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 스트레이독스] 테루코 HL 드림
햄스터님 커미션, 23.07.24 작업본
뱀의 머리와 용의 꼬리. 어느 쪽이 더 중하다고 생각하는지는 가치관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미쳤다고 뱀의 꼬리가 되겠어요? 당신들도 양심이 있으면 나한테 이런 제안은 못 하지. 저는 생각 없으니까 다른 사람 알아보세요.
미야베 미유키는 별 볼 일 없는 스카우트 제의를 간단하게 묵살한다. 순간 허망한 표정을 지었던 마피아 보스의 얼굴이 붉그락푸르락 번져가는 꼴을 보았음에도 미유키는 가뿐한 걸음으로 일어나 자리를 나선다. 쓸데없는 제안이 들어오는 걸 보아하니 내가 그동안 이름 좀 날리긴 한 모양이구나 실감하면서.
이 바닥에서 주어지는 스카우트 제의는 하나의 족쇄에 불과하다. 미유키는 뒷심 더러운 마피아 조직과 손발 맞춰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며, 보스와 부하라는 상하관계에 얽매이는 것도 취향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들어온 스카우트 제안은 조직 이름을 들어도 ‘그게 뭔데?’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의 신생이었고 아직 조직 내 인사 기틀도 잡히지 않은 어중이떠중이들이었다. 한 마디로 불릴 판돈이 개미만큼도 없는 개판이라는 뜻이다. 내 손에 들린 패가 없는데 뭐 하러 도박판에 몸을 던지나? 고작해야 도박쟁이에 불과한 자신에게 간부직까지 제안한 꼴을 보니 조직 내부 사정이 어떤지 알만하다는 감상만이 우스갯거리로 남아, 미유키는 자신이 겪은 우스꽝스러운 제안을 두고두고 씹을 안줏거리 삼았다.
이번에 초대형 마피아 조직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거든. 그쪽에서 날 데려가고 싶다고 어찌나 용을 쓰던지. 일단 생각해보겠다고 말하긴 했는데, 그냥 거절하는 것도 아까우니까 간 좀 보려고.
제안을 거절했다는 결말은 싱겁기 짝이 없으니 미유키는 부러 허세를 부리면서 이야기에 양념을 친다. 미유키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패착은, 좁은 판일수록 소문은 자극을 찾아 끝도 없이 부풀기 마련이고 허황을 먹고 자란 항설은 결국 터질 곳을 찾지 못해 엉뚱한 곳에서 소란을 피우고 말아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무용담이 입에서 입을 타고 날며 ‘웬 미치광이 도박광이 초대형 마피아 소속 간부가 되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유언비어로 떠돌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사냥감을 탐색하는 엽견에게 찍혀 제압당한 다음이었다.
...
"오늘따라 왜 이렇게 패가 안 붙을까요."
"패가 안 붙기는! 너 지금 계속 따고만 있는데?"
"이런 푼돈 가져봤자 뭐해요. 판이 커질수록 도박 칠 맛이 나는 거예요."
이전 판에서 고작해야 트리플 패를 이용해 판돈을 쓸어 간 미유키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같은 테이블의 플레이어들은 트리플에 판돈을 내어준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고작해야 이런 푼돈 운운하는 미유키를 험악하게 노려보았지만, 도박 짬을 한참 먹은 미유키는 눈썹 하나 끄떡하지 않았다. 흥미를 잃은 플레이어들이 슬슬 돈을 뺄 기미를 감지한 미유키가 일부러 신경을 긁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리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러면 뭐, 어떻게 하게? 그만두게? 천하의 미야베 미유키가 여기서 꺾을 생각은 아니지?"
"패가 안 붙는 걸 보니 슬슬 꺾어야 할 때가 된 건가 싶기도."
손안에 들어온 패가 투 페어임을 확인한 미유키가 판돈을 올리기도 전에, 카지노 구석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울린다.
"꼼짝 마!!"
내리 카지노에서 생활하며 온갖 불한당들이 하루 멀다 하고 피워대는 소란에 익숙해진 미유키는 소란이 일어난 방향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오늘도 조용히 지나가질 않네요. 하루라도 바람 잘 날이 없, 커헉!!"
꼼짝 말라는 소리가 자신에게 던져진 윽박이라고 생각지 않은 미유키는 카지노를 습격한 엽견에게 붙들려 무력하게 제압당할 수밖에 없었다. 팔이 꺾인 채로 바닥에 고꾸라진 미유키는 같은 테이블에서 노름하던 사람들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꼴을 보면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미유키를 제압한 붉은 머리의 엽견은 어투에서부터 당당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읊는다.
"미야베 미유키! 드디어 찾았구나!"
