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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포함 9520
로란체는 담담한 표정으로 타국에서 먼 길을 온 청년을 돌려보냈다.
라비린토스 간이 출입증을 목에 걸고 있는 젊은 남자는 고개를 까닥여 가벼운 묵례를 건넨 후 로란체가 근무하는 리틀 샬레이안의 연구동을 나섰다. 보통 사람이라면 ‘유감이다.’, ‘이런 소식으로 찾아뵈어 안타깝다.’ 등의 한두 마디 정도는 할 법도 한데 아무 말 않다니 저 청년도 여간내기는 아닌 성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가져온 것은 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유품이지 않은가. 대개 부모란 자식의 부고 소식을 전했을 때 슬퍼하기 마련이었으니.
다 깨져버린 단안경이 부드러운 천에 싸여 있었다. 샬레이안을 떠나 이단 목록에 이름을 올린 후 결국 너는 이것만 돌아왔구나. 로란체는 그런 담백한 감상을 남길 뿐이었다.
가정 내 불화가 있던 건 아니다. 비록 저희 부부가 라그나로크에 대한 개발 때문에 아들의 유년기 애착 관계를 깊게 형성해 주지 못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한 갈등이 생길 만한 일은 없었다. 알렌은 날 때부터 영특했고, 금세 철이 들어 혼자 시간을 죽이는 것에는 익숙해져 있었다. 로란체는 그런 아이를 볼 때마다 여느 또래 아이들처럼 부모를 귀찮게 하거나 시끄럽게 울지 않음에 감사했었다.
무언가에 꽂히면 절대로 고집을 꺾지 않는 아이였다.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진 그 아이가 어떠한 선택을 내렸다면, 필히 그것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는 까닭일 것이다. 제가 그의 안전을 염려해 무어라고 말한들 뜻을 굽히지 않을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므로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점성술에 관한 지식을 몽땅 머리에 쑤셔 넣을 때도, 지식에 대한 출입이 엄격한 샬레이안을 도피하듯 훌쩍 떠나 이단이 되었을 때도, 소문으로 들려오는 얼음의 무녀 휘하에 들어갔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도. 로란체는 차마 알렌을 저지하지 못했다. 떠나가는 배의 뒷모습을 보며 아들의 죽음을 짐작했던 것도 같다. 장례라도 치러 주고 싶으니 시체라도 돌아온다면 좋겠구나. 하다못해 유품 정도는 돌아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부모로서 이런 소망을 비는 것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미안할 따름이었다.
이젠 별바다로 돌아간 아들의 마지막 소지품을 가져다준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이라도 할 걸. 이젠 멀어져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낯선 사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로란체는 소중하게 아들의 유품을 품에 넣었다.
***
“아하, 어머니가 그런 반응을 보였어요?”
「그래.」
알렌은 깔깔 웃으며 갓 타온 핫초코를 탁자에 올려놓고 소파에 풀썩 앉았다. 링크펄 너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웃기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낙담하진 말아요. 내가 분명 말했잖아요, 우리 가족은 좀 그렇다고.”
「…….」
“라비린토스는 어땠어요? 예전이랑 많이 바뀌었으려나.”
「꽤 멋지더군. 네 말대로 볼 게 제법 많았다.」
인공 강과 숲, 그리고 야생에서 살아 숨 쉬는 이국적인 생명체들까지. 코르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알렌은 제 기억 속의 연구동을 곱씹었다. 인공 태양 아래 싱그러운 레몬 나무들, 짐을 한가득 들고 각 둘레를 바쁘게 돌아다니던 조달꾼, 상부 아크린토스에서 사잇둘레와 속둘레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치 울창한 고대의 숲 한가운데에 떨어진 것만 같던 아득한 감각까지. 좋은 기억이라곤 몇 없는 올드 샬레이안에서의 소중한 추억이었다.
“모처럼 라비린토스까지 들어갈 수 있는 기회니까 당신이 꼭 봤으면 했거든요. 나 혼자 아는 건 아깝잖아?”
「그래, 그건 감사하지. 집에 혼자 있는 건 괜찮나? 어깨는 좀 어떻고.」
“내가 무슨 다섯 살 어린애인 줄 알아요? 괜찮으니까 천천히 보고 와요. 어깨는 뭐, 그럭저럭 쓸만해요. 좀 쑤시는 감은 없잖아 있는데 당신이 돌아올 즈음이면 얼추 낫지 않을까 싶고.”
짙은 흉터가 남은 어깨를 주무르던 알렌은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슬쩍 흘렸다. 그때의 사건 이후 시간이 꽤 지났는데 아직도 걱정을 받는 게 제법 기꺼웠다.
