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버매패] 후회

이기심, 열등감 그리고 그리움

황올 by 황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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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셈디에 -> 오버매패


1.

한 손에는 따뜻한 커피를 들고, 한 손에는 파일 뭉치를 들고 오버마인드가 연구실 문을 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연구실 한 귀퉁이에는 부른 적 없는 반가운 손님이 앉아있었다. 지난주에 평소보다 유독 말이 많길래 그 마지막 날처럼 한동안 못보나 싶어 걱정했는데 꼭 그런 것도 아니었나보다. 어쩌면, 몇 년 만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저것의 시간을 가늠하기란 복잡하고 쓸데없는 일이다. 책상 위에 파일을 내려놓고 다가가니 그것은 인사를 건네는 오버마인드를 쳐다보고 고개를 까닥인다.

"기억에 이상 없고, 신체 구성에 이상 없고. 싸가지도 없는게 매우 정상이군. 퇴원하십쇼, 환자분."

"참나."

의사흉내가 마음에 안 드는 지 작은 얼굴 속 미간이 구겨진다. 오버마인드는 그 모습에 쿡쿡 웃으며, 매드 패러독스의 상태에 문제가 없다는 걸 재차 확인하고서야 자신의 책상에 앉았다. 손에 든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패러독스를 쳐다보니 그새 몸을 돌린 채 무언갈 하고 있다. 데이터 정리라도 하는 모양이다. 짧은 대화 후 조용해진 방 안. 톡. 톡. 톡. 검지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며 작고 둥근 머리통을 바라본다.

저 안에 들어찬 끈적한 덩어리들을 빼낸다면 지금의 너는 무엇이 될까. 무엇으로라도 남긴 할까? 내 옆에 남아는 주려나. 이미 때를 늦어버린 후회. 그 이기적인 입을 꿰매는 생각.

2.

이 곳에 있어서는 안되는 외부인. 그러나 뻔뻔하게도 얼굴을 내밀고 제 집마냥 멋대로 굴던 그런 사람이었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 애드. 에드워드 그레노어. 그러나 그와 그는 다른 존재였다. 소름이 돋고 거북할 만도 한데, 그도 그답게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니어서, 흥미로워했고 이득을 위한 제안을 했고 자신에게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고 시답잖은 감정을 나누었다. 계속될 것만 같던 날들. 그보다 가까워지지도 않겠지만, 그보다 멀어지지도 않을 자기 자신. 그러나 타인.

시간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기회는 누구에게나 주어지고, 선택은 누구에게나 잔인하다. 빛도 들지 않는 가파른 내리막길에 미끄러지던 디아볼릭 에스퍼에게도, 시간은 다가오고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때와 같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을 뒹굴던 몸이 한순간 잠잠해졌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널브러진 에스퍼가 비정상적인 호흡을 뱉었다. 들숨과 날숨이 일정하지 못하다. 언제 끝이 온다 해도 이상하지 않는 몸이란 것을 둘 다 알고 있다. 디셈블러가 제 다이너모를 부른다. 투약을 위한 진단을 시작한다. 하려는데. 분석하고 판단한 것은 에스퍼가 더 빨랐다. 순간 발사된 에너지포는 살덩어리를 꿰뚫고 지나가 바닥 면까지 부순다. 으헉. 컥. 고통을 입으로 뱉어내다 숨이 끊어진다. 시간이 비틀린다. 발을 딛고 선다.

"너. 내가 이딴 건 응급처치는 커녕 악화만 시킨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지? 멍청한 것이 뇌도 녹아버렸나 보군."

