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호연 지방을 떠난 나누는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달려 저녁 늦게 집에 도착했다. 부모는 한 달 만에 보는 아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검회색의 머리카락을 만지며 머리가 좀 길었네, 라는 어머니의 말에 깔끔히 잘라야겠다고 생각했다. 뙤약볕 아래를 누볐더니 피부도 보기 좋게 잘 탔다. 아버지는 항상 비실비실해 보이는 아들이 건강해 보여서 좋다며 농담을 했다. 선물로 받은 술병을 주자 부모님은 굉장히 기뻐했다.
방으로 가서 보스턴백을 내려놓은 뒤 그대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든 나누는 일찍 일어나서 짐을 정리했다. 별로 펼쳐 보지 않은 교재들은 책상에 쌓아 올렸다. 포켓탭에 줄줄 감긴 이어폰을 풀면서 순무에게 이것을 선물로 주고 올걸, 하고 후회했다. 자신을 추억할 것이 필요해서 피우지도 못하는 담배까지 샀기 때문이다. 함께 들었던 음악을 들으면 위로가 되었을 터인데. 겨울이 되면 최신형 기기를 사 주겠다고 결심하며, 순무의 아버지에게 받은 급료 봉투를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 두었다. 이 돈으로 포켓탭을 사 줘야지. 그리고 같은 취미를 가져야지. 나누는 벌써부터 행복해할 순무를 떠올리고 실실 웃으면서 물건들을 정리했다.
아직 방학이 남았기에 당분간은 집에서 쉬기로 한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아침을 먹으며 여관집 아들과 친구가 되었다는 말을 꺼냈다. 조만간 집으로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며 떠들어댔다. 여관의 이름이 뭐냐고 물어봐서 대답하면 부모님은 그 이름을 들어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아직 가슴속은 설레고 있지만, 나누는 더 이야기를 잇지 않았다. 어차피 관심도 없는 분들이었다.
순무는 터덜터덜 돌아오는 길에 울고 싶었지만 꾸욱 참으며 여관으로 돌아왔다. 주변 사람들이 나누를 잘 배웅했냐고 묻자 순무는 애써 웃으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홀로 별채로 돌아온 순무는 급격한 외로움에 나인테일과 가디를 불러냈다. 아까 나누가 떠났다고 말을 꺼내면 둘은 구슬픈 울음소리를 내며 순무를 위로하려 했다. 가디는 뺨을 핥았고 나인테일은 얼굴을 비벼왔다. 그날은 더운 여름인데도 밤에는 둘을 곁에 두고서 함께 잠을 청했다. 뜨거운 존재가 옆에 있어도 쓸쓸함이 느껴져서 곧바로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에 겨우 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여전히 없는 나누가 그리워져 라디오를 켜 본다. 전 지방의 날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맑은 여름 날씨의 관동, 성도, 호연, 신오, 하나. 비가 자주 올 것이라는 칼로스, 가라르. 마지막 휴가를 즐기려면 알로라. 순무는 관동 지방이라는 단어를 듣자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리고 치우지 않았던 재떨이의 내용물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누가 늘 하던 대로 그것을 창틀에 올려 두었다.
순무는 나누와의 약속을 떠올리며 샀던 책을 펼치고 독학을 시작했다. 이번 휴일에는 편지 봉투와 편지지를 사러 갈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에 편지에 쓸 내용을 잊지 않도록, 훈련 일지에다 일기처럼 글을 써 내려갔다.
며칠 동안 아무렇지 않게 슬픔을 잘 참아냈다. 아침에는 포켓몬들과 산책을 하고 자연을 벗 삼아 특훈을 했다. 여름의 끝이 코앞이라 점점 관광객이 줄어들자 공부할 시간도 늘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혼자 뒷길을 올라 나누의 눈동자처럼 붉은 노을을 바라보다 오곤 했다.
