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해

[노을은란] 메리 굿바이 투

현대AU

선연하다 by 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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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GQzbloeLs30?si=pHEl5-bUUW8kQz_k

*창작 세계관 주의

*'Merry Christmas to Myth' 합작 참여작

https://posty.pe/kexe8x

눈이 내린다.

엄동의 한기는 다만 외벽을 겉돌고, 서리가 그 위를 촘촘히 메꾼다. 네모난 제한으로 내다보이는 설경은, 입김과도 같은 담배 연기로 이지러진다. 노을은 다시금 니코틴을 받아들이며, 창문틀의 위로 무게중심을 쏟았다.

완연한 겨울이다. 매듭 달의 정가운데에 그는 어느덧 서 있었다.

잦은 균열의 소리와도 같은, 방 한켠의 타오름이 공기를 고요히 잡아끈다. 메마른 화기가 얇은 천 자락에 달라붙어, 피부와 맞닿은 건축재의 서늘함이 무색도록 만든다.

한없이 평화롭고 고루한 요새에서, 노을은 그의 죽마고우가 내민 권유를 익숙히 받아들인다. 매캐한 숨이 그의 폐부를 부풀린다. 권태는 그가 모정의 유별난 온기 다음으로 배운 것이므로….

그는 원망하지 않는다. 기실, 노을은 단 한 번도 그러지 않았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몫을 기꺼이 나눠 삼켰기 때문에. 그는 언제나 미련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 사실은 노을의 유례없는 행운이었고, …. 동시에 가장 완전했던 불운이자 저주였다. 이제 와 돌이켜 보자면 그랬다.

종말만이 예정된 초읽기에, 남겨둘 애착 따위는 더없는 걸림돌일 뿐이라고. 모든 것의 최초로부터 깨우친, 그에게 유효했던 유일한 명제를.

회귀, 그 정도의 언어로 명명해도 좋을 것이다.

노을은 모든 신의와 애정과 의지와 그리고 상애를 붙들고, 천천히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불멸의 생은 이제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모든 인연은 유한했고, 고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되려 그렇기 때문에.

육중한 목재에 맞부딪힌 뼈대의 소리는 숭고한 계시와도 같이 느껴졌다. 침묵이 빽빽한 계절의 흡음이 그를 엉망으로 흐린대도, 남겨진 비루한 육신마저 마치. 신성의 열화된 송출인 듯하여.

노을은 문을 연다. 망설임 없이 고리를 비트는 손짓의 명료함은 그의 케케묵은, 어떤 만성이었고…. 또한, 예감이었다.

만약을 택한다는 것은 곧 기대인가?

싸늘함이 그에게로 빠져드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시야를 잠식한 백야 속에서, 작열하는 듯한 푸르름이 잔상을 남긴다. 숨결이 허공에 맺히고, 또 흘러내리며 윤곽을 하얗게 흩트려 낸다. 불규칙한 혈색이 창백한 살갗을 부분부분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린 공기로 스며드는 그 더운 호흡을, 코끝의 열기를, 당연한 시선을. 노을은 바랐던가.

냉기에 데인 듯, 살과 맞닿은 손끝의 신경이 무던했다. 그에게 닿은 눈발이 손목의 피부 위로 미끄러져, 곧이어 은란의 옷깃을 적신다. 유리 조각 같은 바람이 그들에게로 부서져내린다. 연갈색 머리칼이 잘게 나부끼며, 안계를 파랗게 가른다. 은란은 그 모든 것으로부터 유리된 채, 그저 노을에게로 허물어졌다. 설한이 그녀를 떠미는 대로.

"키스해 주세요."

모든 인연은 유한했고, 고별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그들은 죽어간다. 그러나 되려 그렇기 때문에, 미련은 다만 불가항력으로써….

얼어붙은 뺨의 감각이 익숙했다.


신은 죽어가고 있다.

신화는 스러졌고, 숭배는 말라붙었으며, 권능은 흩어져 가고 있다. 시멘트로 뒤덮힌 신전 위에서, 인간은 더이상 헛된 기도를 쥐어들지 않는다.

