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취향의이데아
일반 글 커미션 완성본 겸 샘플
그저 하찮은 정육점 주인을 짓밟아주는 것쯤이야 별일 아니리라 생각했다. 애초 저만 특출나게 성채의 주민들을 깔보는 것도 아니었으며, 그가 일하는 동료 선임 후배는 누구 하나 다를 바 없이 구룡에 사는 주민을 길에 널브러진 토사물처럼 취급하고는 했으니. 멀쩡한 사회에서 도의상 허용되지 않는 멸시조차도 구룡성채의 주민에게는 마음껏 내뿜을 수 있다는 점
요령이 좋지 못하군. 한심해. 보통의 인간 같았더라면 여의주까지 가진 상급 요괴에게 제압당하는 순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최악을 가정하며 제 목숨을 걱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령은, 난데없는 요괴의 변덕으로 놀랄 만큼 어리숙하지 않았다. 명줄이 오가는 산전수전을 겪을 때마다 인간적인 두려움과 공포를 야금야금 깎아낸 탓이다. 공들여 조각한 차가운 이성
"정말 지긋지긋하네요. 퇴마사 씨." "…… 죄송해요." "죄송하다 해봤자 또 그럴 거 아닙니까? 그 사과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나는 잘 모르겠네요." 일부러 벼려낸 비수를 쏟아내어도 지젤은 기어이 아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죄송하다 미안하다 사죄를 읊는다. 이젠 거의 버릇처럼 흘러나오는 사과를 들으면서 아인은 속 막힌 울분을 해소하지도 못하고
"아니, 그러니까! 저 사람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니까!" "뭐야?! 말은 똑바로 해야지!! 네가 먼저 나한테 반말 찍찍 싸질렀잖아!" "그만! 아저씨들 그만 좀 싸우고 진술이나 제대로 해요!" 심야의 경찰서는 시끄럽다. 특히 술집거리가 포함된 상가 근처의 경찰서는 더더욱 그렇다. 하루가 멀다고 들어오는 신고는 대부분 여기 싸움 좀 났으니까 좀 말려봐라,
화마와 혈향이 가득한 장소 한가운데 앉아있던 작은 어린아이는 이미 숨을 거둔 시체 사이에 앉아 은은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애니는 이해하기 힘든 기이함을 마주하고 본능적인 거부감이 단전에서부터 피어올랐으나 눈앞의 인간은 아직 어린아이라는 사실 하나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도덕을 자극했던 탓에 몇 가지 의문을 접어두고 일단 아이를 끌어안아 탈출하는 쪽을
아닌 밤중에 폭발음이 터진다. 정해진 기로를 달리던 기차의 앞칸이 터져나가는 바람에 기차 전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전복되고 만다. 사람 대신 화물을 운송하던 기차는 싣고 있던 물건을 우당탕 뱉어내면서 장난감처럼 구겨진다. 기차에서 튀어나온 마력석이 달빛을 받아 은은하게 빛났으며, 소음이 멎은 이후에야 그 주변으로 사람 여럿이 몰려든다. … 한창
하루의 피로를 녹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요? 어떤 사람은 따뜻한 물에 하는 목욕, 다른 사람은 살갑게 맞아주는 반려동물 같은 걸 꼽겠지만 저한테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치즈케이크 한 조각이면 충분해요. 솔직히 말해서 치즈케이크 싫어하는 사람이 어딨어. 그런 사람은 분명 감성이 바싹바싹 메마른 사람일 거라고요. 그날도 별반 다르지 않았어요. 나는
"비키세요, 퇴마사 씨." "그럴 수는 없어요." 아인은 오늘도 자신의 앞을 막아선 채로 곧은 눈빛을 거두지 않는 지젤을 보면서 고요하게 입매를 비튼다. 엘의 힘을 이용하려 들었던 잡배들을 심판하려 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방해꾼은 평소 유약하기가 이를 데 없어 자신의 어문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고 몸을 움츠리는 주제에, 아인이 살생을 저지르려 할 때
졸려. 일어나야 하는데. 오늘 무슨 요일이지? 그러니까…… 아, 휴일인가?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은 의식 속에서 생각을 굴리던 헤르미아는 슬그머니 눈을 뜬다. 햇살이 쨍쨍 비치는 걸 보니 아침이 밝은지 한참 된 것 같지만, 헤르미아의 시선을 붙잡은 건 햇볕이 아니다. 같은 침대에 누워있는 맥베스의 얼굴을 마주친 헤르미아는 속으로 감탄한다. 언제봐도 잘
너무 조금 했나? 저녁밥으로는 양이 조금 적은 것 같은데. 빵이라도 좀 더 구워야 할까. 프라이팬 위에서 노릇노릇한 냄새를 풍기면서 익어가는 파스타는 2인분으로 나누기에는 애매하게 적었다. 애초 양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한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빵을 굽기 시작한다. 파스타와 빵, 나쁘지 않은 조합이자 언제나 성공하는 조합 아니던가. 예전에 파스타를 만들어
