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보청명] 난망難忘

남겨진 것, 이어지는 것, 잊기 어려운 것

倒影 by 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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ㅤ암존 당보가 전사했다.

ㅤ소식을 전해 온 것은 뜻밖에도 당가가 아닌 섬서의 화산이었다. 장문인 대현검이 직접 성도를 방문해 수습하지 못한 그의 유해 대신 끝이 부러진 붉은 잠자簪子*비녀를 전달하고 애도를 표했다는 이야기는 호사가들 사이에서나마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으나 그 관심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시절이 가히 좋지 못했다.

ㅤ중원 전역에 시취와 비명 같은 울음소리가 가시지 않는 전란의 시대였다. 일전에는 점창, 작일은 남궁, 오늘에는 다시 무당의 수십 수백 생때같은 목숨들이 덧없이 허물어졌고, 그들 중 돌아오지 못한 이들은 한봄의 짙은 녹음을 관 삼고 한데에 얼크러진 서로의 팔다리를 수의 삼아 서글프게 썩어갔으며, 남겨진 이들은 지금껏 잃어버린 저희의 이름자와 앞으로 버려야 할 형제들의 목숨값을 셈하고 헤아려 보며 멍청히도 시간을 죽여댔다. 그러니 제아무리 암존이라 한들 하고많은 전사자들 중 하나에 불과한 이가 쉬이 잊혀지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ㅤ장례는 사흘간 치러졌다. 시신도 없고 곡성도 들리지 않는 상가를 지킨 것은 그의 식솔이 아닌 화산의 어느 장로라고 했다. 소문을 접한 이들은 자연히 망자의 유일한 친우인 매화검존이 그를 배웅하기 위해 걸음하였으리라 짐작했지만, 사천과 섬서를 오가는 상인들은 그럴 때마다 손을 썰썰 내저으며 저들은 검존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당가에 출입한 것은 화산의 장로들 중 막내뻘인 청진진인 한 사람 뿐이었노라고 말을 전했다.

ㅤ검존은 그렇게 사라졌다. 신강에서부터 광동에 이르기까지 마교도들을 쫓아 천하를 우습게 누비며 벼락처럼 그들을 응징하던 게 전부 언제였냐는 듯이. 지기를 잃고 슬픔에 빠진 그가 사문으로 돌아가 칩거 중이라는 말부터 구파일방 투사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을 우려한 화산파가 의도적으로 검존의 사망을 은폐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그의 빈자리를 무성히 채우며 천하를 떠도는 것은 근거도 없고 출처도 없는 수많은 소문들 뿐이었다. 그리고 야속하게도 그들은 별다른 해명도 없이 세월과 함께 무정히 흘러갔다.

ㅤ화산은 오래 침묵했고 사람들은 암존의 이름을 돈망頓忘하였듯 금세 그의 존재를 잊었다. 무너져가는 세상을 지켜보며 무력히 발을 구르는 것보다야 망각이 간편했다. 이같은 난세에 심혼을 다한 애도와 우려는 사치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므로.

ㅤ모두 죽음과 몰락의 냄새를 실은 바람을 맞고 자란 해당화가 만개한 오월 초순의 일이었다.

*  *  *

ㅤ귀퉁이가 깨진 채 함부로 바닥을 구르던 술병이 청문의 손끝에 걸렸다. 한숨을 내어 쉰 그가 허리를 숙여 분분히 흩어진 자기 조각들을 줍기 시작하자 등 뒤에 서 있던 청진이 분을 이기지 못한 듯 어휴, 저게 진짜, 하고 답잖게도 거칠게 말을 씹어뱉고는 들으라는 듯 부러 발을 쿵쿵대며 제 처소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청문이 눈을 감았다 떴다. 벌써 이레째 아침저녁으로 꼬박꼬박 청명을 찾고도 그 귀한 얼굴 한 번 구경하지 못한 참이니 청진의 성격에 지금쯤이면 슬슬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래도 좀 전까진 저대로 술독에 빠져 뒈지든 말든 제가 알 게 뭐냐고 이를 득득 갈아대던 녀석이, 사형인지 미친인지 죽기 전에 그래도 제가 한 번은 패야 하지 않겠느냐 툴툴대면서도 착실히 청문의 뒤에 따라붙어 예까지 온 것을 보면 걱정하는 마음만큼은 저도 어찌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ㅤ“청명아.”

