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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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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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을 찾은 순무가 안 그래도 피곤할 텐데 또 힘을 뺐다며 사과하자 나누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팔팔한 걸 보니 젊음이란 게 무섭긴 무섭다고 생각한다. 몸을 씻은 뒤 옷을 가지런히 차려입은 후에는 순무를 도와 방에서 버릴 것들을 정리했다. 낡은 책들을 들고 창고 옆 쓰레기를 분리하는 곳으로 향했다. 종이류를 모으는 큰 플라스틱 박스에 오래된 책들을 휙 던지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별채로 돌아갔다.

둘은 몬스터볼을 챙기고 나온 뒤 팔을 걷어붙이고 포켓몬들을 내보냈다. 나누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을 안고 열정적으로 배틀에 몰입했다. 불꽃타입 기술로 인해 타는 듯한 매캐한 냄새를 맡으면서 저녁이 와도 주거니받거니를 계속했다. 나인테일이 가볍게 뛰어서 나무들을 턱턱 밟고 깜까미의 뒤를 습격한다. 재빨리 앞으로 굴러서 피한 깜까미는 흙을 퍼서 나인테일에게 던졌다. 지시하지 않아도 알아서 익히고 응용하는 포켓몬들을 보자 가슴이 벅찼다.

흥분감에 벌건 얼굴로 땀을 흘리며 순무를 보면 그도 똑같이 열이 잔뜩 오른 얼굴로 나누를 보았다. 순무가 씨익 웃자 나누도 따라서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지었다.

질질 끌려지는 한 판에 모두가 진이 빠지자 일단 쉬기로 한다. 깜까미가 나인테일의 털에 묻은 흙을 털어 주자 나인테일도 깜까미의 얼굴을 핥았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땀을 말려 준다. 한숨 돌린 둘은 얼굴에 그을음을 묻힌 채 포켓몬들을 챙기고 별채로 돌아갔다.

배꼽시계에 맞춰 얼굴을 씻고 말끔한 상태로 본채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그러다 직원 중 한 명이 나누가 떠난다는 것이 섭섭하다며 술이 든 잔을 내밀었다. 나누는 그것을 거절하려 했으나 직원은 어른이 주는 거라며 거절을 거절했다. 발끈한 순무는 자기가 대신 마시겠다며 나누의 손에서 잔을 빼앗았지만, 막상 입에 댈 수 없었다. 직원이 웃자 순무는 홧김에 잔에 든 술을 꼴깍 마셨다.

그 기백에 놀란 나누는 순무를 말렸지만 이미 늦었다. 덩달아 놀란 직원도 정말 미안하다며 어서 순무를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주인장은 팔짱을 끼고서 나누를 불렀다. 우선 직원의 무례함에 관해 사과하고, 순무는 술을 자주 마시는 애가 아니기 때문에 빨리 돌아가 달라고 부탁했다. 나누는 걱정하지 말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자연스럽게 순무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서서히 열이 오르자 순무는 덥다고 중얼댔고 나누는 바람을 쐬면 나아질까 싶어 함께 별채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러나 순무는 걸으니까 더 덥다며 불평했고 뺨에 손등을 댄 나누는 뜨거운 열에 깜짝 놀란다. 방으로 돌아가기 전, 화장실에서 순무의 얼굴에 물을 묻히고 열을 가라앉히려 했다. 순무는 취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더워했고 나누는 에어컨의 온도를 낮춰 주었다. 나누는 순무를 조심히 뉘고 순무는 가쁜 숨을 쉬며 진정하려 했다. 걱정된 나누도 곁에 누워서 괜찮냐고 물었다. 그리고 다시 손을 들어 뺨의 온도를 재 본다.

겨우 조금 마신 것 같은데 이 꼴이라니. 순무는 이런 모습이 어리숙해 보일까봐 스스로에게 조금 짜증이 났다. 그래서 열심히 자신을 돌봐주는 나누에게 미안하다고 하면 나누는 자기가 더 미안하다고 한다. 순무의 눈가가 촉촉해 보이는 것은 기분 탓일까. 나누는 새빨간 얼굴로 머뭇거리는 순무를 보자 불과 며칠 전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첫 경험에 부끄러워하며 어쩌지도 못하고 이끌려 오기만 했었다. 그런 애틋함을 듬뿍 담아 입을 맞추면 순무는 눈을 감고 그것을 받았다.

