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나는 비내리는 날에 우산없는 종자와 어쩔 수 없이 우산을 빌려주는 류노스케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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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루호도 류노스케가 내뱉은 작은 소리가 꼬마 아가씨의 귀를 울렸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갸웃이며 나루호도의 시선을 따라간다. 비내리는 길에, 짙은 색 로브와 가면을 쓴 굉장히 수상한 사람이 서있다. 분명 이름이...아니, 분명 이름을 가르쳐 준 없는 사람이다.

"아는 사람이야?"

아이리스는 레이스와 리본이 잔뜩 달린 핑크빛 우산을 펼치며 나루호도를 쳐다본다. 나루호도는 특유의 곤란할 때 짓는 표정을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게, 아는 사람이라고 할 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할 지... 한번 본게 다라서."

"흐응. 그렇구나."

아이리스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예의 사람을 훑어본다. 체격. 서있는 폼. 시선 끝. 흐음, 고개의 각도. 손 끝. 톡톡 울리는 신발 코. 들고있는 가방, 지금 시간-오후 4시 57분. 방금 보고 온 하트 볼텍스 경, 올드베일리의 사신.

"우산, 빌려줄까? 기다리는 마차는 안 올 것 같은데 말이야."

"응?!"

"그래도 내 우산을 빌려주기에는 좀 그렇네~. 생긴건 둘째치고 이 안에는 소매치기 방지용 연기탄 발사장치 3호가 탑재되어 있으니까 잘못해서 방아쇠를 당기면 놀랄지도?"

우산에 왜 그런걸 설치한거야. 나루호도는 흘리는 식은땀을 소매로 슥 훔치고는 우산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자신은 아이리스와 같은 우산을 쓰고 가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저 '종자'에게 우산을 빌려주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신경 쓰이는 것은 사실이지만 단 한 번 본 사이고, 말을 거는 것은 그것과는 다른 문제라. 나루호도가 우물쭈물 하고있자 아이리스는 손가락을 퉁기며 반짝 웃었다.

"검사측 사람에게 빚을 달아놓을 수 있을지도?"

"아니, 우산 한번 빌려준 것으로 그런건 어떨까 싶은데...그보다 어떻게 안 거야?!"

"그야 《초보적인 추리》라네? 나루호도 군."

"전혀 모르겠습니다."

"나루호도 군은 이럴 때만 눈치가 없네~. 법정에 서있을 때만 든든하단 말이지."

나루호도가 열심히 눈을 찌푸리고 종자를 노려보았지만 정보는 전혀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주머니에 삐죽 튀어나온 승선표라던가, 손목에 찍힌 붉은 도장이라던가 그런걸 보기에는 저 남자, 온통 칙칙한 색의 로브로 감싼데다 가면까지 쓰고있잖아? 알아차리는 쪽이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쪽의 뚫어질 듯한 눈빛을 알아차렸는지 종자 쪽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했다. 

"앗."

나루호도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것처럼 싸한 느낌이 가슴을 꿰뚫었다. 아이리스는 어쩔 수 없네, 소리내며 나루호도의 손을 잡고 총총 종자 쪽으로 발을 내딛는다. 나루호도는 엉겁결에 그 손에 이끌려 그의 앞에 선다. 

다시 만난 그 남자는 첫날 만났을 때처럼 몸가짐에 흐트러짐 없이 곧게 서있었다. 오른손의 검지손가락에는 짙은 감색의 서류가방이 들려있고 중히 봉해져있다. 신발 코를 톡톡 두드리는걸 나루호도와 아이리스가 다가오자 멈췄는데, 비가 내리는 길로 고개를 살짝 틀었다가 나루호도와 아이리스 쪽으로 몸을 돌린다.

"반직스 경의 마차는 안올거야."

아이리스가 확신을 가지고 말한다. 나루호도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지 감도 안잡힌다.

"그, 저번에 뵌 적 있죠? 나루호도 류노스케입니다. 이쪽의 아이는 아이리스 왓슨이에요."

"아이리스 짱이라고 불러도 돼!"

"아이리스가 우산을 빌려주자고 권하네요. 아, 아이리스의 우산 말고 제 우산 말입니다만."

나루호도는 허겁지겁 검은색 우산을 건넸다. 종자는 가만히 우산을 쳐다보다가, 다시 나루호도와 아이리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루호도 군, 이건 어떻게 생각해? 소극적인 거절일까, 적극적인 거절일까?"

"어느쪽이든 거절인건 변함 없네.... 그야,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좋-아. 설명해줄게, 아이리스의 《간단 추리》를! 일단 나루호도 군? 우리가 서있는 곳이 어딜까나?"

