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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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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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다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나옹들의 밥그릇에 사료를 얼마나 부어야 하는지, 간식을 줄 시간은 몇 시인지, 놀아 달라고 하면 장난감들이 어디 있는지. 여태 파출소를 오랫동안 비운 적이 없었기에 걱정이 앞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옛 동료 둘이 여전히 알로라에 머물고 있었고 그들이 파출소를 봐준다고 한 것이었다. 가장 큰 문제였던 나옹들 걱정은 덜었다.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라는 한 마디를 남기면 그제야 마음 편히 파출소를 떠날 수 있었다.

때는 봄을 맞이하기 전이라 약간의 쌀쌀함을 머금은 바람이 부는 때. 지난여름부터 알로라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여 있다. 드디어 이 알로라에도 어느 지방에나 있는 포켓몬 리그장이 생겼기 때문이다. 알로라는 고유의 풍습이 있었기에 리그가 생길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나 열정적인 박사의 노력으로 세워지게 되었다. 아직 일 년도 채우지 못한 신설이다 보니 부족한 점이 많다. 그래서 대표를 선발해 전 지방의 리그장을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만나 조언이나 영감을 받은 후 알로라 지방만의 장점을 살리기로 하였다. 어떻게 하면 주민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을지, 하나의 관습으로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박사 부부는 알로라 최초의 챔피언과 함께 관동과 성도를 잇는 석영고원으로 떠났다. 아, 참으로 그리운 고향의 이름이다. 마지막으로 간 적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다. 그러고 보니 챔피언도 관동에서 왔었더랬지. 아마 언어의 장벽 때문에 데리고 간 듯하다. 나누는 어렸을 때 텔레비전으로 석영 리그 생중계를 보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은 휴대용 전자기기의 발달로 어디서든 포켓몬 배틀을 편하게 볼 수 있는 시대였다.

할라는 나이가 많아 장거리 이동을 불편해한 데다 박사 부부와 함께 총 책임을 맡고 있었기에 그들 대신 알로라에 남기로 했다. 라이치는 키아웨와 함께 더운 지방이라는 이유로 호연으로 떠났다. 호연? 거기 알던 사람이 있었는데 혹시 소식 좀 알아봐 줄 수 있는가? 둘은 그러겠다고 하긴 했지만 워낙 수십 년이 지난 터라 기억 속에 머무는 첫사랑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기로 했다.

체념에 가까운 기분을 품은 나누는 알로라와 생활 양식 및 언어가 비슷한 가라르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하나 지방도 유사한 점이 많긴 하지만 가라르는 특이한 점이 많은 데다, 알로라 출신들이 가라르도 여기랑 다를 게 없지 않냐며 동방으로 떠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다. 나누는 내심 호연으로 갈 수 없는 것이 씁쓸했으나 젊은이들을 위해 양보하기로 했다. 낯선 문화에 대해 배우는 건 물론, 다들 워낙 바빠서 여행은 꿈도 못 꾸던 처지였기에 호연은 언젠가 기회가 되면 혼자 가 볼 것이었다.

짐가방을 들고 터덜터덜 하우올리시티에 도착한 나누는 휴대 전화를 꺼내 박사 부부가 정리해 준 자료를 본다. 가라르 지방의 지도 그림, 도시 이름, 교통 시설 이용 방법, 다이맥스에 관한 요약문. 가라르의 리그는 특히나 타지방보다 오락적인 요소가 강하게 발달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형 특성상 도시 사이에 드넓은 야생의 벌판이 펼쳐져 있다. 어떤 포켓몬을 만날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와일드 에리어. 그 이름만큼 거친 곳이리라 예상한다.

열다섯 시간 넘게 걸려 날아온 나누는 시차 때문에 멍한 머리로 가라르에 도착했다. 현지인들이 특이한 억양으로 말하는 것을 신기하게 들으며 먼저 숙박 시설을 찾아서 쉬기로 한다. 목적지는 엔진시티. 편하게도 스타디움 바로 옆에 호텔이 있으니 물어서 가면 될 것이다. 역에서 산 교통카드를 찍은 뒤 전철을 타고 남쪽으로 향하면 검붉은 도시가 나타난다. 건물들이 온통 붉은 벽돌로 세워져 있어서 따뜻해 보여도 기온은 가라앉아 있다. 피 칠갑이라도 한 듯한 칙칙한 붉은색 때문에 머리가 조금 더 쿡쿡 쑤신다.

