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역전재판

The Bait

'사신'을 위한 미끼

Backlog by 윤펭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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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망할!”

구겨진 편지가 대리석 바닥 위를 굴렀다. 하트 볼텍스는 답지 않게 분노에 찬 얼굴로 거친 숨을 내뱉다가 초조하게 집무실을 서성였다. 토바이어스 그렉슨은 말없이 그런 볼텍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항상 여유가 넘쳤던 수석판사였다. 오랫동안 볼텍스 밑에서 일했던 그렉슨도 이런 그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사법 유학생으로 런던에 방문 예정이었던 아소기 카즈마가 사망함.’

이건 정말 예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다른 때도 아니고 영국으로 오던 증기선에서 사망했다니. 이래서는 안 됐다. ‘아소기 카즈마’는 그렉슨의 처리를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무엇보다 ‘사신’을 다시 런던에 불러오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존재였다.

“…각하.”

그렉슨 형사가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코제니 메군달의 재판이 시작될 겁니다.”

어떡하실 겁니까. 그렉슨의 물음에는 여러 뜻이 담겨 있었다. 코제니 메군달을 계획대로 당장 내일 재판 직후 죽일 것인가. 사법 유학생이 죽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신’, 바로크 반직스는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


어느 외진 숲속에 있는 저택에 도착한 볼텍스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혀를 찼다.

‘사신’이라는 명성이 아깝군. 볼텍스는 그렇게 생각하며 저택의 문을 두드렸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한 늙은 집사가 문을 열고 볼텍스를 맞이했다.

“볼텍스 각하.”

“그는 어디 있지?”

“서재에 계십니다. 응접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니, 됐다. 내가 가지.”

집사는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지금 주인님의 서재는… 정돈이 잘 안되어 있습니다.”

“상관없다. 안내해라.”

2층 서재로 올라가는 계단은 소음이 심했다. 겨울이 아닌데도 저택 내부는 서늘했고, 복도는 텅 비어 귀족들이 흔히 걸어놓는 관상용 그림도 보이지 않았다. 한낮인데도 복도는 어두컴컴해 집사가 등불로 길을 밝혀줘야 했다.

“주인님-”

주인을 부르려는 집사를 막아선 볼텍스가 조용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런던의 강력 범죄 기승,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올드 베일리’

문을 열자마자 발에 채는 신문의 헤드라인이었다. 서재는 정돈이 ‘잘 안되어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볼텍스는 주저 없이 바닥을 뒤덮은 신문들을 밟고 그를 등지고 앉아 있는 이를 향해 다가갔다.

“반직스 검사.”

신문을 읽고 있던 이가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가 볼텍스를 알아보고는 번쩍 일어났다.

“볼텍스 각하!”

“약속된 시간보다 10일 2시간 10분 32초 정도 빠르게 도착했다. 앉아라. 피곤해 보이는군.”

반직스는 그제야 제멋대로 풀어헤쳐진 셔츠와 정돈되지 않은 제 머리칼을 인지하고는 황급히 가슴팍을 여몄다. 그런다고 갑자기 그가 귀족다운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반직스는 궁여지책으로 의자 등받이에 아무렇게나 걸쳐져 있던 망토를 둘렀다.

“어째서 여기에…”

반직스가 서재를 둘러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죄송합니다. 이곳은 각하를 접대하기 부적절한 곳이니 응접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이 영지에서 이곳보다 상태가 나은 곳은 내가 타고 온 마차밖에 없을 거다.”

“각하…”

볼텍스는 들고 있는 지팡이로 소파 위 신문과 책을 바닥으로 넘어뜨려 버리곤 그 자리에 앉았다. 반직스는 입술을 한 번 지그시 깨물곤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죄송합니다.”

“바로크 반직스.”

마치 어린 아이를 혼내는 듯한 말투에 반직스의 어깨가 움찔했다. 같은 성인 남성을 이런 식으로 부르는 것은 굉장한 실례였으나 지금 반직스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분명 푹 쉬고 돌아오라고 했을 텐데. 근데 보아하니 5년 동안 귀공의 상태는 더 심해진 듯하군. 할 말이 있나?”

“…없습니다, 각하.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볼텍스는 반직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초침이 바쁘게 돌아가는 시계를 열었다.

“긴말 않겠다. 런던으로 돌아와라.”

“각하. 저는…”

“기껏 도망친 곳에서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런던에서 일어나는 온갖 범죄들을 바쁘게 살피는 주제에, 언제까지 숨어만 있을 셈이지?”