그들의 본질을 구성하는 혼돈은 질서로 변모한지 오래였으며, 지성체의 지위를 가르려는 시도는 수없이도 무용했다. 천공은 더이상 미지 속의 안식으로 남지 못한다. 절명해가는 이야기 가운데에서, 모든 영물과 요괴와 신령은 질 나쁜 악습으로 전락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몰락도 지리하고 가는 헐떡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생존자들은 상실을 겪어내며 하나하나, 멸절해갔다. 설화의 잊혀짐이 곧 객체의 소실로 변해갔다.

 신성이 사라진 자리를 멀지 않은 부정이 메꿨다. 가호를 끝내 집어삼킨 저주가 폭주했다. 촘촘한 망념과 망각된 것들의 찌꺼기 뿐인 잔해가 뒤섞여, 천계는 고요한 아비규환이었다. 동귀는 곧 덧없는 이상으로 갈음했다.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자들이 있었다. 망집일지, 희망일지 그 누구도 모를 것을 붙들고 무덤을 만든 자들이. 한 때는 둘 또한 등을 같이한 끝없는 어전禦戰이 있었다.

노을과 은란이 이제는 뒤로 하고만 전선은 서로를 붙들, 충분한 당위가 되어주었다. 시련은 으레 결속에 따라붙는 부품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므로, 인계의 안주가 그들을 귀결한 것 또한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노을은 생각했다.


새벽의 연장선을 잇는 강상이, 기척의 부재를 태연히 파고든다. 흐릿한 동천이 열따랗게 세상을 채운 채다. 모든 색채가 얼어붙고, 내쉬는 숨이 헛돈다. 은란은 노을의 곁에 없었다.

간밤의 폭설은 설익은 걸음걸이를 맞이하며, 그대로 남아 있었다. 마치 그가 거짓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듯이.

흰 설원의 불청객은 성마른 눈길에도 굳건해 선명했다. 간간이 나리는 눈송이가 발자취를 엷게 인몰해나간다. 눈밭과 맞닿아 척척해져가는 옷감이 창백하게 물들었다. 상기된 뺨을, 저 멀리 입김이 할퀴고 지나간다.

"자네. 고뿔에 들겠네."

회유하듯 끌어올린 손끝이 서늘히 굳어 있었다. 낯의 윤곽이 둥글어지고, 시선이 늘여진다. 은란이 시야를 물리고, 시리도록 푸른 눈이 그를 마주 본다. 다색 머리카락이 흩어질듯 가볍게 바람을 받아들인다.

"…노을 님께서는요."

차게 식은 손가락이 그의 수지를 단단히 결속했다. 면으로 비스듬히 닿아오는 온기가 아둔하도록 멀다. 예외없이 드러난 두 쌍의 완수와 발목 따위가 울긋불긋하다. 삭풍이 옷차림의 무색함을 무심히 쓸고 지나갔다. 경솔한 헛웃음이 노을의 입가를 매만졌다.

"그렇군."

제 뺨을 감싼 손뼉을 덮어 쥐며, 노을은 고개를 기울였다.

은란은 그를 떠났다. 그리고 다시금 되돌아왔다.

그 의미를, 끝내 우묵히 남겨질 흔적의 깊이를 노을은 가늠해보지 않는다. 그저 지나치도록 고질적이었던 버릇을 수행하며, 오랜 결지를 되새긴다.

기대하지 않으리라. 지금만은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린 아이의 고집과도 다름없는 만용을 부렸다.

그러나 노을은, 어쩌면.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럼에도, 은란에게라면 얼마든지 상처 입어도 좋을 것 같았다.

"춤추겠는가?"

허리를 숙여 짐짓 그럴듯한 간청을 흉내내며, 노을은 이 겨울이 영원하기를 바란다. 젖은 목덜미를 훔치는 마른눈이, 어쩌면 그 청을 진실되게 할 것만 같았기에.

