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derdog

그러고보니 임마 고아면서 생일은 어떻게 아냐는 말은 저이 하지 않기로 해요

"어차피 난 그 녀석을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아"

알고는 있었다. 아니, 모르는 것이 가능하긴 한가? 그때까지 받았던 취급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고아와 못된 계모는 흔히 사람들이 즐겨 하는 이야깃감이었다. 자신은 어쩌다가 그런 이야기의 일부로 태어나게 되었을 뿐이었다.

"나라고 뭐 나쁜 놈인 건 아냐. 좋아하려고 해 봤지! 그런데 어떻게 좋아하겠냐고. 해가 지날 수록 덩치는 겁나게 커지지, 푸르딩딩해서 비늘은 잔뜩 돋아있지... 달라도 너무 다른데 어떻게 그걸 아들이라고 생각하냐고..."

의붓아버지의 짜증 섞인 푸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우스운 것은, 그 와중에도 어딘가 이해하고 있는 자신이었다. 하긴 그래.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동방의 생소한 종족을 혈육이라고 여기기에는 무리가 있지. 그렇게 필사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신이, 마음속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저 사람을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로 여기고 있는 자신이 넌더리가 났다.

엿가락처럼 늘어지는 의붓아버지의 푸념이 마침내 파티가 한창인 문 안쪽에서 들려오지 않게 된 후에도 한참동안 자신은 그 옆에 기대서서 발가락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왕왕 울리는 머릿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쓰면서. 터질 것 같은 가슴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면서.

차가운 바람을 쐬자. 홧홧하게 달아오른 뺨을 느끼며 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그럼 조금은 나아지겠지. 이 정체 모를 감정도 사라지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거실을 가로질러 도시 외곽을 향해 조그맣게 나 있는 발코니로 향했다. 그곳이라면 해가 저물어 온통 푸르게 물든, 너른 황야가 가득 보일 것이다.

건물 밖으로 나서자마자 차게 식은 사막의 공기가 훅 끼쳐왔다. 가슴에 박힌 불덩이가 조금은 식어가는 것을 느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 멀리, 커다란 유성이 길게 꼬리를 끌며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떴다.

여관의 커튼 새로 가느다란 아침 햇살이 새어들어와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여전히 어두운 방 안에서 조용히 나풀거리는 부유물이 그 사이로 춤을 추고 있었다.

정신은 들었지만, 아직 일어나고 싶지는 않았다. 눈을 굴려 찬찬히 캄캄한 방 안을 훑다가, 벽 한 켠에 걸려있는 액자 속의 낡은 시미터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의 취미인가, 무기를 걸어놓는 게.

아직도 발코니를 향해 터덜터덜 걸어가던 자신의 종아리를 찰싹찰싹 때리던 묵직한 검집의 감촉이 기억났다. 양손으로 힘겹게 휘두르던 그것도, 지금이라면 간단히 한 손으로 다룰 수 있겠지. 생각난 김에 손을 들어 얼굴 위에 쫙 펼쳐보였다. 새삼스레 자신이 그 시절에 비해 얼마나 크게 자랐는지 실감했다.

얼마나 먼 길을 떠나왔는가. 지금을 사는 자의 감각이 천천히 손 끝에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을 비비며 무거운 상체를 일으켰다. 방음이 잘 되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다들 자고 있는 것인지. 여관은 조용했다. 발 끝으로 더듬어 실내화를 찾아 신고 욕실로 향했다.

커튼이 없는 욕실은 작을 창을 통해 내리쬐는 햇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부신 눈을 잔뜩 찡그리며 세면대 앞에 섰다. 수도꼭지를 비틀고 고개를 숙이려다 문득, 헐렁한 윗옷의 목 부분을 통해 비치는 푸른 속살과 거뭇거뭇한 비늘이 보였다. 목깃을 끌어당겨 맨몸이 보이지 않도록 정돈하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몸을 보이기 싫어하는 버릇도 그 날 이후로 들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고. 비늘이 보이지 않는다면, 의부도 조금은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을까 하고 기대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바보같다.

두 손 가득 차오른 차가운 물을 냅다 얼굴에 끼얹었다. 철벅.

"꾸에"

"왜 그래, 달려"

"꾸에엑~"

"밥이냐? 여관 나서기 전에 줬잖아..."

그거 가지고는 부족하다. 그렇게 말하듯이 보코는 음흉한 눈으로 이쪽을 흘겨보았다. 곤란하다. 하필이면 정글 깊은 골짜기에서 이렇게 되다니. 한숨을 푹 쉬며 안장 옆에 매달린 불룩한 배낭에서 푸릇푸릇한 기살의 야채를 하나 꺼낸 후 땅에 발을 디뎠다.

"여기. 더 조르지 마라"

보란듯이 얼굴 앞에 디밀어주자 보코는 신이 나서 열심히 야채를 쪼아먹기 시작했다. 이 놈은 어째 해가 갈 수록 방약무인해지는군.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려고 들질 않나, 요즘 들어서는 발이 묶이면 곤란한 장소만 골라 시위를 해대는 일까지 늘었다.