하지만 밤이고 낮이고 나누가 그리워질 때면 담배를 한 대 꺼내서 불을 붙인 뒤 그것을 재떨이에 올려두고는, 마치 향을 피우듯 서서히 타들어 가게 내버려 두었다. 종종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을 때가 많아졌다. 바람은 그 지독한 냄새 속에 추억을 태워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누를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사랑의 열병에 걸려버리고 만 순무는 나누를 생각하면 좋아하는 만큼 많이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울다 지친 어느 날엔 차라리 너를 잊어버리면 내가 편해질까, 하고 혼잣말을 하다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곁에 있던 나인테일이 가까이 다가와서 눈가에 맺힌 눈물을 핥아 주며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그 붉은 눈마저 나누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찰나, 순무는 나인테일의 눈 속에 깃들어 있는 도깨비불의 환각을 보게 된다. 나누와 쌓아 온 추억들이 서서히, 이윽고 주마등처럼 빠르게 스쳐 가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매번 향처럼 피워놨던 담배도, 방 안 가득했던 담배 연기도 모두 재가 된 후였다. 나누와 함께한 기억들이나 그가 어루만져 줬던 감촉은 어렴풋이 남아 있었지만 나누로 있어야 할 추억 속의 남자는 여우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기억 속에 숨게 되었다.
처음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겼던 나인테일은 여린 마음을 가진 순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를 두고 떠난 나누가 너무나 미웠다. 매일 나누의 흔적을 되짚으며 우는 순무를 지켜보는 것은 괴로웠다. 결국 크나큰 결심을 하게 되었다. 기술의 일종인 도깨비불로 환각을 걸어 기억과 감정을 조작해 버린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그를 옛날에 정리한 좋은 감정으로 탈바꿈해 버리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그만큼 순무를 위한 사람도 없었기에 나누가 물려준 굳은 의지는 기억 속에 잘 남겨 두었다.
기억의 파편이 담배 연기에 흐려진 순무는 이제 나누를 기억하지 못했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가슴속에서 샘솟은 알 수 없는 용기를 가지고서 포켓몬 트레이너가 되기로 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 된통 혼난 후 잃고 있었던 열정이 다시 뛰어오르기를 재촉하고 있었다. 뜨거운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순무가 나누를 잊어버리고 활기를 되찾을 무렵, 나인테일은 순무가 잠든 틈에 몰래 서랍을 뒤져 나누에 관해 적혀 있던 훈련 일지와 담뱃갑을 물고서 창문을 훌쩍 넘었다. 언제나 훈련을 하는 장소를 지나 더더욱 안으로 들어가 그것들을 불에 태웠다. 뒤따라서 창틀을 겨우 넘어 쫓아온 가디가 나인테일에게 염려스러운 반응을 보였지만 나인테일은 모두 순무를 위한 일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나인테일도 속이 편한 짓을 한 건 아니다. 믿을 사람 하나 없던 순무를 이끌어 주고 의지를 다져 준 나누가 고마웠지만 지금은 순무가 성장하는 게 먼저였다. 게다가 운명의 장난 같은 도깨비불은 나누를 만나 그 눈을 보게 되면 스러질 것이었다. 어차피 나누는 겨울 방학에 다시 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동안 순무가 열심히 노력한 뒤에 나누를 만난다면 분명 나누도 기뻐할 거라 생각했다. 트레이너를 따르는 포켓몬으로서 최선을 다한 셈이다.
순무의 부모는 나누가 떠난 후 부쩍 우울해하는 순무에게 뭐라 말도 못 하고 있었다. 함부로 나누의 이름을 꺼냈다간 안 될 것 같아서 직원들에게 나누에 대해선 입도 뻥끗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모친은 나누가 떠나자 갑자기 쓰레기들 사이에서 보이지 않게 된 콘돔 박스와 심각하게 우울한 순무에 대해 연관 지어 생각했다. 탕비실에서 마주 보며 서 있던 모습, 마당에서 순무의 어깨에 고개를 올리고 있던 나누. 혹시 둘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도 됐나 싶어 슬쩍 남편에게 말을 꺼내 보면 그이도 뭔가 마음에 걸렸다고 대답해 왔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만이 있었고 기운 없는 아들을 추궁할 수도 없어 부부는 나누를 없던 사람 취급하기로 했다. 그 사이에 나인테일이 환각을 걸었고, 순무는 다시 예전처럼 밝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부부는 역시 그럴 리가, 하면서 안심했다. 순무는 열심히 일했고 아침과 저녁에는 여태 해 온 것처럼 포켓몬들과 훈련을 했다. 멋대로 굴던 식스테일이 어째서 듬직한 나인테일이 되어 있는지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것도 나인테일이 기억을 조작해 둔 덕분이었다.