박사가 보내 준 자료를 보면 이곳은 공업 도시라고 한다. 걸어가며 주변을 둘러보자 공장으로 보이는 건물들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용암마을 같다는 생각이 든 나누는 피식 웃는다. 아직도 과거의 망령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에 자조하는 것이다.

박사가 리그장이 있는 곳이 아니라 엔진시티에 먼저 가길 권유한 이유는 이곳에서 리그 개회식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것치곤 분위기가 뒤숭숭하게 느껴진다. 밤이 되면 공장 단지가 주는 음산함과 붉은 벽돌 건물들로 인해 으스스할 것만 같다. 한밤중에도 끊임없이 엔진이나 모터 돌아가는 소리가 날 테니 잘 모르는 사람들은 무서울 것이다. 엉뚱한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자 유난히 우뚝 솟은 시계탑이 보였다. 저곳이 엔진 스타디움이군. 찾아가기 쉬워서 편했다.

나누는 도시의 풍경을 휴대 전화에 담았다. 젊은이들만큼 잘 찍지는 못해도 온 기념으로 엔진시티의 모습을 카메라로 찍는다. 옥외 광고판이 걸린 건물, 선로를 지나가는 전철, 붉은 벽돌 건물이 남긴 과거와 공장 건물이 장성한 현대가 어우러진 전경. 몇 장의 사진을 찍은 뒤 흔들리거나 초점이 맞지 않은 것들은 지웠다.

벽돌이 깔린 평평한 길을 쭈욱 걸어 큰 다리 아래를 지나면 상층부로 갈 수 있는 승강기가 나타난다. 하나밖에 없었기에 우르르 몰린 사람들을 따라 승차하고 서 있으면 곧바로 눈앞의 풍경이 쑥 올라간다. 빠른 속도였기에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았다. 시차에 시달리는 몸을 질질 끌고 엔진 스타디움 앞에 서서 그것을 바라본다. 어쩐지 성스러운 느낌으로 기둥들의 굴뚝에서는 흰 연기를 내뿜고 있다.

휴대 전화를 꺼내 스타디움 사진을 몇 장 찍은 나누는 호텔이 정말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걸 보고 눈썹을 올렸다. 가까이 가 보면 그 이름에 웃음이 나온다. 꼬몽울 비즈니스호텔이라, 이름도 재미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거대한 동상이 번쩍거리며 제일 먼저 방문객을 반긴다. 작은 로비를 슥 둘러보고는 동상 가까이 가서 설명문을 읽었다. 왠지 중요해 보이니 이것도 카메라로 찍어간다.

한 걸음씩 힘겹게 계단을 올라 카운터에서 방을 숙박으로 요청한다. 젊었을 적부터 쉼 없이 살아왔으니 여유롭게 사흘 정도 머물 요량이다. 카드키를 받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나누는 한숨을 쉬었다. 여정이 길게 느껴진 것이다. 알맞은 층수에 도착한 후 카드키로 방문을 열고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짐가방을 아무 데나 내려두었다. 침대에 드러눕자마자 피로가 몰려온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 이렇게 긴 시간을 밖에 떠돈 것이 정말 오랜만이다. 기분 좋은 이불 냄새를 깊숙이 들이킨 후 다시 기나긴 숨을 내쉬었다. 침대에 누운 채 박사에게 가라르에 잘 도착했다는 짧은 말을 보냈다.

가라르의 시간은 알로라보다 약 열 시간이 빠르다.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지만 시차 때문에 힘들어진 나누는 외투를 벗어 대충 걸어둔 후 안정을 취하기 위해 잠을 청했다. 몇 시간 후, 잠에서 깨어나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은 걸 보고는 끼니라도 챙길 겸 휴대 전화로 호텔 주변에 어떤 식당이 있는지를 찾아본다. 컨디션이 별로였기에 가볍게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카페로 향한다.

밖은 어두웠고 예상대로 약간 으스스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쌀쌀한 공기가 더욱 가라앉아 그럴지도 모른다. 여전히 공장 굴뚝에선 희뿌연 연기가 솟아 나오고 있다. 휴대 전화로 지도를 보며 더듬더듬 걸어간다. 점찍어 둔 카페의 문을 열자 도시 자체가 컨셉이라도 되는 듯 인테리어가 붉은색 계열로 맞춰져 있는 것에 눈썹을 꿈틀댔다. 호텔 객실도 차분한 붉은색 계통으로 꾸며져 있는데, 길거리 공중화장실마저 그런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하고 빈자리에 엉덩이를 내린 뒤 메뉴판을 훑는다. 사장으로 보이는 중년 남성에게 간단한 요깃거리를 주문하고는 창밖을 본다. 언제나 흐리고 비가 잦기에 참 스산한 곳이라고 생각한다.

