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메우]
영감들 행복하게 잘 살어!!!!!!
별 소득없이 끝난 회의를 뒤로 하고 허드슨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미처 처리하지 못한 요청서와 검토하지 못한 보고서가 사무실 책상에 한가득 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장 내일까지 넘겨야 하는 서류를 가늠해보며 목을 죄고 있던 넥타이를 끌어내린 허드슨이 사무실 문을 등 뒤에서 닫을 참이었다. 따듯한 오후의 햇살만이 조금씩 스며드는 사무실은 정적만이 맴돌아야 했다. 하지만 조용해야 할 사무실에는 예상하지 못한 손님이 있었다. 누구지? 허드슨은 문을 마저 닫으며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으로 시선을 옮겼다. 소파에 몸을 깊숙하게 파묻은 채, 팔짱을 끼고 이쪽을 바라보는건 우즈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와?"
퉁명스럽기만한 목소리였지만 허드슨은 당연지사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진 않았기 때문에-물론 우즈가 좋아한다고 말할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에게서 다정한 태도 같은걸 찾는건 시간낭비에 속한다는걸 허드슨은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소파에 푹 눌러앉은 우즈를 슥 지나쳐 책상 앞에 앉고서야 허드슨은 방문객의 목적을 물었다.
"무슨일이야, 우즈."
"무슨일이긴."
그런걸 왜 묻냐며 우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여즉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결재서류를 집어든 그가 그것을 탁 소리나게 허드슨의 앞에 내려놓었다. 대놓고 보라는 듯이 정확하게 제 앞으로 놓여지는 서류에 허드슨의 눈이 그쪽으로 향했다. 동유럽쪽 보고서인가? 우즈가 동유럽의 소련쪽 기지의 정찰을 다녀온 것을 떠올리며 허드슨은 별 감흥없는 손길로 서류철을 끌어당겼다. 이런 보고서 같은건 이메일로 보내도 될 법 한데, 우즈는 그러한 최신 전자기기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다 못해 혐오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항상 서면으로 모든 서류를 전달하곤 했다. 아마 오늘도 손으로 직접 작성한 보고서를 들고 왔을 터였다. 한가지 의아한 점은, 우즈는 항상 허드슨이 사무실에 없을때를 노린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 굳이 기다리면서까지 얼굴을 비춘건지... 우즈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당최 예상할수 없다며 허드슨이 서류철을 가까이 당길 무렵이었다. 스윽 하고 당겨지는 손 위로 다른 서류 하나가 더 떨어졌고, 허드슨의 시선은 곧장 그곳으로 향했다. 잠시간 그곳에 머물렀던 눈동자는 곧장 위로 올라가 서류를 떨어뜨린 장본인을 비추어냈다.
"그거 급한거니까 빨리 처리해 줘."
이건 또 뭐냐며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한 쌍의 눈동자에 우즈는 턱짓으로 방금 떨어뜨린 서류를 가리켰다. 급건이라... 허드슨은 제 손등에 비스듬히 올려져 있는 종이파일을 펼쳐보았고, 미간을 지긋하게 좁히고야 말았다. 여러모로 예상한 내용이 아니었다. 고작해야 새 장비 사게 돈 좀 달라는 서류라든가, 하반기 훈련 계획이라든가, 하다못해 새 팀원을 좀 보충해 달라는 요청이리라 가늠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가 들여다 보고 있는 서류는 그러한 예측을 모조리 다 피해가는 내용이었다. 허드슨은 일단 서류철을 덮고 눈두덩이를 손가락으로 꾸욱 짓눌렀다.
"사직서?"
제 시력을 믿지 않는건 아니었다. 하지만 확인차 물어봐야만 했다.
"봤으면서 또 뭘 물어? 눈 삐었냐?"