"아, 그야, 올드베일리...의 밖이라고 할까. 문 앞이라고 할까. 아슬아슬하게 비가 내리지 않는 지붕 아래네."

"그렇다면 이곳에 오는 사람은 판사, 검사, 변호사, 피고인, 증인 및 법정 관계자 중 한명이갰네?"

"그럴 가능성이 높으려나."

"지금 시각은?"

"5시가 조금 넘었어."

"이 시각에 열리는 법정은?"

"없지."

"그럼 이 사람은 빈 법정에서 나가는거네?"

아이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되나. 그러고보니, 이 시간에 종자는 여길 왜 찾아온거지?

"빈 법정에 찾아온 사람이 또 있지?"

"응? 누구?"

"내 눈 앞에 있잖아."

아이리스가 입을 비죽 내밀었다.

"나루호도 군, 이 시간에 법정엔 왜 왔어?"

"하트 볼텍스 경이, 심부름을 시켜서...."

그다지 멋진 이유는 아니다.

"그럼 이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 법정 관계자와 관련있는 사람이 부탁을 받고 왔다...그럼 무슨 부탁이었을까? 그건 서류가방을 보면 확실하지!"

"그것만으로 단정짓기는 어려운 거 아니야? 서류가방 안에 뭐가 들어있을지는 모르는 일이고, 언제 여기 왔는지는 모르잖아?"

"서류가방은 비어있어."

"앗?!"

"그야 손가락 하나로 들고있잖아? 비어있는게 당연하지."

"소, 손가락 힘이 무지하게 셀지도."

"그런 사람도 보통은 손가락 네개를 사용해서 들지? 가방에 뭐가 들어있다면 말이야! 즉, 이사람은 서류 가방에 들어있는 뭔가를 '주러왔다'... 안에 있는 사람에게!"

"그렇네."

"본인 사무실에 들린 거라면 빈 가방 따위 두고가도 괜찮지? 하지만 그러지 않았어. 그 때 안거야. 이사람은 검사측 사람이지만 검사는 아니고 심부름을 하러 온 관계자구나!"

"응?"

"이 시각에 안에 있는 사람이래야 야근을 하는 판,검사 뿐이니까 해당하는 사람은 한정적이야. 우리가 봤던 볼텍스 경은 빼고, 또 여기에 남은 사람은...."

"바로크 반직스 경...."

"헤헤. 서류가방은 반직스 경의 것이지?"

"반직스 경의 종자니까, 이사람은. 그다지 이상한 일도 아니네."

"그렇구나. 고생이 많네! 마차가 끊긴 시간에 심부름을 시키다니 어지간히 중요한 서류였나봐."

"마차가 왜?"

"5시잖아? 나루호도 군. 티타임 시간이라고!"

"아."

"반직스 경의 서류가방이니까, 젖으면 곤란하겠지?"

"그야, 뭐, 비어있대도 남의 물건이면."

"그래서 비를 그냥 맞고 가는 선택지가 없어져서 여기서 초조하게 신발 코를 톡톡 두드리며 마차를 기다린거고?"

"하지만 5시니까 마차부는 다들 티타임을 즐기러 갔다..."

"즉, 여기서 홈즈군의 《뭐든지 예측해 4호》로 비가 온다는걸 예측한 우리가 우산을 빌려주는 것입니다!"

대단한걸, 아이리스. 저쪽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루호도는 다시 한번 우산을 내밀었다. 아니, 절대로 나중에 빚으로 달아서 정보를 캐내려는 속셈은 아니었다. 절대로.

"그럼 이사람이 반직스 경의 심부름으로 온 사람이라는 것도, 마차가 안 오는 것도 명백해진 시점에서 우연히 우산을 두 개 가진 사람이 지나가고 있다면 마땅히 우산을 빌려주는게 런던 시민이지! 그치, 나루호도 군?"

"그렇게 됐습니다."

종자는 우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주저하며 그것을 집더니 고개를 까딱 숙였다. 아무래도 마차가 오지않아 곤란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나중에 돌려주겠어? 나루호도 군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우산이거든."

"뭐? 그랬단 말이야?"

"나루호도 군은 칠칠치 못하니까 우산을 잃어버릴 때를 대비해서 《뭐든지 되찾아 8호》를 탑재해뒀어."

"아니, 그, 저기, ...고맙다고 해야할지."

종자는 우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우산을 폈다. 아이리스는 밝고 천진난만히게 바이바이, 하고 손을 흔들었다. 종자는 고개만 까딱 숙이고 빗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나루호도는 아이리스의 레이스와 리본이 잔뜩 달린 우산을 들고 빗속으로 발을 내딛었다.

