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해

[노을은란] 단 하나

선연하다 by 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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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자정리會者定離' 합작 참여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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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갈색과 황색의 구슬 줄이 햇빛을 투과하며 반사해냈다. 완연한 한낮의 볕을 쬐는 천자락은 가장 밝은 검정으로 흔들렸다. 노을은 그의 일평생을 함께한 동료들과 함께, 중앙황제신장의 등을 바라봤다. 지금 이곳, 궁에 발을 디딘 모든 이가 단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새롭고, 결코 그 전과 같지 않을 상제의 탄생이 목전이었다.

그리고, 한가득 모여든 우군들의 사이를 가로지르며, 주역이 당도한다. 종이 위에 쓰인 경의가 목소리를 타고 울려 퍼졌다. 끝내 그 의무를 다한 5대 황룡이 허리를 숙였고, 6대 황룡은 같은 행위로 의무의 시작을 행했다. 떠들썩한 소란과 축하가 난춘처럼 터져 올랐다.

노을의 제자는, 꼭 그의 친우와 똑 닮은 웃음을 지었다. 시화와 륜의 마지막이고, 시작이었다. 모든 천계가 목도하고 있을 순간이었다. 어떤 고요한 바위산에도 빠짐없이 깃들었을 출발.

그들의 뒷모습과 상반되게 찾아오던 앞모습을 반추하며, 노을은 엷은 감상에 잠긴다. 해를 들이고 들여, 끝내는 저녁놀을 늦춘 그의 소중한 이들을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유일하게 떠나지 않았으나 닿을 수 없었던 얼굴을 떠올렸다. 오직 그만이 알아차렸던, 두 번째 해후의 기약이 퇴색되지 않았다.

지금, 여섯번째 즉위식을 바라보는 모든 사람은 각자의 고유한 생각을 품었을 테다. 그러나 단 두 사람만은, 같은 기억을 되새기고 있을 거라고. 노을은 어쩐지 확신하게 됐다.


이 산은, 분명한 '금란'의 영역이었다. 단절의 시간 하나하나를 허투루 하지 않고 세운, 그가 알지 못하는 은란이었다. 노을이 서방백제신장으로서의, 학당의 선생으로서의 그를 쌓아나갔듯이. 그 굳건하고 뚜렷한 미지를 등지고, 은란은 노을을 맞이했다. 바위산의 주인임이 틀림없는, 갈색 털과 푸른 눈의 여우라는 모순. 그 모든 것이 은란이었고, 그들의 공백을 시인하는 증언이었다.

노을의 계절이라면 틀림없이 금빛으로 물들 나뭇잎은 아직 푸르르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를 초대한 친우를 향한, 느긋한 발걸음이 디뎌가는 지반은 건조했다. 은란은 다만 춘풍에 흔들리는 채로, 가만히 노을을 기다렸다. 한가로운 웃음이 서린 낯을 담담한 눈빛으로 담으며.

서로에게 닿고자 한다면 닿을 수 있을 거리에서, 노을이 멈췄다. 가벼운 묵례가 오가고, 은란은 가슴팍에 얹은 손을, 노을은 거뒀던 곰방대를 물렸다.

"자네, 잘 지냈는가."

"…노을 님이야말로요."

살풋, 은란이 미소 지었다. 그럼에도, 노을과 은란이었다. 공백 따위는, 그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채워나간다면 되었다. 서로에게 할애할 수 있는 순간도, 할애하고자 하는 친애도 충분한 그들이었으므로. 끝내 무료하고 무한한 신의 삶을 꿰뚫어 닿는 것은, 언제나 평등하고 실체 없는 마음이었다.

느릿하게 노을의 말에 답한 은란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잠시 후 관찰의 결과가 도출된 모양인지, 아래팔을 들어 올린다. 그러고는 은란의 손이 무언가를 끌어올리듯 허공을 휘저었고, 곧이어 판판한 암석이 나타났다. 어떤 지당하고 예사로운 일을 수행하는 이의 낯이었다.

앉으시지요, 그러한 말을 대신하는 가리킴에 노을은 선선히 따랐다. 그가 자리 잡는 것에 뒤따라 은란 또한 거리를 두어 걸터앉는다. 은란은 노을의 앞에서 유의미하게 과묵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정말로… 그간 탈 없으셨습니까."

"자네는 어찌 만날 때마다 그 소리인가. 그날 자네도 봤다시피, 여전히 강건하네."

예의 그 평상적인 눈웃음을 지으며, 노을이 물부리를 머금었다. 더욱이 자네가 이리 신경 써주는데, 쇠약한 채로는 못 배기지 않겠나. 청색 수륜이 한껏 부풀고, 연갈색 치맛자락이 손아귀 아래 조그맣게 주름진다.