ㅤ달래듯 나직한 목소리에도 침상 위에 널브러진 그림자는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청문이 그의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불을 반쯤 걷었다. 눈을 감은 청명의 낯이 고요했다.

ㅤ“진이가 두고 간 죽은 좀 들었느냐?”

ㅤ“…….”

ㅤ“의약당서 지어올린 약도 걸렀다더니. 이놈아, 아직 몸도 성치 않은데 무슨 술을 이리도…….”

ㅤ청문이 짧게 혀를 찼다. 일평생 저 망종 같은 녀석을 보살펴 길렀음에도 이 나이가 되도록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는 너무 멀어져 버린 어느 옛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명은 아침으로 콩물을 내어놓으면 그릇을 엎었고 무등을 태우면 청문의 머리채를 잡았으며 얼굴을 씻겨주면 그대로 달려 나가 저보다 나이가 많은 청자 배 사제와 드잡이를 벌이고는 엉망이 된 몰골로 돌아오고는 했다. 그리고 그 핏덩이같이 작고 어린 말썽꾸러기를 손수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달래고 혼내고 쥐어박고 사과하고 다시 타이르는 것은 모두 청문의 몫이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아도 그저 아름다웠노라 속 좋게만 추억하기에는 지나치게 괴로운 시간들이었다. 그때는 청문도 가끔씩 아이의 자그맣고 보동보동한 그 손을 놓아버리고만 싶었다.

ㅤ“청명아.”

ㅤ허나 그는 차마 그리하지 못했다. 이만하면 되었다고, 저도 할 만큼은 하였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등을 돌리려 할 적마다 아이의 설운 낯이 눈에 밟혀 청문은 번번이 몇 걸음 제대로 떼어보지도 못한 길을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연유야 늘 차고 넘쳤다. 그래도 사형인 제가 마음을 넉넉히 써야 해서, 녀석도 애당초 나쁜 의도로 일을 저지른 건 아니라서. 아무리 제 속을 태우다 못해 가슴에 불을 질러대는 놈이라도 타이르다 보면 언젠간 저를 이해하는 날도 오겠지 싶어서.

ㅤ아직 유충하기 이를 데 없는 사제를 굶길 수 없어 울분에 찬 숨을 씨근덕거리면서도 버섯을 듬뿍 넣고 달걀을 풀어 죽을 푹 쑤어주면 청명은 그릇에서 더 이상 김이 올라오지 않을 때까지 손을 꼬물거리다 우물우물 사과를 하곤 했다. 제가 잘못했다고, 사제의 생각이 짧았으니 그만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무엇 때문에 제 사형이 화를 내는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오로지 미움받고 버려지는 게 두려워 더듬더듬 죄를 청하던 그 가여운 눈을 청문은 감히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러니 자연히 잊을 수도 없었다. 

ㅤ때문에 그는 침상 위 잠든 듯 조용한 청명의 얼굴에서 저와 마주 보고 앉아 버섯달걀죽을 나누어 먹던 그때를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울음을 뱉는 법은커녕 제 마음을 이르는 말 하나조차 알지 못해 그저 서럽게 가슴만 퍽퍽 쳐대던 그 아이가, 아직도 자라지 못한 채 청문의 앞에 누워있는 것만 같았다. 불덩어리를 삼키기라도 한 것처럼 속이 억하고 무지근했다. 청명은 여든을 넘기고도 한결같이 안쓰럽고 한결같이 답답했다.

