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마감 글 커미션' 완성본

FF14 아이메리크 HL 드림

이내님 커미션, 23.07.17 작업물

그토록 일에 묻혀 살면 평범한 즐거움이며 행복 따위는 언제 느끼신답니까? 염려스러운 어투로 묻는 보좌관에게 아이메리크는 어렵지 않게 답했다. 이슈가르드의 안녕이 곧 나의 행복인데 다른 곳을 둘러볼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말하고 미처 1년이 지나기도 전, 아이메리크는 그란디 시엘이라는 모험가를 만난다. 이슈가르드와 비등한 수준의 무게를 지닌 저울추가 될 사람을.​

아이메리크가 처리하는 업무는 대부분 비슷한 인과 안에서 동어 반복된다. 개혁이라는 급물살에 부딪힌 다양한 계층들의 민생고를 들어주고 해결하는 것. 때로는 각기 다른 방향으로 얽매인 매듭을 완전히 풀어내지는 못할지라도 적정선 안에서의 협의를 이끌어 꼬인 채로 삭게 두지 않는 것. 더욱이 힘없는 평민들의 항의를 배부른 핑계로 치부하지 않는 아이메리크에게는 열린 귀와 뜨인 눈이 필수적이다. 그의 시선은 이슈가르드 구석구석을 살펴보느라 한시도 쉬지 않고 각종 서류와 항의서, 탄원서를 살핀다. 예외 없이 흘러가는 일상에서도 그의 마음을 간질이는 기쁨은 분명 존재한다. 바로 오늘처럼, 가득 쌓인 서류 한쪽에 놓인 서신 하나를 발견하는 날이라든가.

공문의 형태가 아닌 평범한 서신이 그의 선까지 올라오는 일은 드물기에 아이메리크는 어렵지 않게 편지의 주인을 짐작해낸다. 직접 뒤집어 본 봉투 한편에는 시원한 필체로 G.C라는 이니셜이 적혀있다. 아이메리크는 아직 처리할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란디의 서신을 열어보기로 한다. 같은 천칭 아래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유지하는 무게추는 이따금 사소한 계기를 통해 기울어진다. 레터나이프로 뜯어낸 편지 안쪽에는 익숙하고 눈에 익은 필체로 친애하는 이의 안부가 들어있다.

 

아이메리크, 잘 지내?

소문으로는 요즘 이슈가르드 정세가 슬슬 안정되어가고 있다고 하는데 의장직에 앉아있는 네가 느끼는 체감은 많이 다르겠지.

어쩌면 지금도 집무실에 앉아서 서류를 처리하다가 내 편지를 뜯어보지 않았을까 싶어.

 

상황을 정확하게 예견한 통찰에 아이메리크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진다. 한 번 떠오른 미소는 가실 줄을 몰라서, 최근에는 제국과 맞닿은 갈레말드를 여행하고 있으며 산이 많은 커르다스와 달리 탁 트인 설원이 고독해 보인다는 소식을 읽는 내내 아이메리크의 표정은 부드럽고 다정하다. 아이메리크는 종종 그란디의 곁에서 함께 모험을 떠나는 모습을 상상한다. 국가 의장직을 맡는 동안에는 쉽게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이지만, 그녀와 함께 커르다스의 창천이 아닌 다른 하늘 아래에 서는 순간을 그린다.

 

아무튼, 갈레말드를 둘러보다 보니 이슈가르드가 그리워졌어.

똑같은 설원인데 어떻게 이렇게 다른지.

그래서 곧 이슈가르드로 향하려고.

어쩌면 편지가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커르다스로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네.

 

아이메리크의 심장이 조용히 맥동한다. 아이메리크는 서신의 날짜와 현재의 시각을 교차하여 그란디가 방문할 날을 대략 짐작하고는 기분 좋은 설렘에 젖는다. 세상을 바람처럼 누비는 빛의 전사는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씩 서신을 작성해주고는 했는데 아이메리크는 거처가 매번 달라지는 그란디에게 답장을 보낼 수 없다는 사실을 매번 안타까워했다. 이번 서신에서는 이슈가르드에 직접 방문하겠다 말했으니, 오늘부터는 서신이 아닌 그녀 자체를 기다릴 수 있다는 사실에 기분 좋은 설렘이 한갓진 바람처럼 스친다.

