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연인과의 여행》
커미션 신청본
ⓒ하람
푸른 바다 위를 비행하는 비행기 안, 퍼스트 클래스 비행기로 더없이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 속에 평온히 창 밖으로 내다보던 나비드가 설렘으로 불그스레 달아오른 얼굴로 루트를 바라보았다.
“진짜, 정말로 완벽해 루트.”
들뜬 음성에 설렘이 숨겨지지 않는다. 덩달아 입꼬리에 빙그레 지어지는 미소가 자신을 향하자 루트가 따라 웃으며 나비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 손 가득 나비드의 고운 흑발을 움켜쥐어 체취를 맡은 루트의 흑안이 두 눈 가득 나비드를 담아내었다.
“마음에 들어하면 다행이네.”
“마음에 드는 정도가 아닌 걸. 오랜만에 여행이라 무척 즐거워. 하하, 루트씨 완전 신사 되셨네?”
정말로 기분이 좋은 건지 실없는 장난이나 쳐대며 저를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루트가 결국 픽 옅은 웃음을 지었다. 1년이다. 1년 만에 보는 웃음이고, 장난이었다. 그 동안 보지 못한 것에 대해 보상하듯 받은 휴가를 단 둘이서 여행 떠나는데 쓰자고 마음 먹었을 때는 조금 불안했었다. 혹시라도 싫어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들었기에. 그러나 그런 자신의 걱정이 괜한 걱정이었다는 듯 좋아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꽤나 오랜 시간동안 보지 못했던, 보고 싶었던 그 얼굴이 미소를 환히 품으며 자신을 반긴다. 두근거리는 심장에 간질함이 느껴졌다.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에 드디어 네 곁으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너는 변함없이, 아니 이전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포근했다.
“하하, 좋아해서 다행이야. 기대해 나비드, 도착하면 분명 더 멋진 일들이 있을 거야.”
“어머, 이미 기대 중인 걸? 정말이지 너무나도 환상적인 여행일 거야 루트. 사실 지금도 너무 완벽한 걸.”
“그럼 영광이지, 나의 작은 천사.”
“윽, 그게 뭐야. 하지 마 루트.”
장난스러운 어조에 질색한 그녀가 이내 웃음을 터트리며 루트의 가슴팍을 약하게 밀어냈다. 얼굴을 마주보며 웃는 그 분위기가 장난스러우면서도 달콤함이 녹아든다. 그 기분 좋은 분위기 속에서 그녀는 기분 좋게 웃었다.
천천히 비행기가 여행지인 섬에 착륙하자 나비드의 입에서 연신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도착하면 더 멋진 일들이 있을 거라는 루트의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는 듯 도착한 섬은 풍경만으로 사람을 홀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공항을 나와 눈이 따가울 정도로 내리쬐는 햇빛 아래에 선 그녀가 주변을 돌아보았다.
“마음에 들어?”
정말 마음에 들었던 건지 말할 생각도 안 한 채 입을 벌리며 주변의 풍경을 담아내는 나비드에 루트가 손에 든 베리모를 나비드의 머리에 씌워주며 말을 걸었다. 그제야 자신이 직열하는 태양빛 아래에 서 있음을 인지한 나비드가 모자를 고쳐 쓰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정말이지, 환상적이야.”
“아직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벌써부터 환상적이야?”
“아직 본격적인 여행을 즐기지 못했으니까 환상에서 멈췄지. 본격적으로 즐길 수 있게 되면 이곳을 천국으로 칠까?”
천국보다 더 좋은 단어는 현재로선 생각나지 않는다며 웃은 그녀가 무엇을 봤는지 이내 호들갑을 떨며 루트의 팔을 잡아 끌고 어딘가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루트, 빨리 와. 저기 정말 근사한 게 있는 걸.”
“천천히 가도 돼 나비드, 시간은 많아.”
“하지만 너와 함께하는 시간은 1분 1초가 아깝고 소중한 걸.”
불쑥 들어오는 나비드의 말에 루트가 잠시 눈을 동그랗게 크더니 이내 맥없이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렇게 말하면 거절할 수 없는 걸.”
“그러니까 빨리 와 루트.”