우즈의 대답은 역시나 거칠었다. 제대로 봤으면서 뭘 또 묻냐는 그의 핀잔에 허드슨은 올라오려는 한숨을 목 안으로 가라앉혔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사직서라... 허드슨의 손가락은 저절로 덮혀있는 파일을 톡- 톡- 하며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즈에게 받으리라 꿈에서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서류를 눈 앞에 맞닥뜨리니 허드슨은 그저....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우즈'가 제출한 '사직서' 라니... 도저히 연결되지 않는 두 개체에 그의 입은 쉽사리 열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침묵을 견디지 못한건 역시나 우즈였다. "되도록이면 빨리 처리해 줘. 나 간다." 라고 말하며 자리를 뜨려던 찰나, "진심이야?" 라는 허드슨의 질문에 우즈는 그 자리에 멈춰서야만 했다. "장난으로 사직서 내는 인간도 있냐?" 슬쩍 뒤를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는 짜증이 한가득 묻어나 있었다. 진심이군. 물론 우즈는 장난이라도 이런 서류를 낼 사람이 아니라는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도 하지 못한걸 이렇게 받아들고 나니 여러모로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조금은 어려웠다. 점점 복잡하게 엉켜들어가는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허드슨은 한마디를 간신히 내뱉었다.
"왜?"
그의 질문은 매우 짧았다. 그러나 간단한 물음에는 그것에 반비례하는 강렬한 요구가 담겨져 있었다. 무엇 하나 쉽게 돌아가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며 우즈는 굳게 다물린 입술을 비죽거렸다. 대답하지 않으면 구구절절 물고 늘어질게 분명한 놈이 이유를 캐묻기 시작하는게 아닌가. 우즈는 짜증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더 이상의 귀찮음이 생기는걸 감수하기 위해서는 대답해 줘야만 했다.
"나같은 늙어빠진 놈이 영원히 여기 엉덩이 붙이고 있을순 없잖아."
물론 우즈의 입에서 나온건 완전한 진실이 아니었다. 자신이 늙긴 했지만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들보다는 아직까지 쓸만하다는게 우즈가 생각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평가였다. 하지만 우즈가 생각하기에는 허드슨에게 사직서 제출에 대한 사정을 말해줘야 한다면 저 정도가 충분한 것 같았다. "젊고 머리 잘 돌아가는 놈들 많으니까 그놈들 잡아다가 부려먹어." 우즈는 친절히 부연설명까지 곁들이며 기어코 발걸음을 옮겼다. "잠깐, 우즈...!" 그런 그를 붙잡으려던 허드슨의 목소리는 매정하게 닫히는 사무실의 문에 가로막힌채 우즈에게 닿지 못했다.
우즈의 퇴직은 사직서 제출부터 순탄치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한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은 기본적으로는 민감한 정보를 다루고 있는 정보기관 이었고, 그중에서도 우즈가 몸담고 있는 특수활동부는 군사적 흑색 작전이 주된 직무였기 때문에 그 기밀함은 배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당연지사 그러한 곳에서 퇴직하기 위해서는 고작 사직서 한 장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퇴직 의사를 밝힌 이후부터 우즈는 웬만한 작전 준비보다 더욱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는 몇달간이나 조사를 위해 여기저기 불려가야만 했고, 인터뷰를 빙자한 강도높은 심문에 몇번이고 시달려야 했다. 그만두는 이유를 물어보는건 아주 온건하고 신사적인 질문에 속하는 편이었다. 뒤이은 질문들은 마치 자신을 간첩이나 전향자로 단정한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평생을 나라에 충성하고 명령에 순응하며 살아온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여도 되는 일인지, 우즈는 이러한 취급에 넌더리가 나다 못해 불쾌할 지경이었다. 적성국 인물과 접촉하거나 이야기를 나눈적이 있는지, 불온한 서적이나 매체에 접한적이 있는지, 특정 인물과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하필 점심으로 버거타운에 들린 이유가 뭔지... 