 

 

편지를 받아보고 2주 후, 아이메리크는 그란디와서 조우한다. 자유로운 빛의 전사와 이슈가르드의 수장. 전혀 다른 궤적을 걷는 두 사람의 만남은 오로지 그란디의 의향에 따라 성사되기 때문에 아이메리크에게는 그녀를 만나는 순간 하나하나가 귀중하고 소중하다.

“그동안 잘 지냈나.”

“나야 잘 지냈지. 너는?”

“나도 별 탈 없이 지냈다네.”

“다행이야. 내가 보낸 편지는 받았어?”

“받아보았네. 언제나처럼 답장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지만.”

그란디는 언제나처럼 싱긋 웃으며 화답한다. 아이메리크는 붉고 푸른 눈동자가 맑게 웃음 지을 때마다 저 또한 미소 짓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녀를 볼 때마다 참 편안한 낯을 하게 되어버린다는 것도, 설풍 닮은 눈동자가 휘어진 초상은 어김없이 사랑에 빠진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도.

“답장까지 안 써줘도 돼. 안 그래도 바쁠 텐데 시간 뺏는 것 같고.”

그란디는 아이메리크의 팔꿈치를 가볍게 건드리며 싱긋 웃는다. 아이메리크는 그녀를 마주할 때마다 때때로 들판에 가득 찬 생명의 숨결을 떠올린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경탄을 불러일으키는 눈부신 아름다움을 연상한다. 아이메리크는 늘 그란디의 앞에서 흘러넘치는 감정을 보기 좋게 갈무리해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담백함을 꾸며낸다.

“이슈가르드에서는 어떻게 묵을 생각인가.”

“글쎄. 지금부터 알아봐야겠지? 묵을 곳을 정하고 오지는 않았거든.”

“괜찮다면 보렐 가에서 지내는 것은 어떤가.”

가끔 한 발짝 더 내디딜 때도 있지만. 그간 오래 보지 못했다는 향수와 그리움을 담보로 잡은 한 보의 직진.

“그대가 어떻게 지냈는지 조금 더 상세하게 듣고 싶네. 그대 집처럼 편안하게 묵었으면 하네만. 어떤가?”

“그래도 되겠어? 나야 그려면 편하긴 하지. 무전취식한다는 오해받을 일도 없고.”

농 섞인 답변이 승낙의 함의라는 것을 깨달은 아이메리크는 기꺼이 자신의 집으로 그란디를 초대한다. 이런 식으로나마 지나가는 바람을 잠시간 가둬두었으면 그것으로 족하기에.

 

 

“그래서 초원 몰볼들이 기승을 부려서 그것 좀 처리해달라고 연락이 왔지. 다 해치우고 보니까 어느새 한나절이 지나있지 뭐야?”

“몰볼이라. 이슈가르드 근처에서는 살지 않는 마물인데, 처리하기가 꽤 까다로운가?”

“나한테는 까다롭지 않지. 그래서 나선 거고.”

아이메리크는 만찬을 앞에 두고 영웅과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행복이라 지칭한다. 그에게도 많은 보람이 존재하나, 단순히 자신의 책무를 다함으로써 다가오는 반동적 성취를 제한다면 그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그란디 시엘이라는 모험가에게 일임되어있다. 무언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눈이 뜨여있는 아이메리크는 자신의 감정이 친애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는다. 그는 그란디를 온전히 독점할 만큼의 이기를 갖추지 못한 탓에 그들의 관계를 맹우라는 그늘 안에 놓아둔다.

“영웅의 책무란 참 무거운 것이군.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 그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도움을 청하는 일이 많으니까 말이야.”

“그래도 너만큼은 아닐걸. 난 어디 소속되어있지도 않고 주어진 의무도 없잖아. 부탁을 들어 보고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거절하면 그만이지. 하지만 너는 그렇게 못하잖아. 모든 국민이 자기편 들어달라고 하는 게 의장직인데.”

그란디는 총명하다. 자신이 겪어보지 않은 맥락을 뚜렷하게 짚어낼 만큼. 아이메리크는 그런 면모를 마주할 때마다 예상치 못한 돌풍을 맞은 것처럼 놀라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한다. 애정하는 맹우의 현명함을 마주할 때마다 그의 마음에 조금 다른 형태의 파문을 일어났다가 가라앉는다.

“그래도 내가 해야 하는 일이니 불평하지 않고 이 나라를 쇄신하는 데 힘쓰자고 생각할 뿐이네.”

“나도 비슷해. 너보다는 강제성이 덜하지만.”

