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마감 글 커미션' 완성본

[엘소드] 비고트 HL 드림

토깽님 커미션, 23.09.19 작업물

"정말 지긋지긋하네요. 퇴마사 씨."

"…… 죄송해요."

"죄송하다 해봤자 또 그럴 거 아닙니까? 그 사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네요."

일부러 벼려낸 비수를 쏟아내어도 지젤은 기어이 아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죄송하다 미안하다 사죄를 읊는다. 이젠 거의 버릇처럼 흘러나오는 사과를 들으면서 아인은 속 막힌 울분을 해소하지도 못하고 지젤을 지나쳐 걸으면서도 그녀가 따라잡지 못할 속도로 땅을 박차는 짓은 하지 않는다. 아인은 몇 번이고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지젤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관두기를 반복한다. 손끝에 담겨있던 일말의 살의가 현신하지 못하고 그대로 스러지는 과정을, 지젤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저 외면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인은 지겹도록 제 앞을 막아서는 지젤의 오만한 다정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몇 마디 말로 감화되기에는 너무도 멀리 왔고 이미 제 생각을 관철하는데 흔들리지 않는 주관이 생겼다. 지젤은 충실한 신관의 모습을 허상처럼 뒤쫓으며 엘리오스를 향해 살의를 쏟아내는 괴물을 버리지 않는다. 지젤이 그의 앞을 막아설 때마다 아인은 노기에 서려 힘을 거두고, 아인이 방해물을 향해 비난 섞인 조롱을 서슴없이 쏟아내면 지젤은 그의 분노를 묵묵히 감내한다.

아인에게는 어째서 거치적거리는 짐을 여즉 치우지 않는지 모르겠다는 자조가 남는다. 저깟 인간 하나가 뭐라고. 여신께 닿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파괴하고 말겠다는 결심이 선지도 오래되었는데. 고작해야 저 목숨이 뭐라고. 아인은 몇 번이고 지젤에게 그런 식으로 굴 거라면 사라지라거나, 방해라거나, 쓸데없는 고집부리지 말라며 그녀의 성품과 결심을 동시에 힐난하면서도 지젤의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숨통을 조이는 방식으로 방해꾼을 없애지 않는다. 제 곁에 남은 유일한 동료라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유대감 따위를 자극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조금 더 원론적인, 그러고 싶지 않다는 감상에 가까운 변덕이다.

아인은 지젤을 내치지도 수용하지도 않은 채 빈번한 방해에 불평불만, 조롱과 힐난을 쏟아놓고 관두기를 반복한다. 지젤이 엘리오스의 수호라는 대의 따위에 감화되어 설교를 늘어놓는 모사꾼이었더라면 이 대륙에 존재하는 악의를 속속들이 마주하게 만들어 희망을 꺾어주었을 텐데. 지젤은 비단 위의 옥구슬처럼 자란 화초가 아니라 죽음과 망자의 원념을 딛고 살아가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파괴와 절망을 예찬하지 않았다. 아인을 향하는 한쪽 눈동자에는 오직 걱정과 염려만이 가득하여 종내에는 아인이 파멸에 이르더라도 그를 가여워하고 말 감각. 밑도 끝도 없는 헌신적인 다정에 아인은 알 수 없는 불쾌를 떠나보내지 못한다. 타락한 길을 걷고, 그릇된 기로를 선택하며, 진실로 진노한 여신께서 신의 사자를 거두기만을 기다리는 일그러진 창조물은 한낱 인간이 보이는 다정함이 불유쾌하다.

애초 부모의 정이라거나, 인간적 관계라거나, 사람 사이에 마땅히 오고 가야 하는 본질적 동정과 측은지심을 경험하지 못한 채 그저 신의 사자로서 창조된 아인에게 지젤의 미련은 무척이나 생경하다. 아인은 이해할 수 없는 생경이 언젠가 처참하게 꺾이기를 바라는 동시에, 미련퉁이 퇴마사를 죽이거나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망가뜨리지는 못한다. 저 작은 목숨을 끊어내는 것을 보류할 뿐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젤은 여전히 아인을 하나의 동료로 대한다.

