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청춘 합작
디에고키아라
그놈의 성질머리는 이길 방법이 없다. 디에고는 위층에서 나는 소리에 결국 방 밖으로 나왔다. 쟤는 왜 하필 내 바로 위층인 건데. 엄밀히 따져서 바로 위도 아니고, 다른 곳이었어도 방음이라곤 안 되는 저택이니 들렸겠지만 디에고는 그런 거까지는 몰랐다. 여름이라 더운데, 장마철이라 비도 내리고, 여러모로 꿉꿉하고 기분 나쁜 와중에 저 소리는 정말 끔찍했다.
“임무 안 나가는 게 그렇게 싫냐?”
반쯤 열린 문을 밀고 기대 선 디에고가 삐딱하게 물었다.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흉흉한 갈색눈이 노려보는 것에 살짝 움찔했지만 디에고는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똑같이 힘줘 쳐다봤다.
“너는 내가 임무 따위를 신경 쓸 거 같아?”
열다섯이나 먹고도 한심한 소리를 한다며 키아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길게 숨을 고른 후 키아라는 바닥에 떨어진 조각들을 줍기 시작했다. 기분을 못 견뎌 전부 집어던져 부순 후에는 항상 후회가 따라온다. 이런걸 치우는 건 그레이스에게 부탁해도 되는 일이지만, 이전에 그레이스의 손끝이 유리에 베여서 보였던 것을 생각하면 조금 껄끄러웠다.
“더 소리 안 낼 테니 그만 가지?”
그걸 여전히 보고 있는 디에고에게 키아라가 잔뜩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
“왜 또 화났어?”
뭔가 심각하다고 느끼기라도 한 건지, 제멋대로 디에고는 방 안으로 들어와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언제부터 그렇게 챙겼다고. 키아라가 헛웃음을 냈다. 평소라면 당장 눈을 뜨고 내쫓았겠지만 그러기도 싫었다. 뭔 생각인지라도 읽어볼 수 있었지만… 어차피 저 머리에 든 거라곤 없어서, 그냥 별 생각 없을게 뻔했다.
“치우는 거나 도와주든가.”
“싫은데.”
“그럼 명령할래.”
“젠장!”
디에고가 눈을 가리는 것보다 키아라가 뜨는 게 빨랐다. 금빛 뱀이 노려본다. 디에고는 욕설을 중얼거리면서도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을 뒹구는 책을 집었다. 걱정한 내가 멍청이지! 누가 얼마 쓰지도 못하는 능력을 이딴 식으로 남발하냔 말이다. 남을 시켜먹는 게 아주 즐거운지 디에고가 사라진 의자에 앉아 웃던 키아라가 잠깐 붉어져서 우물거리는가 싶더니 말했다.
“…난 그냥 바다에 가고 싶었을 뿐이야.”
바다? 뜬금없는 단어에 디에고가 이해할 수 없어 되물었다. 웬 바다?
“오늘 미션 예정이던 곳이 정말 예쁜 바다로 유명한 곳이야.”
리안은 물을 무서워해서 우리가 그 근처로 갈 일은 없었거든. 예전 생각을 하는 듯 살짝 풀린 목소리로 키아라가 말했다. 디에고는 바닥에 떨어진 책들 중 시퍼런 바다가 그려진 도감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고보니 기억나는 게 있다.
“내가 못 가봤는데 넌 왜 가봤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질문에 대체 뭔 대답을 해야 하냔 말이다. 노골적으로 실망한 티를 내는 키아라를 보며 디에고는 괜히 짜증이 났다. 미션도 훈련도 없는 시간에 늘어져서 책을 넘기던 키아라가 갑자기 그를 붙잡고는 툭 바다에 가봤냐는 질문을 던졌고, 디에고는 그에 맞게 가봤다고 답해줬을 뿐이다.
“그냥, 미션 때문에 간 거야. 놀러가거나 그런 게 아니라… 그때는 네가 없었잖아.”
이게 뭐라고 변명하는지 모르겠다. 디에고는 자꾸 말을 꼬았다. 뭔 소리를 해야지. 아니 애초에 유럽을 다 돌아다녔다는 애가 바다는 왜 안 가본 건데. 키아라는 여전히 어울리지 않게 뚱한 표정을 하고 있고, 디에고는 횡설수설한다.
“내가 이걸 왜 변명해야 해?”