기꺼이, 그런 환청 같았던 입엣말도, 우습도록 과장된 예의범절도, 과거의 추상도, 현재의 희희도, 눈 속의 연인도. 언젠가는 모두, 설원 아래 묻혀 녹아 사라질 것이었기에. 


색색깔의 백열등과 숱한 계절성 디스플레이의 빛이, 은란의 건조한 낯을 훑고 지나간다. 인류 문명의 최전선이라 이를만한 대도시의, 다소 허황된 낭만이 귓가를 끊임없이 찔러댔다. 몇십만개의 구둣발이 버석하게, 혹은 들뜸을 간직한 채로 지면을 딛는다.

은란은 노을에게 되돌아가고 있었다. 미경험의 언어와 생활양식 따위가 전대미문의 추위보다도 더 익숙해진 때였다.

옷깃을 가볍게 추어올리며, 은란은 뉴욕의 크리스마스를 묵인했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장식들이 색유리를 부숴낸듯, 잘고도 짙게 반짝이며 시야를 메웠다. 얕은 숨결이, 희끄무레하게 떠올라 번지고는 사라졌다.

언젠가, 그에게 자신을 사랑하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명징한 종소리와 함께, 캐롤의 곡조가 흐리게 공기 속을 떠돌았다. 은란은 느리게, 그러나 멈추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모든 피회의 순간조차도, 노을을 도처로 삼는 것의 일환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다.

기실 마땅한 일이다. 은란의 행동은 언제라도, 노을의 곁을 붙들기 위함이었으므로. 그리하여 은란이 세계에 존속할 수 있도록. 노을이 그 어딘가에서, 숨을 내쉴 수 있도록….

한낱 요호는 천계의 신장에 결코 비할 수 없다. 그 격도가 이름이 바래가는 경과이든, 혹은 멸절의 전조가 찾아오는 때이든.

노을은 남겨질 수만은 없는 사람이었다. 그의 통각도, 생욕도, 삶도 늘 고립에 매여 있었으므로. 모든 의미는 끝내 곁의 애정뿐으로 정의된다. 노을의 자처自處는, 그 어느 때라도 잔류의 결과물이었다.

노을은 떠나갈 이였고, 동시에 남겨짐을 터득한 이이다. 그 상이는, 끝내 그의 전락으로써 일맥상통한다.

인계에서의 노을은 종종, 둔중히 다물린 대문을 응시하곤 했다. 명백한 유족의 눈이었다.

쇠락해가는 은란이 아니었다면, 적어도 그이상은 잃지 않았을 그의 구성들. 전투를 벗어나지 않았다면 함께할 수 있었을 것들.

그렇기에 은란은. 당연한 듯이 이끌어내진 긍정이, 흩어져가는 실재가 두려워졌다. 여우 구슬이 빛을 잃었던 아침이었다.

그녀의 부재는, 작금의 노을이 놓일 수 있는 종류의 것인가? 노을의 상실을 은란은 견딜 수 있는가?

그들이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은, 촘촘한 비극의 일환이 되어가는가?

어쩔 수 없는 이치였다. 사랑을 하는 자는 단지 누구보다 파멸에 가까운 까닭에…….

그렇다면 적어도, 어떤 자는 누구에게도 지워지지 않은 죄를 짊어져야 했다. 익숙한 일이었으며, 기꺼운 일이었다. 이별은 언제나 그녀가 짊어질 몫이었다. 은란이 범한 악업은, 모조리 단 하나의 이름 아래 정렬된다.

더이상 노을을 이루는 그 어떤 것도 세계에 유실되게 두고 싶지 않다. 그러기 위해, 그녀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야 할지라도.

시가지를 빠져나와 들어선 거리는 과자집처럼 반짝였다. 영하의 대기가 뺨을 스쳐내린다. 끝이 머지 않았다.

오롯한 은란의 선택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이기본위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최소한. 마지막의 마지막에서라도.

제대로 된 끝을.

노을을….