그렇게 여름이 끝났고 한숨 돌릴 겸 가족 셋이서 잠깐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하고 계획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순무는 여행은 둘이서만 다녀오라며 자신은 미로마을을 찾아갈 것이라고 했다. 거긴 무슨 일로? 하다가 부친은 그곳에 포켓몬 박사가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렇게 어릴 때부터 말리고 혼을 냈건만 아직도 포켓몬 트레이너가 될 생각인가 보다.
그날, 순무는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강할 때까지 순무에게서 편지나 엽서 하나 오지 않자 나누는 의아하게 생각했다. 연락처를 받아오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매일 신문의 구직 광고란을 뒤졌지만, 나누가 돌아온 이후로 여관의 구직 광고가 올라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순무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지 걱정이 되었다. 오히려 무소식이 희소식인가 싶었지만 그래도 그렇게나 사랑했는데 이럴 리가 없다.
나누는 한시도 순무를 잊은 적이 없었다. 빨리 겨울이 오길 바라며 열심히 대학을 다녔다.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공부에 몰두하는 틈틈이 순무에게 보내려 했던 편지나 엽서를 썼다. 그것들이 차곡차곡 쌓여가던 반년 후, 사학년을 코앞에 둔 나누는 겨울 방학이 되자마자 짐을 싼 뒤 새벽에 집을 나섰다. 가방 안에는 꼭꼭 숨겨 두었던 급료를 털어서 산 최신 모델의 포켓탭이 들어 있었고 한 손에는 편지와 엽서를 날짜별로 정리한 종이봉투를 들었다. 순무가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하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아침 해가 뜨기 전에 기차를 타고 호연으로 향했다. 대체 왜 연락 하나 없었던 건지 너무나 궁금하다. 보라시티에 도착한 후, 굴뚝산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내려서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까지 올랐다. 같이 온 사람들을 따라 산길을 내려가면서 점점 발걸음이 빨라졌다. 마을로 들어가기 전에 앞을 보면 겨울을 맞이한 용암마을은 역시나 관광객으로 가득했다. 나누는 변함없는 거리를 걸으며 여름을 떠올렸다. 그때는 너무나 더웠는데. 짧은 기간 동안 겹겹이 쌓인 추억과 기억을 더듬으며 겨울 날씨에도 지지 않고 척척 길을 올랐다.
다행히 여관은 계속 운영 중이었다. 다만 추위 때문에 마당에 두었던 화분들을 안으로 옮긴 건지 바깥에는 식물이 하나도 없었다. 못의 잉어킹들도 여전히 헤엄을 치며 건강했기에 나누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본채는 관광객들이 이미 묵고 있었기에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겨울에도 단기 아르바이트생을 구하는지 궁금했다. 만약 없다면, 겨울 방학 동안 여기서 일을 하고 싶었다.
설렘으로 부푼 가슴속이 터질 듯이 긴장한 나누는 서둘러서 미닫이문을 열었다. 문에 달린 종이 딸랑거리는 소리를 내며 울었고 접객을 담당하는 직원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한다. 나누는 멋쩍게 미소를 지으며 잘 지내셨냐고 물었다.
직원은 호들갑을 떨며 나누에게 인사를 했다. 바로 사장님을 불러오겠다며 나누를 탕비실에서 기다리게 했다. 그 언젠가 용암전병을 먹다 장난을 쳐서 순무에게 혼났던 일을 떠올려 본다. 그리운 추억에 나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주인장이 나타났다. 오랜만이네, 하고 말을 걸며 악수를 청한다. 그러나 주인장은 순무와 함께 오지 않았다. 그는 차를 끓여 주겠다며 주전자에 물을 담았다.
