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귀 단편

(제목 없음)

정파(화산파)청명 X 사파의 딸이었던 유이설 if 세계관 씨피글.

청명이 사파의 딸인 유이설을 데려와 화산의 제자로 삼아, 본 글에서는 유이설이 청명의 사매로 서술됩니다. 

트친분의 썰을 기반으로 한 리퀘스트 작업입니다.



손 끝에 죽음의 무게가 실렸다. 늘어진 검 끝에 걸린 시신의 눈동자가 생을 잃고 공허하다. 검 자루를 쥔 무심한 눈의 검수가, 시신의 목 근육을 헤집고 들어간 흰 날붙이를 휙 당겨 끌었다. 예리한 검날이 뼈를 끊어내는 감각이 선명했다. 허리께로 당겨 든 검의 끄트머리를 부드러운 흙에 툭툭 두드리던 남자가 쯧,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대가리가 없군.’

 차디찬 시선이 고요가 내려앉은 전장을 훑었다. 한 걸음, 두 걸음. 남자는 젖은 흙 위를 메운 채 식지 않은 시신들의 온기를 즈려밟고 나아간다. 베어넘긴 몸뚱이들 사이에 그가 찾는 놈은 존재하지 않았다. 

 감정 없는 시선이 정면을 향한다. 거대하고 화려한 전각이, 일전의 화우에 휩쓸려 그 단단한 뼈대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핏물이 늘러붙은 발자국이 부드러운 흙에서, 곧은 석재로. 곧은 석재에서, 난도질된 나무 바닥으로 향했다.

 뻔하지. 사파새끼들이 하는 짓이란. 비릿한 웃음이 입가를 맴돈다. 도망쳤나? 아니. 그랬다면 알았겠지.

 그는 튀어오른 나무 조각을 뜯어내고, 무너진 기둥들을 들어 올리기를 반복했다. 무너져가는 건물 안을 헤집던 그가 문득, 움직임을 멈추었다. 저 구석 한켠, 살대가 부러진 작은 문짝 안에, 무언가 이질적인 고요함이 일고 있었기에.

 툭 튀어나온 살대는 이 화려하고 거대한 전각에 속한 것이라 볼 수 없을만치 얇고 초라했다. 청명은 그것을 움켜쥐고, 가벼이 당겼다. 얇고 초라한 것이, 연결된 살들을 붙잡고 우둑 뜯겨져 나왔다. 작은 먼지 바람이 일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뜯겨진 문 안으로 몸을 옮긴다.

 흩날리는 입자들 사이로, 작은 인영이 보였다. 이질적인 고요함 속에, 검디 검은 눈동자가 있었다.

“...이건 또 뭐야.”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매화색 시선이 이채 도는 검은 눈동자의 주인을 훑는다. 햇빛을 보고 살긴 한건지, 창백하리만치 흰 피부에는 핏기가 가셔 있었다. 피죽밖에 못 먹고 살았나. 거죽밖에 남지 않은 듯 깡마른 몸 위에 다 헤진 낡은 옷자락이 걸쳐져 있었다. 물기 없이 마른 입술은 미동이 없다. 제법 예쁘게 생긴 것 같긴 한데.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창백한 낯은 차라리 귀신에 가까워 보였다.

 청명의 시선이 다시 검은 눈동자를 향했다. 그 투명한 것은, 그가 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집요하리만치 그의 매화색 눈만을 좇고 있었다.

 저 눈동자. 저건 좀 봐줄만 하네.

 망령같은 낯에, 오직 그 눈에만 생의 파편이 남아 있었다.

 느릿한 걸음이 망령같은 존재를 향했다. 거리가 좁혀지니 색색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어렴풋 귓가를 울렸다. 끊어질 듯 약한 숨이 드문드문 이어지고 있었다.

 미동 없이 숨을 고르던 여자의 입술이 톡 벌어졌다. 말라붙어 거슬하게 튼 입술이 달싹인다. 새어 나온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맥없이 흩어질 것처럼 나즈막했다.

“죽일거야?”

 마른 입술이 다시 다물린다. 청명은 그 물음에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입술을 두어번 달싹이고, 시선을 내렸다. 

