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마감 글 커미션' 완성본

1차 창작, 자캐로그

냐냥이님 커미션, 23.09.12 작업물

"아니, 그러니까! 저 사람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니까!"

"뭐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먼저 나한테 반말 찍찍 싸질렀잖아!"

"그만! 아저씨들 그만 좀 싸우고 진술이나 제대로 해요!"

심야의 경찰서는 시끄럽다. 특히 술집거리가 포함된 상가 근처의 경찰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루가 멀다고 들어오는 신고는 대부분 여기 싸움 좀 났으니까 좀 말려봐라, 사람이 취해서 일어나질 않는다 등등의 시답잖은 일거리다. 정말 이런 일로 경찰까지 출동해? 싶은 경우도 종종 있으며, 재운은 윗집이 시끄러우니까 어떻게 좀 해보라는 신고가 아파트 경비실이 아닌 경찰서에 꽂히기도 한다는 걸 깨달은 날에 이루 말할 수 없는 허탈함을 느꼈다. 날이 갈수록 그날 경험했던 허탈감은 점차 몸집만 부풀렸다.

"그러니까…… 술을 마시다가 옆자리 사람과 시비가 붙으셨다는 거죠."

재운은 보기만 해도 지겨운 조서에 타닥타닥 타자를 새겨나가면서 상황을 확인한다. 사건 접수가 들어왔으니 조사하고, 경범죄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사건이라면 중재하고 훈방한다. 그게 전부다. 공권력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지긋지긋한 남의 싸움을 말리고 그 과정을 행정 서류로 남겨두는 것. 내가 생각했던 경찰은 이런 게 아닌데…….

재운은 비슷비슷한 조서를 채워나갈 때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비추던, 온힘을 다 바쳐 동경했던 경찰의 모습을 떠올린다. 정확히는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하는 정보원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된 동경이긴 했지만, 나쁜 놈들 잡아 혼내준다는 건 어렴풋이 비슷했으므로 재운은 경찰이라는 꿈을 놓은 적이 없었다. 열심히 노력해서, 경찰 공무원 시험에 통과하고, 교육 과정을 거치는 도중에도 나쁜 놈들을 멋지게 잡아넣는 정의의 경찰이 되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으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우웨에엑……."

"아악! 재운아, 이분 토했다! 대걸레 좀 가져와!"

그래, 시궁창이다. 내리 경찰서 책상 앞에 앉아서 지루한 조서나 끼적이고 취객들의 시비나 꼬장을 감당하다 못해 뒷수습이나 해야하는 게 진정한 경찰의 모습이라면, 이건 재운이 바라던 삶이 아니었다. 재운은 취객이 경찰서 바닥에 쏟아버린 토사물을 치우면서 정녕 이런 짓을 하면서 한평생 경찰로 살아야 하는 건가라는 근본적 물음을 버리지 못한다. 이런 짓을 하면서 평생 살 수 있나? 이걸 위해서 내가 그렇게 뭐 빠지게 공부하고 노력했나…?

"아저씨들, 얘기 들어보니까 서로 잘못한 거 맞네요. 그냥 좀 좋게좋게 넘어가요. 여기서 화해하지 않으시면 어? 서로 법정까지 가야 하는데 변호사 선임 비용 오백 이상씩 들이면서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잖아요."

일상이 이렇게까지 지루해도 되는 건가? 경찰이 되면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는 줄 알았는데. 장밋빛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찰차 경광등이 울리는 현장의 주인공쯤은 될 줄 알았는데. 실상은 거북목이나 손목터널증후군을 걱정해야 할 것처럼 책상 앞에 앉아 행정처리만 하는 꼴이라니. 재운이 여전히 술에서 깨지 못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취객을 진정시킬 때쯤에는, 어느덧 정해진 순찰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취객 상대하는 게 싫어서 아르바이트도 술집만큼은 피했는데. 평생 볼 취객, 지난 1년간 다 본 것 같다. 현실을 자각하는 시간이 꽤 뼈 아파도 어쨌건 정해진 책무를 내버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재운아, 준비 다 했니? 슬슬 나가야 해."

"아, 네! 선배님. 곧 갑니다!"

재운은 그나마 경찰다운 반사체 조끼를 입고 경찰봉을 챙겼다. 순찰은 컴퓨터 앞에 앉아 타자만 두드리는 것보다 경찰다운 일이었으니까. 맨 처음 순찰을 나갔을 때가 떠오른다. 경찰이 되어 범죄예방에 이바지하는 일은 특별하고 짜릿할 줄 알았더랬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피가 튀기는 우범지대가 아니었고, 정해진 순찰 시간은 그냥 콧바람 좀 쐬고 경치 따위 없는 골목 사이사이를 둘러보는 산책 시간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로망에 부합하는 게 하나도 없어. 그날도 재운은 친하지 않은 선배와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경찰서에서 소란 부리는 취객들을 향한 한탄 따위를 주억거리며 순찰했다. 재운이 예상한 대로 오늘도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았고, 바람 좀 쐬었다는 것을 최대의 의의로 두어야 할 때쯤 선배가 입을 연다.