최근의 올드 샬레이안이 개방적인 교류를 시작했다고는 들었다. 처음엔 그 꼰대들이 개심이라도 했나 기대했지만 빛의 전사의 공적이라는 걸 듣고는 그럼 그렇지, 싶었다. 그 인간들이 그렇게 쉽게 바뀔 작자들이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그렇지만 제아무리 개방적 교류를 시작했다 한들 라비린토스까지 갈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을 터였다. 여태까지 샬레이안이 극비에 부친 공간이기도 하고, 이제 와서 외부인에게 그런 곳까지 공개해 줄 거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알렌 본인이야 부모님이 라비린토스 연구원이시고, 유년기에 몇 번 부모님 손을 잡고 구경한 적이 있다지만 외부인인 코르보는 아니지 않은가. 그렇기에 모처럼의 기회이니만큼 코르보가 찬찬히 보고 돌아오길 바랐다.
가짜 유품을 전달했다는 건 코르보가 올드 샬레이안까지 직접 가 처리해야 했던 의뢰도 잘 풀렸다는 뜻일 터다.
2주 전쯤에 코르보 앞으로 들어온 일이었다. 워커홀릭으로 일하던 조달꾼 하나가 커르다스 서부 고지에 얼음풀 잎을 채집하러 왔다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고열로 앓아누워 쓰러졌댔었다. 그 바람에 마감 기간까지 샬레이안에 납품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긴급이니 급구니 하는 말을 써 붙여가며 마감까지 라비린토스에 물건을 전해줄 대타를 구하고 있다는 말을 듣곤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조달꾼 협회에선 대체 뭘 하길래 대타를 못 구하느냐 물었을 때엔, 최근에 투랄 대륙까지 조달하러 나가느라 일이 많아 인력이 부족하더란다.
알렌이 올드 샬레이안이라면 질색하는 걸 아는 코르보는 처음에는 그 의뢰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라비린토스라는 말을 들은 알렌이 먼저 코르보에게 의뢰 수락을 제안해 왔을 때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었다.
‘물론 같이 가자는 건 아니에요. 나는 공식적으로는 죽은 사람 처리가 되어 있지만, 이단자 명단에는 올라가 있으니까 못 들어가거든요.’
‘나더러 혼자 가란 건가?’
‘문제 될 거 있어요? 전투 같은 건 없을 거고, 간단한 심부름만 하면 될 텐데.’
‘환자인 널 두고?’
‘뭐……. 어차피 완전히 나으려면 좀 더 걸리니까. 그래도 나름 쓸 수는 있거든요? 집에서 완전하게 회복이라도 할 테니까 당신은 다녀와요.’
알렌은 코르보의 등을 두어 번 툭툭 치며 턱짓했다. 미심쩍어하며 잠시 고민하던 코르보는 알렌이 등을 떠밀자 결국 의뢰를 수락했고, 그날로 짐을 싸서 올드 샬레이안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그때 알렌은 코르보에게 제 거짓 유품을 부모님께 넘겨달라 부탁했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던 최소한의 자식 도리였다. 당연히 코르보는 제 유품을 넘기는 것을 내키지 않아 했다.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족은 꽤 큰 의미를 지닌 것 같았으니. 떠나보낸 가족과의 유대에 여전히 갇혀 있는 그에게, 제 가족에게 유품을 건네달라는 부탁은 마치 환자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모르지 않았다.
그것은 그에게 무척이나 끔찍한 부탁이었지만 알렌으로서는 그편이 이슈가르드에서 지내는 데에 있어 후환이 없었다. 이참에 샬레이안과 완전히 단절시켜 두어야 본인에게도, 코르보에게도 더 이상 철학자 의회의 입김이 닿지 않을 터다. 애당초 이제 와서는 피로 이어진 가족보다 코르보가 더 가족 같은 사이 아니던가?
제가 고집스럽게 부탁을 거두지 않자 코르보는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제가 내민 깨진 단안경을 받아들었다. 처음엔 무엇인지 몰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던 코르보가 단안경을 알아보자마자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괜히 어깨가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이봐. …이건.’
‘…다 끝난 일이잖아요. 아직도 악몽 꿔요?’
‘…….’
‘꾸는구나?’
‘안 꾼다.’
‘그런 것 치곤 대답이 시원찮아요.’