아, 그때 가면 안의 얼굴은 꼭 이러했을까. 어찌 보면 손쉬웠다 할 수 있는 두 번째 간파를 떠올리며, 노을은 문득 유쾌한 기분에 휩싸인다. 그 봄날 발견한 뒷모습의 분간과 추절 여우 마을 축제에서의 알아차림, 그리고 깨어났던 봉인지의 인식. 실로 변함 없지 않은가. 어린아이 같은 짓궂음을 느끼며 노을은 은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약속했으니까요."

어렸을 때도, 그때도요. 공기 속에서 무의미하게 흩어져버릴 것만 같은 음성이었다. 그러나 흩어지지 않을, 짙고 분명한 원이 그 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말로서, 행동으로서 세상에 뻗어나가는, 한 사람의 중심이라 해도 좋을 것. 은란이라는 존재로 밀도를 가지는, 곧 그녀의 자아나 다름없는 소망.

그 답을, 노을은 선명히 보고 들었다. 말간 금안에 담긴 얼굴이 흔들림 없었다. 어린 날의 설익었던 당부와 가을밤의 선언을 떠올리며, 노을은 눈을 감고 연기를 내쉬었다. 뺨을 스쳐 가는 미약한 바람에서는 풋내가 묻어 있었다. 기대, 그 이상이라 해도 족하지 않은가. 가슴팍에서 일렁이는 긴장감은, 꼭 과거의 기쁨과 닮게 느껴졌다.

삶이란 것은, 고작 이따금 느낄 수 있는 행복으로 붙들기에는 너무 힘겨운 것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러한 순간이, 살아있다면 언젠가는 또다시 오리라 생각한다면.

노을은 그의 선택이, 분명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자네는 그간 어떻게 지냈는가."

"바랄 것 없지요. 노을 님도 무사하시고, 천계 또한 평안해져 가니."

"그런가, 다행이네."

"이제는, 정말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으니까요.

오랫동안 걸쳐온 책임을 벗어낸 듯, 후련한 어투였다. 희미한 소태가 은란의 입가를 덧그린다. 멀고 먼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동자에 볕뉘가 어룽졌다. 그에 담긴 어느 것에도 의미를 두지 않는 시선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을까.

파란 눈동자가 변동하고, 고개를 돌려 그 반대를 머금는다. 그리고, 은란의 눈동자 속에 담긴 노을이 차츰 사라져간다. 눈꺼풀이 덮이고, 양 눈이 각각 가로지르는 하나의 선으로 변해간다. 입매는 완만하고 둥글게, 뺨을 밀어 올린다. 찬란한 햇빛이 잘게 부서져, 나부끼는 머리칼에 달라붙는다. 이 순간을, 기쁨으로 결정해 굳혀두겠다는 듯. 밝고, 밝은 환희를 있는 그대로 빚어내는 얼굴은 어쩐지.

그렇기에 서글퍼서.

"노을 님이 괜찮으시다면, 저는 되었습니다."

그 완연하고도 명백한 웃음을 목도하며, 노을은 울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정말 다행이에요. 축하드리고 싶었습니다."

은란이 미소 짓는다. 그의 옆얼굴에 닿아오는 봄볕이 더없이 따스했다. 시선을, 뗄 수 없다.

그는 이러한 낯을 짓는 이의 다음을 알고 있었다.

기시감일 수는 없었다. 그런 순간은, 두 번 다시는 올 수 없었다. 같지 않았다.

그러나 노을은. 도저히 어쩔 도리 없이…….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아주, 아주 오랫동안 목표를 위해 살아온 이의 목표가 사라졌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지난하고, 홀로였고, 절망에 덮쳐지곤 하던 삶을 이어 나가게 하는. 이어 나가야만 하는, 심지가 불타버렸다면.

생을 붙들 이유를 유실한 사람은 어디로 가는가?

노을은, 벼락같이 깨달아버리고 만다.

이는 단말마의 형태를 한 고백임을.

그가 사랑에 또다시 질식하고 있음을.


유년기의 은란에게 삶이란, 공허였다.

생명에, 일생에 의미나 까닭 따위는 없다. 존재는 그저 영문을 모르고 존재할 뿐이고, 명확하고 합리적인 인과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하필이면 반푼이로 태어나, 배반자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고, 그렇기에 배척당하는 것에도 이유는 마땅히 전무하다.

그러나 영구히 불명일 이유를, 이해의 영역으로 끌어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을 타당하고도 명료하게 풀어내는, 그런 설명을 손에 넣어야만 했다. 은란을 둘러싼 전부가, 단지 이렇게 되었기에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는 서술은. 납득되지도, 그럴듯하지도 않았으니까.