ㅤ“기운을 차리거든 함께 화음에나 한번 내려가자꾸나. 듣자 하니 곽가 주점의 호로계葫蘆鷄*(삶은 닭을 튀겨 만드는 섬서 지역의 음식. 통닭의 일종.)가 그리 일품이라던데, 내 아직 맛을 본 적이 없어서 말이다.”

ㅤ“…….”

ㅤ“… 내키지 않는 모양이구나. 허면, 그 옆 가게에서 파는 증고甑糕*(꿀에 절인 대추를 넣고 쪄낸 시루떡으로, 섬서 지역에서 주로 먹는 간식.)는 어떠냐? 일전에 네가 처소에 쌓아두고 먹는 것을 본 것 같은데.”

ㅤ“됐으니 저 말고, 진이랑 다녀오세요.”

ㅤ청명이 성의 없이 대꾸하고는 그대로 손끝을 더듬어 제 머리맡에 남겨둔 술병을 찾아 들었다. 그 모습을 흘겨보던 청문의 입술 틈으로 참지 못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ㅤ“청명아.”

ㅤ한 번 더 이름을 부르자 여태껏 침상 위에 널브러졌던 청명이 마지못해 몸을 일으켜 앉고는 예, 사형, 하며 짧게 답했다. 그리 마셔대고도 깊은 잠을 자지 못했는지 그의 눈가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청문의 속이 다시 끓었다.

ㅤ“대체 언제쯤에나 털고 일어날 생각인 게냐?”

ㅤ“…….”

ㅤ“이런 널 두고 보아야만 하는 내 속은 편한 줄로 아느냐? 이 녀석아, 진이가 사천에 다녀온 게 벌써 달포도 전의 일이다. 헌데 너는 어찌, 여즉 얼굴 한 번을 비추질 않고 오로지 술만, 그놈의 술…….”

ㅤ“… 장문사형.”

ㅤ“내 입에서 기어이 암존을 원망하는 말이 나와야 하겠느냐?”

ㅤ옹주邕州에서 돌아온 이후 여태껏 텅 비었던 청명의 눈동자에 그제야 제가 비쳤다. 청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입에서 뱉어진 그 두 글자가 괴로워 입술만 짓씹고 있는 청명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속이 쓰리다 못해 생목이 다 받쳐 올랐다.

ㅤ“와즉영窪則盈이라 했다. 패일 때가 있으면 차오를 날도 있는 법이니, 이제 그만 마음을 다잡는 게 좋겠구나.”

ㅤ이러니 제 수양이 충분치 못한 줄을 알면서도 암존을 탓하고만 싶어지는 것이다. 어느날 벼락처럼 나타나 순식간에 청명의 일부가 되어버린 사람을, 제 사제의 얼굴에 하이얗게 웃음이 피어날 적마다 든든히 곁을 지키고 서 있던 그를. 이리 떠나버릴 거라면 처음부터 웃는 법을 알려주질 말지. 차라리 삶을 찾게 만들질 말지. 청문이 그의 손에 들린 술병을 빼앗듯 움켜 들었다.

ㅤ“… 그 말이 정녕 옳습니까?”

ㅤ청명이 뻑뻑하게 마른 제 눈가를 천천히 문지르며 물었다. 여전히 평온하기 그지없는 어조에 고단함이 잔뜩 묻어났다.

ㅤ“장문사형, 사형이 왜 화음에 가자고 하는진 나도 알아요. 다른 생각도 좀 하고 살라고 이러시는 거잖아요. …… 다 아는데요. 알아서 갈 수가 없는 거예요.”

ㅤ“…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겠느냐?”

 ㅤ청문이 미간을 좁히며 이쪽을 보고 되물었다. 고개를 반쯤 모로 튼 채 말을 고르던 청명의 시선이 그의 얼굴에 가 멎었다.

ㅤ“일이 다 끝나고 나면, 제일 먼저 곽 씨네 그 가게에서 술부터 마시기로 했어요. 건너편 집에서 계화떡도 하나씩 사 먹고. … 그 녀석이랑요.”

