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어리테일] 맥베스 HL 드림
KU님 커미션, 23.09.01 작업물
아닌 밤중에 폭발음이 터진다. 정해진 기로를 달리던 기차의 앞칸이 터져나가는 바람에 기차 전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복되고 만다. 사람 대신 화물을 운송하던 기차는 싣고 있던 물건을 우당탕 뱉어내면서 장난감처럼 구겨진다. 기차에서 튀어나온 마력석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으며, 소음이 멎은 이후에야 그 주변으로 사람 여럿이 몰려든다.
…
한창때의 사업이란 으레 그렇다. 잘 나가다가도 고꾸라지고, 빌빌 기다가도 갑자기 승승장구하는 것. 헤르미아는 그런 줄타기가 제법 적성에 맞아서 사업가이길 택했지만, 야근에 특근에 연장근무를 겹쳐도 해결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일감까지 사랑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하아……. 힘들어 죽겠네."
"사장님, 며칠 내내 제대로 퇴근도 못 하셨는데, 괜찮으세요?"
"괜찮아. 원래 직원들 대신 사장이 나서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잖아."
"아직 범인 안 잡혔다고 했죠?"
"응. 어떤 놈들인지는 몰라도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어."
헤르미아는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린 뉴스를 노려보면서 이마를 쓸어올린다. 전대미문의 대용량 마력석 강탈 사건! 이라는 헤드라인이 눈에 띈다. 거창하게 주절거린 기사를 요약하자면 운송 기차가 습격당해 마력석이 탈탈 털렸다는 내용이다. 현장에 남아있는 흔적으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범인은 강력한 마도사일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그냥 엇나간 마도사가 테러를 일으켰구나 하고 말았겠지만, 헤르미아는 위 기사를 그냥 넘길 수 없었다. 마력석을 운반하던 기차는 다름 아닌 헤르미아의 사업장 소속이었으니까.
"거래처에서 이해해줬기에 마련이지. 하마터면 신뢰가 깨질뻔했잖아. 사업에서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데……. 덕분에 생산 일정도 밀리고, 개발 일정도 제약이 잡히고."
마력석은 마법 도구의 개발이나 생산에 직접 연관된 중요한 물질이다. 애초 몸에 담긴 마력이 넘쳐나는 마도사들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지만, 마법을 처음 배우는 견습 마도사나 마법의 힘을 빌려 생활을 쾌적하게 운용하는 일반인은 생활 곳곳에서 마력석을 이용한다. 당연하게도 마도사 길드와 협업을 맺고 사업이나 개발을 진행하는 사업가 입장에서도 마력석은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자재다. 최근에 새로 추진한 개발 때문에 마력석을 대량으로 구입했는데, 하필이면 강탈이라니.
"하……. 이것 때문에 몇 날 며칠을 속 썩고 있는 거야, 진짜."
어떤 일이 터지든 정해진 납기를 꿰맞춰야 하는 최고 경영자 헤르미아만 죽어나는 실정이었다. 덕분에 퇴근도 제대로 못 하고 여기저기 발로 뛰면서 수사 협조, 사업 관리, 일정 조정……. 쏟아지는 일거리가 끝도 없었다.
"사장님, 오늘은 이만하고 퇴근하세요."
"그래도 될까? 나 없는 사이에 또 연락해 오는 거 아니야?"
"중요한 연락이면 제가 연락드릴게요. 그러니까 집에 가서 조금이라도 제대로 쉬세요."
지난 몇 주간 헤르미아는 집에 들러서 한 번 씻고 나오거나 아니면 밥만 먹고 나오거나 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맥베스와 시간을 못 보낸 지 오래되었다. 데이트는 꿈도 못 꾸고 얼굴 마주하고 대화하는 시간조차 부족했다. 아무리 그래도 몇 주는 심했지. 아직 일거리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으나 집에서 오매불망 헤르미아만 기다릴 맥베스의 얼굴을 떠올리자마자 퇴근해야겠다는 의지가 샘솟는다.
"부탁할게, 메디나. 급한 일 있으면 진짜 바로 불러야 해?"
