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청명] 우정愚情

(1535화 스포 有) 그날 이후 어떤 밤

倒影 by 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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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적인 묘사는 없으나 원작 소설 1535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해당 회차를 감상하신 후에 읽어주세요.


ㅤ상실이라면 이미 물릴 만치 지겹게 앓았다.

ㅤ하여 청명은 대산에서의 기억이 발 아래 박인 가시인 양 따끔거릴 때면 버릇처럼 청문의 목소리를 생각했다. 시간이 곧 약이니라. 그건 부모를 여의고 사흘을 내리 울다 의약당 신세를 진 명자 배 아해의 등을 쓸어내리며 제 사형이 건넨 말이었다. 참지 않고 슬퍼해도 괜찮다고, 다만 네 심신이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괴로워하라고. 마음껏 쏟아낸 자리에 언젠가 새살이 돋을 날이 올 테니 당장의 아픔으로 자신을 해하지는 말라고.

ㅤ그때 제가 마흔이었나, 쉰이었나. 당년의 나이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지독스럽게 살아낸 지금에 이르러서도 어찌 그 말만은 이리도 또렷한지. 사형은 분명 시간이 약이 된다 하였는데, 아직 세월이 충분히 흐르지 못한 탓인지 아니면 제 가진 마음이 미욱해 그런 탓인지 청명의 가슴에 고인 슬픔은 백 년 후의 세계에 와서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다만 청문에 대한 기억과 그의 말은 약효가 확실하여, 청명은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사형의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던 시절에 어쩌다 주워들은 그 한마디를 꾸역꾸역 씹어 삼키며 미루어진 수백 수천의 사별을 견뎌내고는 했다.

ㅤ해서 저를 과신했던 것이다. 이 생에는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잃지 않겠노라 거듭 다짐하고 각오하면서. 그런 주제에 또 한편으로는 새로이 가슴에 품은 그 솜털 보송한 얼굴들이 피에 젖어 스러지는 대산의 밤을 매일같이 상상하고 불안에 떨면서, 어쩌면 저도 모르는 사이 점차 무뎌진 걸지도 모른다 그리 기대한 것이다. 최선을 다해 지켜 보겠으나 피치 못하게 누군가 잃게 된다면 백 년 전과 달리 지금의 저는 잘 버텨낼 것이라고, 이제는 숱하게 겪어본 이별을 아무렇지 않은 척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 주제넘게 착각하고 만 것이다. 시간이 약이라 하였으니 모두 끝난 후에라도 지난 혈사의 기억에 이번 일을 이자로 붙여 호되게 앓고 나면 세월이 어떻게든 제 마음을 달래주지 않을까 하고.

ㅤ바보 천치가 따로 없지.

ㅤ그 누구와의 이별에도 괜찮아 본 적이 없으면서. 자조하며 술병을 쥐려 손을 뻗는데 그 대신에 웬 남자의 뜨뜻미지근한 손이 잡혔다. 어찌 그러느냐, 들려오는 목소리에 청명의 미간이 대번 찌푸려졌다.

ㅤ왜 왔어.

ㅤ달도 예쁘고 해서, 어떤 바보 천치랑 대작이나 하려고 왔다. 왜.

ㅤ청명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저거 아무래도 눈까지 삐어버린 게 분명하지. 어둔 밤에도 먹구름이 잔뜩 낀 꼴이 당장 소낙비가 쏟아지지 않는 게 이상할 판이라, 달이 예쁘긴 개뿔이, 하고 투덜거리려던 청명의 입이 그대로 다물렸다. 저 멍청한 사숙은 이지러진 달도 흐린 달도 그저 보기 좋다 보듬고 사는 위인이니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ㅤ너무 늦게 왔네. 나 술 다 떨어졌다, 동룡아.

ㅤ나는 뭐, 빈손으로 온 줄 아느냐.

ㅤ백천이 제 손에 든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다 마셨으니 저는 이만 자러 가 보겠다는 핑계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요량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되니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청명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곧 웬수 같은 사숙이 반짝반짝 잘생긴 그 낯으로 제게 웃어 보이고는 옜다, 하며 병을 건넸다.

ㅤ… 이것만 다 마시면 들어가는 거야.

ㅤ그래.