잠시 후, 카페 사장이 속을 채워 그릴에 구운 파니니와 따뜻한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자기와 배틀을 하고 이기면 디저트를 무료로 준다고 권해왔다. 별로 내키지 않은 나누는 다른 지방에서 막 와서 머리가 아프니 됐다고 했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작은 목소리로 알로라라고 대답하자 어쩐지 가라르 억양이 아니었다면서 호쾌하게 웃는다. 그러고는 서비스로 주겠다며 디저트를 하나 골라 보라고 한다. 호두과자, 양갱, 전병……. 전 지방의 특산물을 훑어본 나누는 무심코 전병을 골랐고 그가 카운터 안에서 꺼내 온 전병을 보고 아, 한마디를 내뱉었다.

"저기 멀리 호연 지방의 명물이라죠. 손님의 고향 맛일지 모르겠습니다."

"이거면 충분하죠."

씩 웃으며 용암전병을 받아든 나누는 커피를 마시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순무와 전병을 나눠 먹다 장난쳤던 것이 떠오른다. 오랜만에 맛보는 것이기에 천천히 조각내어 먹어 본다. 변함없는 돌이라도 갈아 넣었는지 여전한 추억의 맛은 나누의 가슴속에 서서히 스며들다가 밑바닥에 고여 버린다. 그 많고 많은 첫사랑의 맛 중 하나가 용암전병이라니 웃긴 일이었다. 나누는 카페를 나가기 전에 후한 팁을 올려두고 나왔다.

우선은 거리를 좀 더 돌아다녀 보기로 한다. 요새도 음반을 사서 듣는 사람이 있나? 불 켜진 레코드 샵을 지나며 안을 슬쩍 본다. 그럼 그렇지, 가게 안은 텅 비어 있다. 그래도 한 번 들어가 보고 싶었다. 알로라는 번화가가 그리 크지 않아 수요도 없는 음반 전문 매장은 꿈도 못 꾸기 때문이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본격적으로 기름 냄새 같은 것이 났다. 한쪽에 화물 컨테이너를 적재해 둔 것도 보이고 작은 공장들이나 증기를 내뿜는 톱니바퀴 모양의 배출구 같은 것들도 보였다.

하마터면 계속 걸어가다 더러운 하수에 발을 넣을 뻔했다. 철조망이나 울타리도 없어 굉장히 위험해 보인다. 이런 곳에서 리그 개회식을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 구석구석 살펴보니 엔진시티의 인상은 그다지 좋지 않다. 마침 박사에게서 답장이 오자 지금 있는 곳에 대한 감상을 대충 설명해서 보낸다. 박사는 그러냐면서 슛시티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호언장담한다. 과연 이 말을 믿을 수 있을지. 슛시티엔 적어도 사람이 빠져 죽을 하수가 없길 바란다고 답장했다.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도시를 한 바퀴 돌아본 나누는 피곤해져서 다시 호텔로 돌아가 잠을 청하기로 했다. 그나마 침대는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늙으면 늦잠도 없어지는 법이다. 늘 일정한 수면 시간을 지키고 있었기에 여섯 시간이 지나자 천천히 눈이 뜨인다. 새하얀 천장이 나누를 반긴다. 느릿한 몸짓으로 일어난 나누는 기지개를 한 번 켠다. 박사에게서 답장이 와 있길래 읽어 본다. 나누의 말에 웃고는 가라르 측엔 이미 말해 둔 상태이니 오늘 오후에 슛시티에 가서 체육관 관장들을 만나면 된다고 한다. 이미 여러 번 체크한 일정이라 알고 있는 나누는 이제 일어났다며 지금은 새벽 같은 아침이라고 답장한다.