"…… 아인 씨?"

"또 뭡니까."

"아, 미안해요. 그게…… 혹시 배가 고프지 않은가 해서요."

"난 필요 없어요."

아인은 기로를 정한 이후로부터, 인간적 욕구를 흉내 내려는 노력을 내던진다. 이를테면 입에 맞는 식사, 수면을 이용한 의식의 점멸, 살점과 근육에 쌓인 피로의 제거. 인간을 연기하기 위해 일상 곳곳에 배치했던 장애물을 치우고 나니 아인은 평범한 인간의 생활상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다. 몇 날 며칠이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아도 멀쩡하며, 허기짐과 피로 따위를 느끼지 않는 동시에 밤마다 단잠을 덮지도 않는다. 지젤이 그의 변화를, 정확히는 인간 흉내를 벗겨낸 본질을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지젤은 침묵한다. 자신에게 허락된 반경은 그의 본질과 맞닿지 않으며, 감히 질문을 덧대었다가는 기어이 아인의 심기를 거스르고 말리라는 얄팍하지만 정확한 예상에 힘입어서.

지젤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나 식사 시간이 되면 음식을 내어주었고 새벽이 깊으면 눈을 붙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지젤의 쓸데없는 참견을 계속 듣다 지겨워진 아인이, 지금 내게 그딴 게 필요해 보이느냐고 일갈한 이후에야 지젤은 아인의 생활상에 대해 입을 다문다. 지젤은 아인이 신의 사자로서 창조된 생명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으니 기본 욕구가 거세된 상태로 힘을 쏟아내기만 하는 동료가 걱정된 것이었겠지만, 아인은 때마다 그의 신체적 상태를 묻는 행위가 거추장스러웠고 지젤의 걱정은 더더욱 구차하고 귀찮았다. 그 후 지젤은 스스로 음식이나 물을 원하거나 물을 원할 때도, 홀로 갈증을 해결하는 무뢰배라도 된 듯이 아인의 눈치를 보고는 했다. 지젤의 극단적인 조심성에 아인은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렇다고 음식이나 물 따위는 눈치 보지 말고 편하게 먹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제 말이 일종의 허락이나 용인 따위로 비칠 것이 거슬렸기에.

아인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약간의 휴식이나 정신적 소등 상태에 들어서지도 않은 채, 발길이 닿는 데로 여신의 은총을 귀히 여기지 못한 작자들을 찾아 없애는데 신경을 기울인다. 그를 막아서야만 했던 지젤은 어쩔 수 없이 휴식과 충전을 단절한다. 수마를 몰아내고 식사를 대충 때우면서 휴식을 줄인 채 아인을 뒤쫓는다. 지젤은 날이 갈수록 피로가 누적되어 간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음에도 내색하지 않는다. 아인이 사흘 내리 쉬지 않고 거닐어도, 식량 하나 얻기 힘든 황야를 무작정 횡단해도, 강행군이라 불러 부족함 없는 과정에 지젤은 자신을 억지로 꿰맞춘다. 일주일간 제대로 된 잠자리를 얻지 못했더라도 아인이 마을을 지나치기로 했으면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며, 식량이나 물을 구할 때도 아인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수준으로 자리를 비우지 않으며, 발바닥이 아릿하게 저리거나 기어이 물집이 잡힐 수준이 되어서도 잠깐 쉬었다 가자고 말하지 않는다.

저 미련한 퇴마사가 언제쯤 질려 나가떨어질까만 생각하던 아인은 동행이 제법 이어진 후에야 지젤이 기량 이상으로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애초 아인을 따르기로 한 것은 지젤이었으며 동행이라 부르는 게 우스울 정도로 지젤은 아인을 빈번하게 막아서기만 했으니. 하지만 아인은 지젤이 무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밤이 깊어 새벽 공기가 심하게 쌀쌀한 날마다 모닥불을 피워두고 자리를 지키는 일이 많아진다. 아인은 추위나 더위를 느끼지 않아서 아무리 기온이 떨어져도 모닥불 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사실을, 그 시기의 지젤은 짐작할 수 없다.