우연히 다소 석연찮은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은, 어린 은란이 내일을 원치 않는 이유가 되지 못하니까.

그런 매일이었다. 무결한 친애와 긍정이 멸시를 모조리 집어삼킨다는 건, 완전한 허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란은 그 아름다운 파랑이 울렁거렸다. 심장은 공기 같은 적의를 맥없이 들여버리고 만다. 상흔은, 옅어지고 옅어지더라도 끝없이 피부를 긁어댄다.

무르고 미숙하게 밀려난 흔적은, 마치 형편없는 손길로 조성된 도자기의 완성품과 같이. 그 절망이 흉지고 습관처럼 남아, 내뱉는 호흡에 배어들며 온 생애에 드리운다.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은란이 계속해서 돌아오는 헛된 하루하루를 헤쳐가며 견뎌냈다면. 그리고 그것이 결점도 잘못도 아니라는 것을 오랜 시간을 지나 깨치게 되었다면. 문득 더없이 나약하고 희미하게, 살아있음에 안심을 느꼈다면 무언가 달랐을 수도 있다.

가능성은 영영 가능성으로만 남게 되었다.

은란에게, 이룰 것이 생겨버렸기 때문에.

은란은 단 한 번도,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우며, 시시각각 바뀌는 명운. 그것에 무수한 감정과 순간을 바친 것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 시간이 남긴 것은 비단 능력 뿐만이 아니었기에. 그녀가 절절히 삼켜낸 열중과 절망과 기쁨은, 오롯이 은란의 것이었다. 분명히 그러했다.

하지만 은란은, 강렬한 생욕 또한 경험해버리고 말았다.

몰두할 것이 있는 생. 더욱더 정진할 것이 있는 내일. 무의미하고 공허한 목숨에 의미가, 가치가, 이유가 깃든다. 삶이, 비로소 삶으로 기능한다. 그녀가 유구히 가져야만 했었던,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의지를 성급히 되찾는다. 세계가 절실해진다.

은란은 지난 몇천 년간, 살아야 했었다. 노을을 붙들어놓기 위해, 명을 움켜쥐어야 했다.

그리하여, 은란은 영영 스스로 살아나가는 것에 무지한 채로 남는다.

은란은 내일 당장 몸을 던지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 자신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느리고 자연스럽게. 멀고도 낯익은 권태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숨을 내쉬며 부재에 빠져든다. 구실이 스러진 생과 함께 급락한다. 무엇도 붙들지 못한 채, 붙들리지 못한 채 느슨히 일렁이고 일렁이다, 끝내는. 고요히 허물어진다.

바라는 것이 없는 사람은 곧, 죽은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녀에게 부여된 필요가 다했으므로. 노을은, 언제나처럼 그녀 없이 완전했으므로. 어떠한 소란도 무요했다. 은란은 안심했다. 모든 것이 잘되었다. 그녀가 이제 와 노을의 곁에 설 자격 따위는 없었다.

한없이, 되돌아간다. 잠시간 망각했던, 그녀의 시초이자 수렁으로.


노을은 느지막이, 석양에 적셔진 그의 집으로 돌아갔다. 두터이 쌓인 근상은 엷고도 오래 남는 색채로 이어져 갔다. 그가 받아 든 깨달음은 그저 하나의 편린에 지나지 않았고, 노을과 은란의 해후는 원만한 끝을 맺었다. 유려한 기약이 장식한 작별에 은란은, 분명 웃어 보였었다.

그러나 노을은, 나눴던 그 모든 안온함이 한없이 멀게만 느껴졌다. 하나의 편린이 모든 것을 압도했다.

비합리한 기시감이 지독히도 날 서 있었다. 멀지 않은 순간과 오래된 기억이 어지럽게 섞여드는 뇌리가 혼잡하다. 집안을 향해 느슨히 이어지는 발걸음이 맥없었다. 단단한 나무 바닥에 몸을 이며, 노을은 또다시 몇번이고 거듭한 궁리에 잠긴다. 어쩌면 번민이라 이르는 것이 적합할 수도 있었다.

그때 피부를 감싸오던 정오의 온기와 뭉쳐오던 한기까지도, 여태 생생했다. 혹은 이미 바래지도록 되풀이되어, 노을에게 맞춰 재구성되었다.

어느 것이건 변하지 않는 명제는, 은란의 미소가 노을의 본성 어딘가를 건드려 고착했다는 것이다. 그의 의사와도, 이성과도 무관하게. 마치 운명처럼, 불가해하나 분명하게 안배돼 피할 수 없었다.

