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천청명] 미온微溫

그러나 가장 치열한

倒影 by 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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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언젠가의 어린 청명이 청문의 등을 떠민다. 사형, 여기 있지 말고 얼른 숨어요. 이번엔 내가 술래란 말이에요. 청문이 슬쩍 웃으며 곁에 선 청진에게 손짓을 한다. 청진도 입술을 삐쭉이다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긴다. 그 자리에서 눈을 감은 청명이 천천히 열을 센다. 하나, 둘, 셋……, 일곱…. 가벼운 봄바람이 그의 목덜미에 흩어진다.

 ㅤ- …… 아홉, 열. 나 이제 찾으러 가요. 진짜로! 

ㅤ적막 뿐인 사위에 갈수록 매서운 바람만이 왱왱대며 그의 주위를 맴돈다. 다시 한번 머리칼이 흩날린다. 싸늘하게 식은 청명의 등줄기로 피처럼 불온不溫한 땀이 흘러내린다. 심장이 쿵, 쿵 박동한다. 별안간 소름이 끼쳐 청명은 소리 내어 형제들의 이름을 부른다.

ㅤ- 사형? … 진아! 청진!

ㅤ재차 사형, 하고 부르지만 청문은 답이 없다. 북해의 만년빙을 닮은 광한풍廣寒風이 그의 뺨을 스친다. 진아, 하고 부르지만 청진은 대꾸하지 않는다. 막 뿌리어진 선혈에 질척한 땅을 딛고 선 발만이 아래로, 아래로 푹푹 꺼진다. 청명은 그제야 여기에 무언가 있음을 안다. 잘 벼린 검날인 듯 선득한 바람을 따라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손끝이 떨려 온다. 고약한 시취가 코끝을 맴돈다. 쿵, 쿵.

ㅤ“청명아.”

ㅤ귓가에 내려앉는 낯익은 목소리가 청명을 생生으로 끌어당긴다. 청명이 저도 모르게 흑, 하고 흐느끼며 작게 앓는다. 당장이라도 제 육혼을 집어삼킬 듯 심장 깊은 곳을 옥죄던 공포가 여태 가시지 않아 자꾸만 숨이 흐트러진다. 가슴에 들어앉은 돌덩이가 모서리를 깎아내리며 제 속을 마구 구른다. 청명이 손톱으로 바닥을 긁으며 마른 흙을 간절히 움켜 든다. 제가 무엇을 쥐었는지조차 알지 못하면서, 다만 그것이 한없이 오랜 습관인 까닭으로.

ㅤ“손이 상한다. 그러지 말아라, 청명아. 천천히……, 그래, 내가 셋을 셀 테니 천천히 숨을 뱉어 보거라.”

ㅤ하나, 둘, 옳지, … 셋……. 잘했다. 잘했다, 청명아. 한 번만 더….

ㅤ식은땀에 젖은 등 뒤로 산 자의 다감한 손이 닿는다. 아이를 달래듯 톡, 톡 가벼운 손길에 그의 눈이 느리게 뜨인다. 깜깜하게 가라앉은 시야에 하나 둘 별이 밝는다. 그 아스라한 빛을 맞고 나서야 청명은 밤이 깊었구나 한다.

ㅤ”…… 사숙?”

ㅤ“그래.”

ㅤ그래, 네 사숙이다. 백천이 멈추지 않고 청명을 토닥이며 답한다. 탁, 타닥, 하고 모닥불이 타들어가는 고요한 소음 사이로 그보다 긴 한숨이 토해진다. 청명의 입술이 달싹인다. 정말이지 지독한 꿈을 꾸었노라고, 거기에서 아주 오랜 옛날의 제가 쌓아올린 어떤 죄업을 보았노라고 그리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소리 없이 부는 바람에 불꽃이 춤을 추듯 일렁인다.

ㅤ”다 괜찮다.”

ㅤ”…….”

ㅤ”전부 지나갔다, 청명아. 전부, … 전부 지나갔다.”

ㅤ그러니 괜찮다. 등에 닿는 손만큼이나 미지근한 음성으로 백천이 낮게 이른다. 전부 지나갔다, 그 절절한 위로에 청명이 우는 듯 웃는다. 무엇 하나 궁금해하지 않는 이 어린 사숙의 헤아림이 넘치도록 기껍다가도 그는 종종 서글퍼진다. 맹악한 삶의 수심水深을 모르는 이가 건넨 말 하나에도 훗훗하게 데워지는 내 심장의 온도를 너는 아는지. 소중한 것들을 잃거나 이미 잃은 것들을 소중히 여길 뿐인 시간 속에서, 너의 이 온기는 또 생의 어디쯤에서 흩어지려는 걸까 두려워하며 마음을 죽이고 마는 나를 너는 아는지.

ㅤ”…… 사숙아.”

ㅤ“응.”

ㅤ“내가 아무리 빨리 걸어도, 놓치지 말고 따라와야 돼.”

ㅤ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손이 청명의 심혼을 쓸어내린다. 부지런히 따라 달리겠다, 뱉어지는 다짐 같은 약속이 더없이 든든하다. 청명이 그의 어깨에 척척하게 식어버린 이마를 기댄다. 이쪽으로 고개를 숙인 백천이 불안을 몰아내듯 나직이 속삭인다. 내가 너와 함께 두려워하마. 청명아, 그러니 다 괜찮다.

ㅤ미온微溫한 다정이 그의 손을 잡는다. 살아있음이 더는, 싫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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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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