빅터는 지난 삶 동안 생명은 창조될 수 있느냐는 근본적이고도 도전적인 난제보다 난해한 물음은 없을 거라 판단했다.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으로부터 입안이 바싹 타오르는 질문을 듣기 전까지는. "키스해 본 적 있어요?" 빅터는 가문도 외모도 능력도 타고난 탓에 사교계에서 무릇 나쁘지 않은 반려 후보로서 거론되고는 했다. 그가 시체에 미쳤다는 소문을 견딘
에덴 선배가 쓰러졌다. 원체 병약한 사람이지만 이번에는 업무 도중에 쓰러졌다고 한다. 심장이 바닥을 뚫고 추락하는 기분에 업무도 다 때려치우고 의무실로 향했다. 최근에 일이 많이 몰렸다더니, 도와주겠냐고 물어도 한사코 괜찮다고 거절하는 모습을 그냥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팀장, 이거 정말 과로인 거 맞아? 열이 아주 펄펄 끓는데?" "프랭크, 난 괜찮
아이돌 연습생처럼 귀여운 인상, 깜찍한 분홍색 머리칼, 하지만 맵싹하기가 남 부럽지 않을 정도인 주먹. 시형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악력으로 상대의 멱살을 틀어쥐고 주먹을 내질렀다. 망설임을 모르는 행동은 상대의 입술, 코, 눈두덩이를 차례차례 곤죽으로 만든다. 말 그대로 피떡이라는 말이 어울릴 지경이 되어서야 시형은 잡고
유우마 히로의 졸업식 다음 날, 함께 떠났던 바다 여행에서 쿠모루 아사히는 이별을 고했다. "선배, 저 염치 없는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백사장 위로 부서지는 파도 소리가 생생하게 고막을 간질인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아득할 정도로 탁 트인 해변. 비수기인 탓에 사람 없는 모래밭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만이 점점이 남는다. 바다는 흡
몰아치는 돌풍이 작은 어선을 쉴 새 없이 휩쓴다. 심상치 않은 격랑을 느끼고 선실에서 나온 신스케는 이미 제멋대로 풀려 나부끼고 있는 돛을 발견한다. 바다 위에서 돛이 망가진다는 것은 곧 대양을 헤쳐나갈 원동력을 잃는다는 뜻. 신스케는 무서운 각도로 뒤흔들리는 갑판 위를 거의 기다시피 하면서 돛을 갈무리했으나, 밧줄을 단단히 틀어 매기도 전에 배의 중심
세계의 근간인 수많은 지식과 인간에게 허락된 이치를 거스르는 지혜를 통달하였음에도 일평생 사랑이란 감정을 초월할 수는 없었노라. 이 책을 나의 유일한 반려 레이퀸넷에게 바치며. 수많은 마법 저서 중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라 불리는 『프리스틴 마법학』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마법의 근간과 원리를 밝혀낸 역사적 위인이 평생을 바친 저서의
아처, 제가 살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햇빛조차 들지 않는 곳에 갇혀 나 자신이 마스터로서 무능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곱씹는 상태로 정녕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버린 패 취급은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적어도 서번트에게는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라요. 저는 그래도 서번트와 함께하는 마스터라고 인정받길 바랐나 봐요. 제가 많은 것을
선혈의 색은 눈이 시릴 정도로 붉었다. 이 세상의 휘광을 전부 흡수한 것처럼 선명한 적혈. 손안에 흩뿌려진 액체는 흔히 비유하는 검붉은 석류색이 아니라, 이게 정녕 피부 아래서 흩뿌려진 색인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눈부신 다홍빛에 가깝다. 새빨간 생명의 색이 대지 위를, 옷자락을, 손바닥과 허공을 선명하게 물들인다. 공중에 비산하는 혈흔의 냄새는 차가
"블루베리, 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인간이라면 마땅히 겪고 마는 일생의 종점에 대해서. 때로는 재앙처럼, 때로는 파도처럼, 때로는 한낮 햇살처럼 다가오는 인생의 파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묻는다. 블루베리는 줄곧 서류에 고정해두었던 시선을 올리면서 무미건조한 낯을 내비친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어 나가는 곳에서 죽음에 대
삶이란 신이라는 작자가 머금은 한 차례의 냉소에 불과한 것. 결국 흘러가는 게 생명이고 인생이라면 즐거움만 따라가는 것이 뭐가 나쁜가. 한 마디로 오오카의 신조는 쾌락과 흥미였다. 그러나, 86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뒤집힌 적 없는 기준이 에이슈라는 한 인간을 통해 지각변동을 겪는다. 오오카는 많은 인간이 몰입하는 다양한 서사시가 사랑이라는 대전제로
