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전재판

The Last Childhood

Backlog by 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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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제 클림트 반직스가 가주가 되는 건가요?”

“하지만 이제 고작 10살인 애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분명 이언 반직스, 그자가 한동안 그 아이 곁에서 가주 역할을 대신하겠죠.”

“하지만 그는 반직스 가문에서도 거의 내놓은 자식이 아니던가요?”

“어쩌겠습니까. 지금 반직스 가를 이끌 사람이 없는 것을.”

클림트는 정원 담장 너머에 쪼그리고 앉아 무신경한 어른들이 떠드는 소리를 조용히 듣고 있었다. 본래라면 그가 조문객을 상대하고 있어야 했지만, 그의 삼촌이 추모사를 끝내고 클림트에게 다가와 말했다.

“클림트, 조문객들은 내가 맞이하마. 너는 잠시 마음을 추스르고 있으렴. 물론 이젠 네가 반직스 가의 가주지만… 아직 이런 걸 잘 모르잖니.”

“하지만 제가-”

“그래, 가서 동생이라도 보고 있으면 어떻겠니? 가엾은 것, 분명 제 어미를 찾고 있을 테지. 이제 가족이라곤 너밖에 안 남았으니 네가 동생을 돌봐야지.”

어린애를 달래는 듯한 그 말투가 가증스러웠지만 클림트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실제로도 어렸으니까. 조문객을 맞이하는 법이 어설픈 것도 사실이었다. 그는 10살이었다. 부모님은 건강했고, 얼마 전에는 동생이 태어났다. 어느 10살도 부모님의 죽음에 대비해 장례식의 예법을 공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으아아앙-”

어디선가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조문객들이 모두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며 혀를 찼다.

“저 갓난쟁이는 어쩌면 좋아요.”

“이제 막 부모님의 관심과 보살핌을 받으며 자랄 때인데…”

“그래도 형이 있잖아요.”

“이제 부모도 없으니 그가 동생을 돌봐야겠군요. 어찌 생각하면 잘 됐습니다.”

“울음을 그치질 않네요. 엄마를 찾나 봐요.”

“도련님-”

유모가 자신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클림트는 무시했다. 일주일 전이었다면 한달음에 달려가 제 동생을 달래주었겠지만 지금은 그저 혼자 있고 싶었다. 저들의 말이 맞다. 그는 가문을 물려받을 준비를 해야 했다. 이제 막 태어난 동생 따위를 돌볼 시간은 없었다. 이대로 삼촌에게 가문을 빼앗길 순 없었다. 그랬다간 자신도, 동생도 갈 곳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저런, 이 귀염둥이가 어째서 이렇게 울고 있을까-”

담장 너머에서 능청스러운 목소리가 넘어왔다.

“반직스 씨… 혹시 도련님을 보셨나요?”

“클림트도 충격이 클 테니 이해해야지요. 제가 사람을 시켜 찾아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가문의 일원으로서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개소리, 몇 년 동안 아버님께 얼굴도 비치지 않았던 주제에-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던 클림트가 욱해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고 있는 거대한 개와 눈이 마주쳤다.

“발뭉호! 발뭉호!”

클림트는 너무 놀라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굳어버렸다. 그때, 멀리서 목소리가 들리고 개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제 주인에게로 뛰어갔다.

“참, 뭘 하고 있었나 했더니, 이런 시시한 사냥감이나 갖고 놀고 있었어?”

그는 간신히 고개를 들어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분홍 머리의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바스커빌 양…”

“안녕하세요, 클림트. 그 재미없는 호칭은 여전하네요.”

그녀는 어릴 때부터 혼약을 약속한 사이였다. 정확히는 그들이 태어나자마자, 이 혼약은 정해져 있었다. 실제로 그들이 서로를 만난 것은 2년도 채 되지 않았다.

올해 12살이 된 그녀는 클림트보다도 키가 크고 젖살이 빠져 얼굴이 갸름했다. 어차피 남들이 보기엔 다 똑같은 어린애였겠지만 클림트에게는 그녀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서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근데 여기서 뭘 하는 거죠? 지금쯤 조문객들을 상대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녀는 발뭉호라고 불린 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무심한 투로 물었다. 클림트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가문 밖에서 겉돌던 삼촌에게 가주 역할을 빼앗겼단 소리를 어떻게 제 입으로 할 수 있단 말인가.

“흐음…”

바스커빌이 조금의 애정이나 연민도 느껴지지 않는 눈빛으로 클림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그녀의 무심한 눈빛을 전신으로 느꼈다.

“아버지께서 혼약을 진지하게 재고하고 계세요.”

클림트가 놀란 눈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 클림트는 침착하려고 했지만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물론, 반직스 경 부부가 타계한 마당에 가문을 물려받을지도 알 수 없는 10살짜리 꼬맹이와 인연을 이어 나갈 이득은 없다고 판단하신 거겠죠.”

부모를 잃은 아이에게 하기에는 너무나도 잔인한 말이었다. 클림트는 울컥해서 바스커빌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고 눈을 부릅뜬 모양새는 영락없이 울음을 참는 아이였다.

