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 계절 01.
즉위
*십이국기 AU (개변 有)
한갓진 손길로 서고를 훑어내리고는 있으나 맹세코, 뭇 학생들의 열망처럼 미래 걱정 없이 학문만 탐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더는 직업 걱정이 없는 것도 맞고 현재 한가로운 것도 맞지만, 이렇게 반박할 수 있었다,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이런 게 아니라고. 이 또한 제법 배부른 소리임에는 다름이 없었지만 조건을 하나 붙이면 상황은 여유롭고 부유한 학생에서 순식간에 이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것 없이 수족 묶인 신세로 뒤바뀐다. 현재 박문대의 상황이 그러한 것으로, 그가 할 일 없이 서고나 뒤적이는 이유는 그 외의 것을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답답한 상황 외에 한 가지 더 그 마음에 불편한 쐐기를 박는 일이 있었다.
‘읽을 수 있는 게 없다….’
나름 대학 다니던 학생인데 읽을 수 있는 책 하나가 없었다. 이럴수가. 박문대는 언어의 장벽을 통감하며 한순간이나마 부질없는 상상과 가정을 잠시 해보았다. 가령, 내가 언어학이나 사학 같은 걸 했다면…. 물론 박문대가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이 언어체계는 그의 기존 세계에 현존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아무 쓸모도 없는 후회일 뿐이었다.
이제 생각은 한 바퀴 돌아 후회 쪽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언어나 역사를 공부할걸, 이 아니라 애초에 나는 왜 공부를 했던가, 쪽으로. 지금에 이르러 지난 이십여 년–실 공부 햇수가 나이와 일치하는 건 아닌 법이지만 과장을 보탰다–학업이 모조리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으니 과장 좀 보태 삶이 의미를 잃은 셈이다. 정형행동을 하는 우리 속 동물마냥 뱅글뱅글 서가 사이를 오가던 박문대의 신경질적인 손끝이 문득 서가 끄트머리에서 멎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쳐 버릴 법한 구석진 곳에 그나마 눈에 익은 글자가 보였다. 해외 나가면 갑자기 애틋하게 강화되는 동아시아 사이처럼 요상한 외계어 사이에서 모국어는 아니라지만 알아볼 수는 있는 한자를 발견하니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뻤다.
책을 냉큼 뽑아들고 보니 가지런하고 말끔한 다른 서적들과 달리 조금 낡고 얼룩진 잉크인지 먹인지 모를 자국도 있어 정식 출판된 물건이 아닌 듯싶었다. 혹시나 하고 내용물을 펼쳐보니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무슨 국사책 속 자료사진으로만 본 한자가 세로로 주루룩 적혀 있었다. 개중 몇 개 한자를 알아본대도 조선시대–인지 아닌지까진 모르겠으나–글 내용을 이해할 수는 없었으므로 의미 없는 행위였다.
그런 박문대의 침울한 어깨 너머로 불쑥 누군가 말을 걸었다.
“호오, 그건 형님께서 흑해 너머에서 필사해오신 서적. 간만에 보는군요.”
반사적으로 들고 있던 책으로 소리없이 다가온 등 뒤의 인물을 후려칠뻔한 박문대는 간신히 그 참사를 참아냈다. 짐짓 흥미로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상대는 반인반수 투성이인 세상에서 영락없이 인간의 외양을 하고 있었으나 그 누구보다도 인간에서 거리가 먼 존재였다. 요마라고 했던가…. 박문대는 새로 주입당한 낯선 지식 중 일부를 뒤적여 떠올려냈다. 요마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해하는 위험한 본능을 가진 재해와 같지만 기린麒麟과 계약을 이룬 요마는 이름을 받아 그를 지키고 따른다. 그 예시, 기린이 제게 붙여두고 간 요마가 바로 눈앞의 ‘단’이었다.
“흑해 너머에서 필사해왔다고? 신재현이?”
읽을 수도 없는 책을 도로 꽂아두려던 박문대가 멈칫하며 중얼거렸다.
“야, 그놈 어디 출신이야?”
박문대가 이를 갈며 묻자 단은 멀뚱히 답한다.
“해동海東 출신이죠.”
“한국이 아니고?”
“예?”
박문대는 그 멍청한 대답에 결국 기어코 제 머리를 쥐어뜯고 말았다. 벌써 신재현에게 속은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음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는 중이었다. 아니, 따지고보면 신재현은 저를 구슬릴 때 자신도 이 나라에서 태어났다고만 했지 그게 현 대한민국이란 말은 안 하긴 했다. 제아무리 한반도가 조선에서 대한제국 거쳐 대한민국이 되긴 했다지만, 여기 태생이란 게 조선 시대 사람이란 소리일 거라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할 테다.