"형! 데이트하자!" 직진 돌격, 좋아하는 사람에게 취해야 할 일관된 태도다. 톰은 피어나는 소망은 진솔하게 표현하고 가슴을 차오르는 감정은 음성의 형태로 빚어내는 걸 좋아한다. 감정의 출발선은 사람마다 다르고, 상이한 속도와 방향을 꾸준히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진심이라는 종착점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톰은 자신의 신조를 굳건히 믿고 세바스찬에게 청혼하는
기계 모니터 안에 나열된 음표들이 각자 다른 파형을 그리면서 하나의 선율을 자아낸다. 완성하지 못한 후렴구에 수없이 음을 덧붙이고 덜어내기를 반복하던 소희는 이내 미간을 좁히면서 두 시간 동안 공들인 음정을 완전히 삭제한다. 곡이 안 빠지네. 내일까지 납품해야 하는데. 이미 수분이 말라버린 모래를 쥐어짜고 있는 듯한 고갈의 감각이 밀려든다. 창작을 업으로
뱀의 머리와 용의 꼬리. 어느 쪽이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지는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미쳤다고 뱀의 꼬리가 되겠어요? 당신들도 양심이 있으면 나한테 이런 제안은 못 하지. 저는 생각 없으니까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미야베 미유키는 별 볼 일 없는 스카우트 제의를 간단하게 묵살한다. 순간 허망한 표정을 지었던 마피아 보스의 얼굴이 붉
그의 목숨을 노리던 암살자가 더 이상 살심에 잡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라샤드는 렘샤의 단언이 일종의 마침표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저 알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렘사는 힘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라샤드를 죽이려고 할 때만큼은 늘 활력이 넘쳤는데 기점이랄 것도 없이 돌연히, 과수분 상태에 놓인 식물처럼 확연하게 기력이 떨어
그토록 일에 묻혀 살면 평범한 즐거움이며 행복 따위는 언제 느끼신답니까? 염려스러운 어투로 묻는 보좌관에게 아이메리크는 어렵지 않게 답했다. 이슈가르드의 안녕이 곧 나의 행복인데 다른 곳을 둘러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고 미처 1년이 지나기도 전, 아이메리크는 그란디 시엘이라는 모험가를 만난다. 이슈가르드와 비등한 수준의 무게를 지닌 저울추가
길흉화복은 꼬아 만든 새끼줄 같은 거라고 하던데, 성화는 자신이 대체 무엇을 누렸기에 평범했던 일상의 악의적 돌출부를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저희가 어떻게 조치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럼, 집 앞에서 내리 죽치고 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라는 건가요? 저한테 손찌검까지 한 사람인데?” 성화의
장장 사흘간 지속된 장마로 형태를 잡아놓은 석고가 미처 마르지 않을까 염려되어 환기부터 할 요량에 집안의 창을 연다. 틈입한 햇살은 희멀건 빛깔의 조각상을 비추어 눈부신 백색의 광택을 집안 곳곳에 흩뿌린다. 조각가가 주로 손을 보는 암석들은 온도며 습도에 따라 쉽사리 팽창 또는 수축하지는 않지만, 암석질이 아닌 석고나 백토는 관리하기가 비교적 까다롭다
바다 요정의 이름을 가진 조각상은 사후에 대양으로 돌아가는 대신 수증기가 되어 조각가의 곁에 남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손가락 관절을 파고든다. 활을 당길 때는 팔의 힘이 아닌 상체의 힘을 이용하여 시위의 탄성을 통제하고 하체 전반으로 몸의 균형을 잡는다. 호흡 하나라도 틀어지는 순간 현의 탄성은 엉뚱한 곳으로 치솟고 화살의 명중률은 현격히 하락
공기가 무겁게 침체한다. 코끝에 스치는 묵은 시멘트향,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 시커먼 빛깔의 옷을 입은 아이들이 행과 열을 맞춰 도열해 있다. 아이들은 마치 군인이라도 되는 양 열중쉬어 자세로 한 곳을 응시한다. 옆 사람과 잡담 하나가 즐거울 나이대의 아이들이 숨소리 하나 없이 긴 적막을 지킨다. 몇몇 아이들의 옷깃은 어딘가에서 심하게 구르기라
채링턴이 저지른 실수는 사상경찰 경력 내 최고의 오점이었다. 단지 시선을 엮었다는 점 하나가 근본적인 시작이라는 것을 감안하여 그가 처한 상황을 단지 운이 나빴다는 나태한 변명의 그늘 안에 숨겨둘 수도 있었지만, 채링턴은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유연하게 눈 감을 위인이 못 되었다. 해묵은 시대의 온상으로 가득한 가게의 물품들을 하나하나 손보다보면 문득,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