별 같잖지도 않은 질문들에 우즈는 몇번이고 다 뒤엎어 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고, 그것을 억누르기 위해 손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주먹을 몇번이나 쥐어야 했다. 하지만 속으로 화를 눌러참는 일 외에는 그가 딱히 할수 있는건 없었다. 지루하고 불쾌한 퇴직절차를 견디며 그는 주변을 천천히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우즈가 정리하고자 마음 먹은건 현재 머무르고 있는 집이었다. 본인 소유가 아닌 CIA에서 마련해 준 집이었기 때문에 퇴직과 동시에 비워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우즈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짐이 많지 않았다. 기껏해야 군복과 정복을 포함한 옷 몇벌, 그동안 받은 별 도움안되는 훈장들(우즈는 진지하기 이것을 내다 버리려다 끝내 더플백 구석에 쑤셔박았다.), 전우들과 찍은 사진들로 채워진 앨범 뿐이었다. 그것들을 몽땅 더플백에 몰아넣고 나서야 우즈는 수첩에 적어두었던 리스트 중 하나를 펜으로 직직 그을 수 있었다. 다음 순서는 인간관계 정리였으나... 그는 좋게 말하면 혼자있길 선호하며 자립심이 강한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기로는 굉장히 냉소적이며 고립적인 인간인 탓에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친분을 거의 만들지 않았다. 다시 말해 따로 정리를 할 필요조차 없다는 말이었다. 그나마 같이 일하던 동료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남기는게 전부였다. 이러한 우즈의 신변정리와 함께 우즈의 은퇴 절차는 한없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졌다. 인내는 쓰고 열매는 달다 했던가. 우즈의 마지막 퇴근은 기어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출입증을 반납하는 절차를 마지막으로 길다면 길었던 CIA 근무를 마무리한 우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갈길이 멀었기 때문이었다. 뒷좌석에 더플백 하나를 던져둔 채, 그는 곧장 공항으로 향했다.
목적지로 가는 길은 정말이지 '존나게' 지루했다. 디트로이트와 시애틀을 경유하는 비행은 장장 12시간이나 이어졌다. 그 시간을 제정신으로 견딜수 없던 우즈는 비행기를 갈아탈 때마다 맥주를 두어캔 마셔야만 했다. 직업이 직업이었던지라 비행기는 이골이 날 정도로 타봤기 때문에 좁은 좌석 안에 몸을 구겨넣고 있는건 아무렇지 않았다. 게다가 그 좁은 이코노미 좌석도 늘상 타던 군용 수송기나 헬기 좌석에 비하면 가히 벨벳천을 두른 푹신한 안락의자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우즈가 이렇게 조바심을 느끼고 좌불안석하며 맥주를 연신 마셔대는건 대단한 이유가 있는건 아니었다. 그저 목적지에 한시라도 빨리 도착하고 싶은 마음에 몸이 달았기 때문이었다. 안그래도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인데 바다 건너까지 땅이 있을 필요가 있나? 아주 지랄맞은 일이라며 비행기 좌석에 구겨진 우즈는 맥주를 연신 들이켰다.
메이슨은 눈삽을 들고 눈을 치워내는 중이었다. 어제 점심부터 내린 눈 덕분에 도로는 물론이거니와 집 앞마당과 현관 바로 앞까지 눈이 가득 쌓여 문을 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멈출 기세가 없었지만 메이슨은 묵묵히 눈을 쓸고, 치워냈다. 여기서 더 쌓였다간 집안에 고립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는 익숙하고 절도있는 손으로 눈을 푹푹 퍼내 길을 만들고 있었고, 메이슨의 아들인 데이비드는 조그마한 손으로 아빠가 퍼낸 눈을 눈사람으로 빚고 있었다. 자기 몸통만한 눈덩이를 굴리는 데이비드를 보던 메이슨이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온통 하얀 하늘에선 마찬가지로 하얀 가루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중이었다. 눈이 언제까지 오려나... 날씨가 이래서야 차를 몰고 마트에 가는 것 조차 어려울 지경이었다. 더 늦어지기 전에 마트를 다녀와야 할 겉 같은데... 삽을 눈더미에 꽂아넣고 거기에 메이슨이 몸을 기댈 무렵이었다.