바닥에 누워있던 에스퍼를 보느라 아래를 향하던 시선이 그가 다시 서 있는 곳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돌아간다. 학습 능력이라곤 없는 환자 새끼 때문에 열이 오른다. 만들고 있던 약에서 진통 효과가 있는 것은 죄다 빼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래도 서 있는 것조차 제대로 못 하고 비틀거리는 꼴을 보면 화내서 무엇할까 싶다. 육두문자가 섞인 의학적 조언을 말하면서 에스퍼의 허리에 팔을 둘러 지탱해준다. 켈록거리며 기침을 하던 에스퍼가 머리를 들고 그와 시선을 맞췄다. 검은 눈은 혼란과 두려움으로 차 있다.

"에스퍼?"

"뭐야. 누, 누구야? 여긴 어디지?"

겁을 집어먹고 황급히 디셈블러의 품에서 빠져나간다. 아. 으.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제 손톱을 까드득까드득 깨물며 뭐라 중얼거린다. 이런, 진짜 뇌가 녹았나보다.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라더니. 그가 가끔 날짜나 장소를 묻긴 했지만 그건 그의 여행 특성 때문이지 기억에 문제가 생겨서가 아니었다. 저것 좀 봐라. 그의 상태를 대변하듯 다이너모들이 이동하는 그의 옆을 따라가지조차 못하고 위아래로 정신없이 흔들린다.

"뇌 손상이라... 그리고 나를 못 알아본다는 건 아마도...

너 이름은?"

"이름? 이름. 나는 그러니까, 그게, 이름이..."

"역시."

상태가 심각하다. 디셈블러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자기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원인이야 뻔하다만 해결책이 되진 못한다. 그야 지금으로선 시공독은 악화를 막는 것은 고사하고 에스퍼가 덜 아프게 죽어가도록 하는 게 고작이기 때문이다. 방금 죽고 살아났으니 되돌려보는 것도 불가능하다. 골이 땡긴다. 스캔을 좀 하고 아까의 발작을 확인해야겠다. 일단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잠시 기다려 보는 게 좋을 것 같다.

3.

일주일이 지났다. 흩어진 에스퍼의 기억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디셈블러가 적당히 이름과 나이 따위를 알려주고 멀리서 온 그의 형제인 척 마을에 머물고 있다. 경험했던 것이 없어지자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는지 에스퍼는 여기저기 쏘아다니며 제 궁금증을 해소하러 다닌다. 지금 그에게 거슬리는 건 굳이 따져봐야 이유도 모른 채 구석구석 아픈 몸뚱아리 뿐이다.

모든 걸 잊은 그는 밤하늘의 별을 그리 즐겁게 바라보고 길거리의 고양이를 해가 저물도록 쫓아다니고 마을 사람들과 우물쭈물하면서도 함께 어울린다. 서툰 행복에 잠겨 창백한 얼굴에도 붉은 빛이 떠오르고 꺼먼 눈이 한껏 휘어진다. 꽤 오랜 시간 봐 왔음에도 거짓이나 장난으로도 본 적 없는, 베시시한 웃음에 디셈블러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싶어서.

그를 이대로 두는 게 더 나을 테다. 디셈블러는 잡생각에 머리 속이 뒤죽박죽이다. 비록 언제 죽을지 모르는 썩은 몸이지만 더 이상 시공간을 이동하지 않고 머물면 악화는 되지 않을 테다. 더 이상 절망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고 역겨운 악몽에 빠지지 않아도 된다. 내일 죽더라도, 지금이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게 분명하다. 제 뿌리를 전부 잊어서야 찾은 평안. 하지만, 어떻게 감히? 그는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주먹을 쥐었다.

"네가 멍청하게 몽땅 잊어버린 그 과거 때문에 이렇게까지 망가졌던 거야, 알아?? 이대로 전부 포기하고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는 게 아깝지도 않아?"