“아, 그 반응을 보니 국호가 달라서 그러시는 것 같은데, 흑해 너머 땅이 스스로 국호를 뭐라 부르건 이쪽에서 부르는 명칭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신라건 조선이건, 어쨌거나 그곳 국토와 민족이 뒤바뀌는 건 아니니까요. 그곳은 여전히 해동海東일뿐이죠.”
단은 혼란과 배신감을 느끼는 새로운 왕에게 친절하게 설명했으나 그 말은 박문대로 하여금 또다른 의혹을 불러 일으키고 말았다.
“…신라?”
공허하게 중얼거리는 말을 들은 단은 느긋하게 아뿔사, 하고 어깨를 으쓱였으나 요마인 그가 진실로 인간처럼 유감을 느끼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인간 틈에 꽤 오래 부대끼고 살아왔다 하니 정말로 조금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고 혹은 그저 인간 감정의 흉내를 조금 내며 노는 것뿐일지도 몰랐다. 다만 그는 자신이 맡은 일, 새로 즉위한 왕을 보호–일단 명목은 그러했다–하는 것만은 철저하게 지키는 중이었다.
한편 책 좀 뒤지다가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된 박문대는 반쯤 넋나간 꼴로 조용히 손에 든 책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속여서 홀랑 데려온 주제에 저도 태어난 곳이 그립긴 했나보지…. 신라인지 조선인지 모르겠지만.
사실 박문대는 신재현이 저를 속였다는 사실 자체에는 그다지 분노하지는 않았다. 애초 속였다 성을 내기엔 부러 모호하게 말한 것에 제가 착각해 속은 것에 가까운 탓이었다. 심지어 그가 연민에 호소했던 것처럼, 이 세계라는 건 왕이 없으면 나라가 풍비박산이 나는 건 사실이기도 했다. 물론 신재현이 겁주듯 읊어준 내용들 자체는 사실이었으나, 그런 일–가령 요마가 민가를 습격하고 흉년이 들고 파도가 산처럼 거세게 이는–이 현재 이 나라에 일어나고 있지는 않았다. 신재현이 박문대를 속인 것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애초 기린이란 존재가 왕을 찾아내고 모시는 게 평생 과업이자 존재 의의라 하니 속이기까지 해서라도 데려와야만 했던 것까지는, 그렇다 치자. 하지만 데려와놓고 방치하는 것은 뭐란 말인가.
신재현은 박문대를 데려온 뒤 그가 앞으로 새로이 익혀야 할 것들만 읊은 뒤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대신 보좌를 맡았다며 옆에 붙은 사슴을 닮은 수인, ‘연’이 쩔쩔매며 매정한 기린에 대한 해명을 대신 하곤 했다. 그 기린이란 것에 대해서도 물어도 보고 서적도 들춰보았으나–사실 아직 글자가 익숙지 않아 그냥 연에게 물어보곤 했다– 도통 그 설명이 제가 본 기린과 겹쳐지지가 않았다. 기린은 상서로운 짐승이고, 하늘을 대신해 왕을 간택하고, 성품이 온화하고 부드럽고 연약하며….
박문대는 이참에 단을 붙잡고 늘 느끼던 의문을 내뱉었다.
“기린으로서 신재현 성격은 어떻다고 보냐?”
단은 곧장 대답하지 않고 흐음, 뜸을 들이긴 했으나 그 눈이 흥미로운 주제를 만난 것처럼 반짝이는 것을 박문대는 놓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요마는 제가 계약한 기린에 대해 늘어놓고 싶은 뒷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기린은 일반적으로 보호심을 자극하는 연약한 외모를 가지고, 여린 성품을 가진 온화한 짐승이죠.”
“그리고 신재현은?”
“형님 성격이 독특하신 건 여러 이유가 있다고 짐작됩니다만, 우선 첫 번째는 출신이겠죠.”
박문대는 신재현을 해동 출신이라 한 단의 말을 떠올렸다.
“형님은 태과입니다. 본래 이쪽에서 태어나 자랐어야 할 존재가 대재해의 틈인 식을 타고 저쪽으로 흘러가버린 걸 태과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유년을 저쪽에서 보냈으니 여기서 나고 자란 이들과는 다를 수밖에요.”
이건 또 새로운 정보군, 끄덕이는 박문대에게 한 박자를 쉬고 덧붙인 말이 떨어졌다.
“물론 그쪽도 태과이고.”
“뭐? 난 일주일 전에 끌려온 거라고.”