순무는 이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어 열심히 나누가 해 오던 대로 따라했다. 혀를 휘감고 빨아올리면 나누는 목 깊은 곳에서 소리를 내뱉었다. 이젠 제법 늘었다고 생각하며 입을 떼면 순무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자 대답처럼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고 순무는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약간 취해서 감정이 가득 차오른 것 같다고 판단한 나누는 엄지손가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훑고 눈가에 입을 맞춰 주었다. 울고 싶어지는 건 나누도 마찬가지였으나 어떻게든 참는다. 순무는 울면서 나누에게 키스를 했고 나누는 그가 얼마나 울음을 참고 있었는지를 헤아려 본다. 그러자 차마 울지 말라고 애원할 수가 없었다.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보채는 목소리와 섞여서 나왔다. 순무는 나누의 어깨를 잡고 그를 정자세로 눕히고 올라탄 뒤, 여전히 울면서 이마와 뺨에 입을 맞춘다. 나누는 애달프게 울면서도 여기저기에 입술을 붙이는 순무 때문에 가슴이 아파왔다. 고개를 든 순무의 턱을 타고 눈물방울이 얼굴에 똑 떨어지자 참을 수 없어진다. 한 번 풀린 인내의 끈은 놓치면 다시 잡기 어려웠다. 전등을 등진 순무의 얼굴을 올려다본 나누는 서서히 스며 나오는 눈물에 져 버린다. 순무는 몸을 낮추고 조용히 눈물만 흘리는 나누의 부드러운 목에 입을 맞추었다. 나누는 훌쩍이며 낮은 목소리를 내다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올라탄 채 목을 핥고 빨던 순무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고는 나누도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나누는 이제 울지 않았으나 순무는 계속해서 뻘건 얼굴로 울고 있었다. 코 막힌 목소리로 신음하는 순무가 귀엽지만 동시에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순무는 나누가 멈추지 않길 바랐고 그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갖다 댔다. 깜짝 놀란 나누는 순무가 그만큼 절박하다는 것을 느끼고, 이번에도 순무가 원하는 대로 해 준다. 한 번 꽈악 안은 뒤 귀에 숨을 불어넣으며 점점 원초적인 흥분감을 고조시킨다.

옷자락을 허벅지까지 걷어 올리고 귀여운 팬티 속에 손을 넣어 마구 주무르면 성기는 곧바로 단단해져 갔다. 서서히 울기를 그친 순무는 흥분에 의한 목소리를 내며 나누가 하는 짓을 따라 했다. 서로의 손짓에 낮게 신음하다가 나누가 먼저 손을 빼내고는 허리띠를 풀었다. 순무도 손을 빼낸 뒤 옷을 벗는다. 흐르는 얇은 천은 기분 좋게 몸 선을 따라 흘러내려 갔다.

나누가 또 순무의 허벅지를 붙이려 하자 순무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일어났다. 실은 오전에 나누가 없을 때 마을로 내려가서 사 왔다며 책상 서랍을 뒤진다. 눈앞에 내민 것을 받아든 나누는 그것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생각한 순무가 기특해서 손등에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춰 주었다. 드디어 순무가 웃자 나누도 웃으며 끌어안고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이제 별다른 준비가 없어도 익숙해진 몸은 손가락이 쑤욱 들어갔다. 그래도 손을 천천히 움직이며, 구멍이 충분히 넓어졌다고 판단한 나누는 성급하게 삽입을 시도했다. 밀어 넣자마자 순무는 고통스러운 듯, 그렇지 않은 듯 애매한 소리를 내질렀다. 천천히 뺐다 꽂음을 반복하면 순무는 딸국질을 할 것처럼 간헐적으로 숨을 쉬었다.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나누는 천천히 할게, 하고 느릿한 동작으로 허리를 움직였다.

뜨거운 숨을 내뱉으면서도 울상을 짓는 순무를 보니 나누는 어쩐지 억지로 하는 느낌이 들어 그만두고 싶어졌다. 그러나 순무는 나누의 팔을 꽉 잡고 괜찮다고 말해 왔다. 정말 괜찮은지를 확인한 나누는 오금에 손을 넣고 다리를 휙 든 뒤에 있는 힘껏 허리 짓을 했다. 순무는 갑작스레 격해지는 움직임에 따라가지 못하고 나누의 얼굴을 보며 우는 것이 다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를 만큼의 격정이 가라앉자 벌쩍거릴 힘도 없이 누워 있을 뿐이다. 몸 상태가 어떤지 물으면 순무는 흐리멍텅한 얼굴로 웃으며 손만 흔들어 보였다. 격렬한 정사에 기력을 다한 것은 나누도 마찬가지였다. 몇 번 하면서 이제 허리만 움직이지 않고 온몸으로 리듬을 탈 수 있긴 했으나 근육통은 여전하다. 휴지를 가져와 몸을 닦고 군데군데 떨어져 있는 음모를 주워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러고는 순무를 부축하면서 겨우 발을 질질 끌어 따뜻한 물로 몸을 씻었다.

