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자캐 로그
소할짝님 커미션, 25.01.01 작업물
요령이 좋지 못하군. 한심해.
보통의 인간 같았더라면 여의주까지 가진 상급 요괴에게 제압당하는 순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을 가정하며 제 목숨을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령은, 난데없는 요괴의 변덕으로 놀랄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명줄이 오가는 산전수전을 겪을 때마다 인간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야금야금 깎아낸 탓이다. 공들여 조각한 차가운 이성은 불가해의 어둠을 흡수하지 않을 만큼 단단했기에, 제 입에 여의주를 들이미는 상급 요괴를 보면서도 요령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뿐이다.
"설마하니 묻겠는데, 요괴는 짝을 맺을 때 강압으로 해결하나?"
눈앞의 요괴가 분명 제 입으로 말했다. 여의주를 삼키는 것은 부부의 연을 맺는 절차라고. 그 단순한 사실은 령을 인상 짓게 만들지언정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제 표정이 조금도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요괴, 이치도 알았을 터이다. 꿋꿋하게 눈앞에 놓인 붉은 주옥을 노려보았으나 이치는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결연하게까지 보이는 금빛 눈동자는 입을 벌릴 때까지 버티겠다는 항의처럼 보이기도 했다. 령은 이토록 단순하고도 요령 없는 강압에 굽혀줄 생각이 없었다.
"저리 비켜. 나는 요괴와 짝을 맺을 생각이 없을뿐더러, 네 반려 자리라면 물 떠 놓고 거절이다."
"비키란 소리를 듣고 순순히 비킬 것 같았으면 이러지도 않았겠지."
줄곧 침묵으로 대응하던 이치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미 결론을 내린 단호한 목소리. 네 선택지는 여의주를 삼키는 것밖에 없다고 강요하는 눈빛. 이 모든 억지가 너무도 어리석어 보인다는 것과는 별개로, 한낱 요괴가 자신을 반려로 점찍었다는 사실이 매우 불쾌하다. 단순하고 명료한 불쾌함일 뿐이다.
"그래? 그럼, 제대로 거절하면 비킬 텐가?"
"말장난하지 말고 순순히 삼켜. 그럼 놓아주지."
"말을 그대로 돌려줘야 할 것 같군. 순순히 삼킬 것 같았으면 거절하지도 않았겠지."
여의주를 취하는 것이 부부의 증거라고. 그 사실을 알고서도 옳다구나 승낙하리라 생각한 걸까. 짝으로 만들고 싶었으면 여의주를 몰래 먹이거나, 아니면 그럴듯한 거짓말로 포장하여 건네거나.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속이려 들었어도 넘어갈까 말까인데. 도리어 정직하게 밝혀놓고 강요하는 것은 대체 무슨 경우란 말인가.
"나는 짝을 갖고 싶지도 않고, 요괴와 부부가 되고 싶지도 않아.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내게 그런 제안을 하지? 오만하기 짝이 없군."
이치가 아닌 평범한 인간이, 령에게 진심을 담아 청혼했더라도 그는 거절을 읊었을 것이다. 귀애하는 사람과 평안한 가정을 이룬다는 꿈이 한 차례 부서져 보아서. 한시바삐 남의 생을 건져내는 의원 노릇을 하는 것조차도 벅차서. 죽음이 갈라놓은 혼약의 상흔이 아물지 않아서. 주워섬길 변명은 많았다. 그럴듯한 변명 몇 가지를 엮어내 보이면, 령의 마음속 가장 무거운 누름돌을 꺼내 보이지 않아도 되었다. 퇴마사라는 삶이 강제하는 사투에 대해서 낱낱이 설명하지 않을 수 있었다.
"벌써 잊었나? 나는 너희 같은 요괴가 싫다. 인간을 유흥거리 삼는 행동은 물론이고, 평범한 삶을 진창에 처박는 악의가 싫어."