“태과는 다 본래 태어났어야 할 곳과 위치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형님이나 바로 그쪽처럼.”
박문대는 탈력감을 느낀 것처럼 근처 의자에 주저앉았다. 머리 한쪽이 당기며 미약한 두통이 이는 듯했다.
“나는… 비록 돌아가시긴 했지만 부모님도 계셨고, 친구도 있고, 멀쩡히 학교 다니고 있었는데 말이 되는 소리야, 그게?”
박문대가 제 이마 오른쪽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단은 입으로 오, 하는 작은 모양을 만들어냈는데 놀라움을 표현하려는 것치곤 다른 표정 변화가 없다시피 해 아무래도 이 녀석이 인간 종이 아니란 생각은 가시질 않았다.
“태과를 직접 본 게 네 번째인데, 원래 이쪽에 속했어야 할 존재는 필연적으로 저쪽에 적응하지 못하고 불행을 겪습니다. 세계 단위로 거부당하는 셈이죠. 그 탓에 하나 같이 이쪽으로 넘어오는 데 거부감이 없단 것도 공통점이겠군요.”
담담히 설명하는 단에게 박문대는 반박했다.
“살다가 좀 불운한 일을 겪을 수도 있는 거고 그걸로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야. 내 불행이 이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는 정당성을 주는 건 아니라고.”
이게 무슨 이세계행 럭키찬스도 아니고, 박문대가 혼자 중얼거릴 때 단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손으로 턱 부근을 가볍게 문지르는 정석적인 동작 끝에 그가 반문했다.
“그러면 애초에 왜 온 건지 의문이 듭니다만. 선택권은 온전히 왕에게 있잖습니까. 대상이 거부하면 기린은 매달리거나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 텐데요.”
“내 입으로 오겠다고 한 건 맞아, 맞지만….”
박문대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 힘주어 문지르며 신재현과의 저쪽에서의 만남을 떠올렸다.
박문대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일개 대학생에 불과했다. 대학 2학년의 새 학기, 수강신청을 망쳐 별 흥미도 없는 교양 몇 개를 억지로 들어야만 했고 그 덕에 지난 일 년간 붙어다녔던 친구들과 점심도 같이 못 먹는 처지였지만 그조차 어떤 운 없는 대학생의 평범한 학기 생활일 테다.
박문대가 신재현과 처음 만난 것은 동아시아 신화 이해라는 아리송한 이름의 교양 수업이었다. 첫 수업이 아니라 두 번째 수업에서. 교양 주제에 책을 사오라는 불합리한 교수의 요구에도 3학점이 인질로 잡혀–이걸 빼면 최소 신청학점이 모자라 어쩔 수 없었다– 거부하지 못한 박문대가 얌전히 책을 가져온 것과 달리, 옆자리에 슥 앉은 멀끔한 남자는 빈 손으로 멀뚱히 있다가 슬쩍 몸을 기울여 말을 걸었다. 책을 안 가져왔는데 같이 봐도 괜찮을까요 하고. 그야 학기 시작하고 일주일 내에 책을 마련하지 못한 건 별 이상한 게 아니니 순순히 책 반쪽을 보여줬다만, 그 남자는 따로 노트나 패드나 하다못해 휴대전화조차 꺼내질 않았다. 말그대로 그는 두 시간 반을 가만히 앉아서 낭비하기만 했다. 듣기만 해도 머릿속에 모든 게 저장되는 포토그래픽 메모리의 소유자거나 학점 포기 희망자이거나. 어느 쪽이건 두 시간 넘게 옆에서 멍하니 있는 꼴에는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어디 대학에 이상한 사람이 한둘이던가. 박문대는 이내 조금 이상한 남자에 대해 잊어버렸다. 다음 주에도, 다다음 주에도 같은 수업에서 또 옆자리에 와서 책 같이 봐도 될까요 묻는 말간 낯짝과 마주치기 전까지는. 의혹은 아직도 책을 안 샀나 에서 이새끼 책 값 만육천원 아끼겠다고 한 학기 내내 나한테 빌붙을 생각인가 로 바뀌었다. 착한 일 하는 셈 치고 넘길 것인가 저기요 거지새끼십니까 일갈할 것인가 갈등에 시달리던 박문대는 작년부터 자주 술친구로 지냈던 이세진에게 이 고민을 토로하는 큰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진지하게 듣는 듯하다가 “그거… 문대문대를 꼬시려고 하는 거 같애.” 따위의 개소리를 답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다음 주, 또 옆에 앉으면 뭐라고 내쫓아야 하나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 뻔뻔한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마침내 이 수업을 드랍하기로 결정했고 지난 삼 주간은 결정보류의 시간일뿐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괜히 사람을 오해했나 싶어 사 주차 동아시아 신화 이해 수업을 마친 뒤 약간 머쓱해진 기분으로 늦은 점심 끼니를 때우러 편의점으로 향한 박문대는 딱 방금까지 생각했던 인물과 맞닥뜨리고 말았다. 딱 하나 남은 삼각김밥–심지어 1+1 제품이었다–을 먼저 집은 하얀 손을 타고 시선을 올리니 지난 삼 주간 익숙해진 낯짝이 보였다. 뻔뻔한 남자가 말했다.
