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신곡] 자캐 로그
리라님 커미션, 23.09.02 작업물
화마와 혈향이 가득한 장소 한가운데 앉아있던 작은 어린아이는 이미 숨을 거둔 시체 사이에 앉아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애니는 이해하기 힘든 기이함을 마주하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단전에서부터 피어올랐으나 눈앞의 인간은 아직 어린아이라는 사실 하나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도덕을 자극했던 탓에 몇 가지 의문을 접어두고 일단 아이를 끌어안아 탈출하는 쪽을 택했다. 아이를 품에 안은 이후에야 끝없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었는데, 목재가 타오르고 무너지는 소리 사이에서 미약하게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만을 잡아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건물을 거의 탈출할 때쯤에야 애니는 아이가 축복의 언사를 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 대상이 아이 곁에 쓰러져있던 시체들이라는 사실마저도 인지했다.
분명 어떤 방식으로든 인연이 있었을 사람들의 죽음을 보고도 초연한 어린아이는 존재만으로도 기이함의 현신이었으나 정체 모를 아이는 LDL이 그토록 뒤쫓던 사이비종교 집단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가치가 훨씬 더 중요했던 탓에 애니는 아이를 데리고 귀환하는 쪽을 택했다. 아이는 낯선 이의 손에 이끌려 마을을 떠나는 순간까지도 저항하거나 경계하기는커녕 얌전히 걸음을 옮겼고 애니의 신변이나 목적에 관해 묻지 않았으며 고장 난 라디오처럼 축복을 읊을 뿐이었다. 완전히 전소된 마을을 향해 시선 하나 주지 않은 채로.
…
기현상을 숭상하는 사이비종교 단체를 추적 관찰하는 작전은 실상 실패나 다름없었다. 어떤 사건 때문에 집단자살에 이르게 되었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사이비종교에 몸담았던 마을 사람들이 죄다 유해가 되어 불타 없어져 버렸으니까. 남은 증거라고는 불타는 건물 안에서 발견된 작은 아이 하나뿐. 다만 증인 취급도 애매한 것이, 아이는 낯선 장소에 끌려왔다는 두려움 내지는 경계 따위는 추호도 내비치지 않은 채 그저 멍하게 허공만을 응시하고는 했다. 타인이 던진 질문에 꼬박꼬박 답을 해주었기에 정황 파악은 어렵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의외로 아이가 아는 건 많지 않았다.
거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니?
축복 해줬어요.
왜?
축복해달라고 청했으니까요.
같이 있었던 사람들은 누구니?
마을 사람들이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니?
네.
어째서?
몰라요.
불은 누가 지른 거니?
몰라요.
왜 도망치지 않았니?
도망치라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까요.
아이는 LDL이 추론할 수 있는 사실 이상의 답변을 전혀 내놓지 않았다. 정해진 답변을 읊는 듯한 반응에 거짓말 탐지기나 심박수 측정기마저 동원했으나 아이의 신체 반응은 평온하기만 했다. 아이의 기묘한 반응은 심정이나 기분 같은 것을 물어볼 때 특히 두드러지고는 했는데, 눈앞에서 사람이 자살하고 불에 타 죽을 뻔했다는 직관적 비극을 상기시키면 아이는 기억나지 않는 지난 저녁 메뉴를 되짚는 것처럼 잠시간 말이 사라지곤 했다. 사람이 흔히 보일 수 있는 슬픔이나 충격, 공포나 두려움 따위가 매몰된 채 취조 내내 웃는 낯을 유지하는 아이의 반응을 확인한 LDL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아이가 기묘한 현상에 휘말려 정신적으로 소화하기 힘든 비극을 마주했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되는 충격을 받았으리라 예상하는 동시에 정신의학적인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말로 축약하기 어려운 이격이 있다고 판단했다. 어떤 현상을 보고 듣고 겪었는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다짜고짜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기현상이라 불리는, 이 세계의 일면에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위협은 의학과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일반적인 사회의 범주 안에서 교육받고 수련한 정신과 의사가 망상이나 환청, 환각 따위로 치부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정체 모를 작은 아이는 현실로 겪었을 것이다. 결국 아이를 위한 실질적인 치유 방법은 부재한 상태로 LDL은 아이를 ‘중요 증인이니 섣불리 사회로 내보낼 수 없다’는 명목하에 보호하기 시작했다.
새로 들어온 이방인이 기묘하고 기이하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아직 성인조차 되지 못한 아이가 시체 사이에서 울음 한 번 터뜨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앞뒤 맥락 없는 얄팍한 동정심을 일으키기 좋았다. 애니는 자신이 느꼈던 기묘한 거부감을 입 밖에 내지 않은 채 아이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드레퓌스는 여타 조사 과정이 아이에게 폭력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다만 사네미츠는 어른으로서 마땅히 보여야 할 다정과 자상에서 한발 물러선 행보를 보였다. 텅 빈 시선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것만이 하루의 일과이며 의향도 의지도 없다는 듯 구는 무색무취의 아이는, 사네미츠가 회피하기를 택한 현실을 여러 번 자각하게 했다. 꼭 비슷한 눈동자로 사네미츠를 바라보던 아이가 있었다. 제 피를 이었으나 자식이라는 이름 아래서 마땅히 주어야 할 의무를 배반하고 방치한 작은 생명체의 눈동자가 떠올라버리는 탓에 사네미츠는 아이의 앞을 일부러 피했다. 애초 사네미츠 또한 LDL 입장에서는 구조자였던 탓에 새로이 들어선 외부인에 대한 운신을 논할 위치가 아니라는 사실이 묘수로 작용했다. 낯설고 기묘한 아이에게 감정을 내어줄 의무도 책무도 없다는 사실에 기대어 사네미츠는 또다시 얄팍한 회피라는 수단을 택했다.