"아, 나는 담배 좀 사고 들어갈 테니까 너 먼저 들어가라."

"예에."

어차피 곧 경찰서 앞이었고 먼저 들어가도 해되는 것은 없었으니까 재운은 선배를 보내고 비척비척 걸음을 옮긴다. 경찰서로부터 아직 거리가 좀 남았을 때쯤, 멀리서 분홍빛 머리칼을 가진 작은 남자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학생인가 싶은 인상의 남자는 경찰복을 입은 재운을 한 차례씩 훑어보는 것 같더니 그대로 재운을 지나쳐 간다.

쟤 뭐지?

그냥 머리 좀 독특한 색으로 물들인 날라리일 수도 있었겠으나, 재운은 직감적으로 무언가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다. 근거는 없다. 그냥 감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치는 학생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 촉이 안 좋은데. 따라가 볼까? 어쩌면 얄팍한 호기심일 감각을 지표 삼아 재운은 빛나는 형광 조끼를 몰래 벗어두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남자의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남자는 재운이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지 점차 으슥한 골목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설마 저거 몰래 담배라도 피우려고 그러는 건가 집중하면서 걸음을 움직이던 도중. 재운의 발에 무언가 걸린다.

"어, 어어…?! 우아아악!!"

계단을 미처 보지 못하고 발을 헛디딘 재운은 거한 비명과 함께 계단 위를 화려하게 구르고 만다. 온몸이 쑤시는 관절을 붙잡고 몸을 일으킬 때쯤엔, 저 앞에서 걸어가던 남자가 재운을 발견하고 다가온 다음이었다.

"……하하, 하. 아, 안녕."

망했다. 미행하면서 발밑을 안 살피면 어떡해! 머쓱한 걸 넘어서 쪽팔린 상황을 어떻게 모면할까 고민하던 도중, 남자는 재운의 뒷덜미를 믿을 수 없는 힘으로 잡아채 들어올렸다.

"우악!"

"뭐야, 짭새네? 너 냄새 맡고 왔냐?"

"내, 냄새…?"

"너 딱 걸렸어! 어쩐지 졸졸 따라올 때부터 수상하다 했더니만! 따라와, 이 새끼야!"

버럭 소리를 지른 남자는 재운을 짐짝 취급하면서 질질 끌고 골목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재운은 뒷덜미 좀 놓아달라고 말하는 순간에도 상황이 뭔가 잘못 돌아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

 

 

재운이 처음 분홍색 머리 남자, 시형의 뒤를 밟았을 때, 하필이면 시형이 밀수 무기를 챙기러 가던 도중이었다는 것은 정말이지 기막힌 우연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어디서 냄새를 맡았느냐는 말에 냄새요? 뭐가요? 같은 설명으로 일관하는 재운을 보면서 짭새가 입 한 번 무겁네라는 인상을 남긴 것도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지하실에 끌려가 취조당하는 와중에도 재운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고, 중앙에 앉아 고고하게 그를 내려다보던 붉은 머리 여성의 눈빛은 다른 사람들과 무언가 다르다는 것까지 파악한다. 재운이 질문에 최대한 성실하게 답변하는 동안 그를 지켜보던 여자는 손을 내젓는다.

"그쯤이면 됐어.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그냥 보내줘."

"하지만 이놈이 거짓말을 하는 걸 수도 있는데요?"

"그런 건 그냥 보면 알아. 내 눈을 못 믿겠다는 거야?"

서늘한 시선이 오고 가는 모습을 통해 재운은 저 여자가 이곳의 리더라는 판단을 내린다. 재운은 여자의 명에 따라 묶인 손이 풀리게 되었고, 이만 가보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입을 열었던 것은 충동적인 일이었다.

"여기 뭐하는 곳이에요?"

얼씨구, 같은 눈빛이 쏟아져도 재운은 굴하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의 말 따위는 공적을 향한 사전 조사라고 생각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니, 붉은 머리의 여자는 재운의 질문을 대놓고 비웃는다.

"네 정보를 말할 배짱도 없으면서 우리에 관해서 묻는 거야?"

"저는 지금까지 물어본 거 다 말했는데요."

"네 신상이나 가족에 관해서 묻는다고 해도 대답할 수 있을까?"

가족을 운운하는 행동은 그 자체만으로도 일종의 협박이 되고는 한다. 여성은 위협의 의미를 담아 시험 겸 내뱉은 말이었지만 재운의 태도는 의외로 당당하기 짝이 없었다.