뭐. 만족스럽게 날개를 퍼덕이는 초코보를 보고 있자니 저절로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굴어도 엄하게 다루지 못하는 자신이 제일 문제지만. 그리고 이 놈도 급할 때는 눈치를 보긴 했다. 한가할 때 투정을 부리는 것 정도는 봐 줄만하지 않은가.

요란하게 흩뿌려진 부스러기만 남긴 채로 기살의 야채는 완전히 사라졌다. 손을 툭툭 털어 깨끗이 한 뒤 다시 보코의 등에 올라타며 지도와 컴퍼스를 꺼내들었다.

"어디보자, 라자한이..."

이번 여행의 목적은 예전에 신세를 졌던 연금술사를 만나는 것이었다. 웃으며 언젠가 한 번 찾아오라던 말은 아마도 빈 말이 아니었겠지만, 설령 빈 말이었더라도 상관은 없었다. 남부 다날란에서 상단 호위를 맡으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데에는 슬슬 신물이 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타공인 역마살이 낀 인생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고정된 자신의 공간이라는 것을 가져본 적도 없었고, 그렇기 때문에 필요로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울다하에는 의부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구리칼날단에 잡역부로 자리가 난 것을 계기로 의절을 선언하고 뛰쳐나온 이래로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었지만, 껄끄러운 것은 껄끄러운 것이었다. 아무리 다날란을 피해 온갖 곳을 돌아다니더라도, 결국은 돈이 모이는 상업도시로 돌아가게 되었지만.

그 구리칼날단도 얼마 안 가서 갑갑함을 견디지 못하고 빠져나왔다. 조직 생활은 역시 질색이었다. 지금까지 도망치지 않고 오래도록 활동을 이어갔던 곳은 이슈가르드에서 만난 자유부대, 그리고 지금은 해산한 새벽 정도였던가. 두 군데 모두 이렇다 할 활동은 하지 않고, 그저 이름만 올려두고 있는 수준이었지만.

그러니까 기분전환 삼아 일사바드를 찾은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환영받지 못하더라도 그만이었다. 그냥 활동 영역을 옮길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니까. 당분간은 라자한에 숙소를 구하고 일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지형으로 봐서 이 언저리인가. 라자한과의 거리를 가늠해 봤다. 꽤 멀었다. 해가 지기 전에 입성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한숨을 쉬고 지도를 말아 있던 곳에 도로 집어넣은 후, 보코를 향해 푸념했다.

"네 덕분에 오늘도 노숙하게 생겼다. 보코, 좀 더 빨리 뛰어줄 수는 없어?"

보코는 힐끔 뒤를 돌아보고는 뒤뚱거리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딴에는 열심히 하고 있다는 티를 내려는 모양인지, 궁둥이에 매달려 달랑거리는 취사도구를 요란하게 흔들면서. 왈그렁.

"이 녀석이..."

빤히 보이는 수작에 저절로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딱히 화는 나지 않았다. 노숙이야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어차피 오늘이 아니면 내일쯤 입성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약속도 없으니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다만 당장 오늘 저녁에 술을 마실 수 없다는 것, 그것만은 조금 아쉬웠다. 라자한의 술집이 그렇게 유명하다던데.

좋을 대로 해라. 이동은 보코에게 맡기고 고삐를 움켜쥐었다. 똑똑한 놈이니 방향만 정해주면 알아서 달리겠지.

하늘을 올려다봤다. 파랗게 빛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붉게 물든 종말의 하늘이었는데도.

눈치는 있는 놈이었다.

보코는 결국 그 날 안에 라자한으로 데려다 주긴 했다. 시간은 한참 높이 뜬 달이 보이는 한밤중이었지만.

게으른 초코보를 성 외곽의 외양간에 맡겨두고 메리드의 주막으로 향했다.

커다란 주점이었다. 과연 성 안쪽의 술집은 다르군. 여기까지 오면서 지나친 어촌 사람들이 모두 들어차도 남을 것만 같은 가게 내부를 둘러보며 자리에 앉았다.

"곧 문 닫을 겁니다. 그래도 드시겠습니까?"

카운터에 서 있던 휴런 여성이, 아마도 가게 주인인 메리드일 것이다. 컵을 닦으며 멀찍이서 말을 건넸다.

"한 잔만 마시고 가겠습니다. 그 정도야 마누샤 신들께서도 용서해 주시겠죠"

너스레를 떨자 주인은 픽 웃으며 종업원을 향해 소리 높여 말했다. "미릴, 주문 받아" 안쪽에서 검푸른 단발머리의 아우라 렌 여성이 쟁반을 들고 바삐 뛰어왔다.

"예, 무엇을 주문하시겠어요?"

"제일 잘 나가는 것으로. 여기는 처음이라서요"

생글생글 웃으며 주문을 받은 미릴이라는 종업원은 꼬리를 살랑거리며 카운터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별일이구만, 비늘 검은 녀석들이 여기까지 내려오다니"

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자, 금빛 원형 탁자 맞은 편에 턱수염이 하얀 아우라 렌 늙은이가 짓궂은 표정으로 손을 짚고 서 있었다.