"…… 오늘은 날이 꽤 춥네요. 아인 씨는 괜찮아요?"

"난 신경 쓰지 마세요. 하나도 안 추우니까."

"…… 그런가요. 죄송해요. 제가 또 주제넘게."

"주제넘은 소리라는 걸 알면 좀 조용히 있던가요. 말해놓고 눈치를 보는 게 우습지도 않습니까."

아인은 지젤이 말을 걸어올 때마다 상흔을 남기기 위해 작정한 것처럼 행동했지만, 지젤은 대화 주제가 언제나 날카롭게 되돌아오는 것마저도 묵묵히 용인한다. 하지만 지젤은 대화의 연장을 바라지 않는 상대에게 끊임없이 말을 붙일 만큼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었기에 어색하게 이어지는 대화는 흐름을 찾지 못하고 유야무야 흩어지고는 한다. 그날도 상황이 비슷하여, 지젤이 날이 춥다거나 마을을 못 본 지 꽤 되었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어물거리며 내뱉자마자 아인은 마을을 원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버리라는 말로 결론을 뚝뚝 끊어먹었고, 모닥불 앞에서 곱씹을 수 있는 변변한 추억거리 따위 없는 두 사람 사이의 대화 주제는 간단하게 소실된다. 대화를 붙일 방도를 찾지 못한 지젤은 무릎 사이에 코를 묻고 애꿎은 모닥불만 응시했으며, 아인이 별빛이나 풀벌레 소리에 집중하며 침묵을 지킨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긴 여행길에 피로가 한계치까지 누적된 지젤은 강렬하게 밀려드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꾸벅거린다. 지젤은 눈을 바로 뜨기도 하고, 기지개를 켜기도 하고, 제 손등을 꼬집기도 하면서 억지로 졸음을 참다가 결국 기대앉은 나무 기둥에 머리를 대고 곤히 잠든다.

졸리면 그냥 자면 되지. 왜 저렇게 미련하게 굴지?

한심하게 시선을 흘린 아인은 뒤늦게, 동행한 이후로 지젤이 잠든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지젤이 불안해한다는 걸 아인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혹여 아인을 놓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최소한의 휴식마저도 내던지고 그의 뒤를 쫓는 퇴마사의 다정 어린 집념을. 그를 두고 볼 수 없다는 미련을. 모를 리가 없다. 아인의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었으니까. 뭐 하러 자신을 갈아 넣으면서까지 아인의 살육을 막으려고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조용히 잠든 지젤의 표정을 꽤 오래간 지켜보던 아인은 지금이야말로 이 귀찮은 퇴마사를 버려두고 홀로 떠날 기회임을 깨닫지만, 지젤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만큼은 영 내키지 않는다는 감각과 비슷한 기전으로 숲속에서 잠든 지젤을 홀로 놓아두기 싫었다. 짐승에게 습격당할 수도 있고, 아니면 도적이나… 하다못해 모닥불이 꺼지면 새벽 공기에 추위를 먹을 수도 있고. 아인은 자신에겐 필요치 않은 모닥불에 장작을 하나 더 던져넣으면서 자리를 지키기로 한다. 퇴마사를 홀로 버려두고 가더라도 그녀는 끈질기게 자신을 따라잡을 테니까. 단지 그뿐이다. 방랑을 시작한 이후로 영영 방해만 되었던 사람을 향한 결정이라고는 우스울 정도로 온건한 결론을 내린 아인은 자신 또한 나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의식을 놓을 의도는 아니고, 그냥 생각을 놓고 잠시 적막을 즐기자는 생각에.

하지만 아인의 작은 평화는 오래지 않아 깨진다. 다름 아닌 지젤의 앓는 소리로 인해서. 아인은 신경질적으로 눈을 뜨고 지젤을 노려보았으나 지젤의 목소리가 무언가 의미 있는 문장을 만들어내고 있음을 깨닫고 풀벌레 소리 대신 지젤의 목소리에 신경을 집중한다.

"…살, 려…… 엄마……."