"그럼요. 퇴근하세요, 사장님."
똑 부러지는 비서는 손을 흔들면서 헤르미아를 배웅한다. 헤르미아는 급하게 옷자락과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나가 집으로 향했다.
…
맥베스는 녹초가 되어 나타난 헤르미아를 보면서 화들짝 놀랐다. 최근 바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얼굴이 반쪽이 되어 나타난 모습을 보고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맥베스는 바로 때늦은 저녁부터 차려 헤르미아에게 내어주었다. 너무 힘들면 입맛이 없어진다고 하던가. 깨작깨작하며 식사를 다 비운 헤르미아는 우선 방치된 애인을 향해 사과부터 뱉었다.
"미안해, 맥베스. 요즘 내가 너무 바빠서 시간도 같이 못 보내고……."
"뭐? 아니야. 그런 거로 사과하지 마. 바쁜 건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웬만해서는 주말 중 하나라도 시간을 내려고 했는데 일이 꼬여버려서."
헤르미아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는다. 맥베스는 헤르미아가 곤란한 일이 생길 때마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책임감도 강하고, 남에게 짐을 지우지도 못하는 사람이었으니. 하지만 헤르미아는 사업가로서의 수완도 좋고 능력도 좋아서 웬만한 문제는 맥베스가 인지하지도 못한 채 지나가고는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몇 주간 시간도 못 낼 정도로 바쁘다니.
"일이 많이 꼬였어?"
"어, 으음……. 조금?"
"어떤 일인데? 나한테 얘기해줄 수 없는 일이야?"
"아, 아니. 그건 아니고……."
헤르미아는 스스로 어려움을 토로하지는 않을지언정 맥베스가 묻는 말조차 회피하려 들지는 않았다. 그 사실을 아는 맥베스는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대신 직구를 던진다. 이번에도 거짓으로 둘러댈 의향은 없었던 헤르미아가 어쩔 수 없이 입을 연다.
"하……. 그게 있잖아, 사실 최근에 대량으로 구매한 마력석이 강도를 당했어. 그것 때문에 납기도 밀리고, 개발 일자도 밀리고, 제조 공정도 틀어막혀서 수습하느라 진짜 진땀 뺐어."
"강도…? 혹시 그거 신문에 나왔던 기차 전복 사건이야? 마도사가 강탈한 것 같다고 했던?"
"아, 응……. 신문에 실린 기사 봤구나? 그거 사실 우리 사업체랑 연관된 사건이야."
맥베스가 팔짱을 끼고 잠깐 말이 없어진다. 헉, 설마 미리 말 안 해줘서 화났나? 헤르미아가 염려하는 사이, 맥베스가 의외의 발언을 내놓는다.
"이상하네."
"응? 뭐가?"
"신문 볼 때도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는데……. 마도사가 털어갔다며? 마도사가 마력석을 쓸 일이 어디 있다고 그렇게 강탈을 해?"
터진 일을 수습하느라 발에 땀이 나도록 돌아다녔던 헤르미아는 그제야 기이함을 깨닫는다. 마력석은 보통 마법을 쓰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위한 편의 도구를 만드는데 가장 많이 드는 자재다. 그걸 굳이 마도사가 강탈해 가? 기차를 전복시켜서 마법 범죄자가 되는 일을 감수하면서까지 대용량으로?
"……듣고 보니 진짜 이상하네. 이걸 왜 진작 생각을 못 했지?"
"원래 한 가지 일에 집중하다 보면 다른 일에는 조금 눈을 떼게 되잖아. 그래서 그런가 보지. 마도사가 그렇게 대놓고 일을 벌였다면 아무래도……."
어둠의 길드 소행일 것 같은데. 맥베스의 입에서 합리적인 추론이 흐른다. 마법 범죄, 대용량 강탈. 어둠의 길드라는 이름을 덧붙이기에 딱 알맞은 사건이긴 하다. 만약 정말 어둠의 길드가 얽혀있다면 수사는 더 지지부진해질 것이다. 마도사는 추적을 피할 수단과 힘이 충분한 사람들이니까. 이거 더 곤란하게 된 것 같은데. 헤르미아가 미간을 좁히는 모습을 지켜보던 맥베스가 입을 연다.