메이슨이 아들과 자리 잡은 곳은 그의 고향이긴 했다. 하지만 가족의 연은 진작에 끊겼기에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집에 정착하지 못했다. 그리고 여러가지 문제로 인해 그는 사람과의 접촉을 꺼리는 편이었다. 그리하여 메이슨의 집이 자리잡은 곳은 주거지에서도 조금 떨어진,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이었다. 멀리서 지나가는 차량만이 뜨문뜨문 보일 뿐이었다. 부우우웅- 그랬기에 지금 들리는 차량의 배기음은 매우 이질적인 소리였다. 눈이 내리는 소리를 깨부수며 다가오는 소리를 들은 메이슨이 저 멀리, 눈발 너머를 응시했다. 자신이 아니라면 이용하는 사람이 없는길로 차량 한 대가 다가오는 중이었다. 데이비-. 최악의 사태를 가정하며 메이슨은 막 눈사람의 머리를 몸통에 올린 데이비드를 불러 제 다리 뒤로 숨겼다. 가장 좋은 경우의 수는 관광객이 길을 물어보러 온 것일테도, 최악의 경우는 인적이 드문 집에 강도질을 하러 온 놈일터였다. 메이슨은 제 자켓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여차하면 권총을 뽑아 쏠 준비를 마친 그가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데이비드는 제 다리를 잡고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집 안으로 들여 보내야 하나. 아빠의 긴장을 느끼기라도 한 듯, 데이비드는 바짓단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주었다. 괜찮아. 데이비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메이슨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집 앞에 서는 차를 응시했다. 메이슨의 손이 품 안의 권총을 뽑아들기 바로 직전이었다.
"어우 씨발, 존나 춥네."
차 문을 열고 나온건 길을 잃은 관광객도, 강도질을 할 상대를 잘못 고른 강도도 아니었다. 고맙수다, 조심히 가쇼-! 트렁크에서 더플백을 꺼내 들쳐업은건... 우즈였다. 우즈? 권총을 뽑아들던 손이 움찔 하고 멈추었다. 튕겨져 나오던 것을 다시 안주머니에 밀어넣은 메이슨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옛 전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아빠의 다리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꼭 감고 있던 데이비드도 익숙한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우즈 삼촌!!"
타고 온 차를 퉁퉁 두들겨 보내며 뒤를 돈 우즈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이쪽으로 와다다 달려오는 데이비드를 번쩍 안아올렸다.
"잘 지냈냐, 꼬맹아."
한쪽 어깨에는 더플백을, 다른 쪽 팔에는 데이비드를 안아 올린 채로 우즈는 천천히 걸어갔다. 메이슨은 그때까지도 삽과 나란히 서서는 자켓 안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였다. 우즈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개버릇 남 못주고 수상해 보이니 총부터 뽑아들 작정인 모양이었다. 총보다는 그 옆에 있는 삽을 집어 던지면 덜 시끄러웠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우즈였다.
"눈이 이렇게 오는데 삽질은 벌써부터 왜 해? 다 쌓이면 하지."
우즈는 턱짓으로 집을 가리켰다. 벌써부터 이러지 말고 추우니 들어가자는 의미였다. 아직도 눈 앞의 우즈가 믿기지 않는 듯, 메이슨은 굉장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더 쌓이기 전에..."
"눈이 쌓여봤자 눈이지. 데이비 귀 빨개진거 봐라. 애 감기걸리겠어."
"어, 음... 응..."
더 이상의 대꾸는 듣기 싫다는 듯, 우즈는 메이슨을 더플백으로 툭 쳤다. 그것을 엉겹결에 받아든 메이슨은 결국 우즈의 뒤를 따라서 집에 들어가야 했다.