허공에서 끝없이 일렁이는 불친절한 광원만으로도 지젤의 미간이 일그러져 있다는 것은 눈치챌 수 있었다. 악몽을 꾸는 중인가. 기껏 잠들었으면 좀 푹 자기라도 할 것이지. 왜 꿈속에서도 안식을 못 찾고 헤매나. 꿈꾸는 것까지 미련하기는. 아인이 한숨을 쉬고 지젤을 지켜보는 사이, 지젤의 앓는 소리는 조금 더 또렷한 형태를 보인다.

"엄, 마…… 아빠… 안, 돼……."

가위라도 눌린 것처럼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앓던 지젤은 점점 숨을 가쁘게 쉬기 시작한다. 조용히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표정을 바라보던 아인은 손을 뻗어 지젤의 어깨를 틀어쥐고 흔든다.

"퇴마사 씨."

"으…… 살, 려……."

"퇴마사 씨!"

아인이 목소리를 높여 지젤의 어깨를 강하게 틀어쥐고 흔들자 지젤은 화들짝 놀라면서 눈을 뜬다.

"어, 엄마…! 아빠…!"

지젤이 숨을 급하게 몰아쉬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아직 꿈결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습에 아인은 지젤의 얼굴을 손으로 붙들고 제 눈을 맞추게 만든다. 이미 꿈속으로 사라진 망령을 뒤쫓던 한쪽 눈동자가 아인에게 맞춰진다.

"…… 아인 씨?"

"정신이 좀 드나요? 잠을 잘 거라면 좀 얌전하게 잘 것이지."

누가 망령의 인도자 아니랄까 봐, 꿈속에서도 망령에게 휘둘리네요. 아인의 입꼬리가 비틀리는 모습에 지젤은 뒤늦게 시선을 멀거니 주변으로 떨구며 꿈속에서 날름거리던 화마가 물러갔음을 깨닫는다.

"죄, 죄송해요. 제가 잠들어서……."

"누가 자는 걸로 뭐라고 했나요? 피곤해 보이는데 그냥 눈 좀 붙여요."

"예? 하, 하지만……."

"아침 해가 뜬 다음에도 골골거리면 그땐 정말 버리고 갈 거니까 지금 자둬요. 마음 바뀌기 전에."

아인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사실처럼 지껄이면서 지젤의 얼굴을 놓아준다. 지젤은 아인의 말을 듣고도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며 수마를 쫓아내려고 애썼으나 아인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찡그린 이후에야 다시 눈을 감는다. 부산스럽게 잠에서 깬 것치고, 지젤은 꽤 빨리 다시 잠들었고 이번에는 악몽을 만나지 않은 듯했다. 아인은 그날 새벽이 밝을 때까지 조금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악몽에서 깨어나자마자 자신을 응시하던 눈동자가 오래 생각나는 것은, 분명 퇴마사의 나약한 모습을 목격하는 게 드물어서 생긴 상념이라 여기면서. 손안에 잡혔던 작은 얼굴의 촉감을 곱씹고, 또 곱씹는다.

지젤은 날이 꼬박 밝아 해가 중천에 걸리기 직전이 되어서야 일어난다. 지젤은 눈을 뜨자마자 새벽이 밝다 못해 날이 휘영청 떴다는 것을 깨닫고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아인은 밤새워 지킨 모닥불을 대충 모래로 덮어 끄면서 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잠자리가 열악해도 오래 잠든 것을 보아하니 어지간히도 피곤했던 모양이지.

"드디어 깼네요. 이 정도면 죽었다 깨어났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시간인데."

"죄, 죄송해요. 제가 너무 오래 자서……."

"됐어요."

이미 채비를 마친 아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지젤은 허겁지겁 제 짐을 꾸린다. 아인은 먼저 걸음을 옮기는 대신 지젤이 다급하게 얼마 없는 짐을 쓸어 담는 모습을 응시한다.

"퇴마사 씨는 꿈도 미련하게 꾸더군요."

"예…?"

이상하게 아인의 뇌리에는 악몽에 짓눌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지젤의 모습이 상흔처럼 남는다. 잠드는 모습을 자주 보지 못해서 몰랐는데, 설마하니 잠들 때마다 그런 시간을 겪나.