"헤르미아, 혹시 그 일…… 나한테 맡겨보면 안 돼?"
"응? 뭘? 설마 마력석 되찾는 일을?"
"응. 어둠의 길드가 할 법한 일은 너보다 내가 더 잘 알 테니까."
이거 블랙코미디인가? 어둠의 길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말 한마디를 조심하는 헤르미아가 뭐라고 반응할지 고민하는 사이, 맥베스가 쐐기를 박는다.
"나쁜 짓 하는 놈들의 머릿속이라면 손바닥 들여다보는 것처럼 훤해. 그러니까 그거 나한테 맡겨봐."
…
강한 마도사는 전력이 된다. 마도사는 일반인이 볼 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경이로운 힘을 가졌으니까. 근데 그게 수사에도 도움이 되려나? 맥베스의 요청으로 기차가 전복된 위치에 도착한 헤르미아는 여전히 반신반의한다. 맡겨달라는 말을 모질게 거절할 이유가 없어서 승낙하긴 했지만, 맥베스가 가진 마법은 추적 특화도 아닌데. 맥베스는 전복된 기차의 흔적도 남지 않은 채 끊어진 철로와 길게 흠집이 난 대지 말고는 볼 것이 없는 위치를 한참 살피다가 말한다.
"탐색 제어 마법을 쓴 것 같은데."
"탐색 제어…?"
헤르미아 또한 마도사니까 탐색 제어 마법이 어떤 효과인지는 안다. 어떤 마법을 사용했는지 은폐하는 마법인데. 그걸 설마 이 공간 전체에?
"공기 중의 마력이 미묘하게 비틀려있어. 이러니까 수사가 지지부진했군."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맥베스는 가볍게 손을 휘저어 사건 현장에 자신의 마법을 쏟아부었다. 마법을 왜곡시킬 수 있는 맥베스에게 제어 마법은 손 휘저으면 날아가는 연기나 다름없었으니. 허공이 이리저리 일그러지면서 아지랑이 같은 형태를 띠더니 이내 원래대로 되돌아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나, 헤르미아는 어렵지 않게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상하네…? 분명 마법으로 습격당했다고 했는데 남아있는 마력의 흔적이……."
"이 정도 규모를 마법으로 날려버린 것치고는 남아있는 마력이 옅네. 그럼 남은 결론은 한 가지야."
헤르미아는 맥베스의 내린 결론을 곧바로 짐작한다. 마법 습격이 분명한데 규모에 맞지 않는 마력의 농도.
"마법 도구를 사용했나?"
"그런 것 같아. 이 정도 규모의 테러를 일으킬 수 있는 마법 도구가 시장에 유통될 리 없으니 아무래도 불법 개조한 마법 도구겠지. 마법 도구를 사용한 테러라면 범인을 추려내는 건 쉬울 거야. 마법 도구는 전부 제작 길드를 통해 유통되니까. 최근에 공격형 마법 도구 구입 이력이 늘어난 길드를 탈탈 털어보는 게 좋겠어."
테러하는 놈들이 화롯불이나 피우자고 불법 개조를 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이미 있는 도구를 뜯어내서 개조했겠지. 어둠의 길드는 생산 연줄 잡기가 힘드니까 자체적으로 개발하고 생산하는 경우가 드물어서 기성품을 개조했을 테고.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라면 이 정도 규모의 마법 도구를 쓰는 어둠의 길드를 평범한 수사대가 잡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아무리 봐도 마도사 길드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은데."
"……."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맥베스 네가 생각보다, 엄청……."
잘 아네. 아니, 당연한 건가? 맥베스도 나름대로 어둠의 길드 소속이었으니까? 하지만 여기가 대고 ‘와, 너 잘 안다! 역시 경력자는 달라!’ 같은 소리를 할 수 없다는 건 헤르미아도 알았다. 그래서 헤르미아는 그저 맥베스의 품에 안기면서 칭찬을 읊는 편을 택했다.
"네가 생각보다 너무 유능해서 놀랐어."