ㅤ“…….”

ㅤ“도자전에도 들르기로 했는데. 사실은, 이번에 두 동강 난 그 잠자도 화음에서 산 거거든요. 그게…, 나한테 시자병枾子餠*(감 또는 곶감을 갈아 만든 반죽에 꿀에 절인 견과류를 넣어 튀겨낸 호떡의 일종으로, 섬서 지역에서 주로 먹는 간식.) 사 달라고 덤비다가 두들겨 맞았을 땐가.”

ㅤ단 걸 그리 좋아하지도 않는 녀석이. 청명이 불퉁스레 중얼거렸다. 온몸에 피멍이 들 때까지 얻어터진 당보는 그날 사천 제일의 장인에게서 비싼 값을 주고 맞추었다던 잠자를 모조리 부러뜨려 먹고는 도자전에서 청명의 주머니를 털었다. 아니, 이렇게 봉두난발을 하고 성도로 돌아갈 수는 없다니까요! 보시오, 도사 형님. 나도 체면이란 게 있소, 하고 길길이 날뛰던 것치고 녀석은 제법 수수하게 생긴 목잠을 골랐다. 초봄 화산에 피는 홍매화처럼 붉은 빛깔의 잠자였다.

ㅤ- 말코 도사가 사준 물건, 말코 지키다 망가뜨렸으니 그걸로 되었지. 아, 뭡니까? 어째 형님이 더 아쉬워하시는 것 같소? … 돌아가서 하나 새로 사주시면 될 일 아닙니까?

ㅤ그리고 그 목잠은 마지막 전투가 치러지던 날 동틀 무렵에 기어이 부러지고 말았다. 청명의 측면을 파고드는 주교의 일격을 당보가 대신 받아내며 벌어진 일이었다. 소요가 길어지는 동안에도 이상하리만치 부상이 없던 녀석은 그 직후 허벅지에 깊은 자상을 입고 시나브로 무너져내렸다.

ㅤ“그러니까, 장문사형. … 내 말은요.”

ㅤ청명은 제 속도를 내지 못해 한 걸음씩 뒤처지면서도 악착같이 제 뒤로 따라붙던 당보의 거친 숨소리를, 그 위태롭고도 익숙한 기척을 떠올렸다. 부러 기억하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술과 잠에 취해 보낸 지난 달포 동안 청명의 의식은 줄곧 옹주의 깊은 산 속에 머물렀으니까. 해서 그는 그날의 꿈을 꾸는 내내 소리 없이 회한했다. 잠깐만 기다려줄걸. 조금만 천천히 달릴걸. 한 번만 더, 그 녀석을 돌아볼걸.

ㅤ“화음에는, 당보 그 자식이랑 함께한 기억이……, 세상에 그놈 흔적이, 너무… 너무 많아요. 사형, …… 장문사형….”

ㅤ끊어질 듯 애참한 음성이 청문의 심간을 파고들었다.

ㅤ“그러니까 저 좀 가르쳐 주세요. 마음도, 다시 채워질 수 있나요? …… 예전과 똑같이?”

ㅤ붉게 물든 청명의 눈이 끔뻑였다. 잠시 망설이던 청문은 떨리는 손을 뻗어 청명의 뒷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저도 모르게 이가 악물렸다. 고작 이런 것이 이 녀석에게 위로가 될까. 차라리 울어버리면 좀 나을 것을. 한바탕 쏟아내고 나면 조금은 후련해질 것을. 아주 오래전, 죽이 다 식도록 제 눈치만 살피던 그날처럼 여전히도 이 쉬운 방법 하나를 배우지 못해서.

ㅤ명아.

ㅤ청문이 더께처럼 늙어버린 아이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  *  *

ㅤ- 도사 형님, 술 좀 남습니까?

ㅤ- 안 남는다.