"말할 수 있는데요."

"……호오."

이것 봐라?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지, 아니면 멍청한 건지 알 수가 없군. 붉은 머리의 여성, 이류호는 눈을 가늘게 좁히면서 고개를 까딱인다.

"그럼 말해봐. 네가 말할 수 있는 건 전부다."

"저는 한재운이고요. 경찰 시험을 봐서 경찰이 됐고. 부모님은 딸기 농사지어요. 주소는 경읍면 아주리 68번지……."

재운은 당장 생각나는 신상을 줄줄 읊었다. 여성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든 곁에 있던 분홍색 머리의 남자가 재운은 미친놈 보듯이 째려보는 것도 전부 무시하고. 재운은 어렸을 때 논두렁에 버려진 강아지를 주워 길렀던 것까지 읊어버리고는 한층 더 당당해진 낯으로 묻는다.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해줄 차례죠? 여기 뭐하는 곳이에요?"

"……너 같은 일반인은 몰라도 되는 일."

류호는 마지막 경고 삼아 선을 긋듯이 건넨 말이었지만, 오히려 재운은 그 한 마디로 확신한다. 나, 이대로 돌아가기 싫은데. 때때로 그런 경우가 있다. 아주 잠깐의 접촉만으로도 나 자신의 의향을 자각하는 운명 같은 순간이. 고작해야 산등성이의 정상을 밟겠다고 목숨을 거는 사람도, 공 하나를 골대에 넣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하는 사람도. 분명 자신과 같은 감각을 느꼈으리라고 확신한다. 재운은 이 일을 하지 않고서야 견딜 수 없겠다는 열망의 순간을 경험한다. 무뎌진 일상 속 불현듯 찾아온 한 줄기 빛. 이게 바로 자신이 바라왔던 일이라는 의식. 그 가냘픈 예상을 증명하고 싶은 충동.

"저도 동료로 받아주세요."

재운은 그 말이 끌고 올 여파를 감히 짐작하지 못했으면서도 확신에 찬다. 이 사람들은 내 일상을 바꾸어줄 수 있어.

 

 

경찰의 말을 믿는 것만큼 멍청한 일은 없다. 민중의 지팡이라 불리는 이들은 실상 거대한 사회관계가 움직이는 손발의 끄트머리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동료로 받아달라고 말하는 재운을 비웃지 않았던 이유는, 류호가 사람 보는 눈이 특출났기 때문이다. 또렷한 시선 안에 숨어있는 갈망을. 평범한 사회 속에서는 충족할 수 없는 충동을 발견한 류호는 재운을 테스트해보았다. 네 말을 우리가 믿을 수 있도록 직접 증명하라고 말했다. 어설픈 각오였다면 분명 꼬리를 말고 은근슬쩍 연락 두절이 되었을 텐데. 재운은 자신의 각오를 보이겠다며 제 눈깔 한쪽을 그어버리는 것도 모자라서…….

"이걸 난 놈이라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무모하다고 해야 하는 건지. 류호는 재운이 넘긴 서류를 손끝으로 퉁 튕기면서 입매를 비틀어 웃는다. 밀수 단속에 관한 강령과 업무 절차, 심지어는 단속 강화 기간까지 속속들이 담긴 정보를 물어온 민중의 강아지를 향해 웃는다. 저거 진짜 진심이네. 내부 정보를 홀라당 물어와? 이걸 먹은 우리가 입을 씻거나, 아니면 정보 제공자를 죽이거나, 약점을 잡을 수도 있는데.

"이걸 보니까 네가 제법 진심이라는 건 알겠네."

"그럼 수족으로 받아주시는 건가요? 저 진짜 열심히 할 수 있어요. 경찰에 스파이 하나 넣어두면 편리하실 거예요. 저는 옷만 뒤집어쓴 가짜 경찰이 아니라 경찰 시험 봐서 당당히 합격한…!"

"민중의 곰팡이니까?"

"네! 민중의 곰팡이니까요!"

무엇이 잘못됐는지도 모르고 류호의 말을 그대로 읊는 재운은 조금 띨빵하기도 했지만, 이정도 각오가 되어있다면 손에 쥐고 키워보는 것도 썩 나쁘지는 않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일단 네가 헛바람 든 건 아니라는 걸 알겠어. 테스트는 통과야."

"헛, 그럼…!"

기대를 한껏 머금고 눈을 반짝이는 재운을 보면서 류호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린다.

"네게 첫 명령을 내려줄게. 잘 들을 자신 있지?"

"그럼요! 맡겨만 주세요!"

"좋아, 그럼……."

한동안 본가로 내려가서 딸기 농사나 지어.

"……예?"

"기다리라고. 그게 너한테 내릴 첫 번째 명령이니까."

맡겨만 달라고 말했으니 기다리는 것도 할 줄 알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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