 품이 큰 것인지, 저 마른 몸에 맞는 옷이 없었던 것인지. 헤진 옷깃 아래로 드러난 살결이 창백하다. 부러질 듯 얇은 쇄골 위로 검붉은 멍자국이 선명했다. 부러질 듯 얇은 목선 위에도, 드러난 어깨 위에도. 붉고 푸른 자국과 자잘한 상흔이 가득했다. 상흔을 보고 있자면, 그 삶의 궤적이 눈 앞에 그려지는 듯 했다.

 울컥 치고 오르는 쓴 감정을 눌러삼킨 청명은 시선을 더 아래로, 아래로 내렸다. 얇은 손목 위를 덮은 소매를 물들인 핏물이 보였다. 뼈밖에 남지 않은 긴 손가락들이 날붙이를 움켜잡고 있었다. 날붙이를 타고 내려간 시선의 끝에, 축 늘어진 남성의 몸뚱이가 보였다.

 눈도 채 감지 못하고 절명한 시체의 뒷목에, 단검의 서늘한 검날이 깔끔하게 틀어박혀 있었다. 알 수 있다. 저 여자는 저 단검의 자루를 쥔 손에 아직 힘을 풀지 않았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 끝에, 채 갈무리되지 못한 감정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건 누구지?”

“내 아비.”

 돌아오는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다. 답변에는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아비. 아비라. 아비라는 새끼가 지 자식이라는 여자애를 저 지경으로 버려두었나. 기민한 감각이 그에게 전하고 있었다. 찾고 있던 놈이 이 새끼라고. 버려둔 자식의 이빨에 물려 죽은.

 토기가 일었다. 수려한 낯이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일그러진다. 죽어 공허해진 눈동자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청명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매화색 눈동자를 줄곧 좇던 검은 눈동자가 날붙이 아래의 살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투명한 눈망울 안에 맺혀 있던 두려움과, 무력감이. 씻은 듯 자취를 감추었다.

 저 눈을 안다. 그저 무심하게, 감정 없이 가라앉은 것. 날붙이 끝에 닿은 것을 그저 베고 찔러야 하는 것. 그 이상으로 보지 않는 저것은,

“너, 이름이 뭐야.”

 검수의 눈이다.

“유이설.”

“유이설. 유이설이라...”

“죽일거야?”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낯은 여전히 손 밑의 시체를 향해 있었다. 내뱉어지는 목소리는 여전히 나즈막하고, 담담했다. 끊어질 듯 아슬한 숨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그 아스라한 소음 사이 생겨나는 짧은 공백들이 거슬렸다. 저거 숨이라도 좀 편히 쉬면 좋겠거늘.

 청명은 대답을 내놓지 않았다. 대신 그 앞으로 다가가, 몸을 숙였다. 굽혀진 무릎 한쪽이 먼지 낀 바닥에 내려앉았다. 그와, 그 여자 사이에는 오직 널브러진 시체 하나만이 있었다. 그것 하나만이.

 그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단검 자루를 붙잡은 창백한 뼈마디들을 감싸쥐었다. 굳은살 아래에 닿은 살결이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그는 그것을 부러 다정히 쓸었다.

그러고 있자면, 희게 질릴 만치 힘을 주고 있던 여자의 손이 차츰 검자루를 놓는 것이다. 그는 힘이 풀린 얇은 손가락들을 하나하나 조심스레 손끝으로 쥐고, 자루에서 떼어낸다. 좌수에서 다섯개, 우수에서 다섯개. 열개의 손가락을 모두 떼넨 그는, 그것을 모아 쥔다.

 피 좀 닦고 잡아줄걸. 영 미끄럽네. 이럴 줄 알았나.

“너 죽여서 뭐 해, 내가.”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청명은 그 여린 손을 끌어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한걸음 다가서며 널브러진 시체의 등판을 즈려밟는다. 벌어진 입 사이로 울컥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다. 그는 구태여 그것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즈려밟은 몸뚱이를 타넘는다. 이젠 그와 여자 사이에 무엇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부러질 듯 얇은 여자의 팔뚝을 잡아 끌었다. 그것을 제 가슴팍에 붙이고, 팔을 뻗어 어깨를 끌어 안았다. 몸을 수그려 남은 팔로 무릎 안쪽을 받치고, 힘 없는 몸을 들어 안았다.

“불편해?”

“아니.”

“그럼 됐어. 아니 이거 진짜 피죽도 못 먹었나... 내 검이 너보다 무겁겠다.”

