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9.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왈츠

논컾/[어둠]크롬, [풀]바네사

로오히 2차 by 로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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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선 피아노 반주를 더 살려서 가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연습실의 창을 뚫고 비치는 햇살이 피아노 악보 위를 스쳐 지나간다.

 

크롬과 바네사는 신년 음악회를 위해 피아노와 바이올린 협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바네사 찾아와 바이올린 연주회를 하려고 하는데 반주할 사람이 없다면서 찾아온 것이었다.

 

‘제가 피아노를 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크롬의 질문에 바네사는 빙긋 웃었다.

 

‘제가 이래 봬도 비밀 작전을 수행하는 건 특기랍니다.’

 

바네사의 대답에 크롬은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군의 감시를 피해서 반란군을 이끌었던 수장이니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아마도 카를로스에게 자신이 피아노를 친다는 사실을 들었겠거니 하고 마는 것이었다.

 

‘사실 뒷조사한 건 아닌데!’

 

바네사는 그런 크롬의 반응에 오히려 당황한 눈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밤에 그의 피아노 소리를 들었노라 털어놓았다. 어느 날 밤, 잠이 안 와서 산책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피아노 소리가 들리더란 것이었다. 그래서 피아노 소리를 따라 가보니 커튼도 치고 굳게 닫힌 창문과 문 틈으로 피아노 소리가 새어 나왔단다.

 

그 이야기까지 들은 크롬은 그 새하얀 얼굴이 빨갛게 변해 어쩔 줄 몰랐다.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문도 닫고 라샤드 경에게 부탁해서 만든 소음 차단 장치도 썼는데 그게 새어 나가다니. 그런 당황한 표정에 바네사는 그를 안심시켰다.

 

‘괜찮아요! 다들 모르고 있었어요.’

 

바네사가 함참 안심시켰지만, 크롬은 몇 번이나 사죄를 하고 나서 바네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렇게 해서라도 그간 자신이 일으킨 소동에 대한 사죄를 해야 한다는 식이었다. 바네사는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니 그대로 일을 진행 시켰다.

 

 

“제 파트는 여기서 소리를 키우고, 이때 크롬 경이 들어 오는 거에요.”

“네, 알겠습니다.”

 

크롬은 묵묵히 바네사의 지시를 악보에 적었다. 바네사도 열심히 끄적이다가 잠시 펜을 멈췄다. 아까부터 크롬은 자신의 설명을 받아 적을 뿐, 어떤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크롬 경, 제 제안이 부담스러운 건 아니죠?”

“아닙니다.”

 

크롬은 바네사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오히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바네사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짓다가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크롬 경, 그럼 크롬 경은 이 연주에서 원하는 거 없어요?”

“제가요?”

“네. 사실 전 단지 피아노 반주만 필요해서 크롬 경에게 말을 건 게 아니에요.”

 

바네사의 말에 크롬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까지나 바네사가 원하는 연출을 위해 협조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대로 따랐던 것 뿐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이렇게 말하니 크롬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저 그 날 밤에 들었던 피아노 소리가 좋았거든요.”

 

그날 밤, 어쩐지 외롭고 고단하고 슬픈 음악 소리. 갈 곳 없는 슬픔을 실로 자아내어 음악으로 엮어낸 소리는 바네사의 마음을 울렸다. 언뜻 들으면 액자 속에 피어난 수선화처럼 고결하고, 초롱꽃마냥 충실한 아름다운 선율이었지만 그 뒤에는 공허함과 슬픔이 있었다.

 

바네사는 그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떼어낸 액자 뒤에 드러난 허망함의 벽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그려낸 것은 어떤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몰라도, 바네사는 그것이 자신이 한 때 느꼈던 충격과 같다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크롬은 그게 플로렌스의 가곡이라고 이야기했다.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플로렌스를 기리며 오페라 가수들이 부르던 노래라며. 그런 노래를 왜 그렇게 슬픔을 참아내며 쳤는지 바네사는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전 단지 크롬 경의 피아노와 함께 연주하고 싶어요.”

 

바네사의 의지가 담긴 눈빛에 크롬은 그저 입술을 깨물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우리 한 번 맞춰봐요. 그리고 크롬 경이 생각하기에 어떤 게 더 나은지도 이야기 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크롬은 겨우 숨을 들이키면서 대답했다.

두 사람은 메모하던 것을 멈추고 연주를 시작했다. 바네사는 여태까지의 메모는 없던 것처럼, 악보의 지시는 눈에 안 보이는 것처럼 바이올린을 자유롭게 연주했다. 바네사의 연주에 크롬은 몇 번 흠칫 하면서 어깨를 움찔했지만 금방 그녀의 의도를 이해했다.

 

‘다른 사람의 지시는 필요 없어요. 원하는 대로 해봐요.’

 

그녀의 바이올린이 그렇게 말했다. 크롬은 잠시 멈췄지만 바이올린은 계속 노래했다. 크롬은 갈 길을 잃은 아이처럼 바네사를 보다가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의 정석적이었던 연주가 점점 섬세하고 충실한 선율을 타고 춤추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이 화답하듯 같이 발을 맞추기 시작한다.

 

서로 엇갈려 저만의 춤을 추던 피아노와 바이올린은 점점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호흡을 맞추고, 발을 엇갈리며, 손을 맞잡고, 곡의 마지막에 도달할 때쯤엔 왈츠가 막 완성되었다.

 

“크롬 경!”

 

바이올린의 활을 내린 바네사가 눈을 반짝거리면서 소리쳤다.

 

“이거에요!”

 

크롬은 한참 피아노 건반만 보고 있었다. 한 순간이었지만 흑백만 있었던 건반이 온갖 색으로 튀는 것을 보았다. 크롬은 천천히 바네사를 보았다. 그의 금색 눈에 별빛이 튀었다가 사라졌다.

 

“우리 다시 편곡을 해 볼까요?”

“좋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펜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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