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드오브히어로즈] 알 라샤드 HL 드림
채명님 커미션, 23.07.18 작업물
그의 목숨을 노리던 암살자가 더 이상 살심에 잡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라샤드는 렘샤의 단언이 일종의 마침표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알면서도 그저 알겠다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렘사는 힘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라샤드를 죽이려고 할 때만큼은 늘 활력이 넘쳤는데 기점이랄 것도 없이 돌연히, 과수분 상태에 놓인 식물처럼 확연하게 기력이 떨어졌다. 그녀의 태도 대부분을 이루고 있던 강단과 결단이 손가락 사이의 모래처럼 흘러가 버리기라도 한 듯이. 라샤드는 렘샤의 무기력을 이해할 수 없는 상태에서도 렘샤와 자신 사이에 놓인 관계라는 난제를 풀어내기 위해 애썼다. 이해조차 난해한 수식에 매달리는 것은 그의 타고난 천성이자 발달한 후천이었기에. 라샤드는 렘샤를 포기하지 않았으나 그의 인내는 렘샤 세헤라제에게 다른 방식으로 작용한 듯했다.
"내 행복엔 네가 없어."
렘샤의 선언을 듣자마자 라샤드는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대부분의 일상을 몰입 상태로 영위하는 라샤드는 렘샤에게 다가간다는 대전제를 제외한 외적 요인을 제때 분석하지 못했다. 라샤드는 렘샤의 직설적 일침을 들은 이후에야 렘샤는 단지 기운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해 너머에 있는 극단적 변용 상태에 이르렀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렘샤는 그를 살해한다는 목적을 포기할 만큼의 지각 변동을 겪고 있었다.
"네가 있으니 삶이 너절해."
노골적인 일갈을 들은 라샤드는 낙담 한 조각을 맛본다. 동시에 라샤드는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기 위해서 노력했던 나날을 단순한 그리움으로 치환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라샤드는 렘샤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렘샤의 미래에는 라샤드가 없다. 결코 교접할 수 없는 평행선 두 개가 라샤드의 심경을 정면으로 관통한다. 라샤드는 렘샤와 올바른 동업자, 동반자, 삶의 동행인이 되기를 바랐다. 늘 그래왔듯이 연정이라는 얄팍한 단어와는 궤가 다르다. 하지만 보편적 언어를 이용하여 자신의 심정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한 라샤드는 그저 물러서기를 택한다. 이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존중은 렘샤의 뜻을 주워섬기는 것밖에 없다.
"알겠습니다."
라샤드는 단 한 마디만을 남기고 길고 길었던 인연에 종지부를 찍는다.
...
새로운 난제에 처했다. 라샤드는 아직 길이 들지 않은 빳빳한 양피지를 펼쳐두고 생각에 빠진다. 렘샤가 어째서 그토록 극단적인 심경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에 대한 인과적 설명과 단계적 이해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하나의 수식으로 치환하는 그조차도 현재 돌파구는 오직 하나의 기로만을 비추고 있음을 안다. 어째서 렘샤는 자신을 죽이는 것을 포기했는가?
지겨울 정도로 머리를 굴려보아도 라샤드는 답을 찾지 못한다. 렘샤에게 일어난 행동 양상의 변화는 내적 심경 변화로 인한 연쇄작용에 불과한 것이었으므로, 외부 변인을 분석하려 드는 라샤드는 적당한 논리를 찾지 못한 채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이대로 두었다면 영영 남이 되어버릴 것만 같다는 직감적 영리가 빛을 발한다.
좋지 못했다. 렘샤는 여지껏 라샤드를 죽이는 것만이 세상에 단 하나 남은 목표인 것처럼 굴었다. 라샤드도 렘샤가 생을 가장 강렬하게 열망할 수 있는 목적은 그뿐이라고, 일정 부분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제 목에 들이밀어지는 수많은 칼날을 감내하는 쪽을 택했다. 이런 극적인 방식으로나마 그녀의 감정이 해소가 된다면 언젠가 대화를 나눌 수 있지 않을까. 동업자로서 함께 하는 순간마다 보이는 눈동자 속 광채를, 꿈을. 함께 열망할 수도 있지 않을까.
라샤드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질탄한다. 사람은 멈춰있는 것이 아니다. 렘샤는 그가 모르는 사이에 수많은 풍파와 파란을 겪었다. 그녀의 격동과 변화를 따라잡을 수 없으리라는 막연한 불안만이 머리를 잠식한다. 이런 게 무력감인가. 라샤드는 외부 변인조차 분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부 변인에 대한 즉각적 대응책을 내는 것은 불용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책을 강구한다. 라샤드는 애꿎은 양피지를 노려보던 것을 관두고 펜을 잡는다. 날카로운 촉 끝에 잉크를 적시고 렘샤와 마주 보았던 상황에서 미처 언어가 되지 못한 문자를 적기 위해 머리를 굴린다.