 유이설이란 이름의 여자는, 그의 품 안에서 두어번 가볍게 몸을 뒤척인다. 이내 그것도 힘겹다는 듯, 단단한 어깨 위에 고개를 푹 기댄다. 목께에 내뱉어지는 숨이 옅었다.

 청명은 작은 몸을 안고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혹여 튀어나온 조각에 긁힐까, 문짝이 있던 자리를 지나는 몸짓이 조심스럽다. 몸을 숙여 기둥 아래 틈을 지나고, 보폭을 크게 벌려 바스라진 나무 바닥을 넘어간다. 숨을 막아오던 먼지 무리가 걷히면, 붉은 대지가 그들을 반겼다. 여명의 바람이 자욱한 피비린내를 안고 너울쳤다.

“나랑 가.”

“안 죽여?”

“뭐 네가 죽여달라고 빌면 고려해볼까 싶었는데, 그럴 생각은 없는 것 같아서. 불만 없지?”

 멍한 시선이 그의 옆얼굴에 와 닿는다. 미미한 당혹감이 떠오른 검은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청명이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여자는 그 웃음을 가만 바라보다, 그저 묻어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없어.”

의구

정파 청명x사파의 딸 이설

 보리밭이 온통 붉었다. 그 붉음이, 들판의 끝에 내려앉은 태양에서 뻗어 나온 황혼의 빛 때문인지, 숨이 끊어져 널브러진 저 몸뚱이들 때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늑대들의 등에 태양빛이 번지고, 발치에 붉은 선혈이 묻어나고 있을까.

“...하여간 사파새끼들은 변하는게 없지.”

 툭툭, 검에 묻은 핏물을 털어내는 움직임이 간결하다. 손 안에서 검을 한바퀴 돌려낸 청명이 납도하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붉디 붉은 들판 한복판에, 망령처럼 선 검은 여인에게로.

 느릿한 걸음이 검은 여인의 한치 앞에서 멈춘다. 피를 뒤집어쓴 여인이 하얀 낯을 들어올려 시선을 마주해왔다. 청명은, 양 손을 들어 하얀 뺨을 감싸쥐었다. 굳은살 배긴 손가락이, 쉬이 깨질 것을 다루는 듯 조심스럽기 그지 없는 손길로 살결 위에 묻은 핏자국을 문대어 지웠다.

“귀신이 따로없네, 아주.”

“...”

 여인은 무심한 검은 눈동자를 슬 기울인다. 투명한 시선이 앞에 선 이의 어깨를 넘어, 핏물 낭자한 전장을 훑었다. 남자가 밟아온 널브러진 살점들이 시야에 붉게, 붉게 차올랐다. 저것들의 절반은 그녀의 검이, 절반은 그녀의 앞에 선 이자의 검에 스러졌다.

“돌아가자, 사매.”

 여상스레 건조하고 다정한,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배회하던 눈동자가 잡혀 돌아갔다. 다시금 마주한 매화색 시선에는 온기가 배어 있었다. 방금 전, 저 몸뚱이들 사이에서 악귀처럼 검을 휘두르던 이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치 부드러운 온기였다.

 그녀는 그 온기에서 이질감을 느낀다. 언젠가의 새벽, 어딘가의 좁고 퀘퀘한 방 안에서 보았던 그 눈이 저랬다. 쳐죽일 사파 새끼의 딸. 그 작고 하찮은 마른 몸뚱이를 감싸 안던 그의 눈동자가, 저런 온도를 띄고 있었다.

 목구멍을 뚫을 듯 울컥 치밀어오르는 이질감이 익숙하다. 그 품에 안겨 멀고 먼 땅을 지나왔을 때 부터, 그것은 종종 유이설의 심장께를 눌러 잡고 그녀의 성대를 쥐어틀어 목소리를 짜내곤 했다. 

 그것은 그녀가 그의 품에서 내려 낯선 도문의 산문을 밟았을 때에도, 그녀가 매화꽃이 그려진 희고 깨끗한 옷을 받았을 때에도. 

 그녀의 몸이 조금씩 살이 붙어갈 때에도, 그녀의 손에 들린 그 검을 처음으로 쥐었을 때에도. 끝없이 목구멍을 간질이곤 했다.

 그녀는 종종 그날의 꿈을 꾸었다. 그의 손에 들려 방 밖을 나선 그날의 꿈을. 밤하늘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본 그날의 꿈을. 