“그러세요, 바스커빌 양도 저 같은 한심한 꼬맹이의 부인이 되고 싶진 않으시겠죠. 그런 말은 서면으로 전하셔도 됐을 텐데, 여기까지 친히 행차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림트의 비꼬는 듯한 말에도 바스커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죠? 이언 반직스에게 가주 자리를 넘기고 저택의 한구석에서 조용히 숨죽인 채 동생과 그 목숨이라도 연명하면서 지내실 건가요? 아, 이제 곧 런던에서는 뵙기 힘들겠군요. 아기를 키우기에는 시끄러운 런던보다는 한적한 시골 동네가 좋겠죠. 반직스 가가 거의 쓰지 않는, 거의 버려진 듯한 별장이 하나 있었죠. 보기 좋은 꼴은 아니지만 분명 조금 시간을 들여 단장을 하면 꼬맹이 둘이 어떻게든 살 환경은 될 거예요.”

클림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게, 무슨…”

바스커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클림트가 벌떡 일어났다.

“아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아직 어리다곤 하지만 명실상부 가문의 후계자는 저입니다. 아무리 삼촌이라도 절 이렇게 내쫓을 순 없어요!”

“물론 그렇죠. 그자도 당장 당신을 내쫓자고 주장하지는 않을 거예요. 하지만 오늘처럼 교묘하게 가문의 일에 당신을 배제하고 당신을 무능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만들겠죠. 반직스 가의 영지 관리와 갖가지 사업은 10살짜리 후계자가 성장하길 기다릴 시간이 없어요. 꼬장꼬장한 가문의 어르신들은 예법을 중요시하시니 당장은 반대하시겠지만 결국엔 이언 반직스에게 가주 자리를 넘겨줄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성인이 되어서 가주의 자리를 주장해도 때는 이미 늦은 후일 테고요.”

“그런… 바스커빌 양은, 그걸 어떻게 아는 겁니까?”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정원 담장에 죽은 듯이 웅크려있지 않거든요.”

클림트가 욱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으나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녀의 말이 전부 맞았다. 자신은 한심한 10살짜리 꼬맹이였다. 그는 바스커빌 양처럼 노련하지도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저는…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겁니까?”

바스커빌이 부채로 제 입을 툭툭 두드리다가 부채를 촥 펼쳤다.

“바스커빌 가가 클림트 반직스를 지지한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네?”

“내가 당신과 혼약을 유지하겠다는 선언만 한다면 제아무리 능구렁이 같은 자라도 당신을 건들 수는 없을 거예요. 반대로 이언 반직스는 가문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성인 남성이라는 점만 빼면은 내세울 수 있는 구석이 없죠. 가문의 어르신들이 누구를 더 반기실지는 그 작은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알 수 있겠죠?”

“하, 하지만… 바스커빌 경이 혼약을 재고하고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님은 제가 설득할 수 있어요. 하지만… 걸리는 게 한 가지 있군요.”

“으아아아앙-”

우렁찬 울음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설마…

“바로크 말입니까?”

“당신은 굉장히 이례적인 속도로 가주 역할을 해내야 해요. 당연히 저런 갓난아이를 돌볼 여유 따위 없어요. 설마 계속 저택에서 같이 지내면서 착한 형 노릇까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 바로크를… 다른 곳으로 보내란 말입니까? 굳이 그러지 않아도 바로크는 사용인들이 돌보게 하면-”

“순진하네요, 클림트. 누가 그를 돌보든 저택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가주인 당신의 책임이에요. 그리고 저택의 바깥에는 당신이 책임져야 하는 더 중요한 것들이 있고, 이언 반직스가 노리는 것은 당신이 집안 내부의 일에 신경을 빼앗겨 바깥을 신경 쓰지 못하게 되는 거예요. 잊지 마세요. 지금 당신의 입지는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줄 위에 서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당신이 여기서 질질 짜고 있을 때부터 당신은 이미 이언 반직스에게 진 거나 마찬가지예요.”

클림트는 망설였다. 막 태어난 동생을 품에 안은 채로는 줄을 타고 건널 수 없었다. 하지만 당장 동생을 맡아줄 곳도 여의찮았다. 무엇보다 그는 제 동생이 아닌가. 모두 당연히 클림트가 그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클림트가 그 아이의 유일한 가족이니까…

가족. 가족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숨이 막힐 때가 있었나. 클림트를 언제나 기쁘게 했던 반직스라는 이름이, 바로크의 존재가 지금은 자신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하죠.”

바스커빌은 그의 고민을 안다는 것처럼 말했다.

“사람을 시켜 반직스 가로 보낼 테니 오늘 자정, 후문으로 동생을 데리고 오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그게, 무슨.”

클림트가 설명을 요구했으나 바스커빌은 의미심장한 말만 남긴 채 사냥개와 함께 자리를 떠났다.

“신중하게 선택하세요, 클림트.”


자정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클림트는 바로크가 곤히 잠들어 있을 방문 앞에서 한참을 맴돌았다.