따뜻한 물로 씻고 물 한 잔 마시니 좀 개운해진다. 텔레비전을 켜서 뉴스 채널을 틀면 알지도 못하는 유명인에 관한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으면 날씨를 알려 준다. 가라르 지방의 날씨 예보가 지나가면 와일드 에리어의 날씨 예보도 흘러나왔다. 나누는 그것이 신기해서 집중하기 시작한다. 뉴스에서 보여주는 지도를 보면 와일드 에리어는 엔진시티 바로 아래쪽에 있었다. 시간이 되면 필드 워크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영부영 뉴스를 보다 조식 시간이 되자 나누는 담배와 라이터를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아침이라 많이 들어가지도 않기에 배만 채울 요량으로 간단히 한 접시를 해치운다. 그런 뒤에 호텔 밖으로 나와서 담배를 피웠다. 청년일 때부터 피워온 담배는 필터에서 나무 열매의 달달한 향과 구수한 향을 느낄 수 있지만 다 태운 뒤에는 그 맛을 느낄 수 없었다. 타오를 때만 정신을 빼앗기는 미몽이라는 이름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꽁초를 밖에 설치된 쓰레기통에 버리고 다시 객실로 돌아갔다. 방에서 좀 쉬다가 약속된 시간까지 관광이나 하며 시간을 보낼까 싶다. 어제는 밤이 깊어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밝은 낮에는 하수에 발을 디딜 일이 없을 것이다.

텔레비전을 보며 시간을 죽여본다. 말라사다 광고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것이 재밌어서 코웃음을 한 번 친다. 특이하게도 가라르의 텔레비전 광고 중에는 가라르 리그를 협찬한다는 문구를 띄우는 것이 많았다. 대다수의 광고에서 그런 문구를 띄우자 의아하게 느껴져 일단은 휴대 전화에 메모한다. 알로라 리그도 스폰서가 필요하다. 수시로 나오는 말라사다 광고에 '알로라 리그를 협찬하는 공식 협력 브랜드입니다'라는 문구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뒤, 옷을 갈아입은 나누는 주머니에 지갑만 넣고서 방을 나왔다.

호텔을 나서면 하늘에 까만 무언가가 떠도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포켓몬처럼 보이는 생물이 날아가고 있다. 호텔 밖에서 담배를 피우며 잡담을 하는 청년들에게 저것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면 그들은 현지인의 억양으로 아머까오 택시라고 대답해 준다. 알로라도 하늘을 이동할 땐 포켓몬을 타는데 가라르도 마찬가지인 것이 새삼스럽다. 전철이 있길래 전철로만 이동하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년들에게 와일드 에리어에 관해 물어보면 그들은 손사래를 치며 과장된 몸짓을 보인다. 트레이너의 수준에 맞지 않는 큰 포켓몬까지 만날 수 있기에 돌아다니려면 용기와 실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 명은 저번에 그곳을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었는데 마기라스를 만났다며 얼마나 무서웠는지 경험담을 줄줄 늘어놓았다. 나누는 턱 아래를 긁으며 가볼지 말지 고민에 빠진다. 포켓몬들을 데리고 오긴 했지만 그렇게 위험하다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고 휘말리면 귀찮아 보여서 일단은 보류한다. 고맙다고 말하고 동네나 한 바퀴 산책하려고 몸을 돌리면 청년들이 나누를 불러 세웠다.

"가라르엔 처음 오셨어요? 아직 리그 개최하기엔 멀었는데."

"관광이나 하러 왔지."

"아, 저희는 리그 티켓 사려고 왔어요."

나누는 한쪽 눈썹을 올렸다. 아직 봄도 오기 전인데?

"제일 좋은 자리에서 보려고요. 몇 달 전부터 빨리 티켓을 사놔야 해요."

"그 정도라고? 가라르 리그엔 큰 관심이 없어서."

"우와, 가라르 리그를 모르신다고요? 진짜?"

청년들은 황당해했지만 이내 기뻐하며 나누에게 가라르 리그에 대해 알려 주었다. 챔피언은 십 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그의 라이벌이 굉장히 재밌는 트레이너이자 관장이라고 한다. 챔피언 자리를 십 년 동안 지키고 있다니 굉장한 녀석인가 보다. 그리고 각 도시의 관장들은 웬만한 인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팬층이 두껍다고 한다. 나누는 알로라의 캡틴들을 떠올리며 거긴 그렇게 열광적인 분위기가 아닌데 여긴 참 특이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청년들은 나중에 슛시티에 가면 인기 많은 트레이너들의 리그 카드를 둘러보라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나누는 일을 하러 왔지 놀러 온 것이 아니었고 체육관 관장들에도 별로 관심이 없어서 건성으로 대답하고 말았다. 호텔 마당에서 벗어나 승강기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면 많은 사람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줄곧 포마을과 이어지는 도로 한복판의 파출소에서 혼자 지내왔기에 이런 북적거림이 적응되지 않는다.

