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어두운 바다의 등불이 되어

[백애영] 여자아이는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을까?

체념과 꺾인 자존감, 원치 않는 아름다움이지.

-애영 과거 날조글.

-논컾.

너무 어렸을 적의 일이라 처음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앨범을 들여다보며 보육원장이 ‘얘가 너한테 뽀뽀해서 네가 싫다고 때렸잖니~’ 하고 사진을 가리켜도 애영은 무감한 눈으로 사진만 흘끗 보고 넘겼다. 저 날이 처음이었을까? 그 전에 또 비슷한 일이 있었을까.

예쁘면 살기 쉽다는 말이 있다.

애영은 그 비슷한 말을 들을 때마다 참지 못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 말을 뱉는 놈들은 전부 남자라는 것에 제 커리어를 걸 수 있다. 예쁘니까 호감을 사는 일도, 적을 만드는 일도 쉽다는 걸 그 놈들은 모른다.

애영은 얼굴도 모르는 부모가 물려준 우수한 유전자 때문에 기억도 나지 않는 아기일 때부터 관심 속에서 자랐다. 네가 어릴 때부터 남자애들을 얼마나 울렸는지 모른다며 보육원장은 때때로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애영을 호되게 혼내지도 않았다. 보육원에서 예쁜 여자애가 살아남기 얼마나 힘든 일인지 원장은 아주 잘 알았다.

예쁘게 태어난 애영에게 잘못은 없었지만 세상은 그를 힘들게 했다. 애영은 영영 해소되지 않을 분노를 가슴에 품고 다녔다.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들이 성숙해지길 바라는 것만큼 쓸데없는 일은 없다. 유치원을 다닐 때는 애교 수준으로 보이던 호감 표시가 짖궂은 장난과 부담스러운 태도로 변했다. 애영은 툭하면 머리채가 잡혔고 물건이 사라졌으며 시시때때로 발이 걸렸다. 하지만 애영에게는 다행히도, 또 그 놈들에게는 불행히도, 그는 눈에 띄는 외모보다도 뛰어난 운동 신경과 참지 못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머리채를 잡은 놈은 그날 머리털이 반쯤 뜯겨 바닥에 흩날렸고 물건을 훔쳐간 놈의 가방은 화장실 쓰레기통에 지퍼가 열린 채로 통째로 처박혔다. 넘어지라고 발을 걸었던 놈은 애영의 발에 발가락이 밟혔다가 아파서 무심코 뻗은 손가락마저 짓밟혔다.

“애영아, 남자애들이 좋아서 장난친 건데 그렇게 심하게 반응하면 어떡하니?”

“전 걔네 싫어요.”

“싫으면 말로 하면 되지, 너무 과하잖아. 여자애가 그렇게 폭력적이면 안 돼.”

애영의 담임은 나이 든 부인이었다. 남자애들이 좀 짖궂게 장난친걸로 과하게 반응하는 애영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부드럽게 타일렀고 애영은 담임 선생님이 저를 혼내는 것이 아니라 걱정해주는 태도인 것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싫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도 안 들은 건 걔네란 말이에요!! 애영은 보육원으로 돌아와 엉엉 울었다. 애영 또래의 딸이 있다던 보육원장은 애영을 끌어안고 토닥여줬다. 애영이 방에 돌아가고도 한참을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원장은 고민하다 행정복지관에 전화를 걸었다. 태권도든 합기도든, 도장을 다닐 고아 한 명을 후원해줄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태권도장에 다닌 후부터 애영을 쓸데없이 괴롭히는 남자들이 줄었다. 그가 도장에서 격파 송판을 가루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기억도 나지 않을 시절부터 쌓아온 울분을 전부 태권도로 풀어 버린 애영은 학교에서 쓸데없이 눈에 띄는 폭력을 쓰지 않게 되었다. 다만 소문을 모르는 놈이 머리채를 잡으면 말없이 손날로 목덜미를 가격하고 명치에 주먹을 꽂아 넣어 상대의 입을 다물게 했다. 여자아이의 주먹은 상대를 죽일 위력은 없지만 쪽팔려서 닥치게 할 힘은 있었다.

익명의 후원자에 의해 태권도장에 등록했던 애영은, 곧 그 재능을 알아본 관장의 배려로 후원이 끊긴 후에도 여전히 도장을 다닐 수 있었다.

중학교 생활 중에서 애영이 제일 기다리는 건 체육 수업이었다. 활동성을 고려하지 않은 교복 대신 면과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 신축성 좋은 체육복을 입은 애영은 선생님이 시키지도 않은 스트레칭을 하며 운동장의 공기를 만끽했다. 몇 번 움직이다 다리 아프다며 벤치로 슬며시 사라진 여자애들 몇 명은 운동장에서 누구보다 활기차게 달려다니는 애영을 보고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귓속말로 떠들었다.