"여기까진 뭔 일로 왔는가? 말 대신 가자라도 타고 다니게?"

노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잠시 어떻게 대답할까 생각에 잠겼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넘어와도 호기심의 시선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직 결이 바뀌었을 뿐.

"아닙니다, 어르신"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따악 보니 생김새가 대초원에 박혀서 나오지도 않는 놈들인데..."

"저는 그쪽 출신 아닙니다"

이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인가. 노인은 그렇게 말하기라도 하듯이 눈을 부라렸다.

"그래? 그럼 어디야? 도마? 달마스카?"

"에오르제아입니다"

"허어"

전혀 면식이 없는 아우라 노인은 그대로 스툴을 빼어 척 걸터앉았다. 아무래도 눌러앉아 한 잔 할 기세였다.

"그러고 보니 생전 처음 듣는 억양을 쓰네. 이민갔나?"

백화 일곱 닢에 떠넘겨진 신세라고, 이름도 모르는 어르신에게 밝히고 싶지는 않았다. 쓴웃음을 지으며 적당히 받아넘겼다.

"그렇게 됐습니다. 대초원은 다 크고 나서야 가 봤어요"

"그래? 그럼 어디 이야기 좀 들어보자. 어째..."

그렇게 술주정뱅이와 얽혀 밤새도록 술판을 벌이는,

"나짐 씨, 오늘은 적당히 드셨잖아요. 외국 손님 괴롭히지 말고 들어가 주무세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메리드가 팔짱을 끼고 서서 노인을 나무랐기 때문이었다.

"뭐야, 이야기 좀 들어보자고!"

"예에, 지금이 몇 시인 줄 아세요? 아내분이 걱정하실 거예요"

노인은 궁시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내심 다행이었다. 신상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마냥 싫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은 지쳐있었다. 간단하게 한 잔 걸치고 들어가서 자고싶은 마음이 더 컸다. 발효주를 한 모금 마시자, 무겁던 어깨가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산뜻한 맛이었다.

찾았던 연금술사는 종말의 난리통에 야수로 변했다는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을까 하는 예감은 있었다. 무사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는 믿음. 설마 정말로 변을 당했을 줄은 몰랐으나.

환대도, 냉대도 아닌 부고라. 비단으로 휘감긴 방에 들어서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취기는 돌지 않았다.

아침부터 그 날의 꿈을 꾼 건 왜일까. 최악의 날이자, 최고의 날이었던 그 날. 의부가 자신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이자, 자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날. 자신의 운명이 크게 바뀐 날.

갑주와 무장을 풀고, 어촌의 조금 허름한 방에 비하면 천국같은 숙소의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신. 깃털만큼이나 부드러운 매트리스가 몸뚱이를 감쌌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의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동통한 얼굴에 염소 수염을 기르고, 번쩍번쩍 광택이 나는 전통의상을 걸친 채 언제나 너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모습이.

생각해 보면, 자신을 이용해 그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으던 의부도 그렇게 잘 사는 편은 아니었다. 집은 울다하의 중심 구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생활도 실속없이 화려함만을 추구했고, 파티에 모이는 손님들도 질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자신을 이용해 한 몫 단단히 챙긴 것은 틀림없지만.

그대로 계속 의부가 시키는 대로 살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적어도 자신이 태어났을 대초원은 영영 가 보지 못했을 것이다. 빈민가도, 번화가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서 의부의 시덥잖은 잡일이나 돕고 살았겠지.

이렇게 좋은 여관에 묵어보는 일도 없었을테고. 돌아누워 위를 바라보았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도 금박을 입힌 천장은 은은한 광택을 내뿜고 있었다.

좋은 방이긴 하지만, 서둘러 일을 찾지 못하면 파산하겠어. 멍하니 아로새겨진 기하학적 무늬를 헤아리며 생각했다. 일개 떠돌이 용병에게는 조금 과분한 방이었다.

일개 용병인가?

그 날 이후로 손에 넣은 힘. 잘은 모르겠지만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힘. 선뜻 와닿지는 않지만 아무튼 여러 번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여태까지 겪은, 그 힘이 없었더라면 넘어서지 못했을 고난이 떠올랐다.

이런 힘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일개 용병이라고 봐야할까. 아침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손바닥을 쫙 편 채 얼굴 위로 드리웠다.

"힘이라..."

조용한 방 안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퍼졌다.

손을 꾹 쥐며, 생각했다. 지금처럼 소소하게 사람들을 돕는 걸로 충분해. 딱히 명예나 부를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야망도 없었다.

게다가, 그렇게 대단한 힘도 아닌걸.

몸을 뒤척여 조금 더 편한 자세를 만들고 눈을 감았다. 일단 자자. 꿈 같은 건 어차피 맥락이 없는 것이다. 그런 꿈을 꾼 것에 딱히 의미는 없을 것이다.

문득, 생각해냈다.

그 날, 그리고 방금 지난 오늘은 자신의 생일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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