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마감 글 커미션' 완성본

[로보토미 코퍼레이션]

여령님 커미션, 23.08.01 작업물

"블루베리, 넌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어?"

인간이라면 마땅히 겪고 마는 일생의 종점에 대해서. 때로는 재앙처럼, 때로는 파도처럼, 때로는 한낮 햇살처럼 다가오는 인생의 파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 묻는다. 블루베리는 줄곧 서류에 고정해두었던 시선을 올리면서 무미건조한 낯을 내비친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어 나가는 곳에서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냐고 묻는 거야?"

"아, 내가 너무 어렴풋하게 얘기했네. 내 말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는 말이야."

보통 사람들은 인생에 불어닥치는 절망의 고저를 예상하지 못하지만, 날개에 입사한 자들에게는 이와 같은 이치가 한참 빗겨나간다. 생존본능이라는 괴악하고도 굳건한 감정에 사로잡혀 직업적 소명을 뿌리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만 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함께 대화를 나누던 동료가 환상체의 손길에, 동료의 총탄으로, 예상치 못한 여명에 의해 스러져가는 모습은 죽음에 대한 원초적 공포를 자극하는 동시에 끝없이 목숨의 끝을 회고하게 만든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

"의식적으로?"

"의미가 없잖아. 그런 생각에 매몰되면 두려움이 쌓이고 두려움은 몸을 둔하게 만들어. 환상체 앞에서 공포에 떨어봤자 하등 좋을 일이 없지. 그러니까 일부러 생각하지 않아."

"단호하네. 근데 나도 비슷한 것 같아. 처음 입사했을 때는 분명… 죽음에 대해서, 자주 생각했던 것 같은데."

동료의 시신이나, 혹은 형체조차 남지 않은 고깃덩이를 보고 토기를 참을 수 없었던 시절에는 매일 밤 유서를 고쳐 적었다. 밤새 눈물을 흘리며 절망에 허우적거리다가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외면하기를 반복했던 시절.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공포 어린 소망의 끄트머리가 무뎌질 때까지, 수없이 많은 생명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이제는 죽을 것만 같다는 공포감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정말 신기하지.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걸까. 어쩌면 내가 알레프를 상대할 정도로 강해져서 그런 걸지도. 시간이 지날수록 블루베리, 널 닮게 되는 것 같아."

"말도 안 되는 소리네. 네가 일부러 징계팀으로 올라와 시시덕거리고 있다는 것만 봐도 넌 나랑 다른 사람이야."

"에이, 그래도 비슷한 면모가 제법 있을걸?"

이곳에서 팀장직 달 정도로 오래 살아남은 사람이라는 점만 봐도 우리는 꽤 닮았지. 죽음에 대해 무뎌졌다는 사실도, 사람을 깊게 사귀지 않으려고 하는 점마저도.

"그래도 나는……. 뭐랄까, 이곳에서 죽게 된다면 적어도 다른 사람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는 않아. 그저 누군지도 모르는 고깃덩이가 되어서 치워지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해."

이를테면, 이성이 견디지 못할 정도의 공포를 마주해서 미쳐버린다거나, 내 손으로 동료들을 썰고 다닌다거나, 혹은 환상체의 뜻대로 움직이는 괴물이 된다거나 하는 상황만큼은 겪고 싶지 않아. 이곳에 입사한 뒤로 정말 끔찍한 일을 많이 겪었지만, 그래도 내가 만나온 사람들이, 버텨온 시간이, 지켜왔던 것들이.

"무의미하다는 생각은 안 들거든. 설령 내가 내일 죽더라도 말이야."

"오늘따라 말이 많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에이, 아니야. 그냥 좀 오늘따라 감성적으로 굴게 되네. 혹시 모르잖아. 이곳에서는 아무리 팀장이라도 운이 좋으면 시체 신세, 운이 나쁘면 괴물 신세니까."

"……만약 네가 괴물이 된다면 내가 제일 먼저 죽여줄게. 됐어?"

"그건 일종의 전우애 표시야? 나 조금 감동했어."

"쓸데없는 소리 말고 돌아가. 다른 팀으로 놀러 오는 것도 자제하고. 볼 장 다 본 너조차도 그런 감상적이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데,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무지렁이들은 어떻겠어. 아직 뭘 모르는 멍청이들은 금방 불안해하고 공포에 떨지. 그럼 적어도 팀장이 곁에 있어 줘야 하지 않겠어?"