"크흠, 널 위해서라면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는데."
부끄럽다는 것처럼 호흡을 다듬은 맥베스는 헤르미아를 한 차례 꼬옥 끌어안아 주면서 겁도 없이 마법 도구를 이용해 테러를 자행한 집단을 잡기 위한 다음 작전을 설명한다.
"내가 길드를 털었다간 분명 나중에 뒷말이 나올 거야. 어둠의 길드과 관련된 일이니까 나는 얽히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헤르미아, 네가 공격형 마법 도구 납품이 늘어난 길드를 찾아주겠어? 그다음은 내가 해결해줄게."
자신만 믿으라는 듯 웃는 맥베스는 어째 꽤 즐거운 듯 보였다. 착각이었을까?
…
맥베스의 예상은 한 치 틀림없이 들어맞았다. 최근 매그놀리아에 있는 한 제작 길드의 공격형 마법 도구 매입률이 기이할 정도로 상승해 있었고, 중소 길드에 불과한 주제에 매입으로 사용하는 예산도 만만치 않았다. 길드 주소라고 등록된 위치로 찾아가니 웬 낡아빠진 주점 하나만 놓여있는 데다가, 주점의 주인은 마법 도구 제작 길드의 이름을 아예 처음 들어본다고 했다. 헤르미아는 주점 안쪽에 무언가 숨겨져 있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맥베스의 의견은 달랐다.
"내 생각에 그 주점은 털어도 아무것도 안 나올걸."
"뭐? 왜?"
"실제 길드 건물은 다른데 지어두고, 적당한 빈 건물 하나 매입해서 여기가 길드라고 신고만 해두는 경우는 생각보다 잦거든. 신고를 마친 이후에는 건물을 그대로 팔아치우고 서류는 말소하지 않는 거지. 그렇게 하면 매그놀리아 내부 길드에게 주어지는 세금 혜택은 받을 수 있으면서 불시검문은 피할 수 있잖아. 서류상의 길드 건물에 무언가 꼬투리가 잡히는 순간 일이 터졌다는 것을 감지하고 꼬리 자르기도 편하고."
어둠의 길드에 속한 사람이 취할 수단을 줄줄 읊는 맥베스를 보면서 헤르미아는 감탄에 감탄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경력이 있는 사람의 추론은 남다르다는 걸 시시각각 깨닫고, 적극적으로 수사망을 좁혀나가는 맥베스를 보면서 꽤 능숙해 보인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 이제부터는 어떡해? 그 주점을 털었다가는 꼬리 자르기를 할 거라며. 섣불리 손댈 수 없는 거 아니야?"
"손댈 필요 없어. 그 주점을 통해 어둠의 길드 본거지가 어디인지만 파악하면 되니까."
"본거지가 어디인지는 어떻게 파악하게?"
"길드 이름을 달아 매그놀리아 바깥으로 출고되는 수하물 배송지를 뜯어보면 알지. 이제 다 잡은 거나 다름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널 곤란하게 만든 놈들, 하나도 빠짐없이 대가를 치르게 해줄 테니까.
…
"아아악!!"
스파이럴 페인을 맞고 나뒹구는 조무래기들을 보면서 맥베스는 한숨을 내쉰다. 예상한 바와 한 치 틀림도 없이, 마력석을 털어간 무리는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허접쓰레기 어둠의 길드 소행이었으며 그나마 간부진으로 보이는 몇몇 마도사의 실력은 시시하다 못해 김이 샐 수준이었다. 이까짓 놈들 때문에 우리 여왕님이 몇 주 동안 개고생을 했다 이 말이지. 맥베스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일어나지 못할 수준으로만 길드 인원 전체를 두드려 놓았다. 헤르미아가 고생한 것을 생각한다면 전부 멱을 따서 걸어둬도 분이 안 풀리지만 범죄자 잡자고 다시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적당히 정리되었을 때, 맥베스는 길드 마스터로 보이는 젊은 남자에게 다가가 묻는다.
"훔친 마력석은 어디다 숨겼지?"
"지, 지, 지하실에 있습니다! 제, 제발 목숨만은…!"