날카로운 고함이 방을 채운다. 처음 들어보는 디셈블러의 고함에 에스퍼는 굳어서 대답도 못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소화도 제대로 못 하는 것도, 툭하면 피를 쏟는 것도, 기억이 모두 잘려 나간 것도 과거로 돌아가 어머니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라고 한다. 디셈블러는 손으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마구 휘저었다. 스스로도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에스퍼가 행복하게 웃는 꼴이 그렇게나 보기 싫은 게 아니고서야 이럴 리가 없다. 그래, 이렇게 쉽게 내려놓겠다니. 네가 어떻게. 감히. 우리를 묶고 있던 끈을 멋대로 끊어버리고 혼자서 행복해질 수는 없다. 어머니도, 너도, 나도 잊어버리고 떠날 수는 없는 거다.

에스퍼 역시 당연히 기억이 돌아오길 바란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게 억울하지 않은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동시에 디셈블러가 왜 저렇게나 화를 내는지가 궁금했다. 똑같이 생겼는데도 그는 자신의 형제는 커녕 가족도 아니라고 했다. 우리가 무슨 사이냐고 물었을 때 뭔가 설명을 하려 하다가 머리 아플 만큼 복잡하니 나중에 알려주겠다-하고 말았다. 에스퍼는 침을 꿀꺽 삼키고, 디셈블러를 향해 한발짝 다가갔다. 불길한 각오를 다잡고, 이제 그 이야기를 들을 때가 되었다.

4.

차디찬 눈보라 사이. 하얀 시야의 종착점에 서 있는 것은 이질적인 보랏빛이다. 이 어둑한 이계의 땅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침입자. 나는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진영을 벗어나 되는 데로 달려 나갔다. 온 몸이 벌벌 떨리는 이유가 지독한 추위 때문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다. 살이 어는 매서운 바람에도 숨이 차오르고 얼굴에 기대감이 피어난다. 다시 보지 못할 거라 여겼던 얼굴이, 익숙한 목소리가, 한 품에 들어오는 마른 몸이, 낮은 체온이 그토록 그리웠다. 내게 꿈에서나 올 기회가 온다면 전하고 싶던 단어. 문장. 감정.

가까워진다. 어느새 네가 가득히 담겼다. 나는 멈추어 섰다.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너를 만질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한다. 생체반응이 감지되지 않는다. 내 반만 한 것 같은 작은 몸. 형태조차 무너진 다이너모. 아니, 저것은 네가, 아니다. 또 다른 나, 또 다른 너. 하지만 너는 아닐 게다. 그래야만, 그래야만. 하는데.

디아볼릭 에스퍼는 기억을 되찾았다. 나의 말 때문이었는지 그저 때가 돼서였는지는 모르겠다만 기억은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떠났다. 그리고, 자신이 하던 일을 계속했다. 뒤로, 뒤로. 하염없이 달린다. 그립고 안락했던 기억의 끄트머리 속 당신을 향해. 몸이 찢어지고 마음이 무너져도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어도.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더 멈추질 못하고 갈구하기만 하는 사념체가 되었다. 나는 이 모든 걸 멈추고 새로운 삶에서 온기를 찾을 수 있었던 너를 다시 절벽으로 밀어버렸다. 네게 주어진 기회를 빼앗고 말았다.

차가운 몸을 껴안는다. 너는 별다른 반항을 하지 않고 그대로 끌려들어 온다. 죄악감이 척추를 타고 올라 뇌를 좀먹는다. 너를 다시 안을 수 있게 되었지만 너는 영원히 저 너머로 파묻혀버렸다. 엘프의 이야기 속에서, 사랑이란 상대를 귀중히 여기고 상대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는 것이라고 했었다. 그렇다면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나보다. 나는 너를 다시 만나면 가장 하고 싶던 말을 입도 뻥긋할 자격이 없다. 

이것이 내 이기심의 결과. 타인에게 품은 감정의 종말.

5.

뒷통수가 뚫어지도록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는지 패러독스가 고개를 돌려 시선의 주인을 쳐다본다. 용건이 있냐는 물음에, 오버마인드는 어깨를 으쓱이고 언제나처럼 미소 지었다.

"딱히. 별거 아냐.

그냥, 가끔 하는 생각 중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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