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CP] 청명에게吾弟靑明親展

닿지 못할 편지

倒影 by 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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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청명 보거라.

ㅤ오래전 어느 노승과 차담을 나눌 때의 일이다. 그는 소림의 불을 밝히는 노전승이었는데, 그 무위의 수준이 대단하다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 사람의 불자로서만큼은 존경해 마지않을 인품을 지닌 이였지.

ㅤ정성스레 우린 차의 향을 음미하며 고요히 미소 짓던 그는 다짜고짜 내게 혹 우담화라는 꽃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들 사이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그 꽃은 싹을 틔우는 데에 천년, 봉오리를 맺는 데에 천년, 그리고 개화하는 데에 다시 또 천년이 걸린다고. 하나 그 지난한 세월이 무색할 만큼 허무하게, 그저 찰나에 져버리고 만다고 하더구나.

ㅤ이제 와 돌이켜보면 참으로 현묘하고도 감사하기가 이를 데 없는 가르침인데, 그 말에 담긴 지혜를 온전히 이해하기에 그날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던 모양이다. 그때는 그저 뜬금없는 선문답이나 늘어놓는구나 생각하며 벌써 반쯤 식어버린 차로 한참 동안 목만 축였단다. 침묵이 길어지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어릴 적의 너와 꼭 닮은 목소리로 그래서요, 하고 제법 불퉁스레 되묻기도 하였지. 그가 조금이라도 불쾌한 기색을 보이면 미루어 둔 사문의 일을 핑계 대고 그대로 자리를 파할 요량으로 말이다. 헌데도 그는 화 한번 내지 않고 그저 나직이 웃으며 이리 답하더구나.

ㅤ그래서는요, 장문인. 소승이 감히 무엇을 안다 하겠습니까마는……. 글쎄요, 우리네 삶이 마치 그 우담화가 피고 지는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ㅤ다른 말은 더 오가지 않았다. 그다지도 싱거운 대화였어. 하지만 그날 이후 나는 종종 그의 담담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초조해졌어. 우담화를 만나는 데에 꼬박 삼천 년의 시간이 필요하듯 우리의 삶에도, 속세의 인연에도 적당한 때가 있는 법이라는 노전승의 현기 어린 뜻과 달리 나는 때때로 덜컥 겁이 났다. 긴 시간 내가, 우리가, 그리고 화산이 쌓아 올린 이 모든 것들이 훈풍에 흩어지는 꽃잎처럼 쉬이 시들어 버리고 말까 봐 말이다. …… 네가 나를 보고 웃어도 할 말이 없구나. 도문에 속한 이답지 않게 쉰 걱정을 다 하였다고 나무라도 좋다. 한번 차오른 것은 언제든 기우는 것이 천하 만물의 순리이니 그저 흐르는 대로 두어야 하는 법이라고, 그리 믿는 편이 옳았겠지.

ㅤ하지만 청명아, 나 역시 사람인지라 심중에 무시로 찾아드는 두려움만큼은 막아낼 수가 없었다. 시드는 매화나무 가지, 덧없이 무너져 내리는 산문과 전각, 시끌벅적한 형제들의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는 텅 빈 화산을 상상하는 것이 몹시도 괴로웠어.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한 일이지. 만일 그런 날이 온다면 그 역시 세상의 순리일진대, 어찌 나 같은 범인이 감히 흐르는 이치를 거스를 수 있길 바랐는지 몰라. 네 말대로 우습지도 않은 그놈의 장문이란 감투가 그 옛날의 나를 그리 만든 것일까. 그 자리에 오르기만 하면 누구든, 가장 처음 산문을 넘던 그날의 결심을 잊어버리고 마는 걸까.

ㅤ정녕 그런 것이었을까, 청명아.

ㅤ지난밤 꿈에는 어린 너와 연화봉에 올라 노을을 보았다. 푸른 빛깔의 하늘과, 그 위에 엷은 자색 천을 겹겹이 덧대어 놓듯 느리게 번져가는 이른 저녁의 황혼을 바라보며 나는 이것이 너와 함께하는 마지막 일몰임을 알았어. 무정히 흘러만 가는 시간이 야속하고 아쉬워 아직 조막만한 너의 손을 꼭 붙들고서 청명아, 몇 번이고 네 이름을 불렀다. 무슨 연유에서인지 꿈속의 나는 너를 돌아볼 수가 없더구나. 그런데도 네가 답을 하지 않아 얼마나 애가 타던지. 그리고는 바람이 불었던가. 한참 만에 내 옷소매를 당겨 쥐며 네가 이렇게 물었어.

 

ㅤ후회하십니까?

ㅤ나는 못에라도 박힌 듯 같은 자리에 서서, 너의 그 짧은 물음을 오래도록 곱씹었다. 무엇을? 너와의 마지막 순간을 이리 노을이나 구경하며 허비해 버린 것을? 너의 손을 놓지 않고 이만치 걸어온 것을? 아니면, 끝까지 화산의 십삼대 제자로서의 삶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을? 그래서 나와 형제들의 앞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도 그 손에 기어이 검을 쥐게 하고 함께 대산에 오른 것을?

ㅤ그 많은 미련한 역사들 가운데 대관절 무엇을 뉘우쳐야 하는지 그걸 묻지 못해서, 나는 해가 다 저물어버릴 때까지 입 속으로만 말을 어물거리다 청명아, 하고 너를 다시 한번 불렀다. 한데 너무 늦었던 모양이지. 거기에 너는 없고 새벽 어스름인 듯 천 길 깊은 물 속인 듯 검푸른 밤하늘만이 남았더구나.