"내가 언제 죽인다고 했어? 그냥 마력석 어디 있냐고 물었는데."
"제, 제발 자비를. 자비를…! 제발, 살려주세요. 미드나잇 님…!"
오래간 잊고 있던 이름이 낯선 남자의 입에서 나오자 맥베스의 표정이 노골적으로 일그러진다. 동시에 맥베스는, 허접한 어둠의 길드에 불과한 그들의 수법이 어째서 그토록 머리에 익었는지 깨닫고야 만다. 아, 이놈들. 오라시온 세이스 산하였나? 그 사실을 알자마자 맥베스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착잡함에 휩싸인다. 그들이 더 이상 오라시온 세이스의 지시를 받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맥베스가 더 이상 미드나잇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둠의 길드 마스터라는 놈은 그를 미드나잇이라 부르며 밑도 끝도 없이 자비를 구한다. 오라시온 세이스가 만들어낸 수많은 어둠의 길드는 아직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고 사회의 악처럼 곳곳에 뿌리내린 채 연명하고 있다. 세계의 명운을 운운할 정도의 위력이 없을 뿐이지. 일반인의 기준에서 바라보자면 수많은 테러와 불안을 야기하는 놈들. 미드나잇이던 시절에 방치하고 육성했던 씨앗이, 지금 눈앞에 있다. 그 순간 맥베스는 자신의 옛 이름을 부르는 남자의 목을 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문다. 살인은 안 돼. 살인해서는 안 돼. 당장 죽여없애고 싶은 과거가 눈앞에 있지만, 살인만은 안 돼. 기어이 맥베스는 남자의 목숨을 앗아가지 않았다. 범죄자와 연이 통했다고 뒷말을 듣는 헤르미아에게 이 이상의 짐을 얹어줄 수는 없었기 때문에.
…
언제나처럼 출근하여 쌓인 일을 처리하던 헤르미아에게 웬 연락이 하나 닿는다. 마력석을 빼돌린 어둠의 길드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으니 당사의 물건이 맞는지 확인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헤르미아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허공에 감도는 마력의 잔재가 맥베스의 것이라는 걸 눈치챈다. 하지만 현장에 맥베스는 없었다. 어둠의 길드 인원들을 포박하여 체포하고 있는 수색대의 말에 따르면, 실상 자신들이 도착했을 때 이미 길드 전체가 박살이 나 있었다고 한다. 길드의 목적은 마법 도구 개조를 통한 떼돈 벌기에 불과했다는 시시한 결론을 듣는 내내, 헤르미아는 어째서 맥베스가 상황을 정리하고 홀로 떠나버렸는지에 대해 생각한다. 헤르미아는 끝끝내 수색대에게 맥베스의 존재에 대해 입을 다물고, 집에 도착하자마자 헤르미아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맥베스를 냅다 끌어안는다.
"……고마워, 맥베스."
"뭐가?"
"네가 이렇게까지 도와줄 줄 몰랐어."
"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 나는 종일 집안에만 있었는걸."
태연하게 능청을 떠는 맥베스를 보면서 헤르미아는 맥베스의 팔을 툭 친다. 맥베스는 과장되게 아프다는 것처럼 팔을 문지르면서 웃는다.
"현장에서 도망은 왜 갔어? 어둠의 길드를 박살 냈다고 하면 크림 소르시엘 평판도 올라갈 텐데."
"그거야 뭐……."
맥베스는 답하지 않은 채 말문을 흐린다. 그 모습을 마주한 헤르미아는 직감한다. 그냥 귀찮아서 도망간 건 아닌 모양인데?
"뭐야, 무슨 일 있었어?"
"별 일 없었어."
"정말로?"
재차 묻는 헤르미아의 눈동자를 마주 본 맥베스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만다.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티라는 걸 헤르미아도 눈치채고 맥베스도 자각한다. 거짓말로 헤르미아를 실망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맥베스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연다.
"……날 미드나잇이라고 부르더라고. 그 어둠의 길드 마스터가."
"아……."