크리스마스날 아침에, 은란은 동화 속 성인 니콜라스를 모본한 듯한 모습으로 눈 속에 서 있었다. 터무니 없이 가득찬 반투명한 비닐. 그 위로 비집은 실루엣들이 급격한 굴곡을 만들었다. 일회용 가방과 그에 담긴 물건들을 단단히 감싸안으며, 은란은 눈을 깜빡였다.

선물 꾸러미 대신 꽉 채워진 플라스틱 쇼핑봉투를 지체없이 받아들며, 노을은 은란을 문지방으로부터 끌어들였다. 체온을 돌이키려는 시도는 다양한 품물들을 수반하며, 여러 차례 반복됐다. 은란이 두른 마른 수건에는 이내 녹아가는 눈결정들이 달라붙었다. 봉투 속 제각기로 얽힌 것들을 꺼내, 헤아리는 건 그 다음이었다.

분명 가지각색의 집합이었으나, 하나의 구심점만은 명확했다.

형형색색의, 작고 다소 조잡한 줄전구 여럿. 차곡차곡 해체된 종이 나뭇잎의 모형 상록수 하나. 둥그렇고 뾰족한 글리터 오너먼트들과 모두 다른 색채의 모루 서너개. 무겁게 장식된 호랑가시나무 화환과 양산형의 특식들, 실내용 장식품들.

마구잡이의 구매품들은 얼핏 유년기의 욕심과도 닮아 보였다. 쌓인 고전 비디오들을 마지막으로 갈무리하며, 노을은 짙은 빛깔의 표지를 쓸었다.

은란은 자그만 여지도 남기지 않을 셈인 모양이었다. 설령 그것이 얄팍하기 그지없는, 공허한 모방에 불과할지라도. 어떤 질량도, 마음도 실리지 않는 공백을 긁어모으며.

그렇다면 노을은, 다만 그것만은 온전히 수행해낼 자신이 있었다. 그 기대만은 두렵지 않았다. 보기 좋은 겉껍데기란, 그에게 가장 낯익은 이해였으므로.

은란이 욕을 나서고, 함께 매식 서너개를 맛본 조반을 마무리하자 명절의 전면이었다. 가장 처음으로 집어든 것은 모조 나무였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기둥을 차례차례 조립하고, 인조 잎사귀들까지 꽂아넣는다면 본형의 준비는 끝이었다. 제법 그럴듯한 식목의 모양새가 방 한 가운데 우뚝 섰다.

장식품들이 가장 적합할 곳들을 헤아리고, 번복하며 노을과 은란은 차차 트리의 녹청을 채워나갔다. 적색과 금색, 은색, 녹색의 구체들이 가지 하나하나 빼곡히 매달린다. 마지막으로 가볍고 바스락거리는 장식끈을 두르고, 금별 하나를 얹는다면 성탄목은 완성이었다.

두어 시진이 금세 흘러 지나가고, 그 다음은 장식등의 차례였다. 끊임없는 강설과 익숙치 않은 방식에, 눈더미는 수없이 두 쌍의 발을 맞이했다. 발간 두 낯이 삽시간에 초라하고, 짖궂은 파안으로 물들었다.

이어진 무용한 시도들은 끝내, 단 두 개의 기둥에 감긴 전구로 끝을 맺었다. 창백했던 눈구름은 어스름한 야공에 뒤덮힌 지 오래였다. 들어와 몸을 달구고, 남겨진 잔반들을 덥힌 식사가 지나자 완연한 겨울밤이었다.

수상기를 마주보며 몸을 뉘인 노을과 은란은 곧이어 영화를 재생한다. 타이틀 시퀀스가 십몇초간 스크린을 장악하고, 그를 뒤따라 영상이 이야기를 비춘다.

화면은 픽셀 하나하나 크리스마스로 반짝였다. 남녀노소의 짜맞춰진 배우들은 매끄럽게 극을 이끌어가고, 각본은 그들을 거듭 연출한다. 인물은 절망하고, 무감을 겪고, 그에 화답하는 환희를 겪는다. 위기에 잇따른 절정과 함께, 오로지 기쁨과 가족과 기적만으로 결합된 결말이 부서져 내린다. 마치 성탄의 날에 적합한, 허락될 수 있는 요소란 오직 그것뿐인듯이.