제 앞가림조차 갈 길이 먼 어린아이에게 마땅히 내어줘야 하는 도의적인 다정을 거부한 사네미츠와 달리, 레이지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레이지 또한 아직 어린아이이며 구조되지 얼마 안 된 이방인이라 기현상에 매몰된 감각을 현실로 되돌려놓기에는 충분치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레이지는 초점 없는 시선을 허공으로 떨구는 것이 전부인 낯선 아이에게 관심을 보였다. 새로이 들어온 아이가 어른들의 의식을 한 몸에 받고 있으며 이는 관심이라 뭉뚱그릴 부류보다는 경계나 탐색에 가까운 반응임을 인지한 것인지, 레이지는 어른들 앞에서 아이에게 섣불리 다가가는 대신 보호자가 잠깐 눈을 뗀 사이 홀로 격리된 아이의 방으로 찾아가 이것저것 시답잖은 말을 붙였다. 어른들이 경계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몰래 찾아가자는 단순하고도 어린 판단하에 매일매일 생각날 때마다 레이지는 아이의 방을 찾았다. 레이지의 소소한 비밀작전은 당연하게도 금방 탄로가 났다. 레이지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오는 행동으로 인해서.
구조된 이후로 내리 방안을 지키던 아이는 레이지의 손을 잡고 졸랑졸랑 잘도 돌아다녔다. 그냥 레이지가 손을 잡고 끌어당기니까 반응하는 걸 수도 있겠지만. 작디작은 두 아이가 제멋대로 LDL을 돌아다니는 모습을 확인한 어른들은 한 차례 고뇌에 빠졌다. 레이지는 아직 어리고 구조된 지 긴 시간이 지나지도 않았으며 인생에 드리운 커다란 그림자를 걷어내지도 못했다는 사실이 우려되었으나, 그런 레이지가 LDL에 구조된 후 처음으로 생존에 필요한 요소 외의 다른 것에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은 높은 점수를 쳐줄 만했다. 아이의 경우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어른들이 다가가는 것보다는 제 또래의 아이가 편한 것일까 라는 추론만으로도 두 아이를 붙여둘 이유는 차고 넘쳤다. 결국 어른들은 레이지가 아이를 찾아가는 것을 만류하지 않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기껏해야 아이 둘이니 같이 붙여두어도 기관의 개입이 필요할 정도의 큰일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조금은 안일한 판단과 아이가 레이지의 행동에 거부감을 표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흡사 마중물처럼 새로운 정보나 긍정적인 변화를 꾀하는 도화선이 되기를 바라는 기대가 맞물렸다. 그날 이후로부터 레이지는 꼬박꼬박 아이를 찾아갔다. 상황을 썩 마뜩잖게 여긴 것은 사네미츠 뿐이었으나 구조된 이후에 내리 바닥만을 응시하던 레이지가 그나마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일과가 생겼다는 사실을 위안 삼았다. 아이가 불편하다는 사실을 방패 삼아 레이지마저도 외면할 수는 없었던 사네미츠는 레이지에게 저녁 식사 시간을 읊어주기 위해 아이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목도하고 말았다.
방 안에 고요히 앉아있는 라이의 모습을.
인과에 맞는 판단이 들어서기도 전에 이 공간에 있을 리 없는 라이를 품에 안고 싶다는 포근한 감각이 앞섰다. 뒤이어 이성을 되찾은 사네미츠는 도리질을 치고 시야를 바로잡았다. 그러자 반투명한 라이의 모습 뒤로, 본디 레이지의 이름을 갖고 있었던 작은 아들과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하루키마저 눈에 비친다. 영화 필름이 덧대어진 것처럼 환상을 입고 있는 아이는 뒤늦게 들어온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것처럼 사네미츠를 향해 시선을 옮긴다. 라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듯 구는 레이지를 확인한 사네미츠는 제 이성으로 파악할 수 없는 이격을 마주한 채 굳어버렸다. 그날 사네미츠는 억지로 레이지의 팔을 끌어 자리를 피했고 아이를 향한 거부감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사네미츠가 목격한 라이는 환각도 아니고, 레이지의 정신이 나간 것도 아니며, 이는 누구의 잘못도 능력도 아니거니와 아이의 악의는 더더욱 아닌, 그저 하나의 현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데 꽤 오랜 시간이 들었다. LDL의 사람들은 공들인 교차관찰을 통해 아이가 종종 특정 사물이나 대상으로 일그러져 보이며 이는 목격하는 사람에게 안정감을 주는 형태라는 사실을 밝혀낸다. 해당 사실을 검증한 이후, 아이는 기현상에 휘말린 증인이 아닌 기현상 그 자체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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