그리 말하며 루트를 재촉한 나비드가 들어선 곳은 다름아닌 평범한 기념품 샵이었다. 보통 여행지를 떠날 때 들리는 곳이라 루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지만 얼굴에 홍조까지 띤 채 즐거워하는 나비드의 표정을 보곤 결국 못말린다는 듯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곧 한 곳에 정착해 푸른 리본으로 장식 된 밀짚모를 집어든 나비드가 벽에 걸린 거울로 걸어가 모자를 쓰는 게 그의 시야에 보였다.
“마음에 드는 걸 찾았어?”
“응, 이 모자 좀 봐 루트. 리본 끈이 내 눈색이랑 비슷해서 어울리지 않아?”
터기석을 닮은 에메랄드빛 푸른 눈이 저를 바라보며 묻자 루트가 그녀와 모자를 번갈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의 눈 색을 닮은 에메랄드빛 리본은 그녀와 잘 어울렸다.
“잘 어울려 나비드.”
“정말? 그럼 역시 이걸 사야겠어.”
자신의 칭찬 한마디에 곧바로 모자를 집어든 그녀가 계산대로 걸음했다. 아직 시간은 많건만 그녀는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워서 어쩔줄 몰라 하는 것같아 루트의 표정에 묘한 씁쓸함이 어렸다. 그만큼 자신과 함께 하는 시간이 그녀에겐 귀하다는 증거였다. 평범한 부부였다면 당연했을 시간이 자신의 일로 인해 그녀에게 평범하지 못한 일이 돼버린 게 미안할 뿐이었다. 그 탓에 모자를 사고 제 쪽으로 걸음한 나비드가 자신의 팔을 끌고 산책을 요구해도 불만스러운 소리 한 번 내지 않았다. 물론 불만이 없기도 했고. 여행을 오기 전 사전에 조사한 모양인지 가이드북을 들고 지도를 본 채 이리저리 걸음하는 그녀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기에 루트는 마음을 무겁게 누르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바람이 좋아 루트, 지금 너무 즐거워서 죽어버릴지도 몰라.”
“음, 그럼 네가 널 기껏 이 먼 섬까지 데려온 이유가 없어, 나비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온 건데 네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도 없어.”
“하하,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래도 정말로 기분 좋아.”
기분 좋은 여름과 가을, 그 사이로 흘러가는 바람이 그녀를 스쳐지나가자 흑발의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동시에 자신의 뺨에도 서늘한 바람이 닿았다. 조심히 톡톡 제 볼을 두드리고 가는 바람에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이 기분 좋은 바람 때문인지 제 앞에서 환히 웃는 여인의 미소 때문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같이 웃으며 거리를 걷고, 시덥지않은 얘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자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택시를 타면 된다고 말해도 한사코 제 발로 걸어보고 싶다는 그녀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 숙소까지 그녀의 손을 잡고 걸어가게 된 루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으음, 역시 미안해 나비드.”
“응? 뭐가?”
“내 일이 아니었으면 이런 여행 자주 왔을 텐데.”
그렇게 말한 루트가 미안한 감정과 씁쓸한 마음을 채 숨기지 못하고 표정에 드러내자 슬쩍, 루트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낸 나비드가 손을 올려 루트의 두 뺨을 살포시 잡았다.
“저런, 그런 말을 하면 못 써 루트. 나는 지금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해서 어쩔줄 모르겠는 걸.”
“하지만 그 행복을 더 자주 느낄 수 있게 해줄 수도 있었잖아.”
“그랬다면 이 행복은 반감 되었을지도 몰라. 오랜만에 봐서 더 애틋하고, 더 즐겁고, 더 행복해. 루트, 나는 하나도 섭섭하지 않은 걸. 이거 봐, 지금 내가 슬퍼 보여?”
나비드의 눈이 루트를 향한다. 눈동자 가득 머금은 웃음기와, 불그스레 달은 볼, 입꼬리가 살짝 걸쳐진 웃음까지 어느 것 하나 불행해 보이는 점이 없었기에 루트가 졌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닌 것같네.”
“그렇지? 그러니깐 그런 생각하지 말고 앞으로의 여행을 즐기자. 벌써 하루가 흘러가버렸는 걸.”
정말로 아쉽다는 듯 기울어지는 해를 바라보는 나비드에 루트가 결국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봐도 변함없는 성격이었다.