“지난 몇 주간 신세를 졌는데, 보답을 하고 싶었어요.”
“아, 별 거 아닌데요 뭐.”
그래서 그 삼각김밥이라도 사주려는 건가? 돈 없어 식비를 가장 먼저 줄이는 흔한 알바 학업 병행 대학생인 박문대로서는 월말의 공짜 삼각김밥–그것도 1+1 제품–찬스만큼 좋은 게 없었다. 자존심 없게도 이 삼각김밥 하나면 지난 삼 주간의 ‘신세 짐’은 곧바로 청산될 수 있을 터였다. 박문대의 꽤 간절한 눈빛–혹은 눈치주기–이 통하기라도 한 걸까, 남자는 제 손안의 삼각김밥을 무슨 처음 보는 희귀 광물 보듯 살며시 굴리며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또 무슨 문제? 설마 이번엔 지갑이 없어요, 카드 좀 빌려써도 될까요 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한 박문대는 미심쩍게 상대를 바라보았다.
“제가 지갑을 두고 와서요.”
오 분 뒤, 박문대는 죽은 눈빛으로 손에 제 카드로 계산한 삼각김밥을 들고 편의점을 나섰다. 뻔뻔한 남자는 생긋 웃으며 그 뒤를 따라나왔다. 남자는 밖에 나와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주저 앉은 박문대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시간 5분이 지나면 두 번 다신 이 미친 새끼와 아는 척도 하지 않으리라 결심한 박문대는 그를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생글 웃으며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그제야 박문대는 이 뻔뻔한 안하무인의 이름이 신재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궁금하지 않았던 tmi들이 쏟아졌다. 신재현은 자신이 복학생이며, 아는 사람이 없으며, 돈이 없음을 알려왔다. 4학년 복학생이라니 일단 예 선배님 하긴 했으나 속으로는 취업 준비는 안 하나 신입도 아니고 알 거 알 만한 2학년한테 왜 지랄이지 생각하긴 했다. 그리고 박문대가 삼각김밥 두 개를 5분 만에 해치우는 동안 대꾸도 없는 사람 상대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신재현은 은근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앞으로도 옆자리에 앉아도 될까요? 이게 무슨 개소리야…. 박문대가 딱 그런 표정으로 쳐다봤음에도 아랑곳 않은 신재현은 미소와 함께 제안했다. 대신 족보 구해다 줄게요.
이 대목에서 단이 끼어들었다, “아 제가 조사해온 지식이 거기서 쓰였던 거군요.” “무슨 소리야?” “요즘 대학생을 꼬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조언을 구하시길래 족보 얻어준다고 하면 될 거라고 했었습니다.” 박문대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결과적으로 박문대가 족보를 받았는가 묻는다면, 답은 알 수 없었다. 그야 족보를 받았대도 쓸 일이 없었을 테고, 물론 신원도 돈도 책도 없는 신재현이 족보라고 가지고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박문대는 중간고사를 치르기도 전 납치당했다.
단이 또다시 참견했다, “심경은 이해합니다만, 납치라는 표현은 부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어쨌거나 선택권은 왕에게 있으니까요.” “요마는 공감이나 위로라는 걸 모르나?” “배움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죠.” 박문대는 인간 아닌 것에게 기대를 버리자는 결심을 했다.
밥 사줄 돈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시간만 많은 신재현은 망한 시간표 덕에 홀로 뚝 떨어진 외로운 점심을 보내는 박문대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의 두서없는 이야기에는 주제가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돌아서면 무슨 말을 그렇게나 늘어놓았는지 기억에서 휘발되고 말았다. 물론 박문대가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탓인지도 모른다. 스트레스 탓일까, 그 즈음 박문대는 답지 않게 밤잠을 설치고 있었다.
박문대가 슬슬 질려가는 참치마요와 전주비빔 1+1 삼각김밥 세트를 멍하니 씹고 있을 때, 신재현이 불쑥 물었다.
“피곤해 보이네요, 잠을 잘 못 자나요?”