ㅤ- 구라치지 말고.

ㅤ당보가 왈칵 짜증을 내며 쏘아붙였다. 다물린 입술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게 영락없이 잔소리가 시작될 판이라 청명은 그쯤에서 순순히 제가 들고 있던 술병을 건넸다. 웬수같은 말코 새끼, 아직도 제 목숨이 열두 개는 되는 줄 알아. 살점이 반쯤 뜯겨나간 청명의 어깨 위에 독주를 쏟아부은 당보가 구시렁대며 금창약을 꺼내 들었다.

ㅤ- 살살 좀 해라.

ㅤ- … 아픈 줄은 아시는가 봅니다?

ㅤ- 술을 그렇게 함부로 때려 붓는데 안 아프겠냐, 그럼?

ㅤ- 그러니까, 그걸 아는 양반이 몸을 이 따위로 막 굴린다 이거지?

ㅤ- …….

ㅤ청명이 다시 입을 닫았다. 가루를 뿌린 환부 위로 고약을 듬뿍 떠 바른 당보가  제 소매를 뒤지다 말고 한 번 더 성을 냈다.

ㅤ- 이 미친 인간아! 이게 마지막 남은 약이라고 몇 번을 말해. 상처 묶어둘 천도 없고, 소독할 술은 더 없는데! 이걸 콱, 진짜.

ㅤ빌어먹을 독쟁이가……, 바가지 한번 시원하게도 긁네. 청명이 남은 손으로 슬쩍 귀를 후볐다. 기실은 그 역시 당보를 고맙게 생각하기는 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든든히 제 뒤를 지키며 빈틈으로 비도를 던져대는 녀석 덕에 자잘하게 목숨을 구한 것도 벌써 몇 번은 되었다. 그러니 저놈의 잔소리만 아니라면 한 번쯤 제 입으로 고맙다 인사 한마디 건넸을지도 모를 일인데.

ㅤ- 기운도 좋다, 새끼야. 시끄러우니까 그만 좀 해. 가는 길에 내가 술 한번 산다. 됐냐?

ㅤ- 뭐…….

ㅤ장포 아래 아직 피에 젖지 않은 제 옷자락을 찢어 청명의 어깨를 동여맨 당보가 우물거렸다.

ㅤ- … 아니, 술은 됐고. 이름이나 하나 멋들어지게 지어 주쇼. 구리기만 해 봐요. 내 당장 이 길로 화산에 쳐들어가 그간 그 몸에 들인 약값 몽땅 받아 갈 테니까.

ㅤ- 갑자기 웬 이름이야?

ㅤ- 그……, 아보阿寶가 곧 관례를 치르거든요.

ㅤ- 아보?

ㅤ- 예. 곧이라기엔 또 좀, 그 아해가 아직 열셋이 좀 안 되었으니 아직 두어 해는 남았겠지만서도……. 새로 자字를 받으면 평생 그리 불릴 테니, 미리 고민해서 나쁠 것 없잖습니까.

ㅤ- …… 그게 누군데?

ㅤ- … 하다 하다 이젠 이 아우의 손주 되는 녀석도 기억을 못 합니까? 지난번에 우리 집서 한번 봤잖아요. 왜, 평생 쇠붙이만 만지며 살기는 싫다고 까무러치다 형님이 좀 달래주니 뚝 그치던.

ㅤ- 어……, 아.

ㅤ청명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그러고 보니 당가에 공방 일은 죽어도 싫다고 징징 울어대던……, 저 녀석 이름이랑 꼭 닮은 초명을 쓰는 아해가 하나 있었던 것도 같고. 지금이야 어쩔 수 없지만 후일에라도 자는 꼭 좋은 걸 받아야 한다고, 안 그럼 평생 저 덜떨어진 할아버지처럼 살지도 모른다며 그 아해와 당보를 함께 놀리기도 했는데. 그게 그러니까, 한……, 몇 년 전이더라….