"어라, 블루베리. 너 혹시 우리 팀 신입들 걱정해주는 거야?"

"선임 팀장으로서 조언하는 거야. 팀장이 없을 때 문제가 생긴다면 초기 진압에도 악영향을 끼치니까. 추출팀에서 생긴 문제가 초동에 제압되지 않는다면 그다음으로 박살 나는 곳은 징계팀이지. 네 팀에서 생기는 문제를 내가 떠안고 싶지 않아."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그만 돌아갈게. 오늘도 힘내, 블루베리."

사과는 제 얼굴을 가린 웃는 얼굴 기프트를 굳이 들어 올리면서 웃어주었다. 블루베리는 끝내 마주 손을 흔들어주지 않았다. 인류의 번영을 지배한 가장 중요한 덕목은 적응력이라 그랬던가. 사과는 회사에서 겪는 절망과 비탄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흔히 부닥치는 일상의 불행을, 자신은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오만이 팀장이라는 직책을 양분 삼아 자란다. 차라리 고깃덩이가 되더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충격을 주고 싶지 않다고 말했던 사과는, 팀원들이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죽음을 맞았다. 그것의 본질을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면.

"……오늘은 고기를 가져왔어. 먹어."

"사랑해."

"싸구려 가공육이지만 맛은 좋을 거야. 환상체에게 내어주는 먹이가 늘 고급일 필요는 없으니까."

"사랑해."

"가공육을 종류별로 가져왔으니 마음껏 먹어도 좋아. 기호도를 파악해야 하니까 먹고 싶은 것은 먹고, 아닌 것은 편식해도 돼."

"사랑해."

어떤 말을 건네도 고저 없는 목소리로 반복되는 단어를 들은 블루베리는 미약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의식적으로 차트에 떨궈두었던 시선을 올린다. 사과의 얼굴을 한 환상체가 블루베리의 눈에 든다. E.G.O도, 기프트도 없는 사과의 얼굴이 선명하게 망막에 맺힌다.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고요한 낯에 잔물결처럼 번진 미소를 마주한다.

"……하, 오늘은 애착 활동이 아니야. 얼른 먹기나 해."

내가 이래서 사람을 곁에 두지 않는 거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딴 꼴이 되어있는 거냐 묻고 싶었지만 그건 본능 작업에 적합한 언행이 아니었으므로 블루베리는 그저 눈에 띄지 않게 손가락 끝에 힘을 준다. 네 목숨이 이토록 가볍게 스러질 줄이야. 이 회사에서 사람 목숨이란 파리만도 못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팀장까지 살아남았다고 해서 절대 깨어지지 않을 가호 같은 것이 부여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 너는 적어도 무지렁이들처럼 갈려 나가지는 않겠지. 어쩌면 이 녀석은 꽤 오래 살아남을지도 모른다고 일말의 희망을 품었던 안일함을 비난한다.

블루베리는 사과가 사라진 이후에야 짐작한다. 의외로 꽤 오랜 시간을 함께 버텨온 동료를 나름 아끼고 있었다는 사실을. 더러운 정이 붙었어. 꼴에 동료라고, 널 나름대로 신뢰하고 있었구나. 형언할 수 없는 무력이 전신을 덮치고, 끝 모를 허탈이 이성을 침잠시킨다. 죽음에 대한 고찰은 일종의 선언이나 기원과도 같아서, 오히려 준비된 자일수록 오래오래 살게 된다는 미신을 믿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을 거라 여겼다. 어리석고 멍청하게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줄 사람 하나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속을 긁는다. 최근 추출팀 인사가 다 갈려 나가는 바람에 추출팀 직원 중 알레프를 상대할 직원이 없다는 것도, 네 껍데기를 뒤집어쓴 환상체가 내게 할당된 상황도 역겨웠지만, 블루베리는 늘 그렇듯이 정제된 표정으로 환상체를 마주한다. 쉽게 죽는 환경에서 오래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어깨에 붙들린 책임이 무거워진다는 것. 호흡 하나만 틀어져도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알레프가 탈출하지 않은 채 그저 직원 하나를 잡아먹은 것은 실상 다행이라고 부를법한 일상 속 비극이라 블루베리는 이젠 지칠 기력도 남지 않은 마음을 내려두고 관리자의 명령이 내려올 때마다 시간에 맞춰 사과를 보러 간다. 전 본부를 울리는 경계 사인과 함께, 탈출한 추출팀의 알레프를 제압하라는 명령이 내려오는 날까지.