“선배님을 만난 뒤로 잠이 부족해진 것 같은데요.”
단언컨대, 박문대는 연상에게 버릇없이 구는 타입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말로 잠이 부족한 탓인지 말은 그 어떤 사회성 필터도 거치지 않고 툭 튀어나와버렸다.
“악몽을 꾸나요?”
신재현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그 주제를 붙들었다. 반사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하려던 박문대는 멈칫하곤 잠시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단순히 수면부족이라 치부했는데 악몽이라고 들으니 악몽을 꾸느라 자주 깨고 뒤척였던 것도 같았다. 놀랍게도 어느 쪽이라 단언하기에도 영 기억이 흐렸다. 박문대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자 신재현은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뭘 안다고 그러는 거지? 그 날의 신재현은 그 대화를 끝으로 먼저 일어나 자리를 떴다.
그 날 밤, 박문대는 처음으로 수면부족의 원인을 마주했다. 확실히 그건 악몽이 맞았다. 꼼짝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며 시달렸으니 가위눌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동양풍 판타지 소설에 나올 것만 같은 괴물투성이 가위도 가위눌림이라고 할 수가 있나? TV 속 여느 괴담 사연들처럼 머리 풀어헤친 여자가 웃으면서 죽어…! 외치는 게 가위눌림 아닌가?
다음 날 신재현은 다시 물어왔다, 또 악몽을 꿨나요? 박문대는 문득, 정말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이 모든 것의 원인이 신재현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멍한 시선으로 찬찬히 살펴보면, 확실히 신재현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먼저 처음 만난 이래로 변하지 않은, 늘 한결같은 옷차림. 개강 이래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러운 날씨와 한국 특유의 극단적으로 짧은 봄 덕에 모두가 패딩을 넣었다 뺐다, 가죽재킷과 트렌치코트를 눈치보며 일주일 단기 개시하고 눈물과 함께 집어넣는 나날이다. 하지만 신재현의 옷차림은 개강 오티 날부터 중간고사 직전인 지금까지 까만 봄코트에서 벗어날 줄을 몰랐다. 박문대는 지금 티셔츠 한 장만 입고 있었다. 계절감 차이가 심각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지갑을 꺼내거나 뭔갈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책을 꺼내는 일도 당연히 없었고, 노트북이나 패드는커녕 휴대전화도 꺼내지 않았다. 그제야 무척이나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난 신재현에 대해 아는 게 뭐지? 애초에 신재현은….
“뭐야? 너.”
신재현은 마치 그 질문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웃었다. 여태 본 웃음 중 가장 부드럽고 환한 미소였다. 그리고, 믿기 어려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단이 평했다, “그래서 속았다고 말씀하신 거군요. 그런데 제 생각엔 계약사항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덥석 서명한 뒤에 마지막 조항을 뒤늦게 발견한 후회와 비슷한 것 같습니다.”
“….”
단은 요마치고는 꽤 ‘그럴듯한’ 비유를 쓸 줄 알았는데 그에 반해 감정적 공감이라곤 전혀 발휘할 줄을 모른다는–그에 대한 유감이 없는 듯한 점까지 더해– 점에서 자꾸만 그가 인간이 아니란 점을 상기하게 만들었다. 실제 겉 생김새는 여타 수인들에 비해 훨씬 박문대가 아는 ‘인간’에 가까웠음에도. 이는 아마 요마가 직접 고른 둔갑의 외양일 테다.
“꿈에서 본 것들이 실재한다는 걸 알게 됐는데, 나 한 명에 몇백만 목숨이 달렸단 말을 무시할 수 있는 인간이 있겠냐고….”
“과연 성군이십니다.”
단은 무미건조한 박수까지 짝짝 곁들였으나 그 소리는 박문대를 심란하게 만들 뿐이었다. 더 이상 서고에서 할 것이 없었던 탓에 박문대는 책장들을 뒤로 하고 천천히 그곳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단은 조용히 뒤를 따랐다. 어둑한 서고를 벗어나자 복도는 일정한 간격의 창으로부터 비쳐드는 빛으로 환했다.
“지난 번 왕은 성군이 아니었나 보지?”
천천히 걸으며 넌지시 떠보듯 물었다.
“평범했습니다.”
“그 사람은 왜 은퇴한 거지? 은퇴해서 뭐 하고 사는 건데?”
“죽었습니다.”
“….”
서슴없는 표현에 도무지 적응되질 않아 잠시 대꾸를 않자, 단은 제 설명이 부족했다 생각했는지 덧붙였다.
“천도天道가 부여하는 왕권은 절대적인 것이라 생사여탈이 아니고서야 바꿀 수 없습니다.”
