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순무]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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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erneath by 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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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둘만의 비밀을 위해 산으로 향하는 뒷길을 올랐다.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서서히 해가 지는 길을 올라 몸이 근질근질했을 포켓몬들을 내보낸다. 확실히 진화를 했기 때문인지 이제 나인테일은 눈빛에 의욕이 가득했다. 순무는 그 마음을 몰랐던 것에 다시 미안함이 떠올랐다. 자신을 믿고 따르는 포켓몬들을 위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훌륭한 트레이너가 되기를 다짐한다.

주거니 받거니를 하며 기진맥진해진 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더운 날씨이기에 나인테일의 불꽃 기술에 삽시간에 더위를 느낀다. 잠깐 쉴 겸 모두 돌려보내 주고, 둘은 길 바깥쪽에 서서 노을 지는 용암마을을 바라본다. 피어오르는 온천의 증기, 서서히 깊게 잠기는 길거리, 그 속의 생명체들. 조용하고 작은 온천마을일 뿐인데 안정감이 들었다. 도시에서 살다가 찾은 고즈넉한 마을에서의 생활에 평온함을 느낀 것도 원인이다.

이렇게 된 연유를 생각하면 그날, 순무가 먼저 나누의 손을 잡은 날이 떠올랐다. 모든 일의 시작은 가족회의를 걸친 결정이었으나 둘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나누는 주홍색 빛을 받으며 마을 전경을 바라보는 순무의 옆얼굴을 보았다. 투명한 눈동자에 빛을 가득 담고 엷게 미소를 짓고 있다. 돌아가면 이날들이 그리워질 것 같아서 울컥 차오르는 감정에 나누는 순무의 이름을 부른 뒤 그를 소중하게 안았다.

조용히 불린 이름에 고개를 돌리면 나누는 얼굴에 어지러움이 가득했다. 뺨을 쿡 찌르면 눈에서 눈물이 똑똑 흐를 것처럼, 보는 이의 가슴마저 사무치는 표정을 하고 있다. 붉은 눈동자는 저녁놀 빛에 물들어 애수가 가득 차 있었다.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순무는 나누의 품에 안겼고 팔을 돌려 거기에 대답해 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한다. 며칠 후면 느낄 수 없을 이 온기에 순무는 눈물을 흘렸다. 울면서 안 가면 안 되냐고 말해 보지만 나누는 괴로운 표정을 짓고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장래를 위해 할 일이 많은 것이다. 뺨에 뺨을 대고서 반드시 돌아올 테니 그때가 오면 함께 여길 뜨자고 속삭인다. 현재 그런 위로밖에 할 수 없었다.

이러고 밤새 있을 수 있지만 현실을 일깨우는 나누의 말에 어린아이 같이 울며 억지 부리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서 순무는 나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괜찮은 척 웃어 보였다. 부디 이것이 거짓된 미소인 걸 깨닫길 바랐지만 나누는 안심한 것처럼 가볍게 웃으며 입 맞추는 것이 다였다. 그러나 순무는 자신이 연기를 잘한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은 분위기는 떠오를 줄을 몰랐지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거슬리는 곳을 어루만져 주면 점점 뜨거운 열이 오른다. 매일 해도 이 짓은 질릴 일 없었고 젊은 몸들도 지칠 줄을 몰랐다. 늘 같은 부위에 근육통이 달렸고 몸이 휴식을 권유해도 뿌리치며 언제 또 만날지 모를 사랑만을 쫓는다. 잊어도 잊을 수 없도록 여기저기를 깨물어 흔적을 남기는 것이 다지만 이것은 곧 없어질 자국들이었다. 그러나 그래도 잇자국을 남기며 그가 있었음을 일깨운다.

어쩐지 사정을 하고 씻은 뒤 편히 드러누워도 마음은 찝찝하다. 아까 울던 순무의 얼굴이 떠올라 고개를 돌려 옆을 보면 발가벗은 채로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나누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가깝지만 먼 미래. 고작 몇 년만 참으면 된다. 남은 시간 동안 더는 순무가 울 일이 없기를 바라며 밝은 미래만을 상상한다. 열심히 공부하면 곧 졸업할 테고, 그동안 순무도 혼자서 이론을 다지고 포켓몬들과 훈련을 할 것이다. 그리고 순무의 부모를 설득해서 그를 이곳에서 빼내 와야 했다. 그러려면 나누도 울상을 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순무도 참고 있는데 나누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감정을 막고 있는 벽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 전까지는 맹렬하게 뜨거웠으나 이제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순무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순무는 쌓인 피로에 멍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해도 마른 땀은 씻어야 했기에, 나누는 먼저 일어나서 순무를 이끌었다. 따뜻한 물을 맞으며 장난치자 다시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는 무엇 하나 입지 않고 얇은 여름 이불만 걸친 채 잠들었다. 저녁에 배틀을 하고서 서로를 안았더니 너무나 피곤했던 탓이다.

