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고백 로그
고록님 커미션, 23.07.27 작업물
삶이란 신이라는 작자가 머금은 한 차례의 냉소에 불과한 것. 결국 흘러가는 게 생명이고 인생이라면 즐거움만 따라가는 것이 뭐가 나쁜가. 한 마디로 오오카의 신조는 쾌락과 흥미였다. 그러나, 860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뒤집힌 적 없는 기준이 에이슈라는 한 인간을 통해 지각변동을 겪는다. 오오카는 많은 인간이 몰입하는 다양한 서사시가 사랑이라는 대전제로 귀결되는 것을 우스워했다. 그런고로, 지금 이 순간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다.
"가주님, 축제는 즐거우셨나?"
"예, 즐겁군요. 이토록 잘 꾸며진 축제는 오랜만입니다."
"가주님은 공사다망하니까 축제에 오기 쉽지 않구나? 하긴 인간사는 원래 수없이 다양하고 복잡한 일거리가 넘쳐나는 법이지."
에이슈와 축제 한구석을 걷는 와중에도 오오카의 의식은 오로지 한 점에 집중되어있다. 어떻게 말을 해야 에이슈가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을 것인가. 쾌락이 곧 인생의 중추라 생각하는 오오카는 진솔한 이야기를 해본 적이 손에 꼽는다. 무려 860년 만에, 한량 같은 성향을 눌러둬서라도 전달해야만 하는 말이 생겼다.
"오오카 경."
"아? 나 불렀어?"
"생각이 많아 보이는군요. 어디 아픈가요?"
"나 아파 보여? 그럼 우리 가주님이 내 이마 좀 짚어줄래?"
타고난 천성이 묵직하지 못한 탓에 오오카는 장난스럽게 에이슈의 손을 잡아 제 이마 위로 올린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당혹한 에이슈의 표정을 구경하면서, 오오카는 슬그머니 손을 놓아준다. 어휴, 하여간 숙맥. 내 살다 살다 저 정도의 숙맥한테 감정이 묶일 줄은 몰랐네.
"왜, 아파 보인다며. 그럼 당연히 이마 짚어줘야 하는 거 아니야?"
"크흠, 다행히도 열은 없습니다."
"그렇게 잠깐 짚어봐서 알아?"
"……알 수 있습니다."
몸이 이끄는 대로 정신이 말하는 대로 살아왔던 오오카에게 에이슈의 성정은 티 없는 순박이다. 오오카가 발맞출 일은 없다고 생각했던 박자이자 리듬.
"그래, 뭐. 진짜로 아픈 것도 아니니까."
네 손이 닿는 건 기분 좋네. 라고 답하자 에이슈는 늘 그렇듯이 제 입가를 가리며 부끄럼을 탄다. 너는 짐작이나 하고 있을까. 네 손이든 얼굴이든 전부 가지지 못해 안달 나 있다는걸. 오오카는 자신의 마음을 전달한다는 행위 자체가 너무도 막연하여 아주 잠깐, 에이슈가 평범한 인간을 만나 반려의 연을 맺고 일생을 보내는 상황을 고려해보았다. 인간의 속도로 일상의 갈피를 넘기고, 민생고를 헤쳐나가는 발걸음에 대해서 생각한다. 오래지 않아 오오카는 속이 뒤틀리고 꼬인다. 자신 없이 행복한 에이슈라니. 오오카는 그런 것을 축복해줄 만큼 어른이 되지 못했다.
"가주님, 불꽃놀이 보러 가자! 잠시 뒤에 시작할걸."
"아, 그러고 보니 불꽃놀이를 한다고 했죠. 잊고 있었습니다."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렇지?"
저기 언덕으로 올라가자. 분명 잘 보일 거야. 조금 가파르긴 하지만 인파에 치이지 않는 게 더 중요하지. 안 그래? 오오카는 언덕을 오르는 순간에도 자신의 감정을 어떻게 정제하고 연마할지만을 생각한다. 오오카는 원체 타인의 시선과 비난을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반려 삼고 싶은 사람에게 마음을 전하는 순간까지 천둥벌거숭이처럼 굴고 싶지는 않았다. 치정극의 일부가 되는 것은 재미라도 있지, 고백이 망하는 건 안줏거리도 못 된다.
오오카는 흡사 평지를 걷는 속도로 언덕을 오르며 제 뒤를 따르는 에이슈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필요치 않은 순간에 손을 빌리는 것을 사양할 줄 아는 에이슈는 몇 번인가 혼자 걸을 수 있음을 피력했으나, 걷는 길이 갈수록 험준해지자 말없이 그의 손을 청했다. 손가락 사이로 섬세하게 느껴지는 맥동을 느끼면서 오오카는 이 손이, 평생 자신에게만 허락되었으면 좋겠다고 여긴다.
"후우……. 경사가 꽤 가파르군요."
"가주님은 운동 좀 더 해야겠다. 벌써 그렇게 힘들어하면 어떡해."
"당신의 체력이 좋은 겁니다."