"좀…… 심하게 했나?"

그렇게 물어보면 순무는 끄응, 하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도 그럴 것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번인지 세 번인지 세어 보던 순무는 우리가 세 번이나 했다며 놀란다. 막바지에는 정신을 못 차리고 헐떡이던 얼굴과 반대로 순수하게 놀라는 얼굴이 귀엽게 느껴졌다. 나누는 정말? 하고 미소를 지었다. 순무는 내일 못 일어나면 어쩌냐고 쑥스럽게 웃었다.

창문을 열고 새벽의 바람을 들이며 이부자리에 드러눕자 모든 피로가 몰려왔다. 내일은 느지막이 일어나서 순무와 서점에 들렀다가 맛있는 것도 먹고 선물이라도 사 주자. 이런저런 계획을 하던 나누는 스르르 눈이 감기는 것이 느껴졌다. 곧바로 색색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규칙적인 그 소리에 순무도 서서히 눈이 감기었다.

아, 역시나. 둘은 근육통에 시달리며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행복한 고통이라 여기고 외출 준비를 했다. 내일이면 떠나는 것치곤 둘 다 아직 명랑하다. 어디부터 갈지 이야기를 나누며 길을 따라 내려가면 주인장이 본채 입구에 쭈그리고 앉아서 화분들을 돌보는 것이 보였다. 그는 퇴색된 죽은 잎을 떼고 영양제를 꽂아 주고 있었다. 인사를 올리면 주인장은 일어서서 인사를 받았다.

"어제 괜찮았어?"

아버지의 물음에 순무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코로 깊은 한숨을 내쉰다.

"그분도 악의는 없었을 거야. 나누 씨가 떠나는 게 아쉬워서 그런 거니 이해해 줘. 호연 사람들이 드세다곤 해도 다 그런 건 아니니까."

나누는 어제 자신에게 술을 권하던 직원을 떠올리며 마음속에서 그 자에게 욕을 내뱉었다. 그러나 주인장에게는 누가 봐도 듬직한 표정으로 괜찮다고 대답한다.

"저도 그분이랑 일하면서 친해져서 알아요. 휴일 전날에는 꼭 어제처럼 술을 드시고 주변 사람들에게 권하시잖아요."

주인장을 안경을 벗고 미간을 주무르며 이번에는 입으로 한숨을 쉰다. 안경을 벗은 그의 얼굴은 순무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그게 문제인데 자를 수도 없고……. 뭐, 이건 내가 할 일이지. 점심은 어떻게 할 거니? 나중에 와서 먹을래?"

순무가 점심은 밖에서 먹을 거라고 말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인다. 재밌게 놀다 오라는 말을 뒤로한 둘은 웃으며 여관을 나섰다. 마을로 향하며 내려가는 길에 순무도 그 직원에 대해 험담을 했다. 웬만해선 다른 사람 욕을 하지 않는 순무였기에 나누는 약간 놀란다.

"일을 잘하면 뭐해, 술만 마시면 그렇게 되잖아."

"그건 너도 어제 그랬던 것 같은데."

검지로 뺨을 콕 찌르며 장난스레 말하면 순무는 눈썹을 찡그리고 아랫입술을 내밀었다. 어제 있었던 일이 꽤 부끄러운 모양이다.

둘은 순무가 추천하는 식당에 가서 배를 채우고, 드디어 그토록 가고 싶어 했던 서점으로 향한다. 여러 가지 책들을 꼼꼼히 살피며 필요한 서적들을 골라본다. '늦은 나이에 트레이너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제목이 너무 노골적이라 훑어보면 역시나 별 영양가 없는 내용이었다. 나누는 피식 웃으며 그것을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둘은 오랜 시간을 들여 고심하다 트레이너 입문서, 호연의 사천왕 공략집, 포켓몬 타입별 상성 사전, 최신판 포켓몬을 돌보는 법을 골랐다.

