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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시간 속을 걸어왔을 너에게

Type: Lemonade

- 캐릭터+키워드 3~6개 정도만을 가지고 자유롭게 작업하는 프리타입 Type: Lemonade 신청글입니다. 

- 파이널판타지14 장르 그라하 드림 / 콜리에서 신청받아 작업한 글입니다:)!

- 신청자분 요청으로 드림주 이름은 전부 모험가로 대체되어있습니다.

- 주신 신청내용: 모종의 사건으로 드림주가 8재해 이후 그라하 만남

- 신청 글자수는 공미포 6천자. 총 공미포 6,130자로 마무리했습니다.


잊혀진 시간 속을 걸어왔을 너에게

copyright by. Mer

 

8재해가 일어났던 당시의 일을 그녀는 모른다. 제국에서 사용한 최종병기 ‘검은장미’로 인해 자신은 전사. 정말 원시세계로 회귀한 것 마냥 서로 죽이고 죽이는 것을 반복하기만 하는 아비규환의 세계였다는 정도까지만 알고 있을 뿐. 그녀가 없는 세계에서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고, 어떤 심정으로 타워를 움직여 시공간을 건널 생각을 했을지 짐작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라하 티아, 그녀가 좋아하는 이는 그 시절의 이야기만 꺼냈다 하면 이미 없어진 미래의 일이자 과거의 일이 되었으니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의 일을 더 봐줬으면 좋겠다고 부드럽게, 그러나 완강하게 말을 돌리며 이야기하기를 거절하고는 했기에 그녀는 정말로 그 시절의 일을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혼자만 그 기억을 끌어안고 힘들어 하는 게 아니라 기왕이면 함께 나누고 그 짐을 함께 짊어졌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 당시에는 이미 죽은 사람에 해당했던 제가, 저를 잃은 기억이 있는 그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고 여겨져서 차마 할 수 없었다. 누군가를 잃었을 때의 충격과 아픔은 저도 겪어봤으니까. 그에게 그 기억과 심정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컸으리라. 물론, 저는 지금 여기에 이렇게 살아서 그와 함께 나란히 걸으며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역시 궁금한데…….”

“무엇이?”

“왁!”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꼬리를 부풀리며 목소리의 주인을 돌아본다. 그녀의 비명소리에 덩달아 놀란 모양인지 상대방의 붉은 눈동자도 꽤나 크게 뜨여있었다. 미안, 놀래킬 생각은 없었는데……. 많이 놀랐어? 멋쩍게 웃으며 건네는 물음에 놀란 가슴을 가라앉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조금. 꼬리가 펑 부풀긴 했지만 조금이라면 조금인거다. 그렇게 박박 우기면 그라하는 그렇구나 하고 넘어가준다. 그것이 그의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이겠지만…….

 

“그래서, 무엇이 궁금한데?”

“말해도 넌 내 궁금증 해결 안 해줄 거잖아.”

“모험가, 8재해의 일은…….”

“알아. 이미 지나간 일이기도 하고, 없었던 것이 된 일이기도 하다는 거.”

 

그렇지만 너는 겪었잖아. 너는 겪은 일이잖아. 완전히 없던 일이 아니잖아. 모험가는 뒷말을 꾹 삼켜냈다. 궁금한 것을 해결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를 난감하게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에. 꾹 눌러 담은 채 그녀는 웃으며 그를 올려다봤다.

 

“혹시 나한테 용건이 있어서 찾아다녔어?”

“아니, 그건 아냐.”

 

지나가던 길에 네가 보였는데 어쩐지 잔뜩 고민 있는 사람처럼 추욱 늘어져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무슨 일 있나 걱정이 돼서……. 널 놀래키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괜히 얼굴을 붉히며 해명하는 모습이 귀엽다고 느끼는 찰나, 모험가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현기증과도 같은 두통에 머리를 싸매며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모험가? 왜 그래? 괜찮아?!”

“읏, 괜찮……, 갑자기 왜…….”

 

과거를 보는 초월하는 힘이 발동될 때와 비슷하게 찾아온 두통이었으나, 어째서인지 평소보다 그 아픔이 강렬하다고 느끼며 그녀는 천천히 의식의 끊을 놓는다.

 

“모험가……!”

 

눈이 감기면서 흐려지는 의식 너머로 자신을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녀는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그대로 어둠에 잠식당했다. 미안, 그라하. 조금만, 아주 조금만 잘게.

