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자캐 로그
냐냥이님 커미션, 23.08.23 작업물
하루의 피로를 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 어떤 사람은 따뜻한 물에 하는 목욕, 다른 사람은 살갑게 맞아주는 반려동물 같은 걸 꼽겠지만 저한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치즈케이크 한 조각이면 충분해요. 솔직히 말해서 치즈케이크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런 사람은 분명 감성이 바싹바싹 메마른 사람일 거라고요. 그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나는 그냥 치즈케이크를 사려고 외출했을 뿐이었죠. 설마하니 장기매매집단을 의심하게 만드는 건물로 끌려들어 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고요!
…
집에서 나와 조금 걷다 보면 나오는 뒷골목. 겉보기에는 일탈 학생들이 담배나 뻑뻑 피워댈 것 같은 분위기지만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면 몽실몽실한 냄새를 풍기는 디저트 가게가 있다. 아린은 그 가게에서 갓 만든 치즈케이크를 좋아한다. 달콤하고 보드라운 치즈케이크를 한 입 먹으면 피로가 싹 가시기 때문에. 고생한 오늘의 나를 위해서 무조건 보상을 줘야지. 어차피 자주 가는 길이기 때문에 새삼스럽게 경계하지 않은 것이 약간의 실수라면 실수다. 디저트 가게의 맛있는 냄새가 풍겨올 때쯤, 주변 소음을 전혀 잡아채지 못한 아린의 곁으로 누군가가 다가온다. 그 누군가는 아린의 어깨를 불현듯이 잡아챘고 반사적으로 놀라버린 아린이 빽 하고 소리를 지른다.
"꺄아압……!!"
비명이 터져 나오는 순간 아린의 입을 강하게 틀어막은 사람은 붉은 머리를 가진 여성이었다. 뭐야, 괴한? 괴한인가? 당혹한 아린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자 여성은 자신의 입 앞에 검지를 세우면서 웃는다.
"자, 쉬잇."
할 말이 있어서 그런데 잠깐 나 좀 따라올래? 괴한치고는 상냥한 목소리였으나 정체 모를 여성은 대답이 필요 없다는 것처럼 아린을 붙든 채로 걷기 시작했다. 상대가 우락부락한 깡패가 아니라는 점 때문인지 아니면 제 입을 막은 게 약물 적신 손수건이 아니라 단순한 손바닥이라는 점 때문인지 약간 마음이 놓여 버린 아린은 점점 멀어져가는 케이크 가게를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곧 폐점 시간이라 지금 가지 않으면 케이크 집 문 닫을 텐데! 오늘의 보상은 텄다, 텄어.
…
고급 차는 냄새도 다르네. 그러니까 물 부어서 먹는 찻물이 아니라 인간을 태우고 나르는 차! 다짜고짜 고급 승용차에 실려 케이크 가게와 점점 멀어지던 아린은 뒤늦게 이거 신종 납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난 뭘 믿고 이렇게 순순히 따라와 버린 거지? 할 말이라면 그냥 그 뒷골목에서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어디까지 가는지도 얘기 안 해주고! 혹시 다정하게 꼬드겨서 사람을 납치하는 범죄 수법인가 하는 불길한 상상부터, 이 정도의 고급 승용차를 타는 사람이 나한테 무슨 볼일인가. 혹시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너 우리 아들, 남편, 동생 등등과 헤어져! 같은 소리를 하기 위해서 친히 모시러 온 걸까? 근데 나는 남자친구 없는데? 같은 싸구려 막장 드라마를 닮은 상상까지 마구잡이로 솟아오른다. 그와 동시에 알 수 없는 기시감이 고개를 든다. 근데 어쩐지 저 여자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착각이라기엔 좀 익숙하고. 대체 어디서 봤지? 머리를 열심히 굴리던 도중, 승용차가 웬 으슥한 건물 앞에 멈춰 선다. 목적지인 듯한 건물을 보자마자 아린의 상상은 막장 드라마 대신 현실범죄 쪽으로 기울어진다.
"뭐해? 문 열렸어. 내려."
정체불명의 여성은 친히 아린 쪽의 문을 열어주면서 고개를 까딱인다. 어지러운 상상을 붙든 채로 차에서 내린 아린이 슬그머니 도주로를 탐색할 기회도 없이, 여성은 아린에게 턱 하니 어깨동무하면서 건물 안으로 향한다. 가까워진 옆얼굴을 보자마자 아린의 뇌리에는 특정 정보가 섬광처럼 스친다.
