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간의 휴식.
나는 ..............가 좋다
종자는 눈을 번쩍 떴다. 지금까지 눈을 감고있었다는게 믿기지 않을정도로 시끄러운 곳이었다. 바닥을 넘어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독일어 노래 소리, 물이 끓는 소리, 책장을 넘기는 소리.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 찰박이는 물소리가 난다. 반사적으로 허리춤ㅡ정확히는 그의 검을 매둔 곳으로 손을 뻗지만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다. 당황하여 몸을 일으켰지만 시야는 아직 까맣다. 정확히는, 갑자기 일어난 충격으로 시야가 먹먹해져 눈을 뜨고있으나 앞이 보이지 않음이 맞았다.
"이, 일어나셨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적대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리 판단하고 가만히 기다린 결과 시야는 천천히 돌아왔다. 런던의 어느 흔한 다락방. 책은 어수선하게 쌓여있고 알 수 없는 골동품들이 구석에 먼지 쌓여간다. 낯선 환경에 어리둥절한 것도 잠시, 목소리의 주인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수건을 들고 앉아있는 것이 보인다. 그제야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는다. 누군가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갑자기 쓰러지시길래, 그, 병원에 가는 것도 곤란하실테고. 죄송하지만 이쪽으로 모셔왔어요."
쓰러졌다고? 유추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모든 기억을 잃고 어떤 배에서 눈을 뜬 이후로.... 그는 종종 기절하곤 했다. 어떤 날은 두통에 몸부림치기도 했고, 어떤 날은 하루종일 먹은 것을 게워냈다. 반직스 겅 앞에서는 언제나 곧은 자세로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가끔씩 이렇게 증상이 터져나올 때가 있다. 신분을 감춰야하는 입장 상 병원에 가지 않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이렇게 개인적인 공간에 타인을 들인다고? 종자로서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뭔가 또다른 수가 있지않을까 경계하며 몸을 일으키다가, 중심을 잃고 옆으로 무너진다. 맞은편의 남자는 물수건 따위는 바닥에 던져두고 서둘러 종자를 부축하러 달려왔다.
"일어나지 마세요! 뇌진탕 후유증이라고,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한다고 했어요."
누가? 뇌진탕? 팔다리에 버틸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저 남자에게 기댄 채로 얌전히 침대에 다시 눕혀진다. 종종거리는 작은 발소리가 계단을 오르는 것이 들린다. 종자는 몸을 일으켜 앉는다. 밝고 활기찬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노래를 부르듯 말한다.
"의학박사인 아이리스 짱의 진단이니 안심하고 믿어도 좋아!"
"댁을 알 수 없어서 반직스 경에게 연락을 취했어요. 곧 마차가 올겁니다."
"머리가 덜컹거리는 이동수단은 비추천하지만 여긴 병원이 아니라서 며칠이고 나루호도군의 침대에 눕혀둘 순 없으니까 말이야!"
"저, 스사토 씨의 방이 비어있으니까 상관없습니다만...."
"나루호도 군, 분명 데리고 올 때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고 하지않았어? 그런 사람을 사무실에 눕혀둘 정도로 순진한거야?"
"아니아니, 환자니까! 상태가 괜찮아질 때까지 마음껏 있어도 된다는 의미로 한 말이야!"
두 사람은 앞에 종자가 없다는 듯이 유쾌한 대화를 나눴다. 종자도 며칠이고 여기에 신세를 질 생각은 없다. 언제 괜찮아질지 모르는 일이고. 하지만 신세를 진 일은 사실이니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한다. 그게 종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표현이었다. 외부인 앞에서는 한마디도 하지 말 것. 그게 볼텍스 경이 종자에게 내린 가장 첫번째 명령이었으니까. 그리고 온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도 한 몫했다. 그런 그에게 아이리스가 빙긋 웃으며 질문했다.
"반직스 경에게도 검사 결과를 알려줄까?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게 경과에 좋을텐데."
반직스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고싶진 않았다. 함께 일하는 사이니 아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겠지만, 어딘가에서 자존심이 불쑥 고개를 내밀어 종자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기억이 없는데도, 어쩐지 바로크 반직스라는 남자에게 기대는 것만큼은 죽어도 싫다.