대답 없는 코르보를 보며 알렌은 쓰게 웃었다. 그에게도, 저에게도, 별로 좋은 사건은 아니었으니 잊을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알렌은 수십 날의 밤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날 새벽에 올려다본 코르보의 얼굴을 기억했다. 코르보, 라고, 다 쉬어버려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간신히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마주친 눈을 기억했다. 엉망이 된 머리며 그렁그렁하게 맺힌 눈물을 뚝뚝 떨구던 표정이며 가늘게 떨리던 어깨까지. 푸르스름한 새벽녘의 달빛 아래 희끄무레하게 보인 얼굴을 마주했을 때엔 가슴께가 시큰거렸었다. 캄캄한 한쪽 시야 너머로 올려다본 코르보의 표정은 무척이나 서글퍼 보였었다.
***
라바나 토벌 파티였다.
파티원 중에 미숙한 초보 모험가들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당시의 저는 샬레이안으로부터 도망에 도망을 거듭하며 돈을 꽤 많이 쓴 터라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일어나서는 안 될 사고가 연이어 우수수 터졌던 것이 모든 사건의 발단이었다.
발을 헛디뎌 투기장에서 떨어져 버리질 않나, 불길 한가운데에 점프하질 않나, 야만신의 무시무시한 돌진기를 정통으로 맞은 뒤 무력하게 쓰러져버리는 일이 숨 쉬듯 일어났다.
분수마냥 솟구치는 피가 시야를 가렸다.
알렌은 조그만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했다.
어깨에서부터 명치까지 깔끔하게 죽 찢어진 상처 사이에서 산산조각 난 뼛조각과 근육 조각이 튀었다.
깨진 단안경 유리 파편이 눈을 찔렀는지 한쪽 시야가 온통 새빨갰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극심한 고통만이 저를 꿈틀꿈틀 잡아챘다.
갈라진 환부 사이로 심장과 폐가 바깥 공기와 접하는 감각이 선명했다.
피로 젖은 한쪽 무릎이 쿵, 하고 바닥에 닿는다.
몸이 기우뚱하게 흔들리며 가로로 무너진다.
1초가 1분이 되고, 1분이 1시간이 된다.
시간이 확장하고 세계가 느려진다.
아득한 시야 너머, 야만신의 두 번째 검이 땅을 매섭게 긁으며 제게 향했다.
***
—깨는 게 너무 늦지 않나…….
그새 초췌해져 버린 파트너는 야윈 제 손을 양 손으로 조심스럽게 붙들고 울었다.
그의 말로는 제가 그의 명줄을 살려내고도 모자라 그 반토막이 난 몸으로 빈사 상태의 파티원들을 투기장 바깥으로까지 데리고 나간 뒤 쓰러졌다고 했다. 그러고도 2주나 지나서 겨우 눈을 떴댄다. 흐려지는 시야 위로 암흑이 내려앉았던 것까진 기억이 있는데, 그 이후의 기억이 없던 저는 그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새벽 내내 울음을 멈추지 못한 코르보를 간신히 달랬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환기해 보려고 겁이라도 먹었느냐 물었더니 무서웠다고 솔직하게 돌아오는 대답에 오히려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건 제 쪽이었다.
날이 밝아 회진하러 온 의사는 제가 죽지 않은 게 용하다고 했다. 장장 열 네시간의 수술을 거쳐도 숨이 끊어질 것만 같아 수십 명의 치유사가 옆에 붙어 간신히 살려냈다고도 했다.
보통이라면 죽고도 남았을 거라고, 분명 할로네께서 살려주신걸지도 모른다며 농담하는 의사에게 알렌은 엷게 미소 지어 보였다.
분명 이는 할로네 신의 가호이기 이전에 그분의 뜻일 터다.
이젤 님, 고귀하신 당신께서는 불초한 당신의 신도가 당신을 좇는 것을 불허하시는 겁니까? 제가 달 신의 세계에 내려오는 것을 윤허하지 않으신다면, 이조차 당신의 뜻이라면.
그래요, 살아야지요.
저는 당신의 뜻을 이으렵니다. 날 신의 비호 아래 지식을 추구하고, 진실을 탐미하고, 옳은 것을 위해 몸을 내던져 보이지요.
그러니 저는 기쁘게 이 생을 받아들이겠나이다.
혼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찬란한 별, 천체가 점지해 준 그의 완벽한 생에 저라는 최악의 변수를 엮어 넣은 건 다름 아닌 저 자신이었으니, 더 이상 아이가 추위에 떨지 않는 세상이 오길 바랐던 당신의 따스한 뜻을 잇겠습니다.
그를 위해서라도 앞으로 나아가렵니다. 제 모든 행동이 당신의 삶의 방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에게 따스한 생을 선물할 수 있다면.