ㅤ- … 걔 이름이 아보냐?

ㅤ- …… 걔 이름이 아보입니다.

ㅤ진짜 잊어버렸구만. 하, 미치겠네…. 당보가 소리 없이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ㅤ- 도사 형님, 그래도 그 녀석 앞에선 무조건 알아보는 척하셔야 합니다. 그놈 자식이, 제 할아비가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면서 검존 어르신 말씀이라면 아주 껌뻑…….

ㅤ- 공방 일은 좀 할 만하다더냐?

ㅤ꿍얼대며 장죽을 찾던 당보의 얼굴에 미묘하게 화색이 돌았다.

ㅤ- 뭐……, 제법 합디다. 처음엔 망치 하나도 낑낑대며 겨우 들던 녀석이 이젠 담금질도 곧잘 하고요.

ㅤ- 아니, 그놈이 마음에 들어하느냐고.

ㅤ청명이 말허리를 끊고 재차 묻자 당보가 예? 하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별 신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얼빠진 얼굴이 제법 우스웠다.

ㅤ- 본래 독과 암기를 익혀 무인이 되고자 했던 아해 아니냐? 팔자에도 없는 공방 일을 하게 되었으니, 당연히 재미를 붙이는 게 먼저지.

ㅤ- 하이고……, 도사 형님. 이게 다, 형님이 그놈을 본 지가 오래라 그런 걱정을 하시는 게요. 밤이 늦도록 쉬지도 않고 고 고물고물한 손으로 어찌나 열심히 뚱땅대는지, 아마 그 어린 것이 살아온 열두 해 평생을 통틀어 무언가에 그리 매달려본 역사가 없을 겁니다. 언젠가 천하에서 최고로 좋은 명검을 만들어다 검존 어르신께 바치겠다나요.

ㅤ못난 놈. 당장 공방에 틀어박히란 게 아니니 놀러라도 가자 내가 거진 두 달을 졸라댈 땐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면서……. 당보가 못내 섭섭한 듯 떼잉, 하며 혀를 찼다.

ㅤ- 그럼 저 알아서 잘 할 텐데 뭐가 그리도 불만이야? 뭔, 이름 같은 소리 하네. 아서라. 그런 놈들은 이름 같은 것 부러 공들여 짓지 않아도 제 앞가림 할 만큼 하며 살아.

ㅤ- 다 할아비 된 자의 욕심이죠. 그래서 자는 안 지어주시렵니까?

ㅤ- … 별 것 있냐? 검 만드는 놈을 검 만드는 놈이라 부르지, 뭘.

ㅤ이 양반이…. 당보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아무리 그래도 당가의 귀한 자손인데, 이딴 말코의 말 한 마디에 조검造劍 같이 구린 이름으로 평생을 살게 할 수는 없었다.

ㅤ- 그럴 듯한 걸 좀 생각해 봐요! 언제는 뽑힐 일 없는 검이야말로 진정한 명검이라더니. 평화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거라더니! 그 평화를 지켜내는 무기를 만들 귀한 아해의 이름에 이 따위로 장난을 칩니까? 

ㅤ- 아, 그럼 평화를 만드는 놈造平이라 짓든가!

ㅤ참다 못한 청명이 빽 소리를 질러댔다. 터져나온 노성에 덩달아 울컥한 당보가 맞대꾸를 하려 입술을 몇번 벙긋거리더니, 잠깐 사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금세 태도를 바꾸어서는 음, 하며 저 혼자 고개를 주억거렸다.

ㅤ- 나쁘지 않네요.

ㅤ- …… 뭐가. 나 아무 말도 안 했는데?

ㅤ- 그런 게 있습니다. 형님은 몰라도 돼요.

ㅤ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당보가 장죽에 엽초를 눌러 담아 연기를 피워올렸다. 멍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던 청명의 입에서 뒤늦게 허, 하고 헛숨이 샜다. 자식이, 갑자기 무슨 손주 놈 이름을 다 지어준다고 그래.