요괴를 해치우는 것. 인간을 치료하는 것. 근본부터 인애와 맞닿은 두 종류의 직업은 요괴를 동정할 일말의 여지조차 남기지 않았다. 끊임없이 병들고 다치는 삶으로부터, 유흥을 위해 인간의 삶을 무너뜨리는 악독한 요괴로부터. 수없는 불행을 마주한 령에게 요괴와 합일한다는 것은 도의적으로 불쾌한 일이었다.
더욱이 그간 봐왔던 이치는, 호의라는 단어와는 애초부터 연이 없는 듯한 생물이었다. 퇴마사로 오래 구른 령은 이지를 가질 정도의 영물이 인간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경우를 여럿 봐왔다. 무료한 삶을 적시는 하나의 호기심이든, 섬광처럼 스치는 흥밋거리든, 인간의 어리석음을 구경하기 위한 오만함이든. 인간에게 호감을 보이는 영물이라면 필시 보일 목적이, 이치에게는 없었다. 그렇기에 반려가 되자는 강요는 더더욱 난데없는 변덕으로 여겨질 수밖에.
"네가 만약 인간의 형상을 흉내 내지 못하는 하급 요괴였다면 진작 내 손에 사라졌을 거다."
"알고 있어."
"안다고?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내가 얼마나 요괴를 싫어하는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다면 이런 짓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니, 네가 요괴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아니까 하는 짓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너는 계속 요괴를 해치우고 원한을 쌓겠지."
"……원한?"
령은 문답의 의미를 담아서 단어를 되짚었지만, 이치는 그저 여의주를 령의 입가에 가져다 대면서 긴말 없이 강요했다. 하지만 령은, 아주 잠깐 스쳐 간 단서를 무의미하게 흘려보낼 만큼 무르지 않았기에 강경하게 고개를 비끼면서도 재차 묻는다.
"그게 무슨 말이지? 원한이라니."
한 맺힌 영적 기운에 대해서 모르는 건 아니다. 오히려 평범한 사람들보다 잘 아는 축이라 할 수 있겠지. 성불하지 못한 미련, 끊어낼 수 없었던 인연, 갈무리하지 못한 삶의 잔재. 령은 여러 맥락을 가지고 이승을 헤매는 인간의 혼을 풀어주면서 요괴가 휩쓸고 지나간 폐허를 정리하고는 했다. 하지만 이치는 분명, ‘쌓는다’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푸는 것이 아니라.
"퇴마사라면서, 본인에게 쌓인 업보를 보는 눈은 없는 모양이군."
이치는 늘 그렇듯이 고저가 없는, 실상 감각을 느끼는지도 알 수 없고 속내를 가늠하기에는 더더욱 어려운 목소리로 읊는다. 어느 쪽으로도 비틀리지 않는 덤덤한 어투에서는 령의 무지를 진작에 예상했다는 희미한 기척만 읽을 수 있었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인간 편만 드는데 원한을 안 먹을 줄 알았어? 인간의 시야가 좁은 건 늘 있는 일이지만, 퇴마사가 하는 말은 시대를 불문하고 지루할 정도로 똑같단 말이지."
질서를 어지럽히는 요물을 정리한 것이다. 무고한 인간들을 지켰을 뿐이다. 나는 옳은 일을 했다. 산 자의 삶을 더럽히지 마라.
"그 모든 잣대가 인간의 기준이라는 것도 모르고."
"……."
"내 눈에는 보이거든. 네 등에 얹힌 원한. 퇴마사를 하는 이상 걷어낼 수 없는 업보. 무슨 말을 해도 멈추지 않을 거라면, 적어도 안전한 게 낫지 않겠어?"
이치는 다시금 강경하게 붉은색 여의주를 들이밀었다. 이만큼 설명했으면 도리는 다했다는 듯. 이 이상의 맥락은 여의주를 받아들이면 자연히 알게 되리라는 것처럼.
"왜 하필이면 부부의 연을 맺자는 것인지. 알 필요가 있나? 요괴의 말을 무시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선택하는 건 익숙하잖아."
사소한 건 그냥 무시해. 이 여의주는 네게 도움이 될 거야. 그러니 어서 삼켜. 아예 강제로 집어넣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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