 

* * *

 

정신을 차렸을 때 보이는 하늘의 색으로 인해, 모험가는 낯설 정도로 불타오르는 하늘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 종말은 이미 물리쳤을 터, 이런 하늘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아야 정상일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하늘은 때로는 붉게 때로는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몸을 일으키고 나서야, 그녀는 그 하늘이 종말현상으로 타오른 하늘이 아닌, 인간에 의해 주변이 불타며 물든 하늘의 색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잠들기 전만해도 있을 리가 없고 있어서도 안 될 그런 모습이었다. 아니 애초에 쓰러지기 직전에 있던 장소와도 완전히 다른 장소라는 사실 까지 깨달은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이 쓰러져서 보고 있는 꿈과 같은 장소인 것인지, 아니면 옮겨진 장소가 하필이면 이런 지역인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그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기시감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질서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렇다 이곳은 그녀가 그렇게도 궁금해마지않던…….

 

8재해가 일어났던 시간선의 에오르제아였다.

 

*

 

8재해가 일어난 시간선. 하이델린도 사라진 지금, 아무리 초월하는 힘이 있다고 해서 어떻게 이 시간대에 도착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녀는 그녀 스스로가 자신의 모습을 타인에 보이면 큰일이 날 것이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다행이 주변에 사람이 없어서, 그녀는 주섬주섬 제 얼굴을 가릴만한 것이 있나 찾기 시작했다. 수중에 가방도, 로브도 없던 터라 주변에 있는 것으로 충당해야만 했는데, 마땅한 것이 난감함만 느껴지는 찰나…….

 

“……어째서, 네가? ……거짓말. 그럴 리 없어…….”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란 모험가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 붉은 머리, 붉은 눈동자. 목덜미에 새겨진 현자의 문양. 머리에 핀이 꽂혀있지는 않지만 불과 그가 탑에 들어가기 전만해도 늘상 하고 다니던, 탑에서 눈을 뜨고 새로운 옷을 타타루에게 받기 전까지 늘 하던 머리였던 그 머리스타일을 그녀가 잊었을 리 없다. 제일 보이면 안 될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머릿속에 하얗게 물들었던 것도 잠시, 냅다 돌진하듯 달려와 저를 끌어안는 상대로 인해 꼬리를 부풀리며 얼결에 품에 달려든 상대를 마주 안았다.

 

“……정말, 정말로……, 너구나…….”

 

……이렇게 따뜻하게……. 어쩌면 울고 있는 것 같다고, 모험가는 그렇게 생각했다. 떨리는 목소리와 그에 버금갈 정도로 가늘게 떨고 있는 몸,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아주지 않겠다는 양 거세게 끌어안고 있는 두 팔은 그가 꽤나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해서, 모험가는 도리어 제 가슴이 아픈 것 같다고 느꼈다. 그라하 지금 네가 본래 빛나는 수정탑 안에 잠들어있어야 할 네가 이곳에 깨어있다는 소리는 역시…….

 

“역시, 네가 깨어 있다는 소리는 이미 내가 죽었다는 소리겠지?”

“…….”

 

끌어안고 가늘게 떨고만 있던 몸이 눈에 띄게 움찔 반응했다. 내가 죽고 한참 뒤에야 이 시간선을 뒤집기 위해, 나를 살리기 위해 필요해서 너를 깨웠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어. 평온한 어조로 그의 등을 도닥이며 모험가는 말을 이었다. 너는 이런 세상에서 홀로 버텨왔던 거구나. 이렇게 참혹한 참상이라면 네 성격상 말 안 해줄 법도 했네. 흘리듯 내뱉은 말에 한참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라하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내가, 네 곁에 있어?”

“글쎄, 어떨까?”

 

혹시 급한 상황이 아니라면 조금 말동무를 해주지 않을래? 나도 여기에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몰라. 그렇지만 분명, 오래 있지 못하고 왔던 때처럼 조용히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게 되겠지. 모험가는 팔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고 조용히 그라하를 품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갑작스럽게 8재해가 일어난 시간대로 온 것처럼 아마 돌아가는 것 또한 갑작스럽게 일어날 것이기에……. 얼굴을 가릴 것이 없는 상황에서 이곳은 어떤 상황인지 구경시켜 달라할 마음은 없었다. 이 시간대에서 자신은 이미 한참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혼란을 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8재해 당시의 상황이 알고 싶었던 것뿐 그라하 본인을 만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라서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미 만나버린 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말동무를 해주는 것이야 나쁘지 않지만, 너무 늦었다가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찾으러 올지도 몰라.”

“아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걸?”

 

사람들이 찾으러 온다면 그 때는 조용히 몸을 숨기면 되니까. 그건 자신 있거든. 여긴 어째서인지 인적도 드물어서 멀리서 오는 인기척 정도는 금방 잡을 수 있으니까 괜찮아. 내 실력이 그 정도도 못 잡을 정도로 형편없지도 않고. 1000년이나 지속되던 전쟁의 끝을 내고 수많은 희망의 불을 밝혔던 영웅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누가 그런 헛소리를? 네 실력이 형편없었다면 우리는 너를 구하겠다며 너도나도 팔 걷어붙이고 나서지 않았을 거야. 모험가의 말에 흥분한 목소리로 반박하던 그라하가 한순간 핫! 하고 정신을 차린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다.