바스커빌 양은 대체 바로크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설마 바스커빌 가문이 맡으려는 건 아닐 것이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예측이다. 보육원에 보내려는 걸까? 아니면, 설마, 그 어린아이의 목숨을…

클림트는 바스커빌의 옆에 있던 시꺼멓고 거대한 사냥개의 모습을 떠올리곤 방문을 벌컥 열었다.

“바로크…”

창가에 요람이 있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요람 곁으로 다가갔다. 아직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아기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보렴, 클림트. 네 동생이란다.’

어머니가 품에 쏙 들어오는 작은 포대를 내밀었을 때가 떠올랐다. 아기라는 존재는 생각보다 더 못생겼구나, 라고 클림트는 생각했다.

‘동생…’

하지만 동생이라는 단어를 중얼거린 순간 클림트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기의 볼을 어루만지었다. 뜨겁고, 말랑말랑했다.

클림트가 손을 뻗어 바로크의 볼을 쓰다듬었다. 아직도 뜨겁고, 부드러웠다.

“어머니, 아버지…”

클림트가 요람 난간에 고개를 묻으며 울먹였다.

“제발, 돌아와요…”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마차를 타고 떠나기 전에, 제발 가지 말라고 붙잡을 수만 있다면, 내가, 내 유일한 가족을 내 손으로 버리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때, 부드러운 무언가가 클림트의 손가락을 감쌌다. 클림트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파란 눈동자와 눈을 마주쳤다.

“바로크…?”

아기가 눈을 뜨고 클림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을 작은 손으로 꽉 움켜쥔 채. 클림트는 손가락을 잡아 빼려고 했지만 아기가 무언가를 그러쥐는 힘은 그의 예상보다 강했다.

“이거 놔.”

클림트가 중얼거렸다.

“이제 어머니도, 아버지도 없어. 난 이제 여기서 혼자 살아남아야 해. 네가 울어도 이제 달래줄 수 없어.”

아기는 형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아기는 무언가를 요구하듯이 팔을 뻗어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바스커빌 양이… 너를 잘 돌봐줄 거야. 아니면, 다른 가족이… 여기보다 더 나은 곳일 거야.”

클림트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는 점점 비참해지는 기분에 말을 멈추었다.

그는 대신 팔을 뻗어 아기를 품에 안았다.

무겁다. 그새 무게가 는 것일까. 뜨겁다. 어디 아픈 건 아닐까? 너무 부드럽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서지는 게 아닐까? 바스커빌 양이 보냈다는 사람은 누굴까. 아기를 제대로 안는 법은 알까? 밖은 추운데. 나갔다가 바로크가 차갑게 얼어버리면 어떡하지?

부모님처럼, 바로크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리면 어쩌지?

손이라기보단 둥그런 무언가에 가까운 것이 축축한 뺨을 감쌌다. 클림트는 울고 있었다. 그는 방을 나서지도, 다시 바로크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울고 있었다.


바스커빌은 정원을 걷고 있었다. 언제나 그녀의 곁을 지키던 발뭉호는 오늘 없었다. 클림트가 발뭉호의 부재에 대해 묻자 그녀가 말했다.

“발뭉호가 임신했대요. 새끼를 낳을 때까지는 집에 있기로 했어요.”

“아… 축하합니다.”

“그 축하, 감사히 받아들이죠.”

바스커빌은 힐끔 시선을 돌려 클림트와 그 품에 안긴 작은 포대기를 바라보았다.

“제 배려를 헛되게 하셨다고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클림트는 전혀 죄송해 보이지 않았다.

“바로크는 제가 계속 데리고 있기로 했습니다.”

“제 경고는 무의미했나요?”

“혼약을 깨시겠다면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죠.”

“근거 없는 자신감처럼 들리네요.”

“네, 없습니다.”

클림트가 담담하게 인정했다.

“하지만 가주 자리가 제 가족을 버려가면서까지 지켜야 하는 거라면 차라리 가주 자리를 버리겠어요.”

클림트는 바스커빌이 비웃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바스커빌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어제 아버님을 찾아가 말씀드렸어요. 혼약은 계속 유지하고 싶다고.”

“네?”

“당신이 제대로 자리만 잡게 된다면 약혼식을 진행할 거예요. 가주 자리를 차지할 거라면 최대한 빨리해 줬으면 좋겠어요. 저도 이제 와서 다른 남자를 찾긴 싫거든요.”

“화가, 나신 게 아니었습니까?”

“당신이 하나뿐인 동생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사람이었다면 쓰레기 같은 안목을 가진 저 자신에게 화가 났겠죠.”

바스커빌이 부채를 접고 클림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클림트는 그녀가 웃고 있다고 느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클림트 반직스 경. 부디 제가 약혼을 고집한 보람이 있길 바라요. 아, 그리고 앞으로는…”

-라고 불러요.

떠나는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예절도 잊고 클림트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로크는 그의 품에서 무슨 말인지도 모를 소리를 웅얼거리다가 크게 하품하고는 깊은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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