이 사람, 이류호 아니야?
엄청 유명한 아이돌이었던 이류호. 붉은 머리, 곱상한 얼굴, 고운 목소리. 맞는 것 같은데?! 한때 아이돌을 꿈꾸고 연습생 생활까지 거친 아린에게는 하늘보다 높은 선배님이었다. 물론 선후배 사이가 되기도 전에 아린은 재능의 부족을 뼈저리게 느끼면서 아이돌의 꿈을 포기할까 말까 고민 중이었지만. 아니 이 정도 되는 사람이 대체 왜 나를 보자고 한 거지? 더욱 혼란해진 생각을 정리하지도 못한 채, 아린은 이류호가 이끄는 대로 웬 방안에 도착했다. 방문을 열자마자 화사한 냄새가 물밀듯이 들이닥쳤고, 향의 정체는 방안을 가득 채운 꽃들이었다. 창가, 바닥, 구석 하나같이 꽃으로 장식된 방안을 보면서 아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겉멋만 든 조화가 아니라 정성을 들인 생명의 향이라는 사실이 경계심을 약간 허물었다. 예로부터 자연물은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고는 하니까.
"자자, 이러지 말고 앉아. 소파에 편하게."
류호의 제안에 아린은 삐걱거리며 소파에 앉았다. 납치 범죄에 관련한 가정은 깔끔하게 사라졌지만 새로운 의문이 몸집을 키운 채 아린의 생각을 짓누른다. 아니 그러니까, 이류호가 대체 왜 나를? 잘 나갔던 아이돌과 아이돌 지망생. 같은 업계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고 퉁치기도 부끄러운 접점이었다. 만약 열심히 춤과 노래를 연습하는 도중에 ‘자자, 하늘 같은 선배님이 왔다!’ 같은 대사와 함께 등장했다면 이토록 당황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머릿속으로 치열하게 생각하면서 주변을 슬쩍슬쩍 살피는 아린의 기세를 눈치채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못 본 채 해주는 것인지. 류호는 탕비실로 들어가서 오래 본 친구가 놀러 온 것처럼 묻는다.
"마실 건 어떤 걸로 줄까? 차도 있고, 청도 있고…… 아, 콜라랑 이온 음료도 있네."
"아, 저… 저는… 그냥 아무거나……."
"그래, 그럼 유자차로 줄게."
아린은 유자차를 좋아한다. 케이크와 곁들이면 달콤하고 향긋한 향이 아주 금상첨화…… 가 아니라! 내가 유자차를 좋아한다는 건 어떻게 알고 그걸 딱 주겠다고 말하는 거지? 혹시 이거 말로만 듣던 뒷조사…? 그런 건가?
마침 손님용으로 마련된 유자차가 거의 떨어져 가던 상황이었고, 유자청 병이 공간을 차지하게 두느니 한번 대접해서 비워버려야겠다고 생각한 류호의 의도를 알 리 없는 아린은 불길한 상상을 더욱 키워간다. 태연하고도 여유로운 표정으로 차를 타온 류호은 아린의 앞에 고급스러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한다.
"자, 마셔."
그 순간 아린의 머릿속에서는 다시 한번 시사 프로의 진행자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런데 말입니다, 손님 대접을 위해 받은 차 한 잔이 장기매매의 시발점이 될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요? 아무도 몰랐을 겁니다. 남이 내어준 차 한잔도 쉽게 얻어 마실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는 걸 말이죠. 찻잔을 받아든 아린이 여기에 수면제라든가 마약이라든가 기타 등등 불법적인 약물이 들어있을 가능성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순간, 아린의 맞은편에 앉은 류호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자, 그러니까…… 듣는 귀도 없겠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데리고 왔어. 혹시 급한 약속이 있었던 건 아니지?"
"아, 아니에요! 약속 같은 거 없었어요."
나 자신을 위한 달콤한 보상은 사회적으로 맺어진 약속이 아니니까요. 그냥 조금 예외로 두고 말죠……. 아린이 미처 뱉지 못한 말을 입안으로 바싹바싹 삼키는 동안, 류호는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를 연다.
"아, 맞다. 아직 통성명도 안 했네. 내 이름은 류호야. 이류호."