붉음과 푸름, 열정과 냉정을 닮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져 아름다운 초승 모양을 만들어낸다. 아이메리크는 일순 식기질을 잊고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지만 그란디는 당혹하지 않는다. 이따금 선명하게 얽히는 시선이 어색할 사이는 이미 옛적에 지나왔다. 흔들림 없는 시선을 마주하고 있노라면 아이메리크는 다분히 충동적으로 입을 연다.

“편지를…….”

“편지?”

“……편지를 읽으면서, 함께 모험을 떠났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았네.”

수평선 너머로 저무는 햇빛, 생명력 가득한 파도의 향, 숨이 막힐 정도로 들이치는 초원의 동풍과 사시사철 푸르게 빛나는 녹음을 상상한다.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그란디를 상상한다. 영웅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리라고 생각하던 과거가 아득해질 정도로 선명하고 간절한 소망. 그 홀로 미래를 그려보는 것쯤은 허락되지 않을까 가늠하면서도 자신의 어깨를 짓누르는 책무라는 그림자를 미처 덜어내지 못하여 결론적으로는 하나의 공상으로 끝나고 마는 생각을, 끝없이.

“같이 모험하고 싶어?”

혼자만의 공상을 현실로 뒤바꿀 수 있는 사람이 눈앞에 있다. 아이메리크가 무어라 답을 붙이기도 전, 그란디는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인다.

“그럼 같이 가면 되지.”

“당장은 내게 주어진 책무가 너무 많지 않은가. 의장이 자리를 비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니.”

“아이메리크.”

드물게도 그의 이름을 부른 그란디의 눈동자가 아이메리크를 향한다. 꾸중을 들으려나, 그녀 또한 두렵지 않아서 세상으로 향하는 것이 아닐 텐데. 그란디의 입에서 나온 어문은 아이메리크의 예상을 크게 벗어난다.

“내가 처음 모험을 떠났을 때 이야기를 해줄까?”

“……듣고 싶네. 해주겠나?”

그란디는 식기를 내려두고 꽤 진중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처음 길을 나섰을 때 나는 모험가가 되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어. 특출나게 잘하는 것도 없었고, 모험을 떠나야만 이 숨통이 트이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어.”

그란디는 모든 게 막연하여 갈피를 잡지 못했던 과거를 떠올린다. 무엇에 흥미가 있는지, 무얼 잘할 수 있는지조차 모른 채로 택했던 궁술을 생각한다. 첫 모험의 발을 디뎠던 그란디는 꽤 섣불렀고, 서툴렀으며, 또한 무모했다. 그란디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자신을 던졌다.

“처음에는 활을 잡았지. 그나마 내가 할 수 있는 거로 생각했거든.”

활시위를 당길 때 손가락이 저리는 감각. 목표물을 포착하고 꿰뚫는 순간의 탄성. 훈련이 적재될수록 점차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던 화살의 궤도에 매료된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나를 봐. 지금의 내가 쓰는 건 총이잖아.”

이제는 거의 장식품이 되어버린 활을 제 목숨처럼 붙들고 던전을 돌고 마물을 잡던 시절은 이미 과거의 것. 첫 모험을 시작했을 때와 지금의 그란디는 심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전혀 다른 사람이다.

“미래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야. 내가 모험을 두려워했다면 영영 모험가가 되지 않았을지도 몰라.”

무작정 부딪히는 방식으로 세상을 거쳐온 그란디에게는 모든 변명이 무용하다. 앞에 놓인 길이 가시밭길인지, 촉촉한 흙밭인지, 우둘투둘한 자갈길인지 직접 밟아보지 않고서야 모른다.

“그러니까 휴가 내. 너 이 정도면 열심히 일했어. 그러니까 꼭 같이 모험하러 가자. 짧아도 좋으니까 꼭.”

확신 어린 강단에 아이메리크의 심경은 또 다른 파형을 그린다. 무겁게 짊어지고 있었던 수많은 책무와 책임이 한순간에 희박해진다. 아이메리크는 지금, 이 순간 그란디 시엘이라는 사람에게 한 번 더 매료되었음을 직감한다.

“……그래. 그대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은 아니라며 부득불 미뤄둔다면 언젠가는 후회하리라는 생각이 드는군.”

“그렇지? 그러니까 같이 가자. 짧게 라면 괜찮잖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제 이슈가르드의 정세도 예전만큼 혼란하지 않으니까.”

선뜻 나서 동행을 제안하는 행동에 아이메리크는 다시금 편안한 미소를 그린다. 이번에는 다음 서신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구나, 직감하며 아이메리크는 그렇게 창천이 아닌 하늘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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