두툼한 책을 나눠 들고는 한숨 돌리기 위해 작은 카페로 가서 책 내용을 살펴보았다. 입문서는 초보자들을 위해 설명이 쉽고 자세하게 잘 되어 있다. 냉차를 들이킨 순무는 사천왕 공략집을 보며 눈을 빛냈다. 언젠가 이들과 맞붙을 거라고 생각하자 가슴이 들끓는다. 타입별 상성 사전은 작고 얇은 포켓북이었다. 내용도 표와 삽화로 도식화되어 한눈에 보기에도 깔끔했다. 포켓몬을 돌보는 법에 관한 책이 가장 두껍고 무거웠다. 이것은 순무가 가지고 있던 낡은 책의 개정판이다. 표지 디자인도 더 세련되게 변했고 삽화들도 흑백에서 컬러로 바뀌었다.

나누는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 물었다. 순무는 아침저녁으로 시간이 날 때마다 가디와 나인테일과 함께 훈련하고, 휴일이 되면 다른 마을로 가서 야생 포켓몬들을 더 많이 만날 것이라고 답했다. 나누는 그러면서도 틈틈이 자기 집으로 편지나 엽서를 보내 달라고 했다. 포켓내비가 있으면 좋겠지만 주인장은 그것을 사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 아쉬움을 내비치던 나누는 무언가가 떠올랐다.

여관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누는 전자 제품을 파는 곳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카페를 나선 뒤 순무를 따라 가전제품점으로 간 나누는 잠깐만 기다리라며 순무를 밖에 세워 두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참 후에 나온 나누는 작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손에 들고 있었다. 순무에게 제품 박스를 내밀자 놀란 얼굴로 이게 뭐냐고 묻는다.

"선물이야."

세상과 단절되다시피 살아온 순무를 위한 것이었다. 당황한 순무는 입을 살짝 벌리고 그것을 받았다. 묵직한 제품 박스를 천천히 살펴보던 순무는 고개를 들어 나누를 보았다. 울 것처럼 찡그려져 있지만 바깥이라 마음껏 울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누는 웃으며 잘 쓰라고 했다. 순무는 말을 더듬으며 고맙다고 두 번이나 감사를 전했다. 그리고 둘은 발걸음을 옮겨 여관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서서히 저녁 빛으로 물들려는 하늘을 보며 나누는 한 손엔 책을 껴안고, 다른 손으로는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았다. 얼마 안 남았길래 근처 편의점으로 들어가서 담배를 사기로 한다. 순무도 품에 한가득 책과 제품 박스를 든 채 그 뒤를 따랐다.

첫 담배는 이것이 아니었으나 어느새 달달하고 구수한 맛에 매료되어 이것만 애용하고 있다. 나누는 미몽을 두 갑 샀다. 카운터에서 계산을 끝마치고 담뱃갑들을 주머니에 쑤셔 넣은 뒤 자리를 뜨면 뒤에서 순무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같은 걸로 하나 주세요."

그 말에 나누는 눈썹을 올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순무는 나누를 쳐다보며 씩 웃었고 라디오에 쓸 건전지를 찾기 위해 점내를 둘러본다. 그러는 동안 나누는 갖가지 콘돔이 진열된 매대를 흘끗 보며 오늘도 할까? 하고 손을 뻗으려다 됐어…… 하고 손을 내렸다. 어제 순무를 밤늦게까지 시달리게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달려들면 홀로 일할 순무가 불쌍했기 때문이다. 아쉬운 맛을 담고 가자, 하고 순무를 부르면 허겁지겁 건전지를 계산하고 나누의 곁으로 돌아왔다.

둘은 방으로 돌아가 짐을 정리했다. 순무는 새로 산 책들을 책꽂이에 꽂고 나서 라디오에 건전지를 넣기 전에 설명서를 읽었다. 나누도 가방을 정리했다. 급료가 든 봉투, 포켓탭, 음악 테이프들, 쓸모없었던 교재들, 담배, 지갑, 옷가지 몇 벌. 처음 왔을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정리를 끝낸 뒤에는 포켓몬들과 마지막 인사를 했다. 가디와 나인테일은 낑낑대며 나누의 뺨을 핥았다. 나누는 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입을 연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해 줘. 배지도 따고, 사천왕도 이기고, 챔피언도 이길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순무를 지켜 줘. 순무네 부모님이 뭐라고 하든, 이 애가 상처받으면 옆에는 너희밖에 없으니까."