사람이 적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기에 어제부터 눈에 밟히던 레코드 샵으로 향한다. 허름하고 좁은 가게의 주인으로 보이는 남성은 손님이 오든 말든 눈길 한 번 주고는 틀어놓은 텔레비전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님은 기껏해야 두세 명 정도가 있었지만 이것도 많은 편이다. 어릴 때부터 음악 감상에 관심이 많던 나누는 오랜만에 좋아하는 음악이 담긴 음반들을 찾아보았다.

군데군데 벗겨져 세월을 자랑하는 중고 레코드, 한정반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음반들, 이미 중견이 된 어느 가수의 음반에 붙은 대형 신인이라는 문구. 점점 음반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고 있었으나 한때 유행을 이끈 문화의 본고장에 온 기념으로 한 장 정도는 사갈까 싶어 이리저리 살펴보던 나누는 익숙한 음반을 발견했다.

그 옛날 포켓탭에 테이프를 꽂아 듣던 시절에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이었다. 왜냐하면 이 음반이 테이프였던 때에 순무가 여기 담긴 곡들을 마음에 들어 해서 자주 들었기 때문이다. 나누는 아스라이 떠올라 버린 기억을 끄집어냈다. 이젠 얼굴도 희미해진, 처음이자 마지막인 사랑의 추억에 그리운 느낌이 든다. 나누는 이끌리듯 낡아빠진 그 음반을 계산했다. 가게를 나온 후 가득 찬 답답함에 벤치에 앉아 쉬면서 방금 산 음반을 바라보았다. 이어폰을 하나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들으며 좋은 분위기 속에서 서로의 눈동자를 바라보곤 했었지.

문득 손이 잡혔던 것이 떠올라 버린다. 말없이 조심스레 나누의 손을 잡은 순무는 아마 애달픈 표정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주역인 자신의 오른손을 쳐다보던 나누는 쯧, 혀를 한 번 찼다. 잘 잊고 살았다 생각했으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추억의 부스러기들을 맛보자 잠겨있던 기억들이 서서히 나누를 감싸고 있었다. 이미 끝난 지 오래인데도 인사 하나 없이 사라진 것이 거슬려서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이리라. 살았는지 죽었는지 신경 쓰지 않고 담담해지기까지도 오래 걸렸는데…….

나누는 눈썹을 찡그리다가 차오르는 추억에 잠겨 질식하기 전에 일어나서 다시 레코드 샵으로 들어갔다. 방금 산 걸 환불하고 싶다고 하자 주인은 눈썹을 한 번 꿈틀대고는 말없이 환불해 준다. 지갑에 지폐를 넣으며 가게를 나오는 길이 한결 가볍게 느껴진다. 이렇게 서서히 잊어가면 되는 것이다. 더는 기억하지 않도록 말이다.

다시 벤치에 앉아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이고 빨아들인 뒤 한숨과 함께 연기를 내뱉는다. 이러면 잊을 수가 없겠지? 머릿속을 스치는 한 마디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땐 왜 그렇게 심술궂었을까. 좀 더 잘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희미하게 남은 기억은 반대로 후회를 두텁게 만들었다.

꽁초를 버리고 일어선 나누는 이번엔 또 어딜 가볼까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새롭고 신기하긴 했으나 관광 도시보다 공업 도시 쪽에 가까웠기에 그다지 흥미로운 건 없어도, 모처럼 멀리 왔는데 방에 처박혀 있기도 뭣하다. 시차가 아홉 시간가량 빠른 호연에 가 있을 라이치에게 거긴 어떻냐고 물어볼지 말지 고민을 하다가 하지 않기로 한다. 그쪽에서도 먼저 연락이 없는 걸 보면 나누에게 할 말은 없는 듯하다.

시간을 확인한 뒤 늦은 점심이나 먹으려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휴대 전화로 찾아보니 의외로 매운맛을 자랑하는 곳이 유명하다. 참으로 골 때리는 곳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가게 설명을 읽으면 불꽃타입 전문인 엔진 스타디움의 관장님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박사가 정리해 준 자료에 따르면 이 도시의 관장은 불꽃타입을 주로 쓴다고 했다.

용암전병, 즐겨듣던 음악, 이제는 불꽃타입까지. 긴 인생에서 겨우 찰나의 순간이었던 그때가 반추되자 마치 못된 장난에 당하는 것처럼 느껴져 씁쓸해진다. 그것을 피하려는 듯, 나누는 평가도 맛도 그럭저럭인 식당으로 가서 점심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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