숙소까지 걸어온 터라 피곤해진 두 사람은 잡아두었던 룸에 도착하자마자 부리나케 씻더니 곧바로 침대에 자리 잡았다. 온몸이 노곤하다며 졸린 표정을 짓는 나비드의 모습에 피식 웃은 루트가 그녀의 몸을 조심스럽게 토닥였다. 그러자 뭐라 꿍얼거리던 그녀의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왔다. 이내 색색거리는 숨소리만 들리자 루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닿음과 동시에 그도 피곤해진 눈을 감아 잠을 청했다.
어제로 인해 시간이 굉장히 빨리 간다는 걸 느낀 부부의 움직임은 조금 급해졌다. 여유롭게 즐기려 온 여행이었으나 하고 싶은 게 다소 많았던 나비드가 있었기에 여유보다는 즐거움을 만끽하기로 정한 탓이었다.
“루트, 루트! 여기 좀 봐봐!”
“뭔데 그래?”
“얍!”
나비드의 다급한 부름에 루트가 서둘러 걸음을 옮기며 묻자 나비드가 장난스레 웃으며 손에 들고 있던 복면을 루트에게 씌워주었다. 앞이 화려한 깃털들로 장식된 복면을 뒤집어쓴 루트의 모습이 여간 우스운 게 아니었는지 꺄르륵 웃음을 터뜨리는 나비드에 루트가 한숨과 함께 복면을 벗더니 제게 씌워졌던 복면을 확인했다.
“윽, 이건 아니지 않아 나비드? 조금 과한 복면이네.”
“하하, 뭐 어때 루트. 굉장히 잘 어울렸어.”
“음, 칭찬인지 모르겠는데.”
불만이 묻어나오는 루트의 말에 나비드는 다시 한 번 크게 웃더니 도망치듯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불만담긴 눈을 회피하듯 급히 움직이는 모습에 루트가 어깨를 으쓱이곤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어딜 갈 셈이야?”
“첫째날에는 가볍게 둘러만 봤으니 오늘이야말로 제대로 된 쇼핑을 즐겨야지 않겠어?”
“뭐?”
“자자, 루트 이럴 시간이 없어! 빨리 와!”
어제 분명 그렇게 가게를 쏘다녔건만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는 말에 루트가 놀라 물었으나 대답을 들려줄 그녀는 이미 훌쩍 앞서 가게를 들어서는 중이었다. 정말 이럴 때는 행동이 빠른 자신의 아내가 신기할 따름이었다.
가게에 들어선 나비드는 조금 전 자신이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많은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마음에 드는 시스루 가디건 하나만 계산하고 곧바로 다음 가게로 들어섰다. 그렇게 나가고 들어가고 나가고 들어가고 나비드가 옷을 갈아입는 걸 몇 번이나 보고 나왔을 때는 늦잠을 자 늦게 나오긴 했지만 어느새 저녁시간이었다. 쇼핑만 했는데 4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을 소비한 것에 루트는 달갑지 않았지만 눈앞에서 웃는 여인은 아니었다.
“오늘 산 옷들이 하나같이 전부 마음에 드는 옷이야.”
“그렇겠지. 가게를 얼마나 들렀는데.”
“하하, 루트 이 정도면 약과지. 아무튼 정말로 예쁜 옷만 샀으니까 내일 기대해. 내일은 더위를 식힐겸 어디 바다라도 놀러가자.”
“마침 바다가 보이는 괜찮은 별장을 빌려놨으니 내일은 거기서 제대로 노는 게 어때.”
“어머, 그럼 좋지.”
준비도 철저하셔라. 그렇게 덧붙인 나비드가 최고급 스테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황홀하다는 표정을 짓는 나비드의 얼굴이 너무 즐거운 탓에 결국 오늘 하루도 이렇게 흐지부지 넘어간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할 수 없게된 루트가 반쯤 체념하며 제 몫의 고기를 썰며 속으로 내일의 여행을 기약했다.
다음날 어제와 달리 아침 해가 떠있을 때 자리에서 일어난 루트와 나비드는 고급스러운 차 한 대를 대여한 뒤 서둘러 호텔을 벗어났다. 여름의 태양이 내리쬐는 30도라는 날씨는 여간 더운 게 아니었기에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에어컨을 틀어도 창밖의 더위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하…… 난 못 놀아 루트. 너무 더운 날인 걸.”