속으로나마 씁쓸한 기도를 올린 알렌은 곧바로 마음을 갈무리했다. 울음이 멎지 않는 사내의 콧잔등 위로 순수한 애정을 담아 입을 맞췄다.
언제나 죽지 못해 안달이 났던 저였다. 저라는 인간은 죽음이 가까워져도 늘 기뻐했던 족속이었다.
그러니 이것이 그녀의 뜻이라면, 알렌은 그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전부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제 하나뿐인 소중한 파트너가 얼른 나으라며 퉁퉁 부어오른 눈으로 제 품에 머리를 살살 부비던 것도, 제가 불안하다고 말한 단 한마디 때문에 내내 병실을 떠나지 않던 것도, 행여나 제가 다시 깨어나지 못할까 봐 집착에 가깝게 매달리던 것들도.
나의 생의 증거가 당신을 살릴 수 있다면 전부 감당하여 짊어질 수 있었다. 그러니 부디 당신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
“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비스 해 줄게요. 거기 날씨 어때요?”
「맑고 춥다. 음. 오로라가 떴군.」
얼씨구, 참 담백하기도 하군. 투덜거리면서 알렌은 담요를 하나 두르고 후다닥 집 밖으로 나섰다. 매서운 이슈가르드의 칼바람이 뺨을 엘 것만 같았다. 으으, 하고 작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리고 있자니 링크펄 너머의 사내로부터 큭큭거리는 웃음이 들렸다. 알렌은 입을 비죽거렸지만 코르보가 꽤 즐거워 보이자 더 말을 얹지는 않았다. 그는 말을 아낄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었다.
“어디, 이쪽에서 보이는 게 수천이니까, 천체가 운행하는 궤도대로라면 그쪽에서 보이는 하늘은 풍천일거예요. 원격으로 별을 읽는 건 특기가 아니지만, 간단한 정도라면야.”
호오, 하는 작은 감탄이 들렸다. 괜히 좀 우쭐해져 자신만만하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슈가르드의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는 은하수가 걸려 있었다. 이 정도면 별 읽기엔 지장이 없을 터다.
“그림자 6월 4일, 21시 49분 17초, 올드 샬레이안에서의 풍천. 이쪽의 수천 좌표를 토대로 계산해 보면 그쪽이……. 잠깐. 지금 혹시 어디 서 있어요?”
「응? ……. 무슨 광장인데. 분수대 있는 곳.」
“아하. 뭐, 좋아요. 그러면 그쪽 좌표로 보면. 코뿔바다오리 광장에서 살리아크 상을 똑바로 보고 섰을 때, 당신 머리 바로 위에 뜬 별이 오쉬온의 화살촉에 해당하는 별일 거예요. 유독 밝은 녹색 별이요. 오쉬온의 별자리가 얼마나 기울어져 있는지는 직접 봐야 아는 거라 기울기에 따른 의미까지는 제가 못 읽겠지만.”
코뿔바다오리 광장의 좌표 같은 걸 제가 잊을 리가 없다. 애초에 샬레이안에서 나고 자란 몸, 수천 번 하늘을 올려다보며 샬레이안 구석구석의 경도와 위도 정도는 머릿속에 달달 외우고 있었다. 뭐 그딴 걸 다 아느냐는 듯 경악한 목소리가 돌아왔지만 알렌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디 보자. 이 시간에 그 좌표면, 음……. 기울기를 제외하더라도 꽤 운이 좋네요. 해신이 당신의 등을 떠밀고 방랑신이 앞길을 열어준다고 할까, 순풍이 부는 모양새예요.”
「흠.」
제 딴에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대길에 가까운 운수를 읽어줬는데도 담담한 감상이 돌아오자 알렌은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뭐야, 신의 사랑이라도 받았어요? 내가 보는 수천은 완전 엉망이라서 난 내일도 집에 꼼짝없이 틀어박혀야 할 판인데, 당신에게만 순풍이 갔나 봐요. 이거 치사하잖아. 짜증 나니까 나중에 돌아오면 한턱 사세요.”
「뭐 그딴 억지가 다 있나.」
“짜증 나서 한 대 확 치고 싶어.”
「어디 해 보던가.」
“때리면 치료하는 건 또 나잖아요. 나만 손해잖아. 씨이…….”
링크펄 너머로 경쾌한 웃음이 새어 나온다. 가벼운 웃음소리를 듣자니 저까지 비식비식 실소가 스민다. 멀리 떨어져서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하는 통화라니, 연인이라면 퍽이나 낭만적이었을 테지만 저희로서는 그저 애틋하고 먹먹하기만 했다.