 하늘은 넓고 아름다웠고, 여명의 바람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보다 선명한 것은, 대지를 메우던 붉은 몸뚱이들. 뇌리를 헤집는 비린내. 언젠가 그녀가 속했던 것들이 도륙되어있던 곳. 그날의 피냄새가 잊히지 않았다.

 유이설은 역수로 잡은 검을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것을 온기가 식지 않은 발 밑의 시신에 찔러 넣는다. 시신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울컥, 검은 피가 쏟아진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유이설은 문득 심장이 조여지는 감각을 느낀다. 그것이 다시금 그녀의 성대를 잡아 목소리를 짜내려 하는 것이다. 그녀는 저항하는 대신, 톡 입술을 벌리고 말소리를 뱉는다.

“그때 나, 왜 살렸어?”

“...뭐?”

“네 손으로 안 죽여도, 그냥 두었으면 죽었을거야. 왜 살렸어?”

 뱉어지는 것은 이미 몇번이고 그에게 물었던 물음이다. 낯선 도문의 산문에서, 희고 깨끗한 옷 앞에서. 살이 붙은 몸을 바라보며, 매화가 수놓인 검을 쥐며. 그에게 물었던 물음이다. 

 그는 그 숱한 물음에 답을 준 적이 없었다. 그저 곤란한 낯으로 눈살을 찌푸리고, 의미없는 단어들을 읊조리며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그녀는 언제나 그것이 고까웠다. 울컥울컥 치받곤 하는 이것, 진정시킬 방법은 오직 그에게서 제대로 된 답을 듣는 것 뿐이라 생각했기에.

“대답해. 이번에는. 안 그럼 안 돌아가.”

 무심한 눈동자가 단호한 빛을 띄었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

“응. 대답해준 적 없으니까.”

“그래, 그랬지…..한동안 별 말 없다가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하셨을까, 또.”

 청명이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가늘어진 매화색 눈이 앞에 선 이의 속을 들여다보겠다는 듯, 묘한 이채를 띄며 번들거린다. 유이설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 속에 다정이 가시지 않았음을 알았기에.

“이것들, 보고 있자니 의문이 들어서.”

“이새끼들? 아, 사매 이상한 생각 하지 지금. 이새끼들이랑 사매가 동류였니 뭐니 뭐 그런...”

“그정도는 아냐. 하지만 의문이 들어.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네가 찾던 놈의 딸이었으니까.”

 청명이 한층 더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매화색 눈은 여인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아래로 내려깐 눈이 이채를 잃고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그 일렁임 위로 수많은 생각이 스치는 것을 깨닫는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듯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청명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뭐…나도 잘은 모르겠는데. 글쎄, 그날 새벽 바람이 좀 선선했나?”

“...헛소리.”

 하얀 낯이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홉뜬 검은 눈동자에 질책하는 기색이 담겼다. 어디 그 생뚱맞은 소리 더 해보라는 듯, 검마저 놓고 팔짱을 끼는 기색이 제법 살벌하다. 얕은 노기를 정면으로 마주하던 청명의 잇새로 나직한 한숨이 뱉어져 나왔다.

“알았어…그렇게 좀 보지 마. 이게 어디 정인을 보는 눈이야. 어?”

“이렇게 안 볼게. 네가 제대로 대답하면.”

 쯧,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한번 숨을 들이삼킨 청명이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일렁이던 매화색 눈동자가, 어느샌가 고요한 호수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냥. 그날의 사매는 너무 마르고, 볼품없었고.”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었다. 뼈 위에 거죽을 둘 놓기만 한 것처럼 섬뜩하리만치 마르고 볼품없었던 몸을. 하도 작아 저보다 한참 어린 줄로만 알았다. 그녀가 저보다 나이가 두살은 더 많다는 것을 알아챈 건, 화산으로 데려오고서도 시간이 꽤 지난 후였지 않은가.

“뼈마디 다 드러난 허연 손은 핏기 하나 없는 주제에 자기 것도 아닌 선혈을 묻히고 있지...”

 날붙이를 틀어쥐던 긴 손가락을 기억했다. 희어지다 못해 창백히 질린 손 위에 묻은 붉은 선혈 자국이 그토록 이질적이었다. 죽은 것은 그 손 아래에 있는 놈인데, 그 손의 주인인 이 여자가 더 송장에 가까워 보였었다.