이곳에 오자마자 반강제로 듣기 시작한 ‘상식 수업’에서도 그같은 설명을 듣기는 했다. 단지 그가 본 문장은 ‘기린은 천도의 대행자이며 그가 정한 왕은 천부적인 인정을 받는다’는 정도였다.
“신재현이 데려온 왕들은… 얼마나 재위했지?”
“처음을 제외하곤 그다지 길지 않은 편이었지만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한 왕의 재위 기간이 긴 나라가 별로 없는 편이라.”
“내 전임은 왜 죽은 거야?”
거침없이 대답하던 단은 처음으로 잠시 망설였다. 별 생각없이 중얼거리다시피 뱉은 말에 의외로운 반응이 돌아오자 박문대는 걸음마저 멈추고 잠시 단을 쳐다보았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식적으로는 자진으로 기록되었지만 형님께선 다르게 말씀하실 겁니다.”
“단.”
박문대가 더 물어보기도 전에, 누군가의 엄정한 목소리가 이어질 말을 갈라버렸다. 고개를 돌리자 맞은편 복도에, 지난 몇 주간 그토록 행방이 묘연해 사람을 궁금증에 시달리게 만들었던 신재현이 서 있었다. 신재현이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도 그것이 축객령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단은 짧게 고개를 숙이더니 모습을 감추어버렸다. 빈 복도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박문대는 주저않고 방금 얻은 의문을 내던졌다.
“전대 왕은 어떻게 죽었는데?”
“제가 죽였어요.”
서슴없는 대답에 박문대는 눈썹을 찌푸렸다.
“단에게는 호위 명령을 내렸지 시시콜콜한 내부 사정을 들추라고 말하진 않았는데.”
이 자리에 없는 단을 나무라듯 중얼거린 신재현이 다시 시선을 박문대에게 맞추었다.
“몇 주간 연을 붙여 공부하게 했는데…, 이쪽 세계에 대해 많이 이해하게 되었나요?”
“그럭저럭.”
본분이 공부인 학생 신분이라 무언갈 이해하고 익히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비록 그 내용이 전혀 듣도 보도 못한 세상에 대한 것이라 해도, 어딘가 먼 왕조에 대한 역사와 문화를 들여다본다 여기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물론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박문대 자신의 이야기가 될 것이란 점만이 다르긴 했으나.
박문대가 걸음을 옮겨 가까이 다가서자 신재현은 그가 자신보다 반 보 앞서길 기다렸다 뒤따라 걷기 시작했다. 바깥, 그러니까 흑해 건너 박문대와 처음 만났던 때와는 달리 이곳에서 신재현은 절대 박문대보다 앞서거나 그와 나란히 서지 않았다. 이는 연이 열심히 알려준 상식 중 한 가지이기도 했다. 왕이 될 박문대보다 높은 것은 천도 뿐이므로 어느 것도 그를 앞설 수 없으며 하물며 천도의 뜻을 받아 대리로 왕을 택하는 기린조차 즉위 이후에는 왕과 나란히 설 수 없다. 박문대의 즉위는 그가 태과 출신이라 이 세계에 대한 기본 상식을 익힌다는 핑계로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신재현은 벌써 한국에 있던 때와는 태도를 달리 하고 있었다. 우선 속으로 제발 좀 가주십사 빌어도 눈치라곤 갖다 버린 것처럼 따라붙던 태도도 싹 사라졌고 눈앞에서 묻지도 않은 얘기들을 늘어놓던 일도 사라졌다. 어쩌면 그 모든 게 단지 박문대를 이쪽 세계로 데려오기 위한 수작일 뿐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궁부에서 더 이상은 즉위식을 미룰 수 없다고 시끄러워서요.”
목소리는 아주 약간 뒤쪽에서 들려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이한 목소리에 박문대는 고개를 돌려 신재현의 표정을 뜯어보고 싶은 충동을 억눌러야 했다.
“최대한 미뤄 내월 첫번째 날로 정해졌어요. 호월昊月은 원래 상서롭다고 여기는 때거든요.”
“굳이 상서롭다는 때로 잡은 건 전임의 말로 때문에?”
신재현으로부터의 답은 없었다. 하지만 선군의 공식 기록만 해도 최소한 자진, 신재현의 말로는 그 자신이 죽였다 하니 부정 탈까 걱정해서라도 좋다는 날을 고르는 건 추측하기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신재현은 단지 즉위식에 대한 것을 이야기하러 왔다는 듯 할 말을 마치자 또다시 사라져버렸다. 박문대는 넓은 중정에 홀로 우뚝 서서 신재현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보았다.