그에 반해, 눈 앞에 있는 맹한 변호사ㅡ이름이, 분명 나루호도 류노스케. 반직스의 재판 기록에서 종종 보던 이름이다. 이 남자는 분명 반직스의 집무실에서 본 이후로 처음 만나는 것일텐데도 자연스럽게 몸을 맡긴다던지, 이렇게 당황스러운 상황에 빠졌는데도 저남자라면 괜찮다는 느낌이 든다던지, 굉장히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반직스의 상대 변호사라서 그런가? 반직스가 그에게 엄하게 굴진 않았지만 종자는 묘하게 그를 싫어하는...때때로 본능과도 같이 영혼에 새겨진 어두운 감정을 느낄 때가 있었다. 그런 반직스를 몇번이고 무너트린 이 변호사는 믿을 수 있다는 기묘한 운명의 흐름마저 느꼈다. 단순히 내가 반직스를 싫어하기 때문에 이 변호사를 편하게 여기는건가? 종자는 손가락을 이마에 가져다대고 생각에 잠겼다.
"아."
그런 정적을 나루호도가 깼고, 스스로 그런 소리를 낸 것에 놀랐는지 화들짝 입을 막았다. 아이리스와 종자 둘 다 나루호도를 쳐다보자 나루호도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며 주목을 부끄러워했다.
"그, 종자? 이렇게 부르는게 맞나요."
나루호도는 예의 땀을 삐질삐질 흘리는 표정을 지었다.
"습관이 제 친구와 비슷해서 놀랐습니다. 그녀석도 생각에 잠기면 곧잘 그런 자세를 취하곤 했거든요."
"나루호도 군, 의외로 눈썰미 있네."
"의외구나...."
"온통 수상한 복장을 하고있지만 나루호도군이 데려왔으니까 허락했고, 그거랑 별개로 아이리스 짱의 추리라면 금방 이 남자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당황해서 퍼뜩 뒤로 물러나려했으나 뒤는 단단한 벽이다. 나루호도도 서둘러 아이리스와 종자 사이를 막으면서 꼬마 아가씨의 어깨를 잡고 호소했다.
"아니아니아니아니. 이 사람이 정체를 감추는 이유는 하트 볼텍스 경이 명령한거고 나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데?!"
"나루호도 군, 진실은 언제까지나 감출 수 없다네. 아무리 감춘다 하여도 스스로 몸을 드러내지."
"직접 쓴 원고 대사 인용하지 말고! 제발 봐줘... 더이상 볼텍스 경에게 보고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흠, 울고있는 나루호도를 봐서라도 그만두도록 할까."
아이리스는 어깨를 으쓱였고 나루호도와 종자는 둘 다 안심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종자에게 그렇다할 정체 같은건 없었다. 아니, 있더래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그저 바로크 반직스의 종자일 뿐이다. 하지만 이 영민한 꼬마아가씨의 추리에서 그 외의 정보가 나오는 것이 걱정되었다. 볼텍스 경이 아니라면 자신이 영국에서 쫓겨나는건 시간문제다. 영국에는 할 일이 있다... 적어도 그렇게 믿기 때문에 볼텍스 경의 심기에 거슬리는 일은 만들고싶지 않았다.
꼬마아가씨가 환자와 그를 돌봐준 나루호도 유학생 대리를 위한 허브차를 가져왔고, 종자와 나루호도는 감사히 그 잔을 받아들였다.
"역시 종자군은 외국인이네. 그것도, 일본인?"
나루호도는 마시던 홍차를 입으로 뿜었다.
"나루호도 군, 잔이 뜨거웠어?"
"아이리스! 그건 말 안하기로 한거 아니었어?"
"미안!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관찰해버렸어. 홈즈군의 버릇이 옮은 모양이야."
종자는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아이리스를 똑바로 쳐다봤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갸웃이며 종자와 나루호도를 번갈아 쳐다본다.
"경고의 의미일까, 수수께끼의 종자 군?"
종자는 고개를 저었다. 실제로, 종자는 동양인이고 어쩌면 일본인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저 작은 아가씨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아이리스는 눈치껏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듯 하다.
"그게, 스사토 짱이랑 같은 예법으로 잔을 들길래."
"아아. 스사토 씨는 다도에 일가견이 있었지."
"나라마다 차를 마시는 문화가 같아도 다도의 기법은 달라. 다른 나라라면 어려울테지만 스사토 짱의 예법은 몇번이고 봐왔으니까 알 수 있어."
공부가 되었군. 종자는 먼저 영국에 맞게 몸에 배인 습관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야 신분을 숨기기 수월해질 것이다. 종자는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 이번에는 영국식 예법에 맞춰ㅡ반직스 경이 가끔 그러하던 것처럼 차를 마신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완벽하네, 라고 속삭였다.
"대단하네. 나는 몇번이고 연습해도 다도나 티타임 예법같은건 모르겠는데..."
