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없는 풀

극초기라 자인 캐릭터가 와리가리함. 고향 와서 텐션업됐다는 걸로 칩시다

"으어어어억!"

꽈당!

다음 순간, 아우라 치고는 마른 편인 적발의 남성은 기세도 좋에 온통 까진 자국 투성이인 풀밭에 나동그라졌다.

등 위에 얹혀있던 짐덩이를 집어던지고 나서 만족한 덩치 큰 말은 기세등등하게 콧김을 내뿜으며 천천히 제자리에서 한 바퀴 원을 그렸다. 제딴에는 승리의 개가를 올리는 것이었다.

"괜찮으세요!?"

분홍빛 머리카락에 작달막한 체구를 한 아우라 여성이 부리나케 달려서 대자로 뻗은 채 끙끙대고 있는 남성에게 달려갔다. 하지만 거의 다다르기 전에 젤라족 남성은 있는대로 얼굴을 찡그리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괜찮... 괜찮아, 튼튼하니까..."

아짐 대초원의 전통 의상을 몸에 두른 여성은 무릎을 꿇고 미끄러지듯이 남자의 옆에 안착했다. 그리고 우려 반, 분노 반이 뒤섞인 얼굴로 능숙하게 고약이 든 통을 꺼내며 말했다.

"머리부터 떨어졌는데 무슨 소리예요! 뇌가 잘못됐을 지도 모르니까 어서 보여주세요"

남성은 약간 풀이 죽은 표정으로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여자가 머리칼을 이리저리 쓸어보며 상처가 난 곳을 찾는 동안 작게 중얼거렸다.

"역시 재능 없나봐, 난"

여성의 손길이 멈췄다.

"아니예요. 젤라면 누구나 다 말을 탈 수 있어요. 세 살 먹은 갓난아기도 타는걸요"

남성의 얼굴이 한층 더 시무룩해졌다. 날뛰는 말의 발굽에 패여 흙이 드러난 땅을 쏘아보면서 말하는 목소리는 조금 그늘져 있었다.

"난 여기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잖아"

여성은 일순 깜짝 놀란 표정이 되었다가, 곧 안쓰러우워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것도 순간이었지만. 작지만 매운 손바닥이 남자의 너른 등을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후려쳤다.

"어디서 태어났던 젤라는 젤라잖아요! 조금만 더 해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제가 보증해요!"

별반 아파하는 기색도 없이, 한 눈에 봐도 이 지역의 옷차림이 아닌 행색을 한 남성은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씁쓸하게 웃으며 여자를 향해 말했다.

"미안, 시리나. 도와주겠다고 나섰는데, 짐만 돼서"

시리나라고 불린 여성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예요!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고. 해 지기 전까지만 몰아넣으면 되거든요! 그것보다 어지럽지는 않으세요? 두통은 없고요?"

"음... 없어. 걱정해 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 정도 상처는 익숙해"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남자를 보는 시리나의 표정이 한층 더 안쓰러워하는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열심히 눈을 굴리던 몰족 족장의 손녀는 어떻게든 화제를 바꾸기로 결심했다.

"그러고 보니, 자인 씨는 이름부터 어딘가 이국적인 느낌이잖아요? 전 그게 너무 좋은 거 있죠? 처음에 다른 지방에서 태어났다고 말씀하셨을 때 얼마나 놀랐는데요!"

부러 밝게 말하는 시리나의 어조에도, 자인이라고 불린 남자의 미묘하게 그늘진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특별한 이름은... 아니야. 일곱번째라는 뜻이거든. 내 양아버지가 날 주웠을 때 바구니에 백화 일곱 개가 들어있길래 이렇게 지은 거랬어"

"아. 그, 여기 오시기까지 그럼, 무슨 일을 하셨어요? 저 막 호기심이..."

필사적인 시리나의 노력 끝에 자인의 표정도 아주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겨 눈을 굴리며 모험가는 반쯤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글쎄... 언제부터 이야기할까? '새벽'에 들어가기 전에는 용병이었고, 목소리를 듣고 나서는... 음..."

"여러가지를 열심히 하셨나봐요. 바느질도 무두질도 잘 하시는 거 보면"

하지만 말은 탈 줄 모르지. 그렇게 말하려다가, 자인은 가까스로 입단속을 하는 데에 성공했다. 눈칫밥을 먹고 살던 어린 시절의 경험으로 어느 정도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에는 익숙해졌다고 자부하는 몸이었다. 시리나가 자신의 기분이 나아지도록 애를 쓰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고 있었다. 그런 시리나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잘 하는 건 아냐. 먹고 살 수 있을 만큼만 하는 거지"

"그것도 얼마나 대단한데요! 집안 살림 잘 하는 남자라니, 일등 신랑감이잖아요!"

칭찬인가? 자인은 기운 없이 웃었다. 그 표정을 본 시리나는 조금 더 다른 방향에서 대화를 시도해 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리 봐도 긍정적인 반응은 아니었으니.