나루호도가 종자를 다시 본 것은 의외로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번에는 날이 화창-아니, 런던에 화창한 날씨 같은건 없다. 그나마 안개가 덜 꼈다는 의미다. 아무튼 비가 내리지 않음이 확실한 날인데, 종자는 올드베일리의 정문 앞에 눈에 띄는 검은색 우산을 쥐고 서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의 차림새만 해도 눈에 띄지만 우산을 들고있으니 지나치기 어려울정도로 튀는 모습이다. 나루호도는 애써 모른척 하고 지나가려 했으나 나루호도가 정문을 지나칠 때, 점잖은 발걸음으로 종자가 그의 앞을 막아섰다.

"....."

여전히 아무말도 하지않으며 우산을 내민다. 그리고 고개를 까딱 숙이는 것이다.

"아, 고맙습니다."

빌려준건 나루호도인데 어쩐지 그런 말이 입에서 나온다. 나루호도가 우물쭈물 서있자 종자는 잠시 서있다가 그대로 뒤를 돌아섰다. 용건은 그것 뿐이겠지. 분명 그럴 터인데.

어쩐지, 그녀석이 떠올라서. 저사람을 가만 둘 수가 없었다.

"저기...!"

"......?"

"아, 그, 그게... 저, 저희 어딘가에서 만난 적 없습니까?"

"......"

그래. 뭐. 대답할거라 생각도 하지않았다. 뭣보다 그 하트 볼텍스 경의 명령이다. 쉽게 입을 열진 않겠지. 이상한 질문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할 때, 따뜻한 손이 나루호도의 어깨 위에 가볍게 얹힌다.

"그건 데이트 신청 발언으로 적절치 않은데, 미스터 나루호도."

"홈즈 씨!"

"나였다면 아이리스의 특제 허브티를 미끼로 티타임을 권했을거라네!"

"아뇨, 오해하고 계시는데, 데이트 신청 같은 낭만적인 장면이 아니었거든요."

"부끄러워 할 것 없네, 제군!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지금 이 자리에서 저 사내의 가면을 벗겨줄 수 있다만?"

...종자가 홈즈를 눈에 띄게 경계하기 시작했다.

"아니, 됐습니다! 그쪽도 경계하지 마세요, 이사람은 비유적인 표현이라고요! 그리고 이 분의 정체를 비밀로 하는건 볼텍스 경의 명령입니다. 저는 그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아요..."

"간이 작네, 미스터 나루호도."

"홈즈 씨가 너무 대담한거에요."

"명탐점이란 때로는 대담해야할 때가 있지."

"홈즈 씨는 늘 필요이상으로 대담하세요."

"그건 그렇고, 어떤가? 아이리스가 기뻐할텐데."

종자는 아이리스의 이름을 듣고 잠깐 멈칫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예상했던 결과다. 홈즈는 다시 파이프를 입에 물고 모자 챙을 살짝 숙였다.

​"그거 참 아쉽군. 다음 기회가 있으면 꼭 오게."

"언제부터 친했다고.... "

그러는 류노스케도 떠나는 종자의 등을 멀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쳐다봤다. 기분탓이었을까? 어쩐지 아는 사람 같다는 이 기분. 스사토가 이곳에 있었다면 확실히 알 수 있었을텐데.... 하지만 스사토는 바다 건너 일본에 있었고 류노스케는 여기 혼자 남았다.

"그럼 아이리스가 기다릴테니 우리도 슬슬 가볼까."

"아, 네. 그러고보니 홈즈 씨는 올드베일리에는 무슨 볼일로 오셨죠?"

"내 《뭐든지 되찾아 8호》의 신호를 쫓아왔는데, 우연히 여기로 이끌더군."

"그거, 전혀 우연이 아니고 아이리스가 우산에 부착한걸 따라왔을 뿐이잖아요."

홈즈는 그런가? 하고 웃으며 류노스케로부터 우산을 낚아채 빙글 돌렸다. 하여간 속을 알 수 없는 사람. 류노스케는 그리 생각하며 한숨 쉬고는 베이커 거리로 향하는 길로 향했다. 도착하면 아슬아슬하게 티타임에 맞출거고, 아이리스의 특제 허브 티와 운이 좋다면 스콘도 남아있을거다. 가면을 쓴 종자의 정체와 이 가슴을 싸하게 만드는 위화감은 뭘까, 그렇게 고민을 생각할 틈도 없이 류노스케는 따뜻한 221B로 돌아간다. 류노스케는 알고있었다. 진실은 언젠가 밝혀진다. 그것이 아무리 충격적이고 차가운 것이더라도. 그리고 그 때는 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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