오랜만에 만난 우즈삼촌이 어지간히 좋은 모양이었다. 데이비드는 하루종일 삼촌과 붙어 있었다. 그랬기에 메이슨이 우즈와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는 데이비드가 잠자리에 들고 난 이후였다. 같이 자자며 기어이 침대까지 우즈를 데리고 간 데이비드가 골아 떨어지고 나서야 우즈는 다시 거실로 나왔다. 슬쩍 보니 티비 불빛만이 어둑하게 비추는 거실에서는 메이슨이 오래된 영화를 보고 있었다. 우즈는 그 모습을 힐끔 보고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루종일 데이비드와 재잘대고 있으니 목이 말랐고, 비행내내 마셨지만 또다시 맥주가 땡겼다. 기대감에 차 냉장고를 열어보았지만 우즈의 얼굴은 곧 실망으로 구겨졌다. 그 흔하디 흔한 맥주 한 캔 조차 이 냉장고 안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맥주도 안 마시고 산단 말이야? 살풍경한 냉장고 풍경을 바라보던 우즈는 급한대로 콜라 한 캔과 찬장을 뒤져 나초 한 봉지를 집어 거실로 향했다.
"또 이거 보고 앉아있냐?"
우즈가 핀잔을 주며 옆자리에 털썩 앉는게 느껴졌다. 묵직하게 내려앉는 쪽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메이슨은 티비에서 눈도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왜 온거야?"
그의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어찌나 기복이 없었는지 질문이 아니라 티비 속 영화의 대사를 따라 읽었다고 해도 그럴듯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우즈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나초를 북 뜯어 몇 조각을 입에 넣고 씹을 뿐이었다.
"왜? 오면 안 되냐?"
고작 이런 살풍경한 질문에 기가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지지 않고 되받아치자 그제야 메이슨의 입꼬리엔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연락도 없이 와서 놀랐잖아."
"두번 놀래켰다간 총 맞겠네. 그리고 네가 놀랄만한 일이 아직도 남아있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은 우즈가 가지고 온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다. 달디단 탄산이 목구멍을 짜릿하게 긁고 내려갔다. 콜라도 좋았지만 역시 콜라보다는 맥주가 더 마시고 싶긴 했다.
"내일 마트가서 맥주나 좀 사자. 어떻게 집에 맥주 한 캔도 없을수가 있어?"
우즈는 진심으로 못마땅했다. 콜라나 오렌지 주스는 있으면서 맥주가 없다니. 아무래도 메이슨 이놈은 정신감정을 다시 한번 받아야 할지도 몰랐다. 맥주와 콜라는 모름지기 생활의 필수품이나 다름 없었다. 내일 마트에 가면 식스팩을 있는 대로 쓸어담겠다며 우즈가 다짐을 하는 동안, 메이슨은 가볍게 떠오른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그의 방문 이유를 물었다.
"휴가라도 온 거야? 랭글리에 일이 없는 모양이지?"
아닌게 아니라, 우즈는 휴가 때마다 그 먼 거리를 날아 알래스카로 오곤 했다. 너 보러 오는거 아냐. 데이비 보러 오는 거지! 라는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과 함께 말이다. 그가 본토에서 날아올 때면 항상 미리 연락을 해왔기 때문에 이번처럼 난데없이 들이 닥친건 처음이었다. 연락도 못 하고 올 정도로 바빴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갑자기 깜짝 방문이 하고 싶었다던가. 아니, 불심검문인가? 메이슨이 우즈의 의중을 이래저래 가늠해볼 무렵이었다. 전투적으로 나초를 와작와작 씹은 우즈가 손가락을 털며 대답했다.
"휴가? 뭐,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긴 하네."
너도 먹어. 라며 메이슨에게 봉투를 밀어넘긴 그가 소파에 몸을 길게 기대었다.
"나 일 그만뒀어."
"뭐?!"
여즉 티비에 고정되어 있던 메이슨의 시선을 단박에 끌어당기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대로 우즈가 메이슨을 쳐다보지 않았다.
"밤에 소리 지르는거 아니다. 데이비 깨면 네가 재울거야?"
"맨날 내가 재우는... 아니, 이게 중요한게 아니잖아. 일을 관두고 왔다고?"
"뭘 그렇게 놀라고 그러냐."