“별로 친해지지 못하신듯 보이는군요. 제 조언이 효과가 없었던 걸까요.”
어느샌가 다시 불쑥 나타난 단이 멋대로 말했다. 그는 언제나 예고 없이 어디선가 솟아나거나 공기 속에서 실체화한 것처럼 나타나 사람을 놀라게 만들었다. 금방 적응될 것 같지가 않았다. 이러다 심장마비로 죽기 전에 한 마디 일러둘 필요가 있을 듯싶었다.
“어디서 갑자기 나온 거야?”
“제가 받은 명은 호신입니다. 본래 호위란 그림자처럼 존재해야 하는 법이잖습니까? 형님과 여기까지 오시는 내내 저도 함께 있었습니다.”
신재현이 단의 이름을 부른 것은 축객령이 아니라 시야에서 꺼지란 소리였나 보다.
“모습을 드러내기 전에 기척을 좀 내줬으면 싶은데. 이러다 돌아가기 전에 여기서 심장마비로 죽겠다.”
“예? 그럼… 손뼉을 칠까요? 아니면 휘파람이라도?”
단은 진심으로 처음 듣는 요구라는듯 반문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곤 이런저런 제안을 했다.
“휘파람 소리가 낫겠다.”
“음이나 길이는 어느 정도로 하는 게 좋을까요? 마음의 준비를 하시려면 5초는 되는 게 좋을까요?”
“그런 건 그냥 알아서 해….”
박문대는 죽은 눈으로 대꾸했다. 단은 고민하는 듯 하더니 혼자 조용히 이런저런 휘파람 소리를 연습했다. 휙, 휘잇 하는 단순한 소리들이 점차 새소리 같은 화려하고 긴 소리로 발전해나갔다. 인내심이 서서히 닳기 시작한 박문대가 욕을 내뱉기 직전, 단이 기상천외한 곡조를 뚝 멈추고 질문했다.
“그런데,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집도 친구도 대학도 한국에 있는데 당연한 거 아니냐? 그리고 애초부터 잠시 안정되기까지 도와주겠단 조건으로 수락한 거였어.”
물론, 박문대의 당초 생각과 달리 현재 이곳에는 왕의 부재로 인한 어떤 재난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해결하거나 도울 문제도 없었다. 그렇다면 돌아갈 시점은 대체 어떻게 정해야 하나? 이 문제에 대해선 그를 속이고 함께 흑해를 건너온 신재현과 대화해봐야 할 텐데, 제가 박문대를 속여먹은 것을 잘 아는지 신재현은 길게 대화할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방금도 즉위식 날짜만 알리고 부리나케 사라지지 않았던가? 박문대가 즉위식조차 걷어차고 당장 날 한국에 도로 돌려놓아라 깽판이라도 부릴까 두려운 것처럼. 그는 제 입으로 약속한 것까지 모른 체 하는 안하무인이 아니었으므로 신재현에게 말했던 것처럼 일단은 일정 기간 왕 노릇을 할 생각이었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겠지만.
“흠….”
단은 박문대의 말에 제 턱을 문지르며 눈에 띄게 수상한 침음을 늘어놓았는데, 박문대가 눈썹을 까딱이며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눈치를 주자 수상쩍은 태도를 싹 지우고 고개를 저었다.
“흑해를 건너는 건 요마나 기린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무시무시한 검은 바다 위를 날아 건널 수 있는 것은 요마와 기린 뿐이다. 하지만 식으로 길이 열리지 않고서야 흑해 위를 날아도 ‘저쪽’으로 건너갈 수는 없었다. 그런 이유로 식은 이쪽의 것이 저쪽으로 흘러들고 저쪽의 것이 이쪽으로 흘러드는 재해였는데, 마음대로 작은 통로를 열어 드나들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린 뿐이었다.
“그러니까 신재현이랑 얘기해봐야지.”
최악의 경우에는, 식이 일어나는 틈을 타 요마의 도움으로 흑해를 건널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고 박문대의 생각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처럼, 단이 느긋하게 대꾸했다.
“요마라는 건 칠정육욕七情六欲이 결여되어 있는 재앙 덩어리입니다. 말이 통하길 기대하면 안 되며 인간과 같은 상호작용을 기대해선 안 됩니다.”
그 스스로가 요마인 단은 마치 다른 동물 종을 설명하듯 태연하게 읊었다. 인간 시점에서 기록된 설명을 그대로를 일러주는 것만 같았다.
“기린과 계약한 요마는 뭐가 다른 거지?”