그 함박웃음은, 그 말은, 어째서 그렇게나 친숙했나. 찰나를 이루던 모든 요소가, 한때 알았으나 잊어버린 언어 같이 느껴졌다. 가라앉은 저녁 공기가 언뜻 서늘하게 몸을 감싸 안는다.

옷깃을 한 차례 가벼이 여미며, 그는 뒤돌아 앉는다. 툇마루와 정면으로 마주 보는 대문은 늘 그렇듯 환히 열려있었다. 노을빛이 벽 사이로 길게 비쳐오며, 흰 꽃잎을 붉게 물들였다. 반추가 손쉽게 빠져들어 갈, 고요한 둔중함의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구태여 시도하지 않더라도, 이어질 회상은 회피가 무용한 종류의 것이었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라.

아무것도….

손끝이 수벽을 지그시 내리누른다. 어쩐지 통각이 생경해, 희게 질린 뼈마저 바로 다가오지 않는다. 무언가가, 타들어 가는 감각이 차분히 범람해오며 스며든다. 일견 초조가 곤두선다. 과거의 흔적을 닮은 조급함이 심부를 감싸 쥐었다.

……. 진정해야 했다. 지금 당장, 은란이 그를 떠나갈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비합리적인 불안감은, 그저 봄날의 산물이며 한낱 비약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은란은, 노을의 곁에 남아있을 이유마저도 쥐고 있지 않은 듯했다.

마치 중력을 잃어버린 이처럼. 틀림없이 그의 곁에 있었는데, 그 존재를 의심할 수도 없었는데. 시야를 재구성한다면, 곁을 넘어 붙잡지 않는다면 사라져 있을 것만 같다. 어떤 것도 그녀의 의미가 되지는 못한 채로.

어린 노을이 알게 모르게 감지해낸, 희미한 기억 속 소녀의 공허가 그랬듯이.

그리고, 그 언젠가 노을이 그랬듯이.

노을에게는 어떠한 미련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은 그의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 같은 것이어서, 타인에게 전하는 것조차 손쉬웠다. 말로서, 답으로서 결과이자 이유를 세상에 되돌릴 수 없게 붙박아 놓는 것마저도.

노을이 은란에게서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냈다면. 닮은 이는 서하도, 앳된 은란도 아닌, 필경 노을 그 자신일 테다. 왜곡되고 투사되어, 분명 같다고 이르지 못함에도. 그 겹침을 부정할 수 없는, 수면의 반사와 같이.

하…. 헛웃음이 자조처럼 새어나간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이마를 넌지시 기대며, 노을은 고개를 끌어내렸다. 실로 우습지 않은가.

면면 하나하나의 떠오름은, 끝끝내 조각난 연상으로 남을 뿐이었다. 낯익은 것이 마땅했다.

노을은, 언제나. 은란에게서 그가 비쳐 보였다. 죄인에게서 그 낙인까지 물려받은 소년. 삶도, 죽음도 전부 허무할 뿐인 천인.

은란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그는 어떠한 기저 위에 서 있었는가?

그리고 지금, 노을은 어떠한 심경을 품고 있는가.

응시한 하늘은 하얀 저녁달이 얼핏 미미하게 어른거렸다. 홍하의 볕이 한 줌씩 잦아들며, 끝의 끝에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낮 내에는 잊은 듯했던 영역을 되찾으며, 서서히 밤이 내린다. 빛이 져간다.

그러나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세계를 위한 단초였고, 연속됨을 이야기하는 기약이었다.

늘 그를 조심스레 두드리던 은란을, 노을은 막연히 신의하게 되고는 했다. 내일도, 내일이 아니라면 그 후 언젠가에라도 다시금 은란이 그를 찾아오리라고. 그녀의 말대로, 마치 오늘처럼, 노을을 결단코 내버려 두지 않고⋯. 끝내는 비춰온다던 여명과 같이, 그에게만은 허락되지 않은 여상한 미래처럼.

그 때, 어느샌가 품고 말았던 은연한 기대는 유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분명히. 그들은 노을에게 닿아온 친애라는 이름의 첫 외계였고, 그가 가진 첫 고대였다.

그렇기에 노을은 결국, 절대로 은란을 지나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노을이 그러한 인간으로 태어난 탓이었고, 그 누구도 아닌 오직 은란이 노을의 친우인 탓이었다.

어떤 순간, 어떤 찰나에 자신으로서 그를 바라보던 은란. 그를 향해 발걸음을 디디던 은란. 그에게 또다시, 오랜 약속을 되돌리던 은란.