사흘 후엔 일도 끝나고 시험 삼아 치는 시험날이었기에 나누는 어지간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순무, 이별, 시험, 돌아가면 들을 것이 분명한 부모의 핀잔. 냉정하고 침착하던 나누도 점점 부담감이 몰려와서 속으로 탄식만 내질렀다. 순무가 있든 없든 창문을 열어놓을 때면 방 안에서 담배를 태우는 횟수가 늘었다. 그럴수록 순무는 여태껏 이 방에 남을 리 없었던 담배의 잔향이 사라지는 것이 싫었다. 숨구멍을 죄는 담배 냄새는 나누의 존재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냄새가 사라져서 편히 숨을 쉬게 된다면 그것은 나누가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열정적인 덕에 나누는 또다시 담배를 사러 간다는 명목으로 중요한 것과 새 담배를 사 왔다. 남은 날들 동안 다 쓸 수 있을까? 그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눈과 눈이 마주치면 배틀을 하는 트레이너들의 암묵적인 룰과 같이, 둘은 몸이 회복하기도 전에 별채에 있는 시간에는 무리하게 몸을 겹쳤다. 망설이던 손은 먼저 나와서 상대방을 붙잡았고 이제는 어딜 만지면 좋아하는지 파악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뜨겁고 그렇게 소란스러워도 결코 아쉬운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이 순간만을 누리며 살아가듯 오늘은 어제보다 더욱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말들로 다가오는 내일을 그 속에 감춘다. 창문을 열어 들어오는 달빛에 비춘 손바닥에 손바닥을 딱 붙이고는 네 손이 크니 작니 정겨운 이야기를 하다가도 이 손을 놓기 싫어서 깍지를 끼고 잡아 버렸다. 그러면 순무도 손가락을 구부렸고 저절로 찡그려지는 얼굴에 힘을 주고 눈물을 삼킨다. 끊겨 버린 대화는 그 속에 겨우 감췄던 내일을 드러내 버리고 말았다.

같은 나날들이 지나고 끝내 마지막 근무일의 아침이 밝아오자 나누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순무도 그런 건지 아침부터 기운이 없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이겨내려는 모습에 나누도 싱겁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세수와 면도를 마치고 본채로 내려가자 주인장은 나누를 살짝 불러냈다. 일할 준비를 하면서 모레 서점에 가서 무얼 살지 고민하던 나누는 그를 따라 부엌 구석으로 간다.

주인장은 나누에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하나뿐인 아들과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맙다며 다음에 시간 나면 놀러 오라고 한다. 나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선, 꼭 그러겠다고 대답하면서도 마음속으로 반드시 당신네들에게서 아들을 뺏어버리겠다는 다짐을 한다. 자리로 돌아가자 순무가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셨냐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랑 친구가 되어 줘서 고맙대."

순무는 얼굴을 찌푸리고 아버지가 주책맞다며 불평을 했다. 나누는 어깨를 으쓱이며 부모 마음이 다 그렇지, 하고 대답했다. 그 순간, 순무가 여자애였으면 나누를 사위 삼았을 거라는 여주인장의 말도 떠올렸다. 정말 그랬다면 이렇게 서로 가슴 아프게 헤어질 일도 없었을 텐데.

"어쨌든 난 너랑 만나서 좋은데."

애써 간지러운 말을 한 뒤에 싱긋 웃어 보이면 순무는 계속 표정을 풀지 않은 채 입술을 씰룩였다.

"너희 부모님도 똑같이 생각하실까?"

걱정스러운 말투에 나누는 내가 뭘 하고 다니든 어떤 친구를 사귀든 사고만 치지 않으면 됐다는 분들이라 괜찮을 거라고 대답한다. 자신이 나누보다 못난 점이 많다는 걱정에서 우러나온 물음이었으나 대답을 듣고 마음이 놓인다. 경찰관을 목표로 하는 아이가 산촌 온천 여관집의 아이와 어울린다는 것을 납득해 줄지 자꾸만 확신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나누에게 속마음을 말해 보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안심이 된다.