“계약이기 때문에 지키는 거죠. 이 계약이 철저하게 상호 이득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기린이 천도의 대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계약입니다. 사실 인간의 왕이라는 것도 제게는 별 위엄을 가지지 않습니다. 해하진 않겠지만 따로 명을 받지 않는 이상 굳이 나서서 돕지는 않는 정도라고 이해하시면 될 것 같군요.”
단은 무심한 얼굴로 마치 겁이라도 주는 듯 떠들어 댔지만 지난 몇 주, 이런저런 수다를 떤 박문대 눈에는 짐짓 허세를 떠는 꼴이 쉽게 읽혔다. 물론 그의 설명에 틀린 부분은 한 점도 없을 테다. 연이 이곳에 대해 이런저런 것들을 가르쳐주며 일렀던 설명과도 전혀 다른 부분이 없었다. 본디 요마란 이해를 바라지 않는 재해일 뿐이다.
“하지만 신재현은 너한테 이것저것 떠들라는 명령은 하지 않았다던데.”
“제게도 자유 의지는 있으니까요.”
“그럼 지금 이건 무슨 자유 의지지?”
“그쪽이 흥미롭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대놓고 눈을 반들거리는 단의 흥미는 요마답게 그의 고기나 내장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언행이나 처한 상황에 관한 것인 듯싶었다. 박문대로선 제 어디가 이 이상한 요마의 흥미를 끌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나 앞으로도 당분간은 박문대에게 이것저것 쉽게 나불댈 테니 나쁘지 않은 부분이었다.
신재현이 제아무리 날을 늦추었다곤 해도 즉위식은 빠르게 다가왔다. 박문대는 연을 통해 속성으로 제문에 대한 것과 즉위식 설명을 들었다. 신재현이 붙여준, 걸어다니고 말하는 ‘작은 만능 사전’은 이런 데에서까지 유능함을 보여주었다. 그렇다곤 해도, 연이 이런 일까지 맡는 게 보통의 절차인 건가? 박문대는 그에 관해 의문을 품었으나 결국 입밖에 내는 것은 포기했다. 어차피 질문 받는 이는 연이고, 그는 제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로 미안해할 것이 틀림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이런 점을 노리고 신재현이 이토록 상냥하고 작은 수인을 제게 붙여주었나 의심될 정도였다.
나쁘게 말하면 남 눈치를 너무 보고 좋게 말하면 주변 감정에 민감한 연은 즉위식 날 아침, 박문대가 묻지 않았음에도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본래 기린께서 도와주시는 게 보통이지만 너무 언짢게 여기지 마세요. 기린께서도 매듭지어야 할 일이 많으셔서 그런 것이니….”
“…자기가 직접 고른 왕의 즉위식 준비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연은 결국 우물쭈물대다 실언이었어요, 죄송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박문대는 손을 내저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얘긴 단 녀석에게 물어봐야겠군….
즉위식이라곤 하지만 길한 날을 굳이 고른 것치고는 소박한 편이었다. 박문대는 그저 의관을 갖추고 높은 제단 위에서 하늘에 술을 올리고 세 번 절을 하면 되었다. 이렇게 하늘에 고하는 행사는 그저 주변의 인식과 시선을 위한 것에 불과했고, 사실상 진정한 즉위는 기린이 왕 될 자의 아래 머리를 조아리는 순간이었다. 기린의 뜻이 곧 하늘의 뜻이기에 그러했다. 박문대가 신재현의 호소에 마음이 흔들려 이쪽으로 건너와 잠시–정말 잠시라고 생각했다–왕 노릇을 해주기로 결심한 순간, 신재현이 박문대의 윤허를 얻어 무릎 꿇고 머리를 그 발끝에 조아린 순간부터 박문대는 명실상부 왕으로서 즉위한 셈이었다.
역시 신재현의 말에 귀를 기울인 그 순간부터 박문대는 반쯤 사기 계약–단은 약관을 덜 읽은 박문대의 탓도 있다 평했으나–에 당한 셈이었다. 속으로 이를 갈건 말건 얌전히 술잔을 올리고, 술을 뿌리고, 다시 채워진 잔을 마시고–맛은 있었다–돌아서자 신재현이—그의 기린이 다가왔다. 마찬가지로 치렁한 의복을 갖춘 그는 처음 보는 평온하고 잔잔한 미소를 만면에 내걸고 있었다. 마치 정말로 박문대의 치세를 기뻐하고 우러를 준비가 된 것만 같았다. 오직 진실로 그것만을 바라며 원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그가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며 말했다.
“하늘의 뜻을 빌어, 성군이 되시길 바랍니다.”
신재현의 태도가 또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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