ㅤ- 어디가 안 좋냐? 생전 안 하던 짓 하면 죽을 때가 된 거라고들 그러던데.

ㅤ- 왜요. 이제야 좀 이 아우 걱정이 드십니까?

ㅤ- 까지 말고.

ㅤ청명이 코웃음을 치자 녀석의 입술이 툭 튀어나왔다.

ㅤ- 별 건 아니고요, 그냥……. 겁이 좀 나서요.

ㅤ- … 네가 겁내는 것도 다 있냐?

ㅤ- 있지요, 당연히.

ㅤ당보가 장죽을 뻑뻑 빨았다.

ㅤ- 나 죽고 나면 저 아해는 어쩌나. 나중에 저놈이 그냥 무학을 익힐 걸 그랬다고, 그 덜떨어진 노친네 말은 무시할 걸 그랬다고 후회하게 되면 그땐 어찌하나. … 요즘은 그런 게 무섭디다. 그때 난 아무 말도 전해줄 수가 없을 테니까요.

ㅤ- …….

ㅤ- 그러니 뭐라도 남겨줘야겠다, 싶어서요. 저 녀석이 길을 잃었을 때 들여다 보면 도움이 될 만한 걸로. 지금껏 아보로 불린 세월보다 새 이름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더 많을 텐데, 그만하면 훌륭한 선물 아닙니까?

ㅤ- 야.

ㅤ- 제가 도사 형님 같은 괴물도 아니고, 당장 내일 비도 던지다 헛발 디뎌 뒈져버릴지 누가 안다고요. 저승에서 후회 않을 정도의 준비는 해 둬야죠. … 말 나온 김에, 나중에 이 아우 없다고 궁상 떨지 말고 제 조카놈들이라도 챙겨서 좀 놀러다니고 하십쇼. 같이 경치 좋은 곳 유람 가고, 내키면 대작도 하고 그러시란 뜻입니다. 맘에 안 든다고 냅다 쥐어패서 어린 것들 기 죽이지 말고요.

ㅤ당보가 연기를 뱉어 제 얼굴에 걸린 그늘을 뻐끔뻐끔 지워냈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왔다. 깊은 봄 피어난 해당화와 당보의 지독한 망우초忘憂草 향이 훈풍에 섞여 코끝을 간지럽혔다. 청명은 말없이 한참동안 제 입술만 씹어댔다. 싱그럽고 역겨운 냄새에 무시로 현기증이 일어 눈 앞이 어찔했다.

ㅤ- …… 당보.

ㅤ- 예, 형님.

ㅤ- 보야.

ㅤ- 예.

ㅤ- … 조금만 쉬어 가자.

ㅤ- 좋죠.

ㅤ당보가 한손으로 제 소매를 탁탁 털었다. 시원스레 웃는 그놈의 목소리가 하도 말갛고 밝아서 청명은 차마 묻지 못한 말을 그대로 찬찬히 바수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리도 당연히 죽음을 예언하는 너는 내 몫으로 무엇을 남겨 두었느냐고. 언젠가 너를 잃고 길을 헤매일 나에게는, 무얼 남겨 주겠느냐고. 더 뱉을 수 없는 그 물음들이 목구멍 안쪽에 가시처럼 박혀 들었다.

ㅤ청명의 눈이 살짝 감겼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  *  *

ㅤ바깥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청문이 고개를 들었다. 붓을 내려두고 서안을 밀어놓는 사이 성급히 문이 열렸다.

ㅤ”…… 청명아.”

ㅤ도복을 갖추어 입은 청명이 그의 앞에 꿇어 앉았다. 청문이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ㅤ”사제, 잠시 사천에 다녀오겠습니다.”