 

“네가 그렇게 열변을 토하지 않아도, 내 실력은 형편없지 않다는 거 잘 알아.”

“그……, 잊어줘.”

“곤란한데? 이렇게 귀여운 모습을 어떻게 잊지?”

“모험가……!”

 

모험가는 간만에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지독히도 참혹함만을 느끼게 해주는 주변 환경은 잠시 잊은 채, 그저 너와 함께하고 있는 이 순간을 잠시나마 즐기고 싶었던 것도 컸다.

 

“내가 죽고 난 뒤, 이곳의 이야기를 들려줬으면 해.”

“괜찮겠어? 너와 함께하는 내가 너에게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

“알아. 그렇지만 난 그렇기에 더더욱 알아야겠어.”

 

그러니 네 이야기를 들려줘. 단호한 모험가의 요청에 그라하는 하는 수 없다는 양 조곤조곤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 둘 풀기 시작했다. 모험가는 이야기를 들으며 때로는 화를 내고-주로 그라하가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마구 던질 때에 화를 내던 편이었다-, 때로는 눈물짓고, 때로는 크게 웃으며 그 이야기를 흥미진진하다는 얼굴로 듣고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꽤나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오래 자리를 비우면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 했던 말이 무색할 정도로, 그라하를 찾으러 이 외진 언덕까지 올라오는 이는 없었다. 어쩌면 주변에 아무 것도 없을 것을 알아서 도리어 안전하기에 찾으러 오지 않은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찌되었던 그 사실 자체가 모험가에게는, 그리고 그에게는 나름의 다행인 부분이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본래 시간대에 있을 그라하가 걱정되기도 했으나, 모험가는 당장 돌아갈 수 없는데 걱정해봤자 소용없다는 사실을 알고 지금 시간에 충실하기로 했다. 사실 그를 걱정하기엔 이곳의 그라하가 해주는 이야기가 너무 재미있고 흥미로웠던 것도 컸다.

 

* * *

 

그라하 티아는 안에서 답이 들려오지 않음을 알면서도 3번 노크 후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죽은 듯 누워서 잠들어있는 그의 영웅은 오늘도 그에게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갑자기 쓰러졌을 때는 놀랐지만, 그는 침착하게 그녀를 안아들고 그녀의 방에 돌아와서 상태를 살폈었다. 몸에는 이상이 없지만…….

 

“모험가.”

 

그렇게 따뜻했는데 이제는 미적지근하게까지 느껴지는 손을 붙잡고 그라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쓰러진지 벌써 이틀 째. 그의 영웅은 아직도 눈을 뜨지 못했다. 냉기마저 느껴지는 것 같을 정도로 차가운 손이, 그녀의 혼이 이곳에 있지 않음을 증명하고 있었지만, 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하게 영웅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아주 머나먼 과거, 그녀는 모를 8재해 당시, 그럴 리 없음을 알면서도 나눴던 그녀와의 약속이 지금까지 그를 지탱해주고 있었던 것처럼 지금의 그도 지탱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하, 멀다면 멀고, 멀지 않다면 멀지 않을 미래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모험가, 나는 네 약속을 그 때부터 줄곧 잊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어. 그리고 우리는 만났고, 나는 네 곁에서 웃으며 너와 모든 것을 함께 할 수 있게 되었지. 그러니 이번에도 기다릴 거야. 분명 너는 나와 그 약속을 나누기 위해 잠시 여행을 떠났을 뿐일 테니……. 네가 나를 소중히 여기는 만큼, 나도 너를 소중히 하고 있으니, 너무 오랫동안 여행하느라 자리를 비우지 말고 내 곁으로 얼른 돌아와 주기를…….

 

* * *

 

본래 만남의 순간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면 이별의 순간도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다.

 

“읏…….”

“모험가?”

 

이곳으로 오기 전 느꼈던 두통이 이번에는 서서히 찾아왔다. 처음에는 착각인 건가 싶었지만, 두통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손끝부터 그녀의 신체가 서서히 빛을 발하며 산화해가는 게 느껴진다. 그녀는 아, 이제 돌아갈 시간이구나. 그렇게 본능적으로 알았다.

 

“……네 시간으로 돌아갈 시간이구나.”