“게다가 그 방. 그 방이 너무 좁고 역겨웠었어.”

 사람 하나 사는 공간이라기엔 턱없이 작았던 그 방에서는 축축한 포자 냄새가 났다. 텁텁한 먼지가 폐부를 간질여댔었다.

“모든게 그랬지. 형편없고…초라하고…”

 그랬다. 초라한 것, 역겨운 것. 그리고 그 사이 살아 숨쉬는 단 하나.

“근데, 사매 눈은 안 그랬어. 모든게 볼품없고 안쓰러운데, 이 눈은 아니었어.”

 청명은 다시금 하얀 볼을 조심조심 쓸었다. 눈 밑의 여린 살을 엄지로 톡톡 건드린다. 

“이 눈은 살아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눈빛이 영락없는 검수의 것이었으니까. 그랬어. 그냥.”

 느릿하게 내려앉는 긴 속눈썹이 보였다. 그것은 하얀 살결 위에 잠시 내려앉았다가, 다시금 떠올랐다. 투명한 눈동자가 보였다. 그것은 조금 누그러진 채 제법 다정한 온도를 띄고 있었으나, 여전히 잘 벼려진 검수의 것이었다.

“...그래서 살렸나보지. 어때? 됐어?”

 유이설은 곧바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말 없이 청명을 바라보다,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떨구었다. 낮아진 시야에, 제 흰 손이 보였다. 여전히 얇고 가늘지만, 더 이상 창백하지는 않았다. 퍽, 이상한 기분이다.

“나, 이젠 좀 살이 붙었지.”

“그래.”

“핏기가 돌아. 여전히 내 것 아닌 혈흔이 묻어 있지만.”

“응.”

“이젠 역겹고 좁은 방에 살지 않지.”

“그렇지.”

“눈은, 어때?”

 획 들어올려진 하얀 낯에는 표정이 없었다. 검은 눈은 이채를 띈다.

“살아 있어?”

 청명의 매화색 눈이 호선을 그린다. 나긋한 곡선은 더없이 부드럽고,더없이 다정했다.

“살아 있어.”

 유이설은 그 온기 어린 시선을 빤히 들여다본다. 무표정한 낯 위에 파동이 일었다. 다물렸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린다. 힘없이 터트려진 입술 새로 짧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 됐어.”

 청명은 그제서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여유롭고 느른한 웃음이 그 낯에 걸렸다. 만족스럽다는 듯 낮은 웃음소리를 뱉어낸 그는, 여인의 어깨를 감싸 쥐고 품으로 끌어당겼다. 이내 그는 저항 없이 다가온 여인의 이마에 가벼이 입을 맞추었다.

“하여간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그래. 사매 내 것이 된게 언젠데. 이제 그때는 좀 잊어버려.”

 속살거리는 듯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청명이 고개를 물리고 한걸음 물러서려는데, 대뜸 희고 가는 손이 목 아래의 옷깃을 잡아 쥐었다. 

 그를 올려보는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고요했다. 아, 이 눈이 참 좋았다. 무심하게 가라앉아서는, 스러지지 않고 그저 고요하게 잠겨 있는 이 눈이.

 몸을 물리다 만 청명이 참지 못하고 흐드러지는 웃음을 흘려내었다. 고개를 숙이면, 유이설이 그 검은 눈동자를 눈꺼풀 아래로 감추었다. 하얀 눈두덩이를 슬 쓸어내린 청명이 작게 속삭였다.

“그래, 착하다.”

 맞닿은 입술이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것이 퍽 기꺼워, 그는 그것을 두어번 잘게 물고, 벌어진 틈을 파고들어 숨을 섞었다. 옷깃을 틀어쥔 손에 파뜩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큰 손을 펴 여인의 등판을 부드러이 달래듯 쓸어 내린다. 얽히는 살덩이가, 간간히 내뱉어지는 여린 숨이 뜨거웠다.

비릿한 피냄새가 입안을 채운다. 

하여간 우리는 왜 매번 이렇게 피비린내 자욱한 입맞춤만 하는지. 

돌아가면 비린내 없는 입맞춤을 해야지. 

핏물 묻지 않은 몸을 안아야지.

먹 같은 머리칼을 쓸어줘야지.

그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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