점심 이후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훗날 나누가 발령받는 곳에서 함께 살기로 하며 순무는 그곳이 어디든 따라가겠다고 했다. 그때쯤이면 순무도 정식으로 데뷔해서 리그를 목표로 하는 트레이너가 되어 있지 않을까. 가디도 윈디가 되어 있을 것이고 새로운 포켓몬들을 소지하고 있을 수도 있다. 가깝지만 먼 미래.

오후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일거리를 찾아다녔는데, 직원들은 모두 나누에게 아쉬움을 표했다. 일 처리 솜씨도 좋고 정리 정돈도 깔끔히 하며 성실하다고, 하나같이 짠 것처럼 입을 모아 칭찬했다. 그것이 부담스러워진 나누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자신을 포장하는 그들로부터 도망쳤다. 순무는 옆에서 키득대며 당황해하는 나누를 재미있게 보았다. 부엌 뒷문으로 살짝 빠져나온 나누는 다들 작별 인사만 할 것이지 자길 못살게 군다며 농담을 했다. 순무는 그런 나누가 자랑스러웠다.

"다들 그만큼 너를 좋아한다는 거잖아. 여태 이렇게까지 칭찬받은 직원은 없었어."

그 말에 나누는 샐쭉거리며 나 좋다는 건 너 하나면 되는데, 하고 중얼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직 밝다. 둘은 잠시 서서 더위를 식힌 후 본채로 돌아갔다. 나눠 주는 달디단 제철 나무 열매를 받아먹고 주방 담당들이 저녁을 차리기 위해 재료 다듬는 것을 도왔다. 그 후에는 물기가 덜 마른 그릇들을 마른행주로 닦아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체크아웃한 객실에 가서 정리 정돈을 하고 또 아무로 몰래 입맞춤을 한 뒤에 웃었다.

하루는 조용하게 흘러 저녁이 되었다. 밥을 먹는데 어쩐지 먹기 싫어져서 절반을 남겼다. 방으로 돌아오면 순무가 어디 안 좋은지 물었다. 나누는 여름이라 입맛이 없는 것 같다고 둘러댔다. 심리적인 압박감 때문이라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분명 걱정할 것이다. 나누는 모레 무얼 할지나 정해보자며 화제를 바꾼다. 나누가 걱정되지만 걱정하면 싫어할 것이 분명했기에 순무는 티 내지 않고 곁에 앉았다.

트레이너 입문서와 도구 같은 것도 어떤지에 관해 얘기를 하던 도중, 노크 소리가 났다. 문을 열면 주인장이 있었다. 나누의 급료를 현금째로 종이봉투에 넣어 온 그는 수고했다며 교통비 정도는 보너스로 넣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순무가 보는 앞에서 액수를 확인할 수 없어 나중에 세어 보기로 하지만 순무가 그래도 맞는지 확인해 보라고 재촉했다. 나누는 따로 적어 두었던 메모와 실제 받은 금액을 비교했다. 주인장의 말대로 조금 더 금액이 컸다. 이걸로 순무에게 선물이나 사 줄까, 하고 생각하며 종이봉투를 순무의 책상 서랍에 보관한다. 내일은 시험을 쳐야 하므로 가방에 보관할 수 없다.

곧 돌아간다 해도 일단 부모님께 연락해 두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나누는 담배를 챙겨 들고 별채 밖으로 나와 쭈그려 앉은 뒤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무원인 아버지는 회사에 다니는 어머니가 야근할 때보다 먼저 집에 올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집을 떠나 스스로 돈을 벌어 보니 어떻냐고 물었다. 나누는 담배 연기를 내뱉고는 다들 잘해 주고 일도 재밌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꾸짖는 말투로 편한 곳에서 일하니 그렇다며 잔소리를 했다. 만약 네가 일한 곳이 악덕 업장이었다면 어땠겠냐고, 생각을 너무 단순하게 한다며 혀를 찼다. 나누는 그 말에 웃어 버렸다. 말은 이렇게 해도 걱정해 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에게 말을 전해 달라고 하고는 통화를 종료했다.

안으로 들어간 나누는 담배 냄새를 지우기 위해 손을 여러 번 씻었다. 그래도 순무는 코를 킁킁대며 인상을 구겼다. 냄새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엔 손대지 말라며 장난을 친다. 나누는 다리를 뻗어 발로 순무의 아랫도리를 툭툭 쳤다.

"발은 된다는 거지?"