"…… 앞으로 수면이 필요하면 그냥 그렇다고 얘기를 하세요. 미리 말하면 여관을 잡든 마을에 묵든, 방도를 찾았을 거 아닙니까."

"하, 하지만…… 그럼 아인 씨가."

"그래요. 귀찮죠. 하지만 당신이 이렇게 곯아떨어져서 짐승이든 도적이든 알 수 없는 것들을 경계하며 숲속에서 밤을 새우는 게 더 귀찮고 짜증 나네요."

바람 앞에 등불처럼 흔들리던 시선이 밤새 아인을 괴롭혔단 이야기는 끝까지 하지 않는다. 단지 아인은 지젤에게 한 가지를 허락한다. 인간에게 필요한 휴식을 위해서 일정이 조금 어그러지는 것 정도는 발맞춰주겠노라고.

"저, 괜찮은데. 제가 아인 씨한테 맞출게요. 저 정말 괜찮아요. 오늘은 그냥…… 조금 너무 피곤했던 것뿐이고."

"그래요? 그럼 지금 같은 일정을 유지했을 때, 다시는 잠들지 않을 자신이 있어요?"

"……."

"없으면서. 멍청하게 굴지 말고 그냥 쉬라면 쉬어요. 비실거리면서 뒤를 따르는 게 보기 싫고, 피로에 잠겨서 시들시들한 상태로 내 앞을 가로막는 건 더 보기 싫으니까."

"…… 네."

지젤은 수긍의 뜻을 비치면서도 곧이곧대로 아인의 말을 믿지 못한다. 분명 이렇게 안심시켜두고 홀로 떠나버릴 생각이겠지. 나는 그에게 방해물이니까. 그간 쏟아졌던 비난과 힐난에 기반한 결론을 내린 지젤은 그로부터 며칠 내내 멀쩡한 여관방에 묵으면서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제대로 자지 못한 지젤의 눈빛을 발견한 아인이 출발 일정을 취소하고 지젤을 다시 방에 눕혀 한숨 제대로 잠들기 전까지는 침대에서 못 일어날 줄 알라고 으름장을 놓은 이후에야 지젤은 다시 며칠 만에 잠을 청한다. 같은 패턴이 두어 번 더 반복된 이후에야 지젤은 아인이 자신을 두고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온전히 신뢰한다. 지젤이 아인과 다른 방을 쓰면서도 숙면하게 되기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하긴 했으나, 아인은 지젤의 미련을 지켜보면서도 혀를 차거나 한숨을 쉴지언정 방심 뒤에 허점을 찌르지 않는다. 지젤이 다시금 그를 막아서는 날이면, 곤히 잠든 지젤을 두고 새벽바람과 동트기 전의 안개를 홀로 가를 생각이 종종 떠오르긴 하지만 기어이 실천에 이르지는 못한다.

"아인 씨, 저 하나만 물어봐도 되나요?"

"뭔데요."

"저…… 자거나 쉬어야 할 때마다 기다려주는 거 귀찮지 않아요?"

"귀찮아요."

"근데 왜……."

의문을 표하는 지젤 앞에서 아인은 침묵을 택한다. 피로에 휩싸여 잠들었던 순간 지젤에게 닥친 악몽, 애타게 가족을 부르며 흐느끼던 순간, 모닥불에 일렁이던 혼란한 눈빛. 그 모든 것이 날이 가도 흐려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죽어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런 쓸데없는 질문할 시간이 있으면 한숨이라도 더 자둬요. 또 골골대다가 쓰러지듯이 잠들지 말고."

당신은 어차피 날 쫓아올 거니까, 치사하게 먼저 떠나버리는 것보다는 조금 더 확실한 방법으로 고집을 꺾게 만들겠다는 얄팍한 변명을 방패 삼는다. 악몽에 허우적거리던 지젤의 눈빛을 마주했던 날 이후로, 홀로 남겨진 지젤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상상하게 되어버렸다는 사실 또한 결코 말할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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