아무래도 이 말라 비틀어진 왕년의 살인머신에게도 놀랄일이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메이슨은 계속해서 일을.. 관두고 왔다고..? 네가..? 일을? 이라며 비슷한 말을 중얼중얼 외우고 있었다. 우즈는 정말 별 일 아니라는듯 말했다. 그리고 별 일 아니긴 했다. 이 세상엔 영원한건 없었다. 죽어 나자빠질 때까지 CIA에서 첩보작전을 뛰거나 총질을 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메이슨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별 일 따위가 아니었다. 알래스카 한복판에 사막이 생겼다는 소리 만큼이나 천지가 개벽하는 소식이었다. 모든걸 때려치고 이 깡촌으로 다시 기어 돌아올 만큼 자신에게는 가족을 만들겠다는 확고한 바람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캐내봐도 우즈에겐 그런 바람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건 오직 하나였다.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장에서의 외줄타기. 마치 그것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우즈는 능숙하게 전장을 누볐다. 해병대부터 MACV-SOG를 거쳐 CIA-SAD 까지. 우즈의 길고 긴 복무기록은 메이슨의 생각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나 다름 없었다. 설령 현장에서 물러나더라도 후임을 양성하며 간접적으로나마 그곳에 머물러 있을줄 알았는데. 그런데 그 모든걸 걷어차고 왔다고? 메이슨은 처음으로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우즈의 인간관계는 매우 좁고 깊었다. 그 한정된 사람 중에서도 자신만이 그를 온전히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헛다리를 거하게 짚고 있던게 아닌가 싶었다. 메이슨이 우즈와의 관계부터 다시 생각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는동안, 그의 머리를 아프게 만든 장본인인 우즈는 태평하게 나초를 와작와작 먹어치우고 콜라를 신명나게 들이키며 영화를 만끽했다.
"왜?"
오만 궁금증과 가정으로 머릿속이 가득 들어차고 나서야 메이슨의 입에서 의문이 굴러 나왔다. 그제야 우즈는 옆자리를 힐끔 쳐다보았다. 슬쩍 보아도 적잖아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는데 티가 팍팍 날 지경이었다. 저러다가 또 광증 도질라. 우즈는 일단 나초로 바짝 마른 목을 축이고자 남은 콜라를 입에 털어넣었다. 왜? 라니. 이놈이고 저놈이고 다들 이유를 물어대니 아주 귀찮을 지경이었다. 허드슨에게는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메이슨에게도 대답해주지 않았다간 무슨 사단이 날 지 몰랐다. 에휴, 귀찮아 죽겠네.
"너 혼자 데이비 키우는게 안쓰러워서 왔다. 됐냐?"
"거짓말 하지 말고."
우즈의 대답은 반은 농담이었지만 반은 진담이었다. 휴가때마다 봐오던 메이슨 부자의관계는 꽤나 불안정하고 서투르기만 했다. 가족이라고 부를만한 게 없었던 자신이 보고 느끼기에도 그랬으니 말 다 한 셈이었다. 저러다가 메이슨이 데이비드를 키우는게 아니고 잡아먹어버릴 판이라 우즈로써는 그저 걱정 뿐이었다. 하지만 메이슨에게는 저 대답이 좋은 대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허튼 소리 하지 말고 진실을 고하라며, 메이슨은 시선으로 우즈를 뚫어버릴듯 쳐다보고 있었다. 으, 망할놈. 그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던 우즈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이렇게 메이슨이 무언의 압박을 해올때면 우즈는 그것을 유난히 견디지 못했다. 천하의 프랭크 우즈를 눈빛 하나로 입을 열게 만드는건 세상 천지에 저 망할 놈. 오로지 알렉스 메이슨 뿐이었다.
"재미가... 없더라고."
"재미?"
진실을 토해내기 시작하는 우즈의 말에도 메이슨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우즈는 사람에 싫증을 낼 지언정 일에는 싫증을 내지 않았다. 그 어떤 더러운 일이라도 제가 맡은 이상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재미가 없다고? 마치 옮기라도 한 것처럼 우즈의 미간에 있던 주름이 이번에는 메이슨에게 새겨졌다. 충분한 힌트를 줬음에도 메이슨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자 우즈는 나초를 집지 않았던 손으로 그의 미간을 문질렀다.
"얼굴 펴. 안그래도 못생겼는데 더 못생겨진다."