 

생각보다 그라하는 모험가가 눈앞에서 빛으로 산화하고 있음에도 침착했다. 원래라면 지금 절대로 만나지 못했을 꿈에 그리던 상대였다. 시신이 안치되어있는지 여부조차도 확인이 안 되는 비석으로만 인사를 하던 상대를 잠시나마 품에 안아 그 온기를 느끼고 대화를 나눈 것으로 그는 어느 정도 만족한 모양이었다. 참으로 욕심이 없는 사람. 언제나 모험가만을 1순위로 여기는 그런 사람. 그녀는 본래 말해줄 예정이 없었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그에게 주문처럼 힘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말해주기로 했다.

 

“라하, 멀다면 멀고, 멀지 않다면 멀지 않을 미래에 우리는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모험가……?”

“그러니 힘든 일이 있어도,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나는 네가 너무 소중하니까, 네 자신을 조금 더 아껴서 나를 만나러 와줬으면 좋겠어. 어쩐지 목이 메이는 기분이 들어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라하의 목을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네가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 눈앞에 네가 있음에도, 내가 본래 있던 시간대의 네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너에게 가서 고생했다고,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그렇게 험하고 각박한 세상 속에서 삶을, 자신을 포기하지 않아서 고맙다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다. 눈앞에 있는 네가 아니라, 나와 마주보고 웃으며 모험을 함께 떠나던 너에게 너무나도 말해주고 싶었다. 차마 내뱉지 못한 뒷말을 알아들은 듯, 그라하는 그녀의 등을 마주 안고 작게 웃었다. 품에 안았던 이를 놓아주고 마주했을 때, 그녀는 이미 반 이상 빛으로 산화해서 얼굴조차도 알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나의 영웅, 만나서 반가웠어. 만나러 와줘서 고마워.”

“…….”

 

산화하는 빛으로 하얗게 물들이는 시야와 서서히 흐릿해져만 가는 의식 속에서 문득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곳에 머물던 시간은 굉장히 짧았지만, 다시 돌아가면 얼마나 시간이 흘러있을까. 너는 나를 걱정했을까? 나는 너를 만나면 어떤 말부터 해줘야 할까.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는 두둥실 떠오르는 것과 같은 부유감을 느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암전이었다. 잘 가. 나중에 만나. 나지막한 인사가 들렸던 기분이지만, 그녀는 거기에 대답을 해줄 수 없었다.

 

*

 

산화하던 빛이 사라진 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빛이 흩어지며 남은 잔재뿐이었다.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하지 못하고 동경하던 영웅과 이야기 하던 내내 줄곧 영웅 몰래 제 허벅지를 꼬집고는 했던 그는 그녀가 사라지고난 뒤에야 현실을 자각했다. 차가운 현실에 남겨지고 나서야 품안에 있던 온기가 환상도, 꿈도 아닌 현실이었음을 알았다. 모험가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의연해 보였던 이유는 그저 현실감이 없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다시 만나게 될 것이라고 했으니, 분명 우리는 다시 만날 테지…….”

 

너는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 온기가 남았던 손끝에 입을 맞추며 그는 조용히 스스로에게 약속이라도 하듯 속삭였다.

 

“나를 만나러 와줘서 고마웠어. 이제는 내가 너를 만나러 갈 차례구나.”

 

그러니 미래에 다시 만나. 그 때는 잠깐의 환상과도 같은 시간이 아니라 유한한 시간 속에서 쭉 함께 하자. 네가 나를 소중히 여겨준 만큼 나도 네가 무척 소중하니까, 부디 다시 만나는 그 날까지……. 그는 뒤늦게 찾아온 지독하게 차가운 현실감에 주저앉아 한참을 흐느꼈다. 그렇게 좋은 사람이, 그렇게나 강한 사람이, 이 시간대에선 실로 허무하게 스러졌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가슴 찢어질 듯 아팠다.

 

* * *

 

눈을 뜨니 보이는 천장이 꽤나 익숙하다. 아, 돌아왔구나 싶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지? 팔을 들어보려 해봐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모험가?”

 

드디어 깨어난 것이냐는 듯, 그렇지만 정말로 깨어난 것인지 믿기지 않는 듯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돌아오면 너에게 어떤 말부터 해줘야할까 그토록 고민했는데, 그 모든 고민이 부질없는 짓이었다는 것을 그의 물기어린 붉은 눈동자를 보고서야 깨달았다. 너와 눈이 마주치고, 본능적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알았다.

 

“……좋은 아침이야.”

“………………그래.”

 

한참을 침묵하다 고개를 끄덕인 그라하가 기어이 흘러내리려 하는 눈물을 닦아내듯 팔로 눈가를 문지르는가 싶더니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목을 끌어안는다.

 

“좋은 아침이야,”

 

어서와. 다시 만난 내 영웅.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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