당황한 순무는 나누의 다리를 탁 때렸고 나누는 과장해서 아픈 척을 해 보였다. 지금까지는 괜찮다. 언제나처럼 어리석게 굴며 능청을 떤다. 헤어짐의 슬픔이라는 것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도록 순무를 웃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지금 닿는 손과 바라보는 눈동자와 그 존재가 인식될 때마다, 순무는 닿을 수 없는 손과 바라볼 수 없는 눈동자와 아무것도 없을 빈자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누가 일부러 웃음을 유발하는 것을 눈치채고 거기에 어울리며 웃어 주었다. 서로 이것들이 속임수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속아 준다.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했기에 둘은 조금 서둘러서 잠자리에 누웠다. 순무는 시험 잘 봐, 하고 속삭였다. 나누는 그냥 감을 잡기 위해 쳐 보는 것이라 딱히 중요하진 않다고 대답했다. 어차피 시험에 대해 잊은 지 오래였다. 살랑거리는 바람을 맞으며 순무가 먼저 잠들었다. 그제야 나누는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걱정과 안도, 둘 다 섞인 한숨이었다.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잠이 오지 않아 창틀에 걸터앉아 경치를 구경한다. 관광지답게 용암마을은 밤에도 밝은 불빛이 켜져 있다. 문득 여름임에도 밤이 꽤 쌀쌀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손끝을 감싸면 약간 차가웠다. 나누는 창틀에서 내려와 자리에 누운 뒤 이불을 덮었다. 지금 이 차가운 손으로 순무의 얼굴을 쓰다듬으면 깰 것 같아서 함부로 만지지도 못하고 일단은 눈을 감는다.

기상 시간에 맞춰놨던 자명종을 끈 나누는 몇 시간밖에 못 잤으나 머릿속이 약간 무거운 걸 빼면 그럭저럭 상태가 괜찮았다. 창문의 가림막을 내려 순무가 잘 동안 뜨거운 햇빛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다. 씻은 후 옷장에 걸어 뒀던 옷을 꺼내 입는다. 얼마나 꺼내지 않았는지 옷장 냄새가 배어들어 있다. 하얀 셔츠에 면바지를 입고 나서 책과 필기구가 든 보스턴백, 지갑을 챙긴 뒤 방을 나서기 전에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요즘 많이 시달린 탓에 피곤한 건지 깊이 잠들어 있다. 그 만사태평함에 씩 웃은 나누는 방문을 소리 없이 닫은 뒤 짧은 복도를 걸어 현관으로 향했다. 약간 먼지가 쌓인 단화에 후우 입김을 불어 먼지를 털어내고 발을 넣었다.

현관문을 드르륵 열면 뜨거운 햇빛이 피부에 닿는다. 삼 주 전 호연에 도착했을 때를 떠올린다. 오랜만에 챙긴 보스턴백이 무거운 탓일까, 친척 어른을 기다리며 느꼈던 더위가 유난히 크게 와닿는다. 그게 벌써 오래전 일인 것이 우습기도 하다. 함께 있던 날들은 이렇게나 빨리 지나갔건만.

길을 따라 내려가 정원을 지난다. 입구를 나서고 여관 이름이 적힌 표지판들이 달린 나무 그늘을 쭈욱 걸어가면 용암마을이 나타났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조용하다.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로 배를 채운 뒤 굴뚝산의 케이블카를 타러 길을 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여유가 있기에 천천히 걸어간다. 케이블카를 타고 굴뚝산 아래로 내려간 후, 바로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도착한 나누는 가방을 뒤져 꼬깃꼬깃해진 안내문을 펼쳤다. 집으로 날아왔던 우편물이었다. 곧이어 시간에 맞춰 버스가 도착한다.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버스비를 지불했다. 아무 자리에 털썩 앉은 뒤에는 잠깐 눈을 붙였다. 그러나 햇빛이 따가웠으므로 가방에서 책 한 권을 꺼내 얼굴을 가렸다.

금탄도시에 도착한 나누는 처음 오는 곳을 살펴보았다. 건물들이 석조로 되어 있어서 마치 고대 도시와 같은 이질적인 느낌을 준다. 구경할 시간이 없기에 금탄도시의 트레이너 스쿨을 향해 서둘러서 발걸음을 옮겼다. 많은 사람이 옆구리에 책을 끼고 나누와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 나누는 건물로 들어가자마자 화장실부터 찾았다. 찬물로 세수를 한 번 하고, 임시 접수처로 쓰고 있는 교무실로 향했다. 신분증을 꺼내 확인받은 뒤에 수험표를 받고 지정된 교실로 갔다. 순무는 무얼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우선은 눈앞에 닥친 일에 집중하기로 한다.