부드러운 나누의 목소리에 순무는 눈물이 핑 돌았지만 마지막까지 꼴사납게 보이지 않도록 울음을 삼켰다. 깜까미가 슬쩍 다가가서는 위로하는 게 쑥스러운지 손톱으로 순무의 무릎을 쿡 찌르고는 재빨리 나누의 품으로 도망친다. 그 모습을 본 둘은 크게 웃었다.

저녁을 먹으러 내려가면 요리가 특기인 주인장이 나누를 위해 한 상 가득히 차려 주었다. 이렇게까지 호화로운 대접을 받아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나누는 새카만 속으로 주인장에게 복수와 희열을 느껴 왔는데 정작 이런 취급을 받으니 우스웠다. 그러나 절대 티를 내지 않고서 겸허히 감사를 전하며 순무와 마주 보고 배불리 밥을 먹었다. 내일은 아침 일찍 떠나야 했기에 사실상 순무와 함께하는 마지막 식사였다. 가능한 한 천천히 먹으며 주변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어제저녁 나누에게 술잔을 내밀었던 직원이 와서, 어젠 미안했다고 하면서 선물용으로 포장된 술병을 내밀었다. 참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부모님도 좋아하실 거라고 했다. 나누가 처음 왔을 때 만난 카운터 담당 직원도 꼭 다시 놀러 오라고 했다. 직원들은 밥을 다 먹고 나가는 길에 나누에게 한 마디씩 작별 인사를 했다. 다들 마음 씀씀이가 좋은 편이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에 방으로 돌아온 후 라디오를 켜 보았다. 설명서를 보며 주파수를 맞추자 저녁 뉴스가 흘러나왔다. 호연 지방의 사건 및 사고, 내일의 날씨, 광고를 들으며 순무와 이야기를 했다. 내일도 날씨는 맑음이다. 덥긴 해도 습한 것보단 나으리라 생각한다.

끊임없이 수다를 떨다가 밤이 깊어지자 라디오를 껐다. 방바닥에 깔아진 이불 위에 나란히 눕기 전, 어둠이 내린 창틀에 걸터앉은 나누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한 입 깊게 들이쉬고 후우, 숨을 크게 뱉어내 방 안의 향을 바꾼다. 한 모금 더 머금고는 피우다 만 것을 재떨이에 올려둔 뒤 이부자리에 먼저 누워 있던 순무 쪽으로 연기를 훅 뿜어냈다. 갑작스러운 담배 연기의 습격에 순무가 작게 콜록거리면 나누는 순전히 궁금한 마음으로 피우지도 못할 담배를 왜 샀는지 물어보았다. 잠시 시선을 모로 돌린 순무는 이윽고 그 특유의 난처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게…… 너는 내일이면 떠나잖아? 여기서 계속 너를 기다리려면 너를 추억할 것이 필요했어. 그 담배를 보면 언제까지나 널 떠올릴 수 있겠지."

그리고는 별빛인지 슬며시 배어 나온 눈물인지 아니면 늦깎이 첫사랑의 반짝임 그 자체인지, 그런 거부할 수 없는 촉촉해진 눈빛으로 나누를 똑바로 바라본다. 나누는 순무가 자신을 그렇게 보게 되어서 곤란함을 느꼈다. 그 곤란함은 지극히 순무를 염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감정이었다. 떠나야 하는데 그런 눈으로 보면 떠나기가 참 어렵다. 하지만 마지막이니 원하는 걸 해 줘도 나쁘지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오늘도 하룻밤 귀여워해 준다.

순무가 원하는 건 나누를 추억할 수 있는 것이었고 지금의 나누가 해 줄 수 있는 건 잇자국으로 자신의 영역 표시를 하면서, 트레이닝으로 근육이 붙기 시작했지만 아직은 가느다란 몸 전체를 어루만져 주는 것뿐이었다. 그를 속이는 손길에도 순무의 마음속엔 싹이 트자마자 수수한 색의 꽃이 가득 피었다. 담배의 어지러운 냄새를 따라 나누가 제 살결을 슬슬 쓰다듬어줄 때 거기서 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감 속에서 잠이 든다. 나누는 그런 순무를 마지막으로 품에 안고 같이 잠든다.