E.G.O를 틀어쥔 블루베리가 추출팀에 도착했을 때, 입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참들은 전부 고깃덩이가 되어있었다. 블루베리는 사과라는 껍데기를 벗어버린 흉측한 괴이와 독대한다. 이성이 버티지 못하는 공포를 마주한 사무직들이 서로를 쏴 죽이거나 제 머리에 총알을 박아넣는 소요 속에서 블루베리는 고요하게 E.G.O를 겨눈다. 다른 팀에서 지원이 도착하기 전까지 홀로 버틸 가능성은 제로에 수렴한다는 사실을 직면한다.

사과가 죽어갈 때 어땠을까. 때에 맞지 않는 생각이 사고를 지배한다. 알레프를 탈출시키는 대신, 그의 먹이가 되는 방식으로 최후를 맞이한 동료를 생각한다. 자신과는 영 가치관이 맞지 않았던 고집과 신념을 떠올린다.

"사과, 너는 좀 바뀔 필요가 있어."

"내가? 어떻게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쓸데없이 사람 곁에 들러붙는 점을 고쳐야 한다고 생각해. 특히 절반 이상이 갈려 나가는 신입들에게 너무 과한 관심을 쏟아."

그리 말할 때마다 사과는 굳이 제 가면을 들어 보이면서 희미하게 미소짓는 낯으로 망설임 없이 답하고는 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어차피 사라지는 것들이니까 더 함께하고 싶은 거지. 무한하지 않은 것을 무한하지 못한 감정으로 대한다는 건, 제법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어차피 사라질 목숨이니까 어차피 사라질 감정으로 대한다는 말이야? 그렇게 방해가 될 감정이라면 일치감치 식어버리는 게 좋을 텐데."

"그러면 결국 우리 일상은 밋밋하게 식어 빠진 스튜 같을걸."

나는 사람들과 부딪히고 싶고, 대화를 나누고 싶고, 이름을 물어보고 싶어. 설령 언젠가는 기억나지 않는 이름이 된다고 하더라도 괜찮아. 내 기억 어딘가에 발자취가 남아있다면 다 괜찮아. 내가 처음 입사했을 때, 날 처음 본 팀장은 내 이름조차 묻지 않았어. 그리고 그날 나는 팀장이 됐어. 입사한 지 하루 만에 같은 팀의 모든 사람이 죽었거든. 그게 오래오래 마음에 남았어. 분위기가 조금 무섭고 무거웠더라도 입사 동기들의 이름 정도는 물어볼 걸 그랬다면서.

"그러니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싶어. 팀장으로서 팀원들에게 조금이나마 신경을 기울이는 게 뭐가 나빠."

"그렇게 온갖 곳에 신경을 쏟다가는 언젠가 고갈되어 버릴 텐데."

"고갈마저도 다른 사람들이 내게 남긴 흔적이지. 나는 내가 쏟았던 시간이 허황되다고 생각하지 않을래. 추억은 기억하니 나름이고, 식어버린 감정에도 의미가 있어."

영영 멀어진 사람들이 새겨준 흔적은 분명 우리의 일부분을 구성할 거야…….

사과, 네 말대로라면 네가 죽고 나서 허탈함에 젖은 내 감정마저도 의미가 있는 걸까. 블루베리는 자신의 내장이 바닥에 쏟아지는 걸 인지하면서도 사과의 생각을 놓지 못한다. 끝끝내 언젠가 바래질 흔적을 귀히 여겼던 동료의 신념을 죽기 직전에야 회고한다. 네가 결국 옳았는지 글렀는지, 나는 영영 모르게 되었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 내가 죽었을 때 조금이라도 슬퍼해 줄 사람이 있을까. 누군가에게 보내는 애도는 사치라고 말했던 냉혈한 팀장의 죽음을 곱씹을 사람이 있을까. 모르는 일이다. 저 없이도 이 회사는 돌아갈 테고 자신은 이 날개에 스쳐 가는 한낱 점일 뿐이었으니.

그래도 난 정말 최선을 다했어.

언젠가는 자신이 쌓아 올린 시간이 누군가의 일부가 되어 살아 숨 쉴 수 있기를 바라면서, 블루베리는 고요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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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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