*  *  *

ㅤ정마대전. 고금제일의 마인이라는 천마와 그를 추앙하는 교도들을 상대로 싸워 이긴, 백년 전의 바로 그 전쟁. 세인들은 그것을 결사대의 승리라 불렀고 강호에서는 후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이라 간혹 칭송하기도 하였으나 당조평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공방의 어린 아해들을 향해 짧게 말했다.

ㅤ- 개죽음이었다.

ㅤ”개죽음이었다.”

ㅤ자그마한 입에서 경악 어린 탄식들이 흘러나왔다. 허나 당조평은 동요하지 않고 담담한 손길로 처음 우린 찻물을 버렸다. 개죽음, 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을 적에는 자신도 저만치 입을 벌리고 아니, 아, 아니……, 하고 바보처럼 말을 더듬어댔으니 이 어린 녀석들을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선인들이 베푼 은혜를 두고 하는 말로는 지나치게 불손하지 않은가 싶어 저 역시 일생동안 다른 표현을 고민해 보았으나, 길었던 전란을 설명할 단어로 그보다 적절한 것을 찾지 못한 당조평은 수십년 전 세상을 떠난 어떤 검수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ㅤ“대산혈사가 일어나기 전, 검존 어르신께선 그리 말씀하셨다. 천하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건 본디 개죽음과 다를 게 없다고 말이지.”

ㅤ- 혹여나 후일 내 목이 달아나더라도 같은 말로 전해. 천하를 위했다느니, 협의를 지켰다느니 하는 빈말은 집어치우고. 암존도, 검존도 모두 개죽음을 당한 거다. 아해야, 알아듣겠느냐?

ㅤ- 어르신, 어찌…….

ㅤ- 전쟁은 석일의 광영을 모조리 허사로 만든다. 그 비정함 앞에선 네 할아비나 나도 예외가 아니지. 허니 양민들의 생사는 오죽하겠느냐? …… 진정 천하를 지켜낼 방법이 있다면,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는 것 뿐이다. 초개처럼 목숨을 버리고 삶을 잃느니 차라리 두려움을 배우는 편이 나아. 그러니 더는 쓸데없이 말을 꾸며낼 생각 말아라.

ㅤ따끈한 물에 우러난 벽라춘 향이 은근했다. 당조평이 주름진 손으로 잔마다 조금씩 차를 따르며 흘러간 시절을 되짚었다.

ㅤ“듣거라.”

ㅤ“예, 신수 어르신.”

ㅤ아이들이 일제히 답했다.

ㅤ“공방에 발을 들인 너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 뿐이다. 주어진 길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 하면…….”

ㅤ검존 어르신, 하고 당조평이 입속말로 그를 불렀다. 개죽음이라는 그 어른의 말이 진실로 옳았는지도 모른다. 천하는 그들을 기억해주지 않았다. 경지를 뛰어넘은 그들의 무위도, 그들이 묵묵히 견뎌온 지난한 생애의 흔적도. 심지어는 그들의 영광된 이름마저도 세상은 야속할만치 쉬이 잊었다. 예나 지금이나 애도는 어렵고 망각은 편리한 까닭이었다.

ㅤ‘허나, 검존 어르신.’

ㅤ이 아보는 잊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이 제게 남기신 말씀을, 할아버님이 제게 전하고자 하신 그 의지를. 그러니…….

ㅤ- 천하는 네가 지은 검으로 평화를 지켜낼 것이다.

ㅤ“천하는 너희가 지은 검으로 평화를 지켜낼 것이다.”

ㅤ제 이름자는 응당 그런 의미여야 하겠지요.

ㅤ기억하는 이 없이도 자연히 이어지는 것이 있다. 그래서 잊기 어려운 것이 있다. 당조평이 반대편 벽에 걸린 족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억 속 젊은 낯을 한 검수가 그곳에 적힌 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조부가 지내던 상방廂房 귀퉁이에서 찾은 글귀였다.

ㅤ한매寒梅 붉은 꽃무리 북풍에도 굳건하니, 

ㅤ암향暗香 저문 자리에는 녹음綠陰이 분분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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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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