순무의 소식이 궁금했지만 먼저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는 물음에 학교를 다녔다고 대답했다. 으응, 그래……. 그렇게 대답한 주인장은 티백을 하나 꺼내 머그컵에 넣었다. 끓인 물을 컵에 붓고 온도를 맞추기 위해 찬물을 조금 섞어 나누에게 컵을 내민다. 나누는 따뜻하고 향기로운 차를 마시며 드디어 순무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 주인장은 대답 대신 한숨을 푹 쉬었다.
"여기 없어."
"네?"
생각도 못 한 대답에 놀란 나누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초가을쯤이었나. 포켓몬 트레이너가 되고 싶다면서 대판 싸우고 집을 나가 버렸어."
'아…….'
주인장은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면서도 나누의 이름은 절대 올리지 않았다. 나누 때문이라고 하기엔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누가 일찍이 알고 있던 사실을 고백해 왔다. 사실 어릴 때부터 포켓몬 트레이너가 되고 싶어 했는데 가업이 있으니 그렇게 되지 못 하도록 말렸다고 한다. 나누는 속으로 말렸다기보단 일방적으로 꾸짖은 거겠지, 하고 생각했다. 주인장은 결국 순무가 아무도 몰래 집을 나갔다며 마른세수를 한다. 나누는 순무에게서 편지 하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자 충격으로 머리가 아팠고 동시에 화도 났다.
"연락은 되나요? 아니면 연락할 수단이라도."
"미안하지만 우리도 궁금해. 어디서 뭘 하는지……."
순무가 필요한 것들만 챙기고 집을 나간 사실을 알게 된 부부는 순무도 순무였지만 나누에 대한 원망도 적지 않았다. 그동안 얌전히 말 잘 듣던 자식에게 무슨 바람을 넣었냐며 한탄을 하고 방을 뒤졌으나 이미 나누에 대한 흔적은 나인테일이 진작에 태워 없애 버린 뒤였다. 다들 순무를 찾아 헤맸으나 어느 곳에서도 그를 찾을 수 없었다. 곧바로 미로마을로 찾아가 포켓몬 박사를 만났다. 혹시 순무라는 이름의 청년이 오지 않았는지를 물었다. 박사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포켓몬 도감을 받고 떠난 지 좀 되었다고 답했다. 일단 무사한 것은 알았으나 기술이 발전하기 전인 데다 순무는 포켓내비도 없었기에 넓은 호연 지방에서 사람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은 결국 순무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나중에 질려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들은 나누는 그 모든 일이 자신 때문이라는 말은 꺼내지 않고 주인장과 함께 말없이 한숨을 쉬었다. 주인장은 나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묻지 않았고, 숙박비를 받지 않을 테니 온 김에 하루만 묵고 가라고 권유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누는 안내 받은 본채로 가서 짐가방을 내려 두었다. 예전엔 이곳을 청소하느라 바빴는데 지금은 손님으로 와 있으니 어색하다.
코트도 벗지 않고 방바닥에 털썩 앉은 나누는 여름날의 추억을 되짚어 본다. 힘들었던 초행길, 순무와의 첫인사, 웃는 얼굴, 낮지만 부드러운 목소리, 나누의 말에 상처받은 그 날, 그러나 나누에게 사과해 오며 자신이 성장하도록 혹독한 말을 해 달라던 그때, 자는 얼굴, 비에 흠뻑 젖은 첫 휴일, 온천욕을 했을 때, 같이 음악을 나눠 듣거나 배틀을 하던 때, 태풍이 오던 날 손을 잡혔을 때, 그리고 바로 첫 키스를 나눴던 때, 식스테일의 진화, 잔뜩 흥분해서 그를 품에 안았던 순간들, 따스한 온기, 눈물, 이곳을 떠나던 날 모든 것이 나누를 괴롭혔다.