ㅤ그러고는 한동안 둘 사이에 술이 돌았다. 청명이 한 모금을 마시고 병을 건네면 백천이 받아 한 모금을 마시고 다시 술병을 돌려주었다.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이 고요한 지붕 위 술자리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청명은 백천이 가지고 온 병 하나를 꼬박 비우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ㅤ미안하다는 말 같은 거, 나는 못 해.

ㅤ그러냐.

ㅤ…… 고맙다는 말도 하지 않을 거야.

ㅤ바라지도 않는다, 이 녀석아.

ㅤ한데 너는 이미 뱉어버린 듯싶구나. 백천이 사람 좋게 웃으며 머리칼을 흩어 놓는데 청명의 안색은 하염없이 흐려졌다. 왈칵 화를 내지도 못하고 마주 웃지도 못하고, 전부 제 잘못이라 조금이라도 우는소리를 하였다간 저치 성격에 분명 그 썩어 문드러진 속으로 저를 위로하기 바쁠 테니 그마저도 뜻대로 할 수 없었다. 취기가 오른 탓인지 자꾸만 가슴이 답답하고 갑갑하여 울화 비슷한 것이 치밀었다. 청명이 작게 신음했다.

ㅤ동룡아…….

ㅤ오냐.

ㅤ동룡아.

ㅤ아, 왜.

ㅤ… 백천 사숙.

ㅤ그래, 이왕이면 그 이름이 좋겠다. 자꾸만 공연히 불러대니 원, 듣기라도 좋아야지.

ㅤ죽지 마.

ㅤ…….

ㅤ사숙, 죽지 마……. 청명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한번 새어 나온 진심은 어찌 그리도 금세 눈덩이처럼 불어나는지, 어찌 그리도 틀어막을 수도 없을 만치 절박해지고 마는지. 마른 낯이 계속해서 애원하듯 속삭였다. 죽지 마. 죽으면 안 돼. 가만 듣고 있던 백천이 청명아, 하고 부르며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사나운 사질은 그 든든하고 따뜻한 품에 안겨서도 기어이 씩씩대며 이를 갈았다. 

ㅤ죽으면 죽여버릴 거야.

ㅤ알겠어? 죽으면 죽여버릴 거라고. 그러니까……. 발갛게 달아오른 눈가가 뜨거웠다. 울고 있나, 생각하며 제 눈두덩을 더듬어도 보았으나 백 년 전에도 지금도 눈물은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단 사실만 새삼스레 깨닫고 말았다. 차라리 울어버리면 속이 시원할까. 그깟 눈물 좀 흘린다 해서 하늘이, 선계의 높으신 누군가가 저를 가엾게 여겨줄 것 같진 않지만. 소리 내 엉엉 울어버리고 나면 심중에 고인 한이며 그리움이 조금은 가라앉을까. 그러면 조금이라도 후련해질까.

ㅤ청명아.

ㅤ백천이 안은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듯 거듭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도 저 못지않게 서러운 얼굴이었다. 청명의 손이 저를 안은 이의 허리 위에 얽혔다. 그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입을 열어봐야 그러게 왜 그리 미련한 짓을 했느냐는 원망 아니면 미안하단 보잘것없는 말 중 하나, 어쩌면 그 둘 모두를 참지 못하고 쏟아내 버릴 것 같았다. 그리고 제 사숙은 그것을 무엇보다도 원치 않을 이였다.

ㅤ먼 곳에서 하늘이 우르릉하고 낮게 울었다. 아무래도 곧 비가 올 모양이었다.

ㅤ나는, 그리할 수 있어 좋았다.

ㅤ…….

ㅤ하니 후회도 않는다. 청명아, 몇 번이고 시간을 돌린대도 나는 같은 결심을 할 거야.

ㅤ뱉어지는 음성에 청명의 입에서도 흐득흐득 흐느끼는 듯한 숨이 샜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 어리석은 아해를 어찌해야 할까. 그 어리석은 마음에 기어코 흔들리고 마는 나의 어리석음은 또 어찌해야 하고. 괜찮다는 듯,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듯 저를 어르는 손길에 다시 한번 가슴에 불덩이가 얹혔다.

ㅤ툭, 툭 하고 눈물 같은 빗방울이 청명의 머리 위를 적셨다. 하늘에서 우정愚情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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