어떤 운동을 하든 애영은 A를 받았다. 맨몸 운동도, 기구 운동도, 구기 운동도 애영은 자신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며 단련된 몸은 체육 선생님이 아직 1학년인 애영에게 진지하게 최상위권 체대를 준비해보라고 조언해줄 정도였다. 수행평가에서 같은 반의 남자보다도 좋은 기록을 받은 애영이 싱글벙글하며 교실로 돌아오자 뒤에서 어떤 놈이 다 들리도록 떠들었다.

“아, 백애영 저 능력이 아깝다.”

“뭐가?”

애영이 교실에 들어온 줄 모르는 친구가 거들자 놈이 애영을 흘끗거리며 대답했다.

“저렇게 운동 능력이 좋으면 뭐하냐. 얼굴이 저렇게 예쁜데. 얼굴 때문에 능력 썩힐 거 생각하니 내가 다 아깝다.”

“뭔 헛소리야. 능력도 좋고 이쁘면 더 좋은거지.”

“아니지~ 쟤 키도 작잖아. 아, 키가 좀만 더 컸으면 무슨 국대 같은거 했겠다. 이쁘다고 팬 많이 생겼을 듯?”

“그거 백애영한테 실례-”

“야, 더 말해 봐.”

어느샌가 애영이 그들 앞에 서 있었다. 적당히 대꾸해주고 있던 친구는 그제야 침묵 속에서 눈치를 보고 있는 여자애들과 흥미롭게 쳐다보는 남자애들 사이에서 자신들만 떠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색이 된 친구가 어버버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아까 그놈은 책상에 두 발을 걸친 채로 건들거렸다.

“뭐? 니 능력 아까운 건 사실이잖아.”

“내가 왜 능력을 썩히는데?”

“아, 왜긴. 이쁘니까! 아하, 너 이쁘다는 말 듣고 싶어서 괜히 말 건거야? 거 참. 그래 너 이뻐. 됐냐?”

거들먹거리며 큰 소리를 내던 놈은 애영의 의도를 눈치챘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런 놈을 보는 애영은 아무 표정이 없었다.

몇 초간의 적막 속에서 머쓱해진 놈이 한 마디 더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애영은 빠르게 의자를 걷어찼다. 네 발로 남자의 무게를 지탱하던 의자는 놀랍게도 애영의 발차기 한 방에 한쪽 다리가 붕 뜨더니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쿠당탕,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엎어진 놈은 쓰러진 채로 얼떨떨하게 눈을 끔뻑이다가 곧 상황을 파악했는지 벌떡 일어났다. 벌개진 얼굴이 수치심으로 가득했다.

“이게 여자애라고 봐줬더니-”

“누가 누굴 봐줘. 웃기고 있네. 야, 너는 네 걱정이나 해. 공부도 어중간하고, 운동도 못하고, 심지어 못생긴 주제에 누구한테 참견질이야?”

“뭐가 어째?!”

안 그래도 바닥에 넘어져서 쪽팔린데 훅 치고 들어오는 사실적시 명예훼손에 남자가 이성을 잃고 주먹을 휘둘렀다. 흥미롭게 쳐다보던 남자들도 놈이 진심으로 주먹을 들자 놀란 얼굴로 말리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이미 내질러진 주먹은 옆의 친구들이 잡기도 전에 애영에게 똑바로 향했다. 뒤에서 여학생들이 짧게 비명을 질렀다. 애영은 가볍게 몸을 돌려 주먹을 피하더니 관성을 이용해 돌려차기로 상대의 목을 갈겼다. 4품 심사를 앞두고 있는 사람의 발차기를 직격으로 맞은 놈은 그대로 나가 떨어지며 바닥에 볼썽사납게 굴렀다.

뒤늦게 달려온 학생부장 선생님은 바닥에 축 늘어져 있는 남학생과 그 앞에 서 있던 애영을 보고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기절한 남학생이 응급차에 실려 가는 동안 혼자 끌려온 애영은 반 아이들의 목격담을 통해 먼저 시비를 건 데다 주먹을 휘둘렀던 남학생의 잘못이 크게 인정되어 정당방위로 경고만 받고 풀려났다. 다음 날 목에 반깁스를 한 채로 등교한 남학생은 벌점을 받고 며칠 간 교내의 쓰레기를 주웠다.

늘 겪는 시비, 늘 겪는 폭력. 애영은 진저리가 났다. 능력이 얼굴에 비해 아깝다, 아니면 얼굴이 능력에 비해 아깝다는 소리는 저 새끼가 처음도 아니었다. 어른이고 아이고 가리지 않고 감탄이나 시비조로 늘상 들었다. 국가대표 같은거 하면 팬 많이 붙겠다고? 애영은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한테서 칭찬처럼 들었다. 애영은 차마 남자애들한테 하듯 필요 없다고 내뱉지 못하고 조용히 웃었다.