ㅤ청명아, 나는 너에게 그리 좋은 형제가 되어주지 못했다.

ㅤ네가 사제들의 멱살을 휘어잡고 연화봉 뒤편으로 늘어진 심산의 흙바닥을 구르고 돌아올 적이면 나는 이미 상해버린 속을 어찌하지 못하고 너를 나무라곤 하였지. 꾸지람을 늘어놓다 말고 네 머리를 쥐어박으며 화를 냈다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울음을 참으려 겨우 입술만 삐쭉이는 널 보고는 미안한 마음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과를 하며 달래보기도 하였단다. 그날들을 네가 어찌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청명아, 때때로 그런 네가 너무나도 겨웠구나.

ㅤ분을 삭이는 법을 몰라 악을 쓰고 주먹을 내지르며 발을 굴러대는 너를 더는 감당할 수 없다 생각되는 날이면 나는 이따금 어딘가로 도망쳐 버리고 싶었다. 나로서는 감히 흉내조차 내지 못할 검을 그려내며 자꾸만 나아가는 너, 그런 네가 나의 도울陶鬱과 인내를 먹고 착실히 자라나고 있음을 새삼 깨달을 적이면 너를 만나지 않은 어느 세계의 나를 상상해 보기도 했어.

ㅤ너는 너의 장문사형이야말로 천하 제일의 현인이라 이야기하고는 했지만, 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큰 사람이 아니었다. 해서 나조차 미처 깨닫지 못한 도道에 너를 좀 더 가까이 두기 위해, 그리고 너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 젊은 날의 나는 수많은 명분들을 떠올려야만 했어. 내가 화산의 대제자라서, 네가 화산의 제자라서. 그런 너를 나는 이끌어야만 해서. 네가 아직 어려서, 조금만 더 가르치면 나의 뜻을 알아줄 것만 같아서. 알아주지 못한대도 이미 오래전에 내 삶의 일부가 되어버린 너를 어찌할 수 없어서.

ㅤ하나, 청명아. 그런 나의 시간들을 어찌 생각하느냐고 묻고 싶었던 거라면, 그래서 몽중에도 이 못난 사형을 잊지 못하고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거라면, 나의 답은 언제나 하나뿐이란다.

ㅤ일흔을 앞둔 무렵이었나. 경대 앞에 앉아 거기에 비치는 파파노인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가 있었다. 머리칼은 한때의 의기를 잊은 듯 하얗게 세었고, 얼굴 곳곳에는 세월이 패여 정말이지 볼품이 없었구나. 세상이 지어놓은 나의 수많은 이름들을 모두 내려놓고 단지 초라한 경대 앞의 노인으로 나는 이 생에 무엇을 이루었나, 하고 돌이켜보다 문득 거기에 네가 있음을 알았다. 청명아, 나는 그 순간에서야 깨달았어. 나는 한평생 너를 이루었다는 걸, 내가 그동안 외어댄 그 많은 명분들이 실은 전부 무용할 뿐이었다는 걸.

ㅤ내가 끝내 네 손을 놓지 않은 것은 네가 너이기 때문이었어.

ㅤ실로 그렇구나, 청명아. 네가 너이기 때문에 나는 너를 삶으로 이끌고 싶었다. 물 위의 부평초인 듯 하염없이 흔들리며 살아있음을 견딜 뿐인 네게 살아감生을 알려주고 싶었어. 네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와 진이와 너의 다른 형제들과 조카들은 항상 너를 기다리며 그 걸음을 좇고 있다고, 그러니 언제든 뒤를 돌아보아도 좋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ㅤ부딪혀 깨어질 것을 알고도 그날 대산에 오른 것은, 너도 모르는 사이 너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들을 온전히 지켜주고 싶어서였어.

ㅤ청명아.

ㅤ그러니 나는 무엇도 후회하지 않는다.

ㅤ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화산의 제자로 살았던 것을, 너와 우리의 화산을 위해 대산에 오른 것을. 일평생 너의 손을 놓치지 않은 것을. 그 옛날, 어린 내가 그보다 더 어린 너를 만났던 것을. 나는 그 중 어느 하나도 뉘우치지 않아. 네게 삶을 알려주기 위해 살아온 시간들 모두 내게는 오로지 기쁨이었으니.

ㅤ그러니까, 청명아.

ㅤ너 역시 후회할 것 없다.

ㅤ나는 그저 네가 나를 만나, 화산을 만나 내내 평안하기를 바랐다. 긴 긴 세월 내가 네게 바란 건 단지 그것뿐이었어. 내가 너를 만나 행복했듯 너도 꼭 그만큼 행복하라고, 그 한마디를 해주지 못해 나는 너무 오래 염려했구나.

ㅤ그래보아야 화산 아니겠느냐.

ㅤ이만 맺는다. 너를 조금 더 아껴주지 못하고 먼저 떠나는 이 부덕한 사형을 용서치 말거라. 그러잖아도 짊어진 것 많은 그 어깨에 내 걱정까지 지우고 싶지 않으니 그러지도 말고.

ㅤ하나, 그래도.

ㅤ그래도 화산이니라.

ㅤ너의 형장,

ㅤ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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