그는 보답하고자 했다. 연민은 동질감으로부터 태어나는 법이었고, 과거의 미련은 안개처럼 그를 둘러싸곤 한다. 그 어느 것이든 옳았으며, 적확하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라면 할 수 없고, 지금에서야 할 수 있는 것. 오직 은란이어야만 했고, 오직 노을이어야만 했다. 그 명명만은 영구히 미상일, 노을의 기저.

그러나 어쩐지 노을은 알 것도 같았다. 늘 그렇듯이, 단일한 세계를 움직이는 인과는 끝내 하나로 수렴되기 마련이므로.

노을은 은란을 죽게, 포기하게 두지 않을 것이다.

은란이 그랬듯이.

잔존해 있던 볕의 온기가 바람에 흩어졌다.


가을밤은 마치 언약을 따르듯 숨을 죽였고, 붉은 꽃잎은 더 없도록 고요히 내려앉았다. 다갈색 암석 위 자리 잡은 빨간 동백의 선연함은, 아침의 푸른 눈동자를 잡아두기에 족했다.

……. 인연을 잇는 매개이자, 침입자를 배제하는 안전망. 은란이 직접적으로 초대된 것은, 이번이 분명 처음이다. 그녀가 홍로에게 환대받을 수 있었던 때에는 필요치 않았고. 그 후에는 불가능 했으니까.

헤매던 의식이 자연스레 가닿은 곳은, 얼마 전 은란을 방문했던 노을의 얼굴. 천연덕스러운 낯은 예사로운 것이었다지만, 축제에 대한 언질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늘 그랬었지만, 이번 축제는 기대할 만 하겠네.'

조심스러운 손길이, 꽃봉오리에 살며시 맞닿는다. 두 손으로 신중히 밑동을 감싸 쥐는 움직임이 무르기 그지없었다.

분명, 마음을 쓴 결과물이었다.

계절이 두어 차례 변모하는 동안, 부단히 은란을 찾아왔던 것과 동일한 성질의 것. 천계인이 살아가는 억겁에 비한다면 비루할 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 평등한 다정을 이리 쓸어내릴 수 있건만.

은란이 어찌, 춘난을 닮은 회고에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녀에게 내밀어진 가능성을, 잡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은란이 변함없이 머무른다 해도 부지하지 못할 찬란함. 영영 그리움으로 호명될 수밖에 없는, 완전한 듯 보였던 나날들. 친우가 친우로서 곁에 있기에, 잠시간은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던 과거. 그 모든 것이 이토록 은란을 밀어붙이거늘.

아직 드높은 창공으로 남아있을 바깥을 떠올리며, 은란은 행해야 할 채비를 피어오르듯 그렸다. 그녀는 언제나 한없이 무력했다. 그러나 그 무력함만은, 언제까지고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언젠가의 노을을 기다리는 것이, 한없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끝내 달이 떠오르자, 두 명의 방문자가 금빛 나무 아래 서 있었다. 조그만 인사를 뒤로 하고, 두 쌍의 발이 지체 없이 앞을 향했다.

이슬 맺힌 추풍이 살랑하게 그들을 맞이했다. 떠들썩한 난색이 맑은 야공을 덧씌우며 빛났다. 언제나의 들뜬 소란이 공기를 빈틈없이 메운다. 먼 과거도, 아주 멀지 않은 지난날도 손에 잡힐 듯 반짝이고 있었다.

늘 흔들리지 않는, 하나의 이유를 가지고 모였던 곳. 은란은, 다만 노을을 모든 것의 위에 두지 않는 법을 몰랐으므로. 매 순간 그 명제는 굳건했으나, 특히나 축제는 은란에게 곧 노을을 의미하고는 했다. 인생의 과반수를 차지한, 지울 수 없이 들러붙은 버릇과도 같았다.

노을의 일생에 공고히 미지로 남아있는, 그토록 전부를 지배하는 불사의 감각. 어쩌면 영원 같은 시간 동안, 그는 놓아버린 기대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되돌릴 수 없는 포기의 공백을 마냥 따라가고만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적어도 오늘 밤만큼은 그 殉愛를, 노을은 흉내라도 내보고자 한다.

인파에 섞여들어, 길을 향하는 노을을 은란은 뒤따른다. 밤하늘의 색이 섞여든 신을 붉은 신이 묵묵히 쫓았다. 이따금씩 평연히 느려지는 발걸음을 제재할 이유 또한 찾지 않은 채.

의미없고, 싱겁게 떨어질 뿐인 말들을 밟아나가며, 노을과 은란은 찬찬히 흐려져 간다. 여느 누구와 다르지 않은, 단지 행사를 즐기는 모두로서. 창백한 빛을 한 남자와 적색 옷을 걸친 여자가 그들의 옆을 스쳐 지나간다.

