 챔피언에 관해 묻는다. 알로라의 챔피언이라. 그 어린 녀석이 위험에 빠질 뻔한 알로라를 구해 줬으니 굳이 챔피언이 아니었더라도 찬양받아 마땅했다. 그는 대단한 인물이네요, 하고 나누에게 이것저것 더 물어보았다.
"십 년 동안 그 자릴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일일 겁니다."
"끊임없는 노력과 마음가짐이 중요한 거죠."
그리고 그를 가르쳤던 스승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이 자리엔 와 있지 않으나 챔피언의 스승 또한 과거엔 챔피언이었다고. 그는 심지어 거진 이십 년 가까이 챔피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더 대단한 분이 있었군요."
그렇게 농담을 하고 챔피언이라는 자리의 무게가 어떤지 물어보았다. 알로라의 챔피언은 아직 어린아이였기에 괜히 더 마음이 가는 것이다.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마침내 나누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챔피언과 나누가 사이좋게 이야기하던 것을 보았는지 다른 관장들도 나누에게 말을 걸어왔다.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이대로라면 엔진시티의 관장과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침내 엔진시티의 관장도 이쪽으로 다가오며 악수를 청한다. 나누는 머쓱한 기분을 안고서 엔진시티의 관장과 악수를 하기 전, 다시 제대로 듣기 위해 이름을 물어보려 했다. 막 입술을 떼고 눈을 바라보는데 그는 그대로 굳어버린다. 나누는 그의 표정이 굳은 걸 보고 의아함을 느껴 한쪽 눈썹을 올렸다. 설마 이제서야 누군지 알아본 건가?
"순무……?"
이름을 부르는 작은 목소리에 포켓몬이 걸었던 복수를 품은 장난의 불길은 마침내 휘날리며 스러져 버린다. 이미 기억도 희미한 누군가의 얼굴을 가린 여우 가면이 소리 없는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간다. 가면은 으스러지고 으스러져도 끊임없이 생겨나 도통 그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다. 재를 날리며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여우 가면들 끝에는 머리칼이 검은 청년이 한 명. 오른손에 담배를 든 그 청년은 제 손으로 마지막 가면을 벗으며 마침내 붉은 눈동자를 드러내고 입꼬리를 한쪽만 올린 채 담배 이름을 가르쳐 주었던 때의 미소를 지었다.
짧은 순간 동안 머릿속을 방황하다 맑아진 시야에 들어온 이는 눈빛은 그대로지만 초로의 머리가 희끗한 나누. 그동안 잊고 살아온 이유는 뭘까. 서로가 나이 들어 버린 이 세월은 뭘까. 도깨비불의 장난은 그를 순식간에 사랑의 열병에 아파하던 시절로 되돌려 놓고서 견딜 수 없는 당혹감에 빠지게 만든다. 고여가는 눈물을 감출 수 없다는 걸 느낀 순무는 한 번 훌쩍인 다음 악수도 하지 않고서 자리를 피한다.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걸 느낀 나누는 울기 직전이었던 순무의 얼굴을 떠올리며 위로든 뭐든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짓다가 쯧, 하고 혀를 차면서 뒤통수를 긁는다. 그는 그대로 돌아서서 연회실을 나갔다. 완전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 껄끄러워져 자리를 피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순무는 나누를 보자마자 울면서 피한 걸까. 젊을 때와 변함없는 애달픈 얼굴은 마음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뒤따라 나온 로즈가 복도 제일 끝에서 창문을 열어놓고 서 있는 나누를 발견했다. 순무 관장님이 원래 그런 분이 아닌데 방금은 어딘가 편찮으셨는지 미안하다고 말해 온다. 나누는 자기도 기분 상한 게 아니라 놀라서 진정하는 중이라며 설득력이라곤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로즈와 다시 연회실로 돌아가면 사람들이 얼굴이 벌건 순무를 달래는 것이 보였다. 관장들은 돌아온 로즈와 나누를 쳐다보며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자기들끼리 웅성대기 바빴다. 그런 것에도 신경 쓰지 않고서 멀찍이 순무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순무는 울기를 멈추고 지금 좀 마음이 복잡해서 혼자서 머리를 식히겠다고 한 뒤 연회실의 테라스로 향했다. 테라스로 이어지는 유리문을 닫고 슛시티의 야경을 보며 쌀쌀한 공기를 맞자 점점 진정되는 것 같다.