아직 할 말을 전하지 못했다는 생각만이 공고하다. 이미 그른 틀에 부어버린 회백토가 시시각각 말라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라샤드는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공문 이외의 문서를 보낸 적이 없고, 편지라는 문서가 으레 내포하는 애정과도 연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제 얼굴을 비치는 것조차 불가능한 현 상황에서는 마음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매체가 편지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한다. 라샤드는 렘샤의 이름을 적어두고 또 한참 시간을 보낸다. 시시각각 타오르는 촛불의 눈물이 봉긋이 고일 때까지 라샤드는 한 문장을 꾸려내지 못한 채 오롯이 렘샤 세헤라제를 생각한다.
라샤드는 오래간 양피지를 내려다보다가 펜촉의 잉크가 말라버렸음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쉰다. 애초에, 이 모든 것이 렘샤 세헤라제에게 닿을 수 있기는 한 건가? 도달하기가 상당히 힘든 과제이긴 하겠으나, 자신의 심경이나 감정 따위를 훌륭하게 담아낸 편지 한 장을 완성해냈다고 치자. 하지만 렘샤는 라샤드와 멀어지기를 택했고 라샤드 또한 그 사실을 인정한 이상, 완성된 편지를 전달할 방법은 추호도 없었다. 편지라는 형태로 다시 다가가길 택한 그의 결정을 렘샤가 잘게 찢어버리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으므로.
아니다. 무용하다고 생각하지 말자. 혼란한 상태에서는 글을 이용하여 상황과 심경을 정리하는 게 객관적 고찰에 도움이 되니 우선 그 목적만을 생각하자. 라샤드는 겨우내 손을 들어 종이에 펜촉을 마주 댄다. 현재 알아낸 사실, 렘샤는 살의에 취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이유는? 현재로서는 추측 불능. 그렇다면 취해야 할 대안적 행동은……. 머리가 이끄는 대로 양피지 한 장을 빼곡히 채우자 어느덧 완성된 문장들은 편지가 아닌 보고서 형태라는 사실을 깨닫고 라샤드는 종이를 잘게 구겨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 자신의 성향이 사회적인 상호작용에 대한 보편적 정서와 동떨어진 사람이라는 것이 이토록 갑갑한 경우는 없었다. 눈앞에 놓인 논제를 풀어낼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확연해진다. 그에게 있어 렘샤 세헤라제는 일단 견디고 버텨내야 하는 역경에 가까웠으므로, 그 문제에 대한 실질적 고찰과 심층적 해독을 게을리한 후폭풍이 현재의 알 라샤드를 휩쓴다.
렘샤의 행복에는 내가 없다. ‘없다.’ 실존하는 물질이 존재하지 않음을 이르거나 추상적인 개념이 실질적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이르는 말. 자신이 차지할 수 있는 건 렘샤의 과거뿐. 그녀의 현재도, 미래도 라샤드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 역으로 생각해보자. 어째서 렘샤의 단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지, 어째서 그녀와 영영 멀어질 수 없는지. 꺼내 볼 수 없는 렘샤의 마음 대신 자신의 마음으로 논점을 비틀자, 답은 우스울 만큼 간단히 나온다. 라샤드는 자신의 미래에 렘샤를 그리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그녀가 함께할 수 있으리라고 속단했다. 설령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형태일지라도 괜찮다는 오만을 부렸다. 렘샤의 마음이 어떤 식으로 썩어가고 있는지는 관심조차 주지 않은 채로. 렘샤의 결정을 단두대 위의 처형인처럼 목 빼고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한숨이 길어진다. 허공에서 내리 찍히는 단두대의 칼날은 라샤드와 렘샤를 영영 이해할 수 없는 타인으로 끊어내리라. 도피와 헤어짐, 조우와 살의로 얼룩진 희곡의 종지부가 눈앞에 있다.
네자마 샤록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혹은 렘샤와 함께 도피했더라면, 하다못해 살의로 얼룩진 렘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들여다볼 생각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쉽게 그려지지 않는 미래가 한낱 공상에 지나지 않음을 알면서도 라샤드는 렘샤와 자신이 일그러지지 않은 미래를 적극적으로 검토한다. 탐색하고, 고찰한다. 이런 형태로 굳어지지 않을 수 있는 최후의 유예를 고뇌한다. 당신과 멀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멀어지는 것 정도는 괜찮습니다만 평생 안 본다는 것까지만 아니라면 괜찮습니다. 당신의 행복을 존중하지 못하여 죄송합니다. 당신이 바라던 순간에 목숨을 내어주지 못해서 그 또한 죄송합니다. 라샤드는 끝없이 문장을 적어 내리고 찢어버리기를 반복한 후에야 이 편지를 전달할 수 없음을 체념한다. 결코 닿지 않을 그리움을 문자라는 형태로 빚어내어 밤을 새운다. 그날 밤, 라샤드는 스무 장의 양피지를 찢어버렸고 마지막 남은 편지에는 단 두 줄만을 적어넣을 수 있었다.
렘샤, 아무래도 제 행복에는 당신이 있는 모양입니다.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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