다채로운 시야에 새겨지고, 흘러나가며 간략한 만남을 반복한다. 그저 단적인 인상의 일부를 이룰 따름인 행인.

그러나 간혹, 그를 벗어나 별개의 기억으로 살아남아 존재하게 되는 것이 있다.

어린 여우 하나가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 돌연 부동했다. 백색 머리칼 아래, 티 없는 회색 눈이 홉뜨며 그 안계를 한껏 담는다. 그녀가 알지 못하는 낯이었으나, 그럼에도 분명히. 틀림없이—

"…천호님?"

여리나, 결코 흔들리지 않고 뻗어나간 음성이었다. 조금의 의심도 없이, 뚜렷하게 은란을 호명한다. 한 차례, 같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이끌리듯 시선이 향해간 발신인은, 낯익은 표정으로 은란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곱슬거리는 짤막한 머리 위로 두 여우 귀가 솟아 있었다. 유순한 눈매가 무구하게 희락의 빛을 띤다. 일족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 어린 무옥 여우. 그때와는 달리, 축제에 걸맞은 고운 옷차림이 더없이 잘 어우러지는 모습이었다. 노을은 잠시 첫낯의 소녀를 관측하고는, 은란의 곁에서 한발 물러선다.

"저, 저번에 도와주셨던 천호님이시죠? 그때는 정말 감사했습니다!"

"…별 말씀을요. 어차피, 제 힘도 아니었습니다."

얼굴 한가득 웃음을 채우며 아이가 꾸벅 허리를 숙였다. 느리게 눈높이를 끌어내려 맞추며, 은란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차분히 굽힌 무릎 위 올려둔 손끝이 느른했다. 그 옆얼굴을, 노을은 가만히 응시했다.

네? 앳된 얼굴에 언뜻 의아함이 스친다. 은란은, 그저 여전히 멀건 낯을 하고 있었다. 얇은 미소에, 수렁의 흔적이 슬며시 맺혀 보인다. 타인에게는 한없이 불가해할, 습관과도 같은 무력감. 도저히 떨쳐낼 수 없을…

"…다른 분도 함께 도와주셨다는 뜻인가요? 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천호님이 나서 주셨으니까요!"

"예?"

"도와주러 오시지 않았다면 모두 죽었을 거예요.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는데, 천호님을 만나서 다행이었죠!"

아무튼 잘 지내시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눈을 접어 웃으며 떠나던 여우를 은란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아이의 음영마저 인파 사이로 녹아들어 사라질 때까지, 계속해서. 그 희미한 흔적을 몇번이고, 몇번이고 덧그리듯이…. 서늘한 밤바람에 흘러가지도, 들뜬 불빛에 가려지지도 않도록.

엷은 암야로 물든 얼굴 속에서, 짙푸른 홍채만이 피어오르듯 초라하게 빛났다. 미약하기 그지없었고, 언제라도 사라져 버릴 불씨였다. 그런데도, 그것만으로, 노을은.

"자네. 괜찮다면, 나를 따라 와 보지 않겠나?'

멈춰두었던 발길은, 당초부터 흔들리지 않는 목적이 실려 있었다. 노을의 선두에 따라 차츰 말라가는 소음의 끝이, 내부의 시작으로 이끌린다. 외인의 여흥마저 가닿지 않을, 단절의 장소. 철저한 관망의 영역이 높게 서 있었다. 처마 아래, 홍빛 환영이 무한한 남색 위에서 친숙함을 흉내 냈다. 금빛 나뭇잎과 맞닿은 정자는 아직 비어 있었다.

……. 그 사적의 함의가, 도저히 모른 체 할 수 없는 명백함이. 은란은 꼭 책임 같았다. 어떠한 말을 붙여보든, 회피는 그저 회피였으므로. 그렇기에 걸어온 타성이 이제는, 오롯한 은란의 행보로서 남아 있었다.

"아직 말하지는 않았네. 누군가 찾아오리라는 예고 정도는 해두었다만. 그러니, 자네의 선택일세."

선택. 그가 그런 말을 입에 담는가? 은란이 지금 문을 연다면, 그것은 단지 그녀의 선택이 되는가?

들어가 홍로를 만난다면, 그녀는 사과해야 할까? 고마워해야 할까? 인사를?

아니, 은란이 그런 보편을 담을 처지는 되었던가.

어떤 물음에도 정답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러니, 그러니 은란이 믿을 수 있는 것은.

어둑함의 사이, 그저 하얗게 머물러 있는 노을의 미소. 만월을 닮은 투명한 눈동자. 담담하고, 고요하며, 여느 때와 같이 태연하게… 불안을 가장해둔 낯. 그는, 이러한 종류의 초조함에 능숙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완전하지 못한 단념은 끝내 미련을 의미하기 마련이었다.