결국 먼저 터져 눈썹을 치켜든 디에고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야 네가…! 키아라는 뭐라고 버럭 말하려는가 싶더니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너한테 말한 내가 바보지.”
들고 있던 책을 덮어버리고 키아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를 밀쳐 넣으면서 퍽 소리가 났다. 디에고가 뒤에서 부르든 말든 키아라는 안 들린다는 듯 위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왜 또 저래. 혼자 남은 디에고가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이해할 수가 없다. 넌 아냐? 시퍼런 바다가 그려진 도감을 잠깐 노려보다가 디에고도 이내 다시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
“나중에 가자.”
디에고는 별생각 없이 말했다.
“파이브가 돌아온 후에나, 그 전에 면허를 따서 차를 몰 수도 있고. 여기 가까이에도 있긴 하니까.”
“네가 약속한 거야!”
키아라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키아라가 말하는 바다는 해변에 가깝고, 디에고가 말하는 바다는 부둣가에 가까웠지만 둘은 그걸 몰랐다. 배랑 비린내나 있는 바다 그게 그렇게 보고 싶나.
그것도 저것도 전부 예전 일이다. 지금 와서 그런 걸 들먹일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비가 억수로 내리는 여름에 키아라는 아이스크림을 사러 간다고 나가더니, 물에 푹 젖어 들어왔다. 그래도 아이스크림을 사는 데에는 성공했는지 한쪽 손에는 검은색 봉지가 들려있었다. 집에 있는 건 디에고 하나였다. 물기를 다 털어내고 거실로 나온 키아라는 뜬금없이 디에고에게 바다 얘기를 꺼냈다.
“예전 일이라니, 자기야, 너무하네.”
자기야, 라니. 그거 꼭 어릴 때나 부르던 말 같다. 그러니까 완전 어리진 않고, 그렇다고 또 나이를 먹지는 않았던, 아는 것도 없고 생각도 없던 때 말이다. 디에고가 절로 미간을 찌푸렸다. 키아라의 입에서 다시는 듣고 싶지 않은 호칭이다.
“약속이었잖아.”
“열여섯도 못 된 어린애들 약속이지.”
“우리 아직도 젊어.”
날도 더운데 옆으로 붙는 게 끈적거렸다. 디에고가 밀어내려 해도 키아라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자긴 더위를 안 탄다 이건가. 한여름에 긴팔을 입고도 팔팔하게 뛰어다니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쩌다 이렇게 자랐지.”
“그야 아이를 기르는 데엔 재주가 없던 레지널드 경과 사랑스러운 우리 어머니 그레이스 덕분이지.”
“나 말고 너, 키아라.”
“나도 너랑 똑같이 자랐어.”
‘똑같이’ 그 단어에 유난히 힘이 들어갔다. 디에고도 알아챘다. 키아라가 사 온 아이스크림을 와작 씹으면서 디에고는 잠깐 생각했다.
“마이애미에서 대학 다녔지?”
“그랬지. 지금은 전부 사라졌지만.”
또다시 돌아온 시간에는 키아라 하그리브스 같은 사람이 없어서, 대학 졸업장이든 의사 면허증이든 전부 없는 게 되었다. 그렇다고 못 써먹는 건 아니었지만. 키아라의 목소리가 약간 침울해져서, 디에고는 괜히 찔렸다. 아예 존재가 없으니 자신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건가. 그런 이상한 생각까지 들었다. 키아라가 알면 분명 한 대 때릴 거라는 확신을 하면서 디에고는 말했다.
“바다는 질리게 봤겠네.”
“아침에 눈을 뜨면 바다고, 밤에 눈을 감기 전에도 바다가 있었지.”
“그런데도 바다가 보고싶어?”
“누구랑 같이 본 게 아니잖아, 디에고.”
키아라가 고개를 올려 디에고를 빤히 보았다. 선글라스로 눈이 가려졌지만, 그래도 한심하다는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것 정도는 디에고도 알 수 있었다. 어릴 때는 언제 갑자기 저 눈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짜증났어도 항상 마주하고 있었는데, 뭔가 조금 아쉬운 느낌이다.
“지금 가자.”
일어나서 옆에 놓인 겉옷을 집어든 디에고를 보고 키아라가 눈을 끔뻑였다.
“방금 비 맞고 왔는데?”
“싫음 말고.”
“너 진짜 나쁜 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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