"뭐, 사적인 자리에서 그런걸 신경쓰는 사람은 이제 없으니까 나루호도 군이 걱정할 필요는 없지. 종자 군은 뭐든지 습득이 빠른 모양이야!"
잠깐의 티타임이 끝나고 마차가 올 시간이 다가오자 아이리스는 알 수 없는 기계들로 종자의 상태를 체크한다. 뭔가 팔에 붙였다가 떼기도 하고, 공책에 뭔가 적어가며 혼자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리스, 그래서 좀 어때...?"
"뇌 내 출혈의 징후는 보이지않고, 이정도면 경과가 좋아! 앞으로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트라우마로 인해 상태가 안좋아질 수 았으니까 정신적인 면도 다잡아야 할 것 같네!"
"이사람, 기억을 잃었으니까..."
"트라우마 같은건 몸이 먼저 기억할 수도 있어! 어디서 어떤 증상이 나타났는지 기억하는게 포인트야."
종자는 감사의 의미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생판 남을 이렇게 챙겨주는 것은 셈이 서투르다고 할지, 사람이 너무 좋다고 할지. 어쨌든 그런 순진한 선의에 도움을 받아 가슴 한 쪽이 물렁해진 기분이었다. 아이리스에게 줄만한 것은 없나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그럴듯한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미소지었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니까 됐어."
그래도. 종자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색하게 바라보니 아이리스는 입술을 톡톡 치며 고민에 빠졌다.
"그럼 다음에 티타임에 놀러오는건 어때?"
"응?"
옆에 있던 나루호도가 놀랐다.
"반직스 경의 종자니까, 친하게 지내면 나루호도 군 앞길에 좋을까 싶어서!"
"너무 솔직하게 얘기하네..."
티타임은 모르겠다. 이 꼬마아가씨는 너무나 총명해서 보지 말아야할 것을 꿰뚫어보곤 했다. 만약 티타임에서 아이리스가 알면 안되는 비밀을 본다면 종자는 그것을 어떻게 처리해야할지 방법을 몰랐다. 미안하다는 의미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아이리스와 시선을 맞춰 고개를 흔들자 아이리스의 입이 비죽 나왔다.
"티타임에 빠지다니 신사답지 못해."
"뭐, 집에서 혼자 즐기는게 좋은가보지."
"어쨌든 정말로 보답을 바라고 한 건 아니니까. 나는 의학박사로서 법 앞에 선서한 내 양심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야."
그렇다면 적어도 감사를 표하고싶다. 그렇게 생각해서 작은 아가씨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류노스케는 펄쩍 뛰었다. 아무래도 종자가 그정도까지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어이, 시끌벅적한 제군들? 바깥에 반직스 경의 마차가 왔어."
아래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에서 길쭉한 얼굴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종자가 아이리스의 손등에 입맞추는 이 상황을 보자 뒤로 넘어졌다. 쿵. 쿵. 쿵. 계단을 따라 셜록 홈즈ㅡ런던 최고의 명탐정이 뒤로 구르는 소리가 멀어진다.
"환자가 갈 시간이 되니 서운했나? 홈즈 군이 환자가 되어주네."
아이리스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류노스케와 종자는 서로를 잠깐 쳐다뷰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무 일 없다는 듯 계단을 내려갔다.
홈즈가 말한대로 반직스 경의 마차는 이미 베이커 거리에 도착해있었고 종자는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않고 고개만 가볍게 숙이고 마차 안으로 들어간다. 마부가 출발하기 전, 아이리스가 까치발을 들고 마차 문을 두드린다.
"티타임은 언제나 사람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종종 놀러와~."
"절대 오지않겠지, 저사람."
류노스케의 말에도 불구하고 아이리스는 못들은척 떠나는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내 예감인데, 얼마 지나지않아서 종자 군이랑 친해질 것 같아!"
"근거는?"
"흐음~. 명탐정 조수의 감이랄까? 이유는 더 있지만 말 안할래."
"...왜?"
류노스케는 대답을 듣는 것에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폭풍 전 고요. 쓰나미가 오기 전 바다. 반사적으로 왜냐고 물었지만 대답을 들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근거는ㅡ자신의 감이다.
"왜냐면, 이유를 들으면 이번엔 류노스케 군이 기절할 것 같아서. 지금은 홈즈 군 보러가야 하잖아."
류노스케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언젠가 적절한 때가 되면 열리겠지만 그 때는 지금이 아니었다. 종자는 방금 떠나갔고, 홈즈는 기절해있고, 류노스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됐으니까.
그 뒤 종자가 티타임에 오는 일은 없었지만 《만국박람회》 의 사건이 끝나는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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