가끔 꿈속에서 희미하게 손을 내밀며 웃던 사람이 있었다. 목소리도 잘 기억나지 않았다. 배경은 언제나 가업인 용암마을의 여관이었고 때는 여름이었다. 그 반복되는 꿈은 무언가 덧칠한 듯 선명하지 않아 깨어나면 답답함이 가슴에 남아 있는 그런 지독한 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되살아났다. 차라리 너를 잊어버리면 내가 편해질까. 모든 것은 나약했던 어린 날의 한 마디로 시작된 일이다. 나인테일은 잘못이 없다. 순수하게 순무를 위한 일이라 생각해서 저지른 일이니 말이다. 순무가 기억하기론 나인테일도 나누를 좋아했다. 그러니 잘못한 게 아니다.
나누는 주변의 소란스러움에도 상관하지 않고서 척척 걸어가 테라스로 이어지는 유리문을 열고 뒷짐으로 그것을 닫았다.
"순무."
나이에 맞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이름을 불린 순무는 몸을 돌리고서 자라온 시골 마을의 별빛과는 다른, 형형색색으로 얼룩진 도시 불빛이 비치는 나누의 얼굴을 보았다. 세월의 풍파에 상하고 인생의 무게에 짓눌리며 이곳저곳이 패인 지친 얼굴. 담배 이름을 가르쳐 주면서 웃었던 기억 속의 청년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내심 깨닫게 된다. 그렇게 마음속에 별이 하나 떨어지는 기분으로 씁쓸한 미소를 짓고서 응, 하는 대답을 한다. 나누는 다가와서 순무의 옆에 선다.
"그렇게 웃는 건 여전하네."
어느새 테라스의 난간에 기대고서 담뱃불을 붙인 나누는 연기와 함께 다음 말을 내뱉는다.
"넌 아픔을 감출 때 그렇게 웃었거든."
그가 뿜은 연기를 다시 비강에, 폐에 담아보니 이전처럼 몽롱해지지도 않고 오히려 그 독한 냄새에 정신이 또렷해지게 된다.
이제는 미몽에서 깨야 할 때인가 봐.
눈을 감고 마음속에서 그렇게 말한다. 도시의 매정스러운 바람이 오히려 마음을 다잡으라고 등을 떠밀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윽고 버릇처럼 가슴 위에 오른손을 얹고 심호흡을 한 순무는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는 말을 시작한다.
"우린 제대로 된 이별도 하지 않고 서로를 떠났어. 제대로 끝맺지 못한 사랑에 뭐가 남는지 너도 모르진 않겠지. 외로움, 그리움."
미몽을 태우며 곁눈질로 순무를 흘끗 본 나누도 말을 보탠다.
"집착, 미련, 갈망…… 다시 돌아와 줄 거란 헛된 희망."
"후후. 잘 알고 있네."
회의실에 급하게 왔을 때처럼 머리를 한 번 쓸어넘기고 좀 더 편안한 표정이 된 순무는 말을 잇는다.
"어째서인지, 어쩌다 보니…… 였을까? 어쩔 수 없이겠지? 나인테일의 장난으로 평생 만날 일이 없을 것처럼 너를 잊고 살아왔는데……. 여기서 다시 만나니 네가 떠나고 매일 가슴이 타들어 가던 때가 생각나더군. 하루하루 정신 차리고 보면 널 생각하면서 많이도 울었지. 네가 말하는 꼴사나운 미련 같은 거였을지도 몰라."
생각보다 담담하게 생각을 정리해서 말하는 순무가 많이 성숙해져 있음을 실감한다. 주변인들에게 휘둘리며 자기 의견도 내지 못하던 어리숙한 순무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누는 피식 웃으며 담배 연기를 내뱉었다.
"아직 있어?"
뜬금없는 질문에 순무는 무슨 말이냐는 듯이 눈썹을 올렸다.
"꼴사나운 미련."
축 처져 생각을 읽을 수 없는 눈빛은 여전하다. 순무는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그저 포켓몬의 위로 아닌 위로 때문에 잊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 일도 없었으면 둘은 여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터.
"꼬몽울 호텔 1807호. 잊어버리진 않겠지?"
손톱 끝으로 담배 끝을 툭 쳐서 재를 날린 나누는 그렇게 말한 뒤, 순무의 어깨를 한 번 두드리고 테라스의 문 너머로 사라졌다. 순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다가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로즈에게 나누가 어딨는지 물어보면 나누는 짧게 인사를 하고서 나갔다고 대답한다. 관장들이 무슨 일이냐며, 나누는 또 왜 저러냐며 순무에게 물었다. 순무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너무 반가웠거든. 이만 가볼 테니 다들 잘 놀다 가라구."