"나는 늑대의 핏줄이잖아. 인간보다는 튼튼해야지. 자, 저기 하늘 보고 앉자. 곧 시작될 거야."
오오카와 에이슈는 한적한 풀밭 언덕에 나란히 마주 앉는다. 어둑한 밤하늘을 수놓는 휘광의 자수를 기다리는 동안 오오카는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꼴사나운 모양새가 되었나 생각한다. 그는 인간의 일생이 열한 번쯤 지나갈 시간을 거쳐왔음에도 이토록 말을 신중하게 고른 적이 없다. 애초 긴 수명을 타고난 생명체들은 무료한 일상을 물들이는 흥미를 과할 정도로 탐닉하다가 결국에는 정도(定道)를 걷지 못하고 엇나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오오카는 그런 어긋난 길마저도 기껍게 탐했다. 무려 860년 동안. 그렇게 긴 세월 쌓이고 굳어진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변할 일은 절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바뀔 수가 있었네……."
"바뀐다고요?"
"혼잣말이야. 요즘 고민이 생겼거든."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읊는 말투였으나 에이슈의 눈빛은 순식간에 진중해진다. 에이슈가 이야기를 들어줄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오카는 긴 고민 없이 입을 연다.
"가주님, 사람의 감정이 식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라고 생각해?"
"감정이요? 갑자기 그게 무슨…?"
"대답부터 해주라."
"음……. 어떤 감정인지에 따라 다르겠죠. 감정의 깊이와 두께는 때마다 다른 법이니까요. 수도 없이 다양한 감정을 한마디로 압축시키는 것도 불가능하거니와 그게 식을 시기를 가늠하는 것은……."
"어렵다는 얘기지?"
"그럼요."
"그래? 가주님도 그렇게 생각한다면 답 나왔네."
오오카는 풀밭 위로 놓인 에이슈의 손을 끌어다 잡았다. 에이슈는 늘 그렇듯이 조용히 당황했지만 오오카는 도리어 잡은 손을 얼굴 근처까지 올려 손바닥에 깊게 입술을 내렸다. 이건 일종의 선언이다.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청산이자 하나의 온점. 그리고 새로운 문장의 시작.
"가주님."
"예?"
"널 사랑해."
담백하게 쏟아진 답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에이슈의 표정은 조금 전에 머물러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색색의 광채가 쏟아진다. 오오카는 어둠을 가르는 불빛 아래서 에이슈의 표정이 선명하게 바뀌어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감정이 식는 시기는 가늠할 수 없다며. 나는 그 긴 시간을 기다릴 정도로 인내심이 높지도 않고 그럴 이유조차 못 찾았어. 솔직하게 말할게. 이래저래 거창하게 포장하는 건 내 성미에 안 맞거든."
처음에는 당신 돈을 보고 접근한 거 맞아. 돈, 좋잖아? 인간에게도 좋은 게 돈인데 나처럼 오래 사는 생명체에게 돈이란 경시할 수 없는 인생의 동반자야. 딱 그거 하나만 볼 수 있을 줄 알았지.
"참 이상한 일이야. 당신의 무엇이 내 마음을 울렸는지는 아직도 모르겠거든. 사랑 같은 거, 너무 낯간지럽잖아. 그래서 그냥 불장난으로만 즐기자는 게 내 생각인데……. 그 생각을 고쳐먹게 만든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 있네?"
오오카는 인생 처음으로 방향키를 놓쳤다. 감정이라는 대해에서 표류하고 헤매다가 닻이 닿은 곳은 에이슈라는 종착지다. 발을 내딛어야만 할 것 같다는 직감. 이대로 지나쳐 버린다면 영영 후회할 것만 같다는 예감. 당신이라는 사람의 모든 것을, 평생에 걸쳐 눈에 담고 손에 쥐고 품에 두고 싶다는 강렬한 소망.
"근데 이제는 달라. 당신의 모든 걸 갖고 싶어."
이렇게까지 말해도 진솔하게 들리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나는 빈말 같은 거 못하는 성격이라는 것도 조금 고려를 해줬으면 좋겠어. 나 지금 당신한테 불장난하자고 고백하는 거 아니야.
"인간에게 감정을 고백하고 반려로 맞아달라는 거, 얼마나 큰 각오인지 알아?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각오했다고."
수명이 긴 생물의 감정은 쉽게 식지 않는다. 짧은 생을 불살라 치열하게 나아가는 인간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속도의 생명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생물은 인생의 유속이 느리고 파형이 길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오오카의 일생에 아주 큰 파문을 그릴 것이다. 끝모르는 동심원은 분명 생이 짧은 인간의 목숨이 다한 이후에도 퍼져나가겠지.
"만약 당신이 죽더라도 나는 당신 곁에 남아있을 거야. 수명 긴 생물의 쉽게 식지 않는 사랑이 어떤 건지 궁금하지 않아? 그거 내가 경험시켜줄게."
그러니까 날 반려로 삼아줘. 당신의 일생 전부와 죽음 이후마저도 사랑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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