심장을 꽉 죄듯 괴로워진 나누는 참을 수 없었다. 벌떡 일어나 객실에서 조용히 나왔다. 시끌벅적한 본채를 빠져나와 별채로 이어진 뒷길을 올랐다. 반가운 초라한 건물이 나타난다. 그러나 불 꺼진 별채는 이제 아무도 쓰지 않는 건지 현관문에 큰 자물쇠가 채워져 있다. 옆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뿐인 큰 창문도 가림막이 처져 있었다. 항상 아침에 일어나면 더울세라 햇빛을 막곤 했는데…….
순무와의 추억이 완전히 사라지는 게 두려워진 나누는 숨을 헉헉거리며 재빨리 별채의 뒷길을 오른다. 언제나 순무와 포켓몬 배틀을 하던 곳으로 가면 얼어붙은 숲에는 아직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열심히 노력한 모양이다. 나무 한 그루에 손을 대고 순무의 포켓몬들이 남긴 불꽃, 발톱 자국 등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손끝이 시려도 상관없었다.
자그마한 흔적이라도 찾은 나누는 그곳에 서서 미몽을 꺼내 불을 붙이고 담배를 태운다. 진정하려 하지만 계속 가슴속이 아려왔다. 흔적들은 남아 있으나 순무는 없는 것이다. 나누는 길 바깥쪽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겨울의 냉기가 감도는 용암마을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더 이상 열로 들뜨지 않는 곳이었다.
마음의 열이 차갑게 식은 나누는 객실로 돌아가서 들고 온 봉투를 찾았다. 그것을 옆구리에 끼고 다시 아까 그 장소로 올라갔다. 빈터에 봉투의 내용물을 쏟아내자 여름부터 썼던 편지지와 엽서들이 땅바닥에 떨어진다. 나누는 한참 동안 그것들을 쳐다보다가 쭈그리고 앉아서 아무거나 한 장을 집었다.
안녕, 순무. 지금은 동네에 단풍이 물들어 있어. 너도 이 풍경을 봤으면 좋겠다. 당연히 단풍이 핀 가을의 용암마을이 더 예쁘겠지만. 전에 같이 온천욕을 했을 때의 풍경이.
그 뒷말은 보이지 않았다. 나누가 라이터로 불을 붙였기 때문이다. 종이는 서서히 타면서 그가 정성스럽게 썼던 글자들을 지워간다. 나누는 그것을 툭 떨어뜨렸다. 그러자 몇 달 치의 편지와 엽서들이 함께 타들어 간다. 나누는 혼잣말들이 모조리 타오르길 기다렸다. 붉은 눈동자는 불꽃과 같은 색을 하고서 모든 것이 재가 되는 것을 지켜본다. 마침내 잿더미만 남게 되자 발로 쓸어서 흙과 재를 뒤섞었다.
결국 아무런 소득도 없이 여관을 떠나기로 했다. 주인장은 하룻밤 자고 가지, 하고 아쉬움을 표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나누는 순무를 보러 온 것인데 순무가 없으니 당신들과 같은 공간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내뱉지 않았다. 분노를 애써 죽인 나누는 다음에 순무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떠났다.
길을 따라 내려온 나누는 어두워져 가는 용암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첫 휴일에 함께 밥을 먹었던 식당, 순무의 권유로 억지로 들어갔던 디저트 가게, 재미 삼아 뽑았으나 길과 흉이 나왔던 사당, 불꽃의 돌을 샀던 상점, 담배와 콘돔을 샀던 편의점, 함께 책을 골랐던 서점, 책을 훑어봤던 작은 카페, 라디오를 사 주었던 가전제품점.
허무함에 눈물도 나오지 않는 나누는 귀가 시릴 만큼의 추위보다 온통 추억이 깔린 곳에 순무가 없다는 사실에 더더욱 마음이 얼어붙었다. 언제 다시 찾아오리란 기약도 없이 한 번 뒤를 돌아본 후 용암마을에서 나간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가는 길이 너무나 느리고 길게 느껴진다.
보라시티로 가서 힘없이 기차표를 끊은 후 미처 주지 못한 최신형 포켓탭을 꺼내어 손에 들었다.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는 순무와 함께 들었던 음악의 테이프를 계속 반복해서 들었다.
물론 음악이 귀에 들어올 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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