"내 얼굴을 아는 걸 보니 오라시온 세이스 산하였나 봐. 난 기억이 안 나지만 어쩌면 직속이었을 수도 있겠지."
헤르미아는 맥베스가 자신의 출신과 과거가 흠결이 될까 걱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몇 주 내내 헤르미아를 괴롭힌 사건이 사실 오라시온 세이스 산하였던 길드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니. 헤르미아는 조용히 맥베스의 손을 잡았다.
"맥베스."
"……."
"나 신경 하나도 안 써."
네가 과거에 뭘 했든, 무슨 이름으로 불렸든. 지금 내 곁에 있는 건 미드나잇이 아니라 맥베스잖아.
"그러니까 부채감 같은 거 느끼지 마."
실질적으로 어려운 부탁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안다. 맥베스 또한 홀가분해진 표정은 아니었기에 헤르미아는 조금 더 신중하게 꺼내려고 했던 이야기를 터놓는다.
"맥베스, 사실 나 이번 일을 겪으면서 너한테 제안할 게 하나 생겼어."
"제안…?"
"응, 사업 아이템이야. 들어볼래?"
맥베스는 추가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것처럼 고개를 기웃거린다. 헤르미아는 자신감에 찬 눈빛으로 설명한다.
"이번 수사가 지지부진했던 건 범죄 현장에 탐색 제어 마법이 걸려있기 때문이었어. 하지만 맥베스는 그 마법을 단번에 간파할 수 있잖아. 그러니까 이런 경우에는……. 맥베스가, 정확히는 크림 소르시엘이 마법 범죄 추적을 전담하는 의뢰 창구를 만들면 어떨까 해."
마법 범죄는 빈도가 잦지는 않지만 한번 일어나면 그 규모가 크고 피해가 막대하다. 범죄를 추적하기가 쉽지 않고 마도사를 제압하여 체포하는 것 또한 어렵다. 하지만 만약 이와 같은 범죄를 적극적으로 타파하는 길드가 하나라도 있다면.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다른 길드와 차별화된 강점을 내세울 수도 있고, 경제성도 있겠지. 평판에도 분명 도움이 될 테고."
대대적인 어둠의 길드가 격파되면서 남아있는 건 잡범들이라고는 해도 일반인들이 느끼는 마법 범죄의 공포는 마도사가 느끼는 위협과는 차원이 다르다. 끝도 없이 맥베스를 괴롭히는 범죄자 출신이라는 꼬리표 또한, 언젠가는…….
"스스로 타파하면 되잖아. 미드나잇이 뿌렸던 씨앗을, 맥베스가 거두면 되지."
맥베스의 시선이 고요히 헤르미아를 향한다. 자신의 기획에 자신이 있었던 헤르미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다. 잠시간의 침묵 이후, 맥베스는 희미한 웃음을 짓는다.
"너는, 정말이지……."
"어때? 꽤 괜찮은 아이템이지?"
"응, 대단해. 너무 대단해서…… 눈이 부실 정도야."
이따금 과거에 발목 잡힐 때마다, 헤르미아는 맥베스가 다시 비극으로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단단하게 붙들어주고는 했다. 바로 지금처럼. 뿌린 씨앗을 거둬들이는 일이라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앞으로도 이와 비슷한 일이 생기는 건 맥베스 또한 사양이었기 때문에.
"해볼게. 의뢰 창구를 개설하는 일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크림 소르시엘의 전력으로 해결 불가능한 의뢰도 아니니까. 그리고……."
"그리고?"
헤르미아의 올곧은 눈동자를 고요히 바라보던 맥베스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내려 헤르미아에게 경건하게 입 맞춘다. 자신의 희극을 향한 경이와 경탄을 담아서.
"고마워."
단순명료한 한 마디였으나 헤르미아는 그 안에 포함된 수많은 언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천만에. 나 대신 범죄자들 소탕해줘서 나야말로 고맙지."
미드나잇이 쏟아낸 과거를 주워 담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미드나잇의 곁에는 없었던 헤르미아가 맥베스의 곁에는 있다. 오직 그것만으로 족했다. 네가 있는 곳이라면 세상 어떤 구석이라도, 희극으로 변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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