노을은 염려하고 있었다. 불신이 아닌, 신의로써. 무엇도 간섭할 수 없을 듯한 평면에, 은란이 담긴다.

그리하여 비로소 은란은, 그녀를 바라보게 된다.

노을은 은란이 다시금 되돌아오기까지 자리를 지켰다. 보통과 비교한다면 길었고, 예상보다는 짧은 시간의 기다림이었다. 그것이 은란의, 우정과 우정이 가능했던 최대의 수용이었으리라고 노을은 다만 짐작한다.

다소 모호한 종류의 표정을 짓고 돌아온 은란은 거조 또한 그러했다. 일순의 휴게는 권해졌을 뿐 맞물리지 못했기에, 노을은 그저 걸음을 계속했다.

수없는 기억이 거리를 스쳐 가고, 노을과 은란은 단지 그 사이의 지금을 걷는다. 양옆 붉은 매대의 행렬이 연속되다, 어느 순간 끊어진다. 마치 밤하늘의 연장선과 같은 수면이 다가온다. 완연히 내린 어스름으로 푸른 빛을 띠는 연꽃에, 그제야 은란은 얕은 숨을 삼켰다.

"자네, 이 곳을 기억하는가."

방해되는 것 하나 없이 반짝이는 별빛이 노을의 배경이었다. 연잎에 둘러싸여, 스스럼 없이 눈앞을 등진 노을이 양손을 젖혀 맞잡는다. 부드러운 소태가 그의 얼굴에 천연이 일렁였다.

"…장난은 그만두시지요."

"하하, 알겠네."

그녀가 이 곳을, 그 대화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은란의 변하지 않는 기저는 언젠가부터, 그녀의 가장 큰 비밀조차 되지 못했다. 함구는 때로 공공연한 묵시의 일환이 되고는 했다. 가볍게 웃어 보인 노을이 말을 이었다.

"그 축젯날에, 자네가 했던 말 또한 잊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하네. 변함없다고 했었지."

"네."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가."

야기 위를 미끄러지며, 언뜻 산뜻이 전해오는 물음이었다. 그럼에도 조금의 오차도 없이, 분명하고 느릿하게 가라앉는다. 네. 은란이 답한다. 한 치의 주저도 달라붙지 않은, 곧은 음성이었다.

예측이 실재가 되어 박힌다. 선선히, 시야를 단절하고는 다시금 밝힌 노을이 발걸음을 뗀다. 절차의 마디마디를 짚어내듯 차분한 동작은, 은란의 한 걸음 앞에서 멈췄다.

두 개의 하얀 손아귀 사이로, 붉은 옷소매가 자리 잡는다. 그 속의 손목을 약하게 고정하고, 노을은 시선을 맞부딪힌다.

"나는, 자네가 그러지 않기를 바라네."

조금의 반동은 있었으나, 은란은 어떤 거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일렁이는 수륜으로, 노을을 바라본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은란 자네도 알고 있잖나."

"…."

변하지 않는 것. 변하려 하지 않는 것.

"제가, 부담을 드렸나요."

미련하게, 숨기려 들지 않아서. 언제나 지나치게 다정한 당신의 심려를 빼앗은 건가요. 늘 이런 나조차 신경 쓰고 마는 당신을.

"그런 뜻이 아닐세. 그렇게 변질될 일도 없고."

"그렇다면, 어째서…."

"그저 내가, 자네를… 그렇게 두고 싶지 않다는 말이네."

떫은 자조가 노을의 얼굴 위로 쏟아진다. 그는, 은란이 내일을 기대했으면 한다. 단지 노을이 찾아오기 때문이라는 것 뿐만이라도, 삶의 존재에 안념했으면 한다. 지난 계절들의 방문이, 적어도 실낱만큼의 의미라도 부여했기를. 그녀가 그가 느낀 감정을 알아내고 보답 받았기를.

의연함이, 무너져 간다.

"자네는, 그동안… 나를 기다려서, 살고 있었나?"

아, 노을은 깨달음 같은 탄식을 삼켜낸다. 비로소 이것이었다. 가장 비이성적이고, 아둔하고, 무책임하며 오만한 선언. 은란을, 상대방을… 관여할 수 있다며 오판한다. 논리도, 경계도, 겸허도, 그 무엇도 단 하나의 감정을 뒤집지 못하는 감각. 그 하나에, 다른 모든 것이 한낱 티끌로 전락해 휩쓸린다. 믿어버린다.

다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은란만은 알 마음.