딱 자른 단호한 태도에 모두들 더는 말을 꺼내지 않기로 한다. 사생활에 간섭할 이유가 없지. 순무는 손을 한 번 흔들어 보인 뒤 연회실 문을 열고 나갔다. 서둘러서 아머까오 택시를 타고 엔진시티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나 느리게 느껴진 순무는 초조했다. 파티용 와인 때문인지 초조함과 함께 얼굴에선 열이 올랐다.
익숙한 꼬몽울 호텔로 달려가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나누에게 무슨 이야기부터 시작할지 정리해 본다. 부모와 싸우고 가출한 뒤, 무작정 미로마을로 가서 도감을 받고 배지를 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는 와중에 많은 사람을 만났고 그들을 통해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과연 내가 나아가는 길이 옳은 것인가? 속 편히 가업을 물려받는 것이야말로 안정적이지 않은가? 그것은 배지를 여러 개 따 놓은 상태에서도 계속 그를 괴롭힌 고민이었다. 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다. 외부와 차단되어 방 안에 갇힌 채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는 것엔 신물이 나서 도망쳤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끊임없이 내적으로 충돌하며 스스로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끝에 호연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는 그제야 당당하게 집에 연락할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들은 것은 부모님의 울음소리였다. 그러나 그때의 순무는 울지 않았다. 나누가 주었던 용기와 그걸 지우지 않고 남겨둔 나인테일 덕분에 강인해진 것이다.
이윽고 18층에 도착하자 발걸음을 죽인 채 복도를 걸었다. 1807호의 문을 두드린 뒤 건너편에서 나누가 누구냐고 물을 땐 갑자기 두려워져서 그냥 돌아갈까 했다. 하지만 집에서 도망친 것처럼 여기서도 도망치긴 싫었다.
"……나야."
대답하면 곧바로 문이 열렸고 나누는 연회 때 입은 정장의 재킷과 타이만 풀어둔 채 셔츠 단추도 두어 개만 열어 놓은, 실로 그다운 상태로 순무를 맞이했다. 순무가 문을 닫으면 현관에서 어스름한 조명을 등 뒤에 진 나누가 입을 열었다.
"내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오늘 밤 네가 오는 것에 걸어 보고 있었어. 온다……. 안 온다……. 사실 확률은 절반이 아니라 '네가 꼭 여기에 오게 된다'가 전부였을지 모르지."
나누는 말을 마치자마자 순무를 벽에 밀어붙이고는 수십 년이 쌓인 입맞춤을 해 온다. 잊고 있던 감정은 서로를 거칠게 탐하도록 만든다. 순무는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이걸 위해서 불렀나 싶지만 왜인지 키스 후에 몸이 달아올라 나이를 생각 못 하고 불타오른다. 현관에서 숨도 겨우 쉴 정도로 한참을 입 맞추다가 입을 떼고 눈을 바라본다. 붉은 눈동자와 맑은 눈동자는 아무런 말이 없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침대로 가는 도중 나누는 솜씨 좋게 타이를 풀어 내던지고 셔츠도 벗어서 떨어뜨린다. 어느새 상의를 다 벗어버린 나누는 순무를 이끌어 푹신한 침대에 눕히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처음 그와 사랑을 나누던 때를 떠올리며 감색 스웨터를 벗어 던진 순무는 어슴푸레한 방의 불빛을 등에 업은 나누에게 묻는다.
"그래서 이 내기는 네가 이긴 건가?"
나누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기는 별로 안 좋아한다니까."
순무는 장난으로 넘기는 나누의 목에 팔을 감다가 눈앞에 거슬리는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굉장한 노력파인 순무는 타지방의 리그 문화에 관해 공부한 적이 있었기에 이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누는 목에서 순무의 팔을 치우고 크리스털이 달린 목걸이를 벗었다. 그러고는 두 손으로 고개를 살짝 들게 한 뒤에 목걸이를 걸어 준다. 순무는 나누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주는 거야?"
"우리 섬의 수호신에게 혼나겠지만 꼭 네게 주고 싶어."
나누는 대답을 끝낸 뒤 자세를 낮추고 완전히 몸을 밀착해 순무를 껴안는다. 맞닿은 몸으로 서로의 체온이 전달되어 왔고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도 살결을 타고 느껴졌다. 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도시의 불빛은 상념을 잊게 만들면서도 지금 여기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들은 그렇게 수십 년 만에 미몽에서 깨어났다.
꿈, 그것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사그라드는 것이었다.
꿈, 그것은 감은 눈 속에선 선명하지만 뜬 눈 속에선 잊히는 것이었다.
꿈, 그것은 결국 현실과 대척하는 것이었다.
꿈,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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