알고 있어요. 저는 아이돌 지망생이라고요. 당신의 이름을 모를 리가 없잖아요! 라고 속으로만 외친 아린은 어색하게 웃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내 이름이 아니지. 내가 너한테 하고 싶은 말은 말이야……."
아린은 그 짧은 순간 수많은 가능성을 탐색한다. 혹시 집안에 우환 있니? 너 혈액형이 어떻게 되니? 돈을 펑펑 벌 수 있는 일에 관심 없니? 머릿속에 떠오른 수많은 예제 중 정답은…….
"아이돌이 되어줄래?"
정답은 없었다. 예상한 모든 질문을 빗나가는 질문에 아린은 저도 모르게 멍청한 감탄사를 내뱉고 만다.
"……예?"
"아이돌 말이야. 예전부터 종종 지켜봐 왔는데 너 같은 원석을 그냥 내버려 두기에는…… 뭐랄까, 내 사업가의 수완이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잠깐, 이거… 설마 캐스팅?! 무려 그 이류호한테? 내가? 당황한 아린이 적당한 말을 고르기도 전에, 류호의 입에서는 아이돌 제안보다 더 큰 폭탄제안이 쏟아지고 만다.
"겸사겸사 암살자도 해보지 않겠어?"
"……네?"
잠깐만,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나? 방금 뭐라고…… 암살자? 사회가 인정하는 규범 안에서 산다면 절대 입에 담을 리 없는 단어에 정신이 팔린다. 그 때문에 아린은 자신이 아이돌 연습생으로 지내온 시절은 하루하루 나 자신의 평범함에 치를 떠는 과정의 반복이었다고 말할 기회를 놓친다.
"아이돌 겸 암살자. 어때? 돈이라면 아주 톡톡히 벌 수 있을 거야. 둘 다 돈으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직업이거든."
아린은 아주 잠깐, 수많은 꽃 사이에서 카메라가 등장하며 ‘자,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 같은 대사가 쏟아지는 상황을 상상한다. 아이돌 겸 암살자. 이게 어디서 쉽게 볼 수 있는 단어의 조합이던가. 농담이 아니라면 말이 안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으나 류호의 표정은 아주 진지하기 짝이 없었다. 아린의 머릿속에서 무슨 상상이 스치는지 꿈에도 모를 류호는 다시 쐐기를 박는다.
"당황스러운 제안이라는 건 알아. 하지만 원래 이 업계에서는 보안이 생명이거든. 다짜고짜 찾아온 것처럼 보여도 난 너를 꽤 오래 지켜봤어. 그리고 판단했지. 네가 빛 앞에 서는 것도, 어둠 속에 서는 것도 적합한 사람이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날 믿어볼래?"
내가 잘 키워줄게. 라고 말하는 류호에게 절박함 따위는 보이지 않았으나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만약 여기서 앗, 저 못하겠어요! 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암살자 이야기를 운운한 상대를 곱게 돌려보내 줄까? 이 상황에서 당신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겠어요! 라는 말을 어떻게 하냐고. 우선 무사히 집에 돌아가는 게 먼저잖아? 거절 의사를 밝혔다가 상대가 어떤 태도로 나올 줄 알고! 결국 아린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른침을 삼키면서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 할게요! 아이돌이랑…… 암살자."
끝났다. 죄송해요, 엄마 아빠. 절 낳아주시고 키워주셨는데 뭣도 모르는 계약에 휘말리는 딸로 자라서! 하지만 여기서 거절했다가 집으로 못 돌아가게 되면 어떡해요. 저 여기가 어딘지도 모른다고요! 복잡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류호는 손을 내밀면서 악수를 청한다.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할게. 내 제안을 승낙한 거 절대 후회하지 않게 해줄 테니까 기대해. 난 사람을 키우는데 일가견이 있거든."
그래요, 인제 와서 생각해보면 보스의 그 말은 허세가 아니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정말 잘 키워줬거든요. 아이돌이 가져야 할 실력, 멘탈은 물론이고 암살자로서의 기술, 평정심까지. 아이돌을 만드는 것도 힘이 드는데, 동시에 그 사람이 어둠 속에서도 완벽히 행동하게 만드는 건 갑절로 힘이 들었겠죠. 전혀 다른 정체성을 소화하게 만드는 거니까요. 그래도 뭐, 마이크와 나이프를 동시에 잡는다는 건 아무나 못 하는 일이니까.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만족하기로 했어요. 무엇보다 저, 나름대로 잘하거든요.
아, 물론 노래와 춤 말하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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