“…”

볼텍스는 그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5년 동안 계속 망설였을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의 등을 떠밀 아주 작은 계기였다.

“일본에서 사법 유학생이 올 거다.”

“…”

“당연히 알고 있겠지.”

볼텍스가 지팡이로 바닥에 떨어진 신문 하나를 툭 제 쪽으로 당겼다.

“이미 봤을 테니.”

“…네. 알고 있습니다.”

반직스가 벌떡 일어나 책상 위에 놓인 와인잔을 향해 다가갔다. 잔에는 포도주가 넘치기 직전까지 채워졌다.

“10년만의 유학생이다. 보고 싶지 않나?”

반직스는 마시지도 않을 와인잔을 들고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이제 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언뜻 듣기엔 덤덤해 보였으나 볼텍스는 그 목소리에 담긴 잔떨림까지 느낄 수 있었다.

“그 유학생이…”

볼텍스가 거만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아소기 겐신의 아들이라고 해도?”

쨍그랑-

바닥에 떨어진 와인잔이 산산조각 나면서 붉은 와인을 사방에 흩뿌렸다. 바짓단이 젖어 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반직스가 볼텍스를 돌아보았다.

“무슨,” 떨리는 목소리가 공포와 불안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무슨 말씀입니까.”

“들은 그대로다.”

볼텍스는 미소가 드러나려는 것을 간신히 막았다.

“아소기 겐신의 아들, 그가 이번 대영제국의 사법 유학생으로 온다.”

반직스의 몸이 비틀거렸다. 책상에 기대앉은 그가 한참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음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제가 가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귀공은 보고 싶지 않은가? 아소기 겐신, 그 증오스러운 원수의 아들을.”

“대체 무얼 기대하시는 겁니까. 제가 그자의 아들과 싸우길 원하시는 겁니까?”

“아소기 겐신의 아들이 이곳에서 한가롭게 변호사 공부나 하러 오는 것 같나?”

볼텍스가 아쉬운 거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귀공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과거를 완전히 청산할 기회를.”

그럼, 잘 생각해 봐라. 볼텍스는 반직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는 것처럼 말했으나, 서재를 나서는 순간 그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바로크 반직스는 런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조용히 앉아 그의 ‘사신’을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국제 전신으로 한 소식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유학생이… 사망했다고요.’

코제니 메군달의 사건을 수사하던 중, 바로크 반직스가 볼텍스의 집무실에서 국제 전신을 발견했다. 볼텍스는 멋대로 자신에게 온 서신을 뜯어본 것에 화를 내야 할지 생각하다가 그의 눈빛을 보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 어처구니없는 사고…라고 해야겠지.’

‘그렇습니까.’

‘설마,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는 건 아니겠지.’

‘당장 사흘 후가 재판입니다. 이제 와서 물러설 생각은 없습니다.’

반직스가 국제 전신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 재판이 끝나면 제 영지로 돌아가겠습니다.’

‘바로크 반직스.’

‘아니면,’ 반직스가 그의 말을 가로챘다. 지팡이를 쥔 볼텍스의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코제니 메군달이 사망할 때까지 기다릴까요, 각하.’


“변호사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시험이라도 치르겠습니다.”

볼텍스는 눈앞의 작은 동양인 청년의 청원을 들으며 짧은 고민을 마쳤다. 이대로라면 ‘사신’은 다시 런던을 떠날 것이다. 교환 살인을 이용해 토바이어슨 그렉슨을 죽이겠다는 계획도 어그러진다. 위대한 대영제국을 위한 그의 큰 그림은 한순간에 빛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아소기의 의지를 잇는다, 그 발언은 진심인가?”

“아…네, 그럴 생각입니다만…”

“그런가…”

볼텍스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그는 미소를 숨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신이 그에게 준 또 다른 기회였다. 저 일본인 변호사는 분명 그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 것이다.

“좋다. 귀군의 바람대로 기회를 주도록 하지.”

바로크 반직스. 넌 결국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네 형이 그랬듯이 너 또한 내게 스스로 네 목을 맡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바라던 그 순간이 오면 너는…

볼텍스는 이 재판 이후 그를 찾아올 바로크 반직스의 표정을 떠올리며 회중시계를 열었다.

뭐, 목줄을 놓을지 당길지는 그때 결정하도록 할까.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7시간 53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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