이런 날씨에 바다라도 뜨겁게 데워지겠다며 중얼거린 그녀가 보조석에 축 늘어져 말하자 루트는 입꼬리를 올리며 가볍게 웃었다. 그도 그럴게 말은 저리 해도 막상 도착하면 가장 신나게 놀 사람이 누군지 뻔히 예상이 간 탓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바다에 도착하자마자 수영복 차림으로 바다에 뛰어든 그녀는 차가운 물 안에서 물장구를 치며 잔뜩 신난 표정으로 루트를 불렀다.
“루트! 뭐하고 있어? 얼른 들어오지 않고.”
“방금 못 놀겠다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생각하고 있었지.”
“하하, 막상 바다를 보니깐 안 뛰어들고는 못 배기겠더라고.”
“어련하시겠어.”
태연한 나비드의 말에 피식 웃은 루트마저 바다에 들어서는 순간 부부의 물 전쟁이 막을 올렸다.
“꺄아아악! 반칙! 완전 반칙!”
“물놀이에 반칙이 어딨어? 즐기면 되는 거 아니었나.”
언제 챙긴 건지 커다란 물총을 가지고 사정없이 나비드를 쏘는 루트에 연신 비명을 질러대던 나비드는 이내 승부욕이 불타올랐는지 손으로 물이란 물은 전부 때려가며 물을 튀기기에 열중했다. 한 명은 물총, 한 명은 맨손으로 싸우는 한쪽이 조금 불리한 물 전쟁이 막을 내릴 때는 이미 두 사람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고 난 후였다.
“정말! 물총을 챙겨오는 게 어딨어?”
“안 챙겨오는 사람이 잘못이지.”
“완전 야비했어. 알아?”
“하하.”
지친 몸을 뉘여 일광욕을 즐기는 것으로 휴식을 취하던 나비드가 삐친 듯 투덜거리자 루트가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듯 나비드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도 루트의 물총 덕에 심심할 틈이 없을 정도로 재밌게 놀았으니 처음엔 투덜거리던 나비드도 루트의 웃음에 결국 항복선언을 내뱉었다.
물놀이를 하고 난 후가 가장 피곤하다고 열정적으로 물놀이를 해댄 두 사람은 호텔로 도착하자마자 뻗어 잘 듯 피곤했으나 오전에 나서기 전 지배인에게 해 둔 부탁이 있기에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죽을만큼 피곤한 몸을 붙들고 부부가 자리를 잡은 곳은 와인잔 두 개에 1907년산 고급 와인을 둔 소박한 테이블. 어두운 방 안에 테이블 위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서로를 바라본 두 사람이 동시에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몸은 노곤했으나 피곤함을 이겨내고 만든 자리가 썩 나쁘진 않은 터라 와인잔에 와인을 따른 나비드가 빙글빙글, 잔에 든 와인을 돌려가며 입을 열었다.
“네가 없이 지낸 시간들이 울 정도로 슬프지는 않았지만 역시 같이 있는 게 좋은 것 같아.”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넘실거리는 촛불 너머로 반짝거리자 루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임무 때문에 그녀를 혼자 둔 시간이 길었는데 이 여행이 끝나면 또 다시 장기 임무를 수행해야하는 까닭이었다. 또 멀리 떠나게 될 거라는 말을 해야 했으나 이제 겨우 제대로 얼굴을 보고 이제 겨우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곧바로 떨어져야 한다는 말을 전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특히나 나비드가 이렇게 웃고 있는데. 으득, 몰려오는 착잡함에 루트가 남모르게 입술을 짓이겼다. 오랜만에 보는 네가 내 앞에서 이토록 예쁘게 웃는데 어떻게 얘기를 할 수 있을까. 결국 그녀의 눈치만 보다 이야기 할 타이밍을 놓친 그가 타는 목을 달래기 위해 와인잔을 들었다. 달 아래에서 조용한 술자리를 가진 나비드는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로, 루트는 씻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 설 때 그의 첫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따르르릉-. 따르르릉-.
많고 많은 벨소리 중 굳이 기본 벨소리를 고집하는 루트의 전화벨 소리가 울리자 화장실로 들어선 그를 대신해 나비드가 성큼성큼 핸드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들리는 전화벨 소리에 빼꼼, 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 루트의 눈에 전화를 받는 나비드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순간 갑작스러운 불안함이 몰아쳤다. 설마, 아니겠지. 어째서인지 드는 불안함에 그는 요주 인물 한 명이 떠올랐으나 애써 불안을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윽고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에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었다.