그렇게 잠들었던 다음날, 나누는 간밤에 뒤숭숭한 꿈을 꾸는 바람에 최악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울적한 아침을 맞이했다. 타인과의 연을 이어나가길 싫어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꿈에서는 셔츠 위에 양복 재킷이 아닌 온천의 핫피를 걸치고 순무와 함께 여관을 운영해 나가는 모습을 멋대로 꾸고 말았기 때문이다. 막 꿈에서 깨어나 조금 멍한 머리로 지난밤 순무가 보였던 눈빛과 약간의 곤란한 듯한 마음의 위화감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 정말로 이 곁을 떠나기 싫어졌구나.

마음을 강하게 먹고 떠난 후 꿈을 이루기 위해 달리기로 했는데 품에 안긴 순무의 체온과 고른 숨소리, 그 몸의 무게에 나누는 헛숨을 집어삼킨다. 이곳에 오기 전의 나누는 나이를 먹으면 모든 걸 내던지고 조용히 살고자 하는 바람이 강하게 들 때가 종종 있었는데, 지금 품 안의 순무는 자신의 바람을 모두 충족 시켜 줄 것 같았다.

나누는 마음의 시끄러운 잡음들을 담배 연기 속으로 감춰 버리고 싶어 아직 잠들어 있는 순무가 깨지 않게 바로 눕히고는 어젯밤 창가에 놓아둔 담뱃갑을 다시 찾았다. 방바닥에 앉아서 하나를 꺼내 입에 물고는 다시 담뱃갑을 보니 미몽이라는 이름이 자신을 비웃는 듯한 느낌마저 들어 왔다.

'한 때의 미몽…… 이라는 건가…….'

이곳에 있었던 시간은 집으로 돌아가면 그리운 추억이 된다. 겨울 방학이 되기 전까지는 그럴 것이다. 짙은 냄새를 가졌지만 날아가면 옅어지는 담배 연기와도 같았다.

창문을 열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밖을 보았다. 청량한 여름 햇볕이 내리쬐는 온천마을은 따끈한 증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마을을 둘러싼 녹음 사이로 이르게 떠오른 해를 보고 있으면 등 뒤에서 순무가 막 잠에서 깼는지 뒤척이며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려 왔다.

순무는 여태 맞이한 아침 중 최고로 행복한 아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이별할 때가 오니 어제와 다르게 슬프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누를 편히 보낼 수 있어서 홀가분한 마음이 들었다.

최고로 이별하기 좋은 날이다. 그렇게 생각한다.

"좋은 아침."

가라앉은 목소리로 아침 인사를 건네는 순무의 어깨에서 느슨해진 옷자락이 툭 흘러내린다. 햇빛에 타지 않은 하얀 살결, 가슴께에 온통 자신이 물들여 놓은 자국이 훤하게 드러난 아찔한 광경에 나누는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광경을 한때의 미몽에 숨기려 듯이 연기를 내뱉었다.

'최고로 이별하기 좋은 날이야.'

아침이 시작되기도 전에 순무는 나누를 따라 별채를 나서고 본채의 마당을 지났다. 그늘 아래를 걸으며 한적한 용암마을을 뒤로하고 케이블카에 올라탔다. 그러는 동안에 둘은 필요한 말만 하고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굴뚝산에 도착한 후 둘밖에 없는 정류장에 앉아 손을 맞잡고 버스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여름의 강렬한 햇볕에 땀이 스며 나와도 둘은 계속 손을 잡고 있었다. 사람 하나 지나가지 않자 둘 사이의 침묵이 더욱 무거웠다. 반대편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훑으며 흙바닥만 보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버스가 오자 둘은 손을 뗀 뒤 의자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나누는 영차 보스턴백을 손에 들었다.

이윽고 선 버스에 올라타기 전에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순무는 조심해서 가, 하고 손을 흔들었다. 나누도 꼭 다시 올게, 하고 손을 들어 보였다. 그 두 마디만이 다였다.

나누는 자리에 앉자마자 순무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창문으로 고개를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이상하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순무는 멀어지는 버스가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질 때까지 계속 그쪽을 바라보았다. 곧, 버스가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되었지만 떠날 수 없어서 땀을 흘리면서도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비록 그들은 떨어지게 되었지만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느낌이 든다. 순무는 라디오를 통해 관동의 소식도 접할 것이고, 주소도 알았으니 가끔 나누네 집으로 편지를 보낼 것이다. 그럼 나누도 답장을 써서 여관으로 보낼 것이다. 그렇게 소통하며 서로를 만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마침내 그때가 올 것이다.

다시 만날 그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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