두 개의 작품으로 나눠진 관람의 중반부부터, 은란의 호흡은 정갈히 숨을 죽였다. 그의 상체에 맞닿으며 성기게 흘러내린 몸이, 더없이도 소중함을 확신해서.

요에 단단히 감싸졌음을 확증한 노을은, 디스플레이의 빛이 내려앉은 눈꺼풀을 담는다. 평이한 낯은 안식의 표면과 닮아 있었다. 그 얼굴에, 영원이 찰나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은란은 그의 기억과 비교해, 뚜렷하게 잠이 길어졌다. 그가 그녀의 이별을 이해하지 않았다면, 무척 늦게 깨달았을지도 모르는 것.

영화는 예정된 끝을 향해, 담담히 프레임을 밟아나간다.

네 시간 가량의 영상이 전부 끝나자, 자시의 정중앙이 목전이었다. 나리는 눈은 겨울의 남청빛을 훼방 놓았다. 겹겹이 쌓이는 침묵의 소리가 들려온다. 숨결은 잠시도록 영원하다.

노을은 도외에 손을 뻗는다.

감각을 지겨이 탈환하며, 은란은 눈을 떴다. 그 홍채 위로, 환시 같은 빛무리가 맺힌다. 노을은, 그 푸르름을 외면하지 않으려 잠깐 애썼다. 고작 이조차 감내해낼 수 없는 육부라면.

그녀의 자의를 승낙하는 꼴밖에 되잖는가….

"자네, 즐거웠는가?"

맞잡은 손이 이토록 가까워서.

"네. 무척이요."

"다행이네."

그러면서도 더없이 멀어서….

은란의 방향은 다시금 뉴욕의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다. 대기에 섞여든 시선이, 일렁이며 공간을 누수한다. 노을이 알지 못하는 은란. 그가 붙잡을 수 없는 그녀. 그녀가 아주 오래 고대해오던 것.

밤은 매끄럽게 존재를 감추며 내달린다.

은란의 존재가, 오직 그만을 위해 남김없이 쓰인다.

다만 그럼에도, 그 자그만 침묵을. 말과 말 사이의 행간을 곡해하듯 매달리며…

노을은 분명 이해하고 있었다. 언제나 이러한 명명들은 일축되며, 동시에 영원불멸해 그를 전락하므로.

그러므로 마지막으로 남은 삶의 선고가, 그의 손을 잡아오는 것 또한 당연한 것이다.

"노을 님."

은란은 말을 잇는다.

살아주셔야 해요. 알겠네.

천계로 돌아가세요. 남아있는 분들이 분명 있을 테니, 함께하세요. 알겠네.

멀건 낯의 소태가 저주처럼 그를 적신다. 감사의 말은 무분별하게 뇌중을 구른다. 이제 그는, 영영 합리화 따위에 제멋대로 흐려질 수 없다.

노을은 기억되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오직 그만이 은란을, 은란의 실재와 욕망과 삶을 비망하므로.

낡아빠진 결단이 되풀이된다. 무분별한 무감각이, 어쩌면 조금 감상적으로 헛돌았다. 은란은 어딘가 우스운 기분이라고 생각했다.

정중하게 준비된 평안함이 번진다. 그토록 오래 애썼건만, 끝내 인간이었다.

당신도, 나도.

"이제 그만할까요?"

그는 눈을 감았고, 떴다. 무엇도 변하지 않았다. 자네가 바란다면.

고정된 합의였다. 어느 순간에도 변하지 않던 전제였다….

"키스하겠나."

그러나 그를 알면서도 노을은.

은란은.

로맨스는 다만 언제나 가장 흔한 기적이었고, 크리스마스는 그 배경으로써 더없이 적합했으므로.

일순을 소원했다.

크리스마스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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