애영은 딱딱한 규칙 아래 정정당당한 시합 따위 관심 없었다. 태권도장을 다니며 확실히 느꼈다. 애영은 고만고만한 여자 상대와 정해진 기술로만 싸워서 이기는 데에는 흥미가 없었다. 저를 위협하고 주먹만이 답인줄 아는 덩치만 큰 남자 놈들을 때려 눕히는 쪽이 훨씬 즐거웠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남자보다 약할 수 밖에 없는 여자인데다 키도 크지 않은 애영은 엄격한 규율 아래서 절대 남자와 대등해질 수 없었다.

“선생님. 몸을 쓰는 일 중에 뭐가 돈을 제일 많이 버나요?”

“으음…. 택배가 돈을 잘 번다고는 들었는데.”

“아, 그렇게 무식…아니 힘만 써야 되는 일 말고요. 뭔가 기술을 써야 한다거나.”

애영은 자신에게 호의적인 체육 선생에게 진로 상담을 요청했다. 기껏해야 대학 진학 문의일줄 알았던 선생님은 갖고 온 체대 입시 자료를 전부 내려놓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이미 애영의 담임에게서 그가 고아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던 선생은 애영이 고소득 직업에 관심을 갖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고보니 애영이 태권도 한댔나?”

“네. 얼마 전부터 권투도 배우고 있어요.”

“특공 무술이 재밌나 보구나?”

그런가? 애영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가 끄덕였다. 다른 운동도 나름 재밌긴 했지만 직접적으로 상대를 쓰러뜨리는 무술이 재밌었다. 아르바이트로 다니게 된 복싱장 사장은 애영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일하는 시간 외엔 그에게 기술을 알려주었는데 새로운 배움에 흥미가 생긴 애영은 아르바이트가 없는 날도 자진해서 출근했다.

“그럼 경호원?”

“경호원은 자주 싸우나요?”

“아니…. 자주 싸워야 하는 경호직은 때려 치워야지. 으으음….”

체육 선생은 한참 고민하더니 손가락을 튕겼다.

“아, 용병?”

“용병?”

“한국에서 흔한 직업은 아닌데, 아냐, 용병은 너무 거칠어.”

“얼마나 거친데요?”

“아냐아냐, 이건 애영이 네가 할 일은 안돼. 죽기도 쉽고. 살인도 하고. 잊어 버려라.”

“돈은 많이 줘요?”

“잊어 버리라니까?”

체육 선생은 단호하게 대답하더니 그 뒤로도 다른 직업들을 열심히 얘기했다. 하지만 다른 일엔 별 관심을 갖지 못한 애영은 상담이 끝나자마자 용병에 대해 찾아봤다.

몸을 써서 싸우고, 대가로 일반인은 쉽게 만지지 못하는 거액을 받았다. 엄격한 규칙 따위는 없었다. 그 곳에선 살아남는 자가 강자였고 근육만 가득 찬 남자도 방심하면 죽었다. 애영은 평화로운 양지의 세계와는 다르게 적용되는 용병 세계의 약육강식의 법칙이 마음에 들었다.

애영은 고등학교를 다 마치기 전 홀연히 사라졌다. 걱정 어린 조언도 듣고 싶지 않았고, 또 그들이 저의 생사를 걱정하는 일도 원치 않았기에 저를 돌봐준 보육원장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태권도 관장에게는 짧은 편지만 남겼다.




애영이 돈 버는 일에 집착하는 과정도 세세하게 적고 싶었는데, 이미 원치않는 미모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굳이 가난의 고통까지 상세하게 묘사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서 생략했습니다.

왜 애영은 용병이 되었을까? 생각하다가 과거를 나름 상상해봤어요. 다른 나라 사람까지 넋놓고 쳐다보게 만들 외모라면 애영이는 연예인을 해도 대성했을텐데 왜 하필 용병이었을까. 힘을 길러야 했던 상황이었을까. 그리고 돈에 왜 이렇게 집착할까. 그렇다면 역시 고아거나 고아에 준하는 상황이겠구나.

예쁘고 덩치 작은데다 (아마 뒷배경도 없는) 여자아이. 악에 받치기에 충분한 조건이잖아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여자에게는 같은 여자라는 이유로 국적 불문하고 굉장히 무르잖아요. 정상적인 남자(해량, 무현)에게도 예의 바르게 굴고요. 세상이 괴롭혔다고 세상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게 아니라 자신에게 해를 입힌 상대에게만 가차없이 굴어요. 강강약약의 자세는 무술가의 자세이기도 해서 태권도 같은 것을 배우지 않았나 생각했습니다. 물론 애영의 천성이 착하기도 하겠지만.

용병이 되는 과정까지는 굳이 후술하지 않겠어요…. 유명하지 않은 용병단에 들어가 개처럼 구르거나 스승처럼 모셨는데 뒤통수맞거나 그런 일들만 가득했을 거 같아서…. 애영이 괜찮은 스승이나 용병단을 만났으면 그런 일을 겪지 않았겠죠. 첨부터 해량이를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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