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양육권

키아라앨리슨

키아라 로미티. 퍽이나 대단한 이름이다. 이름은 사회부의 미친 기자로 유명하고, 성은 온갖 고생 끝에 올라온 미국 최연소 상원의원의 것. 결혼 이전까지 달고 있던 하그리브스는 몰락했으나 여전히 소소하게 얘기가 나오는 히어로와 같고. 이혼하고 나면 다시 하그리브스로 돌아가야겠지. 그보다 더 오래전에 쓰던 성으로 돌아가고 싶으나, 뜻대로 될 리가 없다.

하지만 키아라 로미티가 대단한 이름이라 해봤자, 그 배우자인 카를라 로미티보단 덜 대단한 이름이며 마찬가지로 같은 날 재판이 잡힌 배우 앨리슨 하그리브스보다도 덜 유명하다. 그래, 후자가 문제다. 앨리슨 하그리브스. 키아라는 왜 하필 재판이 잡혀도 그녀와 같은 날짜일까 생각했다. 왜 하필. 제일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다. 우연찮게 마주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앨리슨도… 같은 생각일 거다. 키아라는 그랬으면 좋겠다고 바란다.

“안녕.”

그러니까 키아라는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봐도 모른 척 해주길 원했다. 안녕, 건네진 인사에 키아라가 떨떠름한 눈치로 다시 돌려준다.

바깥은 몰려든 기자떼에 시끄럽다. 옆에 앉은 앨리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자꾸만 손 끝을 가만히 두지 못한다.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못한다. 섣불리 할 수 있는 말이 없다. 적막이 길게 흐른다. 법원 벽에 걸린 시계가 빨리 네 시를 알리기를 키아라는 간절히 기다린다. 저 빌어먹을 초침 소리와 공백 사이에 파묻혀 죽어버릴 것만 같다. 빌어먹을. 제발, 부탁이니까, 저 놈의 시계 좀.

“…키아라?”

순식간에 소리가 묻힌다. 목줄이 걸린 것마냥 말 한마디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엉망인지 알아챈다. 대기실에 자신과 앨리슨만 있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사실인가. 동시에 가장 비극적인 사실이다. 그녀한테 만큼은 문제없는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앨리슨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보며 괜찮은지 묻는다. 어떻게 대답할 수 없어 가만히 숨을 고르는데, 네 시를 알리며 종소리가 들린다. 키아라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다. 비틀거리는 모습에 앨리슨이 손을 뻗으나 괜찮다는 말만 하며 마치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대기실에서 뛰쳐나간다.

겨우 도착한 화장실에서 한참 속을 게워낸다. 구역질 나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 어쩌다 여기까지 떨어졌지.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를 붙잡고 생각하려 애쓴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애초에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문제다. 올라간 적이 없으니까. 항상 밑바닥이었다. 항상 추락하기 직전에 서있던 주제에 이제와서 무슨 생각을 한다고. 노란 위액까지 전부 쏟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오는 것 같다. 화장실 팬 소리가 들린다. 빌어먹을 소리. 귓가를 헤매는 소리가 끔찍하다. 이대로 천장에 목이라도 매달고 싶어진다.

그러나 그런 행위를 하지 않고, 그저 얌전히 아무일도 없던 사람마냥, 엉망이 된 모습을 다듬고 화장실 밖으로 나선 것은 키아라가 아직 그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완전히 못 벗었기 때문일 거다. 그 동생은 바냐 하그리브스일 수도 카를라 로미티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같다. 연장자의 행세를 했으나 그게 전부인 놈. 거울 속에 비치는 키아라 로미티에게 키아라 로미티처럼 웃어주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가늘게 뜬 헤이즐넛색 눈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고 싶다.

“자.”

밖에서 기다린걸까 앨리슨이 내미는 가방과 음료에 키아라는 저도 모르게 굳는다. 안받고 뭐하냐는 눈치에 조심스레 건네 받는다.

“…고마워.”

“뭐, 이런 걸로.”

스치듯 닿은 손끝이 괜히 저릿한 느낌이다. 건네 받은 음료의 뚜껑을 따서 벌컥벌컥 들이키니 목을 지나간 차가움에 숨이 트인다. 언제 흔들렸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키아라는 앨리슨을 보며 웃는다. 마주 웃어주는가 싶던 앨리슨이 묻는다.

“아직도 힘들어?”

아직도? 무엇을 두고 하는 말인지 키아라는 모른다. 짐작가는 일이 끝없이 많다. 하지만 그저 방금 전의 일만을 칭하는 것처럼 키아라가 답한다.

“아니, 많이 괜찮아졌어.”

그 답이 앨리슨의 마음에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앨리슨은 언제나의, 키아라의 기억 속에 있던 모습과 다를 것 없이, 그를 본다. 또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는 눈이다. 이제와서 믿어줄 수는 없냐고 말할 순 없다. 그런 말은 10년도 전에 했어야 한다. 또다시 숨이 막혀오는 느낌이다. 어질거린다. 하지만 생각보다 버틸만 하다. 말을 돌릴 게 없나 생각하다 떠오른 게 있다.

“애랑 만나게는 해줘?”

말하자마자 실수한 것을 깨닫는다. 키아라는 결과를 안다.

“정신과 상담을 받은 후에나 가능하지만, …그래.”

키아라의 걱정과 달리 앨리슨은 꽤나 담담하게 답해준다. 키아라는 안도한다.

“나보단 괜찮네.”

거짓말이 아니다. 처음부터 카를라가 원하는 대로 해줄 생각이어서, 키아라는 양육권을 주장하지도 않는다. 변호사조차 선임하지 않았다.

돌아간 대기실 속 시계가 보이지 않는다. 예민한 귀에 초침 소리는 여전히 들린다. 하지만 훨씬 작은 소리다.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소리. 구석에 여름과 어울리지 않게 두툼한 천이 보인다. 어떻게 된 일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

대화가 자연스럽다.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말한다. 누가 본다면 정말 사이좋은 남매로 오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오늘 ‘기자 키아라 로미티’로 이곳에 온 거라면, 자기 자신까지도 팔아먹는 남자는 기사를 쓰고 있었을 거다. 증오하는 버릇이나 사라지지 않는다. 그건 앨리슨이라고 다르지 않을 거다. 새로 만든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에서 쓸모가 있을지는 알 수 없으나 형제와 사이가 좋은 장면에 나쁜 얘기가 나올 수는 없다. 키아라는 앨리슨이 그런 것까지 계산했기를 바란다. 그녀가 원한다면 다정한 형제가 될 수 있다. 지금이라도.

아니, 어쩌면 이미 되었을지도. 어릴때에 대해선 암묵적으로 묻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구는 거다. 그건 바냐가 터트린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처럼. 디에고는 바냐의 자서전을 두고 길길이 날뛰었지만, 키아라는 별 생각 없었다. 우리가 잘못한 건 맞잖아. 디에고는 그 말조차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앨리슨도 같을까? 동경은 그 이상이 되지 못했으므로, 키아라는 앨리슨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제멋대로 내리는 판단은 거기까지 정의하지 못한다.

시간이 되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시간은 아니고, 앨리슨이 나갈 시간 말이다. 시계 없이도 시간을 알아채는 일에 키아라는 익숙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앨리슨에게 손을 내민다. 꼭 춤이라도 신청하는 것 같은 모양새다. 앨리슨은 웃는가 싶더니 키아라의 손을 잡고 일어난다.

“춤은 싫어하지 않았어?”

“그야 너와 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키아라가 따라 웃으며 답한다. 꼭 농담하는 듯한 어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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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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