조금 정도는 그가 그리웠던 탓이다.
“저번에 얘기했었죠? 풍천은 오쉬온이 창조한 영봉에 리믈렌이 바람을 일으켜 만들어진 하늘이에요. 그 하늘 아래에서 모험하는 인간들에게는 방랑신과 해신의 가호가 주어진다는 얘기도 있거든요. 믿거나 말거나 우스갯소리지만.”
「열두 신 신화라면야 기억한다. ……. 그렇지만 그런 얘기는 들은 것도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어디까지나 소문처럼 들리는 거니까요. 신앙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네가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안 될 거 있나요? 그러니까 그 소문처럼 즐겁게 여행하고 돌아와요. 당신의 여행길에 축복이 함께하기를.”
진심을 담아 그를 축복한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당신이 행복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이다. 저답잖은 말에 한동안 링크펄 너머로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괜한 짓을 했으려나, 하는 걱정을 꾹꾹 밀어 담으며 어색한 침묵을 깨고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사흘 뒤에 올드 샬레이안을 뜬다고 했죠?”
「그래. 다음 배편이 그 때라더군.」
“그래요……. 림사에 내리려면 하루 이틀은 더 걸리겠네. 몸 조심해서 돌아와요. 이쪽은 이쪽대로 당신 앞으로 온 일이 산더미니까 어디 딴 길로 새지 말고.”
「내가 너인 줄 아나?」
“뭔데요, 내가 언제 딴 길로 샌 적 있어?”
「그럼 없나?」
“……. ……. 역시 짜증 나. 두 대는 후려 패야 성에 차겠어.”
「어디 해 보라니까.」
“이 인간이 진짜!!”
평소처럼 투닥거리는 것이 싫지 않았다. 즐거운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가던 알렌은 다시금 숨을 길게 빼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 위에 수놓듯 흩뿌려진 은하수가 몹시 아름다웠다.
***
부오옹, 하는 묵직한 뱃고동 소리에 갈매기들이 끼룩거리며 날아올랐다. 하선을 알리는 소리였다.
코르보는 짐가방을 들고 서툴게 부두로 내렸다. 한평생 설산에 둘러싸인 이슈가르드에서만 살아 온 그에게 배편은 익숙하지 않은 탓이었다.
이슈가르드로 돌아가려면 림사 로민사에서 비공정을 타야 한다. 배를 타고 들어올 때 갓 하늘로 떠나는 비공정을 봤는데, 다음 비공정 시간에 맞출 수 있을까 조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북해의 오로라는 자신이 올드 샬레이안을 떠나는 그 날에도 어김없이 코르보를 반겼다. 출렁이는 배 위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낯설고 두근거렸다. 이런 걸 혼자 보기엔 아깝지 않나. 알렌이 자신을 라비린토스에 보낸 게 이런 기분이었나 싶었다.
이런저런 복잡한 감정을 쑤셔 넣으며 사람들을 따라 입국 수속을 밟고 있자니 저 멀리서부터 익숙한 실루엣이 제 쪽으로 손을 흔드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알렌.”
“뭐야, 일찍 왔네? 이야~ 시간 못 맞출 뻔했네요. 도착하기 전에 연락 주지 그랬어요.”
“너 어깨는.”
“당신 돌아올 즈음이면 나을 거랬잖아요. 멀쩡하게 다 나았어요. 왜요, 마음에 걸렸어요?”
“…….”
“어, 진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깔깔 웃던 알렌이 제 짐가방을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깨 부상을 입은 주제에 이런 걸 들겠나 싶어 거절하자 알렌은 눈을 가늘게 뜨다가 코르보의 짐을 낚아채듯 빼앗았다.
“식사나 하고 가요. 비스마르크 식당, 오늘 조금 한산한 거 같더라. 내가 살게요.”
“……. 마중 나올 줄은 몰랐는데.”
“불만 있어요?”
“…….됐다.”
뭐야, 뭔데요. 불만 있으면 얘기해요, 라고 투덜거리는 목소리 사이사이에서 기분 좋은 웃음이 군데군데 잘랑거리며 묻어난다. 몇 년씩 못 만난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열흘 정도의 짧은 여행길이었는데, 그저 무사히 돌아온 얼굴을 본 것만으로도 반가운 탓일 테다.
비공정 승강장으로 가려던 발을 돌려 상층 갑판의 식당으로 향했다.
나란히 발맞춰 걸어가는 거리가 부쩍 가까워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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