“여보세요.”
“여-. 형, 휴가는 잘 보내고 있고? 안 그래도 말이야 다음 임무가 또 한참은……에엥? 뭐야? 형이 아니잖아?”
철없는 목소리, 장난기가 다분한 버릇없는 목소리의 정체는 다름아닌 자신의 동생이었기에 루트가 황급히 욕실에서 달려나와 전화기를 가로챘다.
“루트?”
“받을 필요도 없는 전화야.”
갑작스러운 루트의 행동에 나비드가 당황스러운 눈으로 루트를 바라보자 고민없이 전화를 끊은 루트가 조심스레 차단 버튼을 누르며 그녀를 달랬다. 하마터면 장기 임무를 가는 사실을 들킬 뻔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쿵쿵거렸으나 애써 태연함을 유지했다. 그런 루트의 노력이 쓸모가 없지는 않았는지 의아해하던 나비드도 졸린지 하품을 내뱉고는 다시 침대로 걸음을 옮겼다. 한바탕 뒤집힐 뻔했던 위기가 가까스로 모면되자 루트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런데 진짜 언제 말하면 좋지.’
차단 목록에서 제 동생의 전화번호를 확인한 그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남은 여행의 시간을 그럭저럭 적당히 흘려보낸 부부의 여행은 어느새 마지막 날의 다달았다. 7일의 여행이 너무나 짧게 느껴져 흘러간 시간도 되돌리고 싶을 정도였던 나비드가 몹시 아쉬운 표정으로 호텔에 풀었던 짐을 챙겼다.
“정말이지 7일이 이렇게 훅 갈 줄이야. 얼마 놀지도, 쉬지도 못한 것 같은데.”
아쉬운 티를 내며 짐을 싸는 나비드의 모습에 루트도 그리 마음이 좋지 못했다. 할 수만 있다면 휴가기간을 연장하고 싶었지만 이미 낼 수 있는 최대로 내고 온 뒤였다. 그렇기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떠나야 했었고. 한편 이런 사실을 아직도 그녀에게 전하지 못했기에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나중에 알수록 충격이 클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나비드를 바라보자 영문모르는 그녀는 자신이 너무 아쉬운 티를 내서 바라보는 거라 생각하고 싱긋, 미소를 지어 보냈다. 그러나 채 가려지지 않는 아쉬움이 표정에 서려 남아있었다. 이제 겨우 얼굴을 본 것 같은데. 표정만으로도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그녀에게 다가선 루트가 피식 웃으며 나비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다음에 또 오자.”
“나는 무조건 찬성이야. 기왕이면 다음은 더 길게 왔으면 좋겠다.”
“가능하도록 노력해볼게, 레이디.”
“어머, 힘내세요. 미스터 루트.”
루트의 장난스러운 말을 받아친 나비드가 웃자 그제야 착잡함이 잔존했던 루트의 표정에 어두움이 가셨다.
그러나 그런 홀가분한 마음도 오래가진 못했다. 공항으로 들어서 비행기에 올라서니 새삼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과 함께 임무로 복귀해야 한다는 사실이 떠오른 탓이었다. 결국 비행기에 올라탈 때부터 지금까지 내도록 고민한 그가 고개를 틀어 나비드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나비드.”
“…….”
한참의 고민 끝에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 겨우 입을 떼었지만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루트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비드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루트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단꿈에 빠진 건지 조용히 숨만 색색 내쉬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일주일 동안 피곤했을 만도 하겠지.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잠에 빠진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쉰 루트가 손을 뻗어 헝클어진 나비드의 머리칼을 정리했다. 가능하면 지금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 말하지 못한 임무에 대해 신음을 뱉은 그가 짧게 고민하더니 이내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가 고민을 거쳐 그녀에게 접촉을 시도할 때까지 그녀는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 있었다.
"잘 자. 나비드."
그녀의 손등을 입가로 끌어올려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춘 루트가 중얼 거렸다.
" Sweet dream. "
그리 말하며 다시 한 번 길게 손키스를 한 루트의 달콤한 시선은 비행기가 공황에 도착해 나비드가 깰 때까지 줄곧 이어졌다.