겨우 대학 삼 학년인 나누는 어차피 맛보기로 친 시험이니 망치는 게 당연하다고 자신을 위로하며 약 100분의 시간이 흐른 뒤에 교실을 나섰다. 중요한 일을 끝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점심시간 즈음이었기에 뭐라도 먹을까, 하고 거리를 돌아다녀 보았다. 산업 도시라 그런지 곳곳에서 근무처의 이름이 박힌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뭉쳐 다니며 식사를 해결하기 위해 길을 걷고 있었다.

빨리 순무에게 돌아가고 싶어 대충 배를 채우기로 한다. 어김없이 편의점에서 빵과 우유를 산 나누는 문득 저쪽에 바다가 보이길래 그쪽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바다를 바라보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나누도 벤치에 앉아 경치를 보면서 끼니를 때웠다. 갈모매들이 즐겁게 바다 위를 날아다니고 있다. 더 없는 평화 속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보스턴백을 챙겨 들고 하차했던 정류장으로 향한다.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정류장에 앉아 있으면 보라시티-굴뚝산으로 가는 버스가 도착했고 거기에 힘없이 올라탔다. 졸음이 쏟아지지만 겨우 참았다.

한참 후, 정류장에 내린 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 굴뚝산의 정상에서 내렸다. 어느새 불어난 관광객들을 피해 산길을 따라 내려간다. 빠른 걸음으로 걷자 금방 용암마을 입구가 보였다. 어깨가 무겁고 발바닥에 땀이 찼지만 신경 쓰이지 않는다. 드디어 여관에 도착하고는 마주친 직원들과 인사를 한다. 어딜 다녀왔는지 묻길래 볼일 좀 보고 왔다고 대충 둘러댄다.

별채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전혀 힘들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고 단화를 가지런히 정리한 뒤 큰 보폭으로 걸어서 방문을 열었다. 이불들은 깔끔히 개어져 있었고 순무는 책꽂이에서 버릴 책들을 정리하던 중이었다. 노크 없이 문을 연 나누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다녀왔어."

나누는 묵직한 가방을 떨구고 순무를 안았다. 아침 일찍 떠나 점심 이후에 돌아왔지만 그 짧은 시간마저도 볼 수 없어서 아쉬웠다. 뭐라도 먹었냐는 질문에 대충 먹긴 했다고 대답한 뒤, 더위에 지친 나누는 우선 샤워를 했다. 그 후 순무의 허벅지에 누워 휴식을 취한다. 순무는 짧은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시험이 어땠는지를 물었고 나누는 웃으면서 망했어, 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순무 때문이 아니라며 걱정을 덜어 주었다. 나누는 그러고 있다가 피로가 몰려와서 잠들어 버린다. 머리를 쓰다듬던 순무는 보드라운 뺨을 손끝으로 훑었다. 턱 아래를 쓰다듬으면 간지러운지 고개가 돌아갔다. 순무는 그 모습을 보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다리에 쥐가 나기 전에 나누는 눈을 떴다. 벌떡 일어나서 무거웠을 텐데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순무는 괜찮다며 더 잘 거면 이불을 깔아 주겠다고 했다. 나누는 기지개를 켜면서 지금 자면 밤에 못 잘 거라고 대답한다. 시험을 보고 나니 해방감이 느껴진 나누는 해가 지고 시원해지면 배틀을 하자고 권해왔다. 순무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 고갯짓이 귀엽게 보인 나누는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순무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고 나누가 떠나지 못하도록 했다. 의도를 파악한 나누는 그의 혀를 빨아올리며 다급한 숨소리를 냈다. 아, 콘돔이 없는데 오는 길에 살 것을. 그 얘기를 하면 순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당장 없어도 괜찮으니 저번처럼 다리 사이에…… 라는 말을 끝맺지 않고 입을 닫아 버린다. 부끄러운 건가? 라고 생각하는 찰나, 순무는 얇은 천으로 된 옷자락을 걷어 올린다. 점점 올라가는 옷자락이 치워지며 탄탄한 다리를 드러냈고 나누는 그 과정을 보며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다. 두툼한 허벅지 다음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아랫도리가 나타났다. 나누가 당황하면 순무는 애가 타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잡았다. 기다리는 동안 방을 정리하고 씻으며, 나누가 좋아할 만한 것을 고민했다고 한다.

나누는 기대하지도 않은 광경에 그만 콧김을 내뿜으며 순무가 원하는 대로 해 주기로 했다. 자신을 위해 어렵게 용기를 낸 것이다. 직접적인 삽입 빼고는 모든 짓을 했다. 아, 더는 서지도 않을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날 정도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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