은란은, 그저. 그저, 노을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청색이 고요하고 소란스럽게 요동친다. 이해하고 있었다. 이해되고 있었다. 제멋대로의 착각일지라도. 은란은 노을의 눈을, 말을, 위로를… 응시한다. 노을의 두 손이, 그녀를 붙든다.

"…모르겠습니다……."

단지 제자리에서, 의미를, 그녀의 의미를 씹어 삼켜낸다. 과연 그 결과를 진정 바라는지도 모르는 채로. 그럼에도 그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확신에 비껴 서 있어 보잘 것 없었고, 이끌릴 종국 또한 불분명했다. 손에 쥐어진 이것이 원죄의 시초일지도 몰랐다. 모든 금기의 바탕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그래도 좋네. 자네를 위해… 살아주게. 그러기를 바라는 나를 위해, 살아주게."

단 하나가 모든 것이 된다고, 그렇다면 전부 괜찮아질 것이라고. 속아 넘어가고 싶었다.


희끄무레한 새벽달은 바위산의 안쪽, 그 주인에게는 가닿지 못했다. 퇴색돼가는 한밤의 마지막 잔재만이, 그녀에게 남아 함께한다. 축제로부터 정확히 하루, 그리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때였다. 오늘이 어제로, 내일이 오늘로 변하는 시각. 영원히 멈추지 않을, 은란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그대로일 지겨운 반복.

그러나 내일을, 모레를, 주를 넘어, 그 오늘이 완전한 과거로 자리 잡는대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 반복을 꿰뚫는 것이 있다. 미진하게, 심지를 흉내 내듯이.

은란은 유습하게 끌어올린 손목을 내려본다. 잦은 전적에 따라, 그리고 습관이 아니더라도 눈에 새겨진 끈을 담는다. 조금도 바래지 않은, 결코 바래지 않을 것만 같은 천자락. 은란의 사소하고 거대한 의미.

그것은 전부가 될 수 없다.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은란은, 어린 은란은, 마침내 주어진 작은 가치를 모든 것으로 삼지 않는 법을 알지 못해서. 완벽한 구원에 안주하는 법밖에는 몰라서….

그리 믿었더라도, 정말로 모두 괜찮아지지는 않았다. 은란은 노을과 차라리 생명을 맞바꾸고 싶었으니까. 절명의 노골적인 낌새에 틀어박힌 밤이, 너무 길고 깊었으니까. 그건 절대로, 절대로 '괜찮은' 상태가 아니니까. 설사 가장 큰 절망이 기적처럼 사라졌어도, 그에 따라 은란의 모든 절망이 사라지지도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해야 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은란은 제 완수를 감싸 잡는다. 손가락에 가려졌음에도, 끝내 지워지지 않을 푸름을. 부정할 수 없는 변화를….

진홍색 머리칼 아래의 푸른 눈을, 절대 닮아갈 수 없을 또렷하고 생생한 시선을 마주했을 때. 은란은 미안하다는 말만이 그녀에게 허락된 것이라고 느꼈다. 유일한 가능이라 해도, 그것이 곧 용서이자 복귀는 아니었다. 그를, 어쩔 도리 없이 바라면서도 은란은 바라지 못했다.

은란의 중심을 조금도 온전하게는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누구에게도 그런 것 따위를 기대할 수 없으면서, 고작 이런 의미를 부여했으면서. 세계를 믿어보라고 한다. 어떤 미상은 영원히 미상으로 남는다. 어떤 반창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고, 나약하고, 불완전하기 그지없더라도. 수도 없이 흔들리더라도. 또 다시, 앞으로의 수많은 실패의 초석이 될 뿐이라도.

그리고, 그럼에도 당신이 있다. 저열하고, 가혹하고, 지난한 세상에, 당신이 있다. 노을을 사랑한다면 그가 있는 삶까지 사랑해야 했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하게도.

그것은 전부가 될 수 없다. 그러나 하나가, 모든 것의 시작일 초라한 하나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할당된 이야기가 영영 끝난 것 같더라도. 이야기가 아닌, 생은 이어지는 것이라서.

바깥의 밤이 지금 가장 어두울지도 모른다고, 은란은 생각했다. 분명한 여명도, 쾌청한 낮도 아직은 더없이 멀었지만. 그를 기다릴 자격만은 어설프게 갖춘 것 같았다.

서서히 확고해져 가는 백호의 계절을 떠올리며, 은란은 아침 공기에 대비했다. 지금 당장은, 기다릴 것이 생겼다. 기실, 완전한 무지의 감각도 아닌 까닭이었다. 따지자면 되려 익숙해진 것에 가까웠다.

그가, 늘 볕을 비추어 줬으니까.

노을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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