"진짜로, 자인 씨가 여기 오고 나서 많은 도움이 되고 있어요. 사냥도 잘 하시고, 힘든 일도 많이 도와주고 계시고. 이제는 우리 부족 사람처럼 느껴져요"

"그런가?... 무리하지 않아도 돼. 말투도 다르고, 생활습관도 다르고, 생각하는 방식도 다르잖아. 나부터 영 어색한걸. 태어난 후로 이렇게 많은 동족 사이에 있어본 적은 처음이야"

"정말 그렇게 아우라가 없어요?... 에오르제아라는 곳은"

"응. 어렸을 때는 고민 많이 했어. 나만 주변과 다르니까. 얼굴에 난 비늘을 떼어보려고 하기도 했고..."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야, 당연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게 앞에 서 있기만 해라, 신기한 녀석을 구경하려고 손님이 몰려들 테니. 이런 의뢰를 받는 일도 심심찮게 있었다.

그러니까 처음 도착했을 때도 그러했고 여전히 존재하는, 구경거리를 바라보는 시선 또한 자인에게 있어서는 익숙한 것이었다. 오히려 온갖 생소한 것이 가득한 이국의 땅에서 그 시선만은 안정감을 가져다 주는 것이었다.

"아프잖아요! 고생이 많으셨나봐요, 그랬을 정도면"

시리나는 어쩔 줄을 몰라하며 자인의 얼굴에 흉터라도 남지 않았는지 걱정하는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 봤다. 그 상냥함 또한 익숙한 것이었기에, 자인의 얼굴은 조금 더 밝아졌다. 따뜻한 마음. 어디를 가더라도 만나고,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적.

"그나저나...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 녀석"

"말을 바꿔드릴까요? 죄송해요. 원래는 저렇게 까다로운 애가 아닌데"

눈을 가늘게 뜨고, 자인은 여전히 의기양양하게 발굽을 다그닥거리고 있는 커다란 검은 말을 노려봤다. 초코보에 타고 양을 모는 건 안 되려나. 한순간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곧바로 멀리 치워버렸다. 이 뻔뻔한 아짐 대초원의 양떼가 초코보를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

무엇보다, 자인은 한 번 오기가 생기면 도저히 말릴 수 없는 성격이었다.

"이렇게 된 거, 꼭 저 녀석으로 해야겠어"

시리나는 빙긋 웃었다. 말에서 떨어진 직후의 시무룩한 태도 때문에 걱정했지만, 지금 자인이 짓고 있는 표정을 보아하니 더이상 손님의 풀이 죽을까봐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좋아요!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하이얍! 이랴아!"

고함소리와 함께 마지막 양이 우리 안으로 들어갔다. 쪼르르 달려간 시리나는 재빨리 우리의 문을 닫아걸고 돌아보았다. 위를 올려다 보는 얼굴에는 미소가 한가득 어려있었다.

"잘 하시네요! 이제는 제 도움도 필요 없겠어요!"

다그닥. 그 말과 함께 온통 땀에 젖은 흑마는 투레를 치면서 그 자리에 멈춰섰다. 뒤이어 온통 흙투성이가 된 자인이 반쯤 무너져내리듯 땅을 딛고 내려섰다.

"해냈다..."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잔뜩 피로에 젖어있었지만,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말에 매달리듯 기대서서 숨을 고르는 자인의 곁으로 시리나는 짧은 풀밭을 박차며 바쁘게 달려갔다.

"정말 배우는 게 빠르세요! 역시 포기하지 않고 시도하시길 잘 한 것 같아요!"

"후욱... 아니, 시리나가 잘 가르쳐 줘서... 지만..."

자인은 약간 휘청이며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의 옆얼굴을 노려보았다. 커다란 말 또한 눈을 부라리며 자인을 마주 바라봤다.

그리고 자인은 픽, 웃었다.

"이겼으니까... 기분은, 좋아"

대답 대신 흑마는 거세게 콧방귀를 뀌었다. 푸르릉.

"이제 조금 더 초원에 익숙해지셨네요. 축하드려요!"

"익숙이라..."

자인은 눈을 깜박이고, 초원의 저 먼 곳을 바라보았다.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 땅, 타오르듯 붉게 빛나며 가라앉고 있는 태양의 조각을. 한동안 그렇게 바라보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완전히 익숙해지면,"

완전히 익숙해질 일은 없을 것이다. 알고는 있었다. 아무리 오래 지내더라도, 아무리 그들의 풍습을 배워도 자신이 여기에서 이방인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이곳 또한 자신에게 고향이 되어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편안했다.

언제부터였던가.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사람들과 인연을 맺으면서 편안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 아아, 자신이 있어도 좋은 곳이구나. 그렇게 여기게 된 장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

이곳도 그런 곳이 될 것이다. 자신을 받아들여 주는 곳. 자신이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곳. 그런 곳 중에서 조금 더 특별하고, 조금 더 소중해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지만.

"좋겠다"

짧게, 많은 감정을 담아 자인은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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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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