공황에 도착한 부부는 근처에 맡겼던 자동차를 찾아 일주일간 비웠던 집으로 향했다. 드디어 가는 집에 나비드는 왜인지 조금 설레는 표정이었으나 루트는 공황에서부터 집으로까지 가는 길이 무척이나 짧게 느껴졌다. 외제차의 시동을 걸고 그녀를 태우는 동안 착잡함이 쌓여가는 기분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아직까지 미처 말하지 못한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타이밍을 잡을 수 없어 힐끔, 나비드의 눈치를 볼 때 그녀는 창밖을 바라보며 연신 아쉬움을 표현했다.
“이번 여행은 무척 즐거웠어. 다음에 또 가자, 루트.”
정말로 아쉽다는 듯 미련 남은 눈으로 밖을 바라보는 나비드에 그가 쓰게 웃었다. 역시 지금 타이밍에는 말할 수 없었다. 결국 다음 번에도 가자고 대답해야하는 상황이 미워지는 날이었다.
시간이 질주했나 싶을 정도로 훌쩍 가버린 시간에 달이 찾아올 때쯤 집에 도착한 루트가 곤히 잠든 나비드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나비드, 집이야. 그만 일어나.”
귓가에 들리는 매력적인 보이스에 몸을 꿈틀거리던 나비드가 재차 몸이 흔들리자 결국 무거운 눈꺼풀을 뜨고 루트를 바라보았다.
“아...... 깜빡 잠이 들었나봐. 하하, 늙으니깐 졸음도 많아지나.”
“늙기는, 내가 보는 너는 언제나 젊고 아름다워. 나의 작은 천사.”
“윽, 그거 하지 말래도.”
루트의 장난에 잠이 깬 건지 번쩍 눈을 뜬 나비드가 말하자 루트가 그녀의 안전벨트를 풀어주며 차에서 내리기를 종용했다. 달칵하는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가 풀리자 나비드가 그의 차에 내려 땅에 발을 딛었다. 나비드를 뒤따라 차에서 내린 루트가 짐을 내릴 동안 현관문을 연 나비드는 먼저 들어가려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아 루트를 바라보았다. 짐을 내려 현관까지 운반한 루트가 들어올 생각을 안 하고 서있기만 하자 의문이 떠올랐다.
“안 들어와?”
“어, 음. 그게 말이야 나비드. 빨리 말하려고 했는데…….”
나비드의 물음에 루트가 대답을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이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말을 내뱉었다.
“다시 가?”
“응?”
“다시 가야 하냐고 물은 거야 루트.”
그녀의 경험상 루트의 연속적인 출장은 몇 번 있었기에 지금까지 영 어딘가 불편해보였던 루트를 떠올린 나비드가 혹시나 싶어 묻자 루트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일찍 말하고 싶었는데 네가 너무 좋아하니 타이밍을 못 잡았어 나비드. 이번 여행이 끝나면 바로 다시 돌아가야 하거든.”
“아.”
루트의 대답에 나비드가 익숙하니깐 괜찮다는 듯 웃어보이자 루트가 그녀에게 한발짝 다가섰다. 채 지워지지 않는 아쉬움을 본 탓이었다.
“미안해 나비드.”
그리 말한 루트의 입술이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닿자 나비드가 아쉬운 표정으로 루트를 올려보았다.
“이제 겨우 만났는데 다시 또 헤어지네. 얼굴 볼 시간이 너무 적은 능력 좋은 남편을 둔 게 때론 괴롭기도 해.”
“그건 달갑지 않은데.”
“하하, 농담이야 루트.”
루트의 말에 농담이라 웃은 나비드가 슬쩍 루트의 허리를 껴안고 품에 얼굴을 묻자 그녀를 끌어안은 루트가 입을 열었다.
“다녀올게, 나비드.”
무척이나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무척이나 오랜만에 다녀온 여행이었다. 7일이나 이 유능한 사람을 독차지 했으니 이만 만족해야겠지 싶은 나비드가 결국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애써 입을 열었다.
“응, 다녀와 루트.”
그렇게 1년만에 만난 연인과 7일만에 다시 헤어져야하는 안타까운 이별에 부부는 한참이나 서로를 끌어안은 채 침묵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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