"왜...?"
왜? 라는 질문은 못생겨진다는 농담에 대한 의문이 아니었다. 메이슨은 자신의 농담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게 분명했다. 우즈는 답답했다. 현역때 비상하게 좋았던 눈치는 본토에 다 버리고 온게 분명했다. 짧게 대충 말해도 척 하고 알아듣던 놈이 이렇게 멍청하게 구는걸 보니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어쩔수 없었다. 친절을 베풀어 구구절절 설명을 해 줄 수 밖에.
"그냥, 다 재미가 없었어. 네가 여기로 가 버리고 나서, 여기저기 가보고 이것저것 해 봤는데 전부 다 재미가 없었어. 존나 지루해서 토할거 같더라."
메이슨의 미간에 자리잡은 주름이 서서히 펴지고 있는것도 모른채, 우즈는 허공만을 더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제 그만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서, 다 그만두고 온 거지. 그렇잖아? 나이도 있고-..."
대단찮은 이유도 아니었지만 어쨌든 메이슨이 궁금해하니 우즈는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가 얼마 남지 않은 나초를 탈탈 털어먹는 동안 메이슨은 우즈의 고백을 천천히 곱씹었다. 다 그만두고 온거야, 이제 그만 해야 겠더라고, 존나 지루했어, 재미가 없었다고... 우즈가 내뱉은 말을 거꾸로 되짚고 있자니 문득 옆에서 소리가 멈추지 않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우즈가 계속해서 뭐라뭐라 떠들어 대고 있었다. 답지않게 말을 많이 하고 있다는걸 알아채자마자 메이슨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즈가 저리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건 오로지 한 순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했을때. 저 자신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즈는 열없는 순간들에는 말이 많아졌다. 그리고 우즈가 처음 무어라 말했는지 되새긴 메이슨은 그가 왜 저리 당황하고 겸연쩍어 하는지 알아챘다.
"그래. 이거저거 다 해보고 여기저기 다 가봤는데 전부 재미가 없고 지루하기만 해서 그만두고 왔다-. 이거지?"
메이슨은 방금 우즈가 한 말을 조목조목 짚어주었다. 딱 한 문장만 빼고 말이다. 메이슨의 지적에서 다분한 의도를 눈치챈 우즈가 주먹으로 그를 퍽 쳤다.
"말 할거면 다 하던가! 왜 그것만 빼먹는데!"
사정 봐주지 않고 주먹을 내지른 덕분에 메이슨의 상체는 크게 흔들렸다. 하지만 메이슨은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여기 있을거야?"
"니가 내 엉덩이 걷어차서 쫒아낼 때 까지."
"그래, 그럼."
궁금증이 해소된 메이슨이 다시금 소파에 몸을 기댔다. 데이비가 좋아하겠네. 라고 중얼거리자 곧장 우즈의 핀잔이 날아왔다. 씨발, 당연히 좋아하지! 이런 재미없는 애비가 놓아주는 것보다 멋진 우즈 삼촌이 놀아주는게 더 재밌으니까!!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우즈의 말에 (그리고 어느 정도 사실이긴 했다.) 메이슨은 부드럽게 웃었다. 사실 나도 좋아. 나지막하게 밀어 넣어지는 진심에 우즈는 욕을 짓씹을 수 밖에 없었다. 씨발롬... 아주 영광이라서 눈물이 다 날 지경이네. 그의 투덜거림을 뒤로하고 둘은 거의 끝나가는 영화를 마저 감상했다.
"이 망할 영화는 언제 끝나냐?"
"조금만 있으면."
"나 소파에서 자면 되냐?"
"소파 낡아서 허리 아파. 침대에서 같이 자."
"데이비가 왜 자기는 안 끼워줬냐고 삐질걸?"
"내일부터 셋이 자면 되지."
"하, 너랑 부대껴서 자기에도 좁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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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여까지 쓰고 나니까 둘이 뽀뽀도 안하고 포옹도 안함 어째서 이래도 되는 것인가 이렇게 건전한 우메우는 처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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