"나요? 왜! 나 뭐?! 나 밑장빼기 안 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자신의 도박 스킬에 대한 오해라고 짐작한 미유키는 황급하게 변명을 덧붙였으나, 엽견의 입에서 나온 귀책 사유는 뜻밖의 것이었다.
"마피아 간부가 되어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도박광이 네놈이렸다!!"
"예? 그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아니 개패 따먹는 소리야?"
자신이 떠벌렸던 정보가 어떻게 증식하고 부풀었는지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미유키는 상대의 말을 수긍하지 못하고 일견에 반박한다. 제 팔을 꺾은 상대방의 아귀힘이 더욱 강해지고 있음을 깨달은 미유키는 다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아, 잠시! 잠시만요! 변명할 시간을! 일단 진정 좀 해보세요! 무슨 말을 듣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 오해입니다, 오해!!"
"오해는 무슨 오해! 네놈 입으로 마피아 영입을 받아 그 제의를 승낙했다는 소리가 저 먼 지역까지 아주 낭랑하게 퍼져있거늘!"
그제야 미유키는 제 입으로 허세를 부렸던 사실이 어떻게 와전되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엽견에게 황급히 상황을 설명했다.
"아닙니다! 그거 다 거짓말이에요! 그냥 허세 좀 부렸던 겁니다. 허세!! 그러니까 일단 내 말 좀 들어보세요!!"
"……허세라고? 어디 한번, 자세히 설명해보거라."
"일단 팔 좀 놔주시면 안 될까요? 저 진짜 팔에 쥐가 날 것 같아서."
"흐음, 좋다. 놓아주마. 하지만 혹시라도 도망갈 기미가 보인다면 서서히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네놈의 목숨을 거둬갈 것이야!"
미유키를 제압한 엽견은 도망치는 그를 붙잡아 족칠 자신이 있었던 것인지, 단단히 붙들었던 속박을 놓고 미유키와 얼굴을 마주 보았다. 미유키는 그제야 붉은 머리칼이 굽이치는 물처럼 흘러내린 여성의 낯을 바라본다. 머리칼을 똑 닮은 색채의 눈동자가 형형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것을 보면서, 미유키는 지금 내뱉는 말이 제 삶의 마지막 변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에 휩싸인 채로 해명을 시작한다.
"엽견 나리. 제가 사람 죽이는 거 본 적 있습니까. 왜 소문이 그렇게 와전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냥 일개 마피아 조직 보스에게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을 뿐입니다. 심지어 저는 그 제안을 거절했다고요! 도박광이라는 사실은 변명할 생각 없지만 저는 밑장 빼고 사기 치는 꾼이 아닙니다."
그렇죠? 제가 이곳에서 사기 치거나 사람을 죽인 적 있습니까? 미유키의 간절함이 카지노에서 벌어진 소란을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맞닿은 것인지, 미유키의 편력을 익히 알고 있는 딜러와 손님들이 웅성거리며 말을 거든다.
"사람을 죽인 적은 없습니다. 애초 우리 카지노에서는 그런 흉악범죄자를 받지 않거든요."
"늘 돈을 따가기는 해도 밑장빼기 같은 건 안 하지. 의심스러워서 CCTV를 돌려본 적도 있었다고."
"마피아 제안도 받은 적 있었어? 난 처음 듣는 소식인데."
"자네는 소문도 안 듣고 사나? 그런 소문 들린 지가 언제인데 그 사실을 몰라."
웅성거리는 수선함이 전체적으로 미유키의 입장을 대변해주자 엽견은 한 차례 의아한 낯을 보이면서 제 옆에 서 있던 동료에게 작은 목소리로 묻는다.
"타치하라, 이게 어떻게 된 게냐. 분명 내게는 극악무도한 범죄자라고 하지 않았더냐."
"그,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영문을 잘……."
엽견 소속인 두 사람은 서로 무어라 의견을 나누며 의아함을 종식하기 위해 의견과 맥락을 공유하는 듯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당장 미유키를 잡아서 제압할 마땅한 명분을 찾지 못했다.
"죄, 죄송합니다. 부장님! 제가 너무 섣부르게 정보를 전달한 것 같아요."
"아니, 되었다.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하고……. 네놈, 미야베 미유키라고 했나?"
"예? 갑자기 저요?"
붉은 머리의 여성은 자신의 행동이 실례로 작용했음을 똑똑히 인지한 상태에서도 당당하게 손가락을 치뜨며 미유키에게 경고를 날린다.
"떠돌던 소문이 거짓말이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라, 멍청한 여우!"
"여, 여우?!"
"다음에도 비슷한 건으로 헛걸음하게 만든다면 네놈의 사지를 찢어 상어 밥으로 만들어주마!!"
"아니, 그러니까 제가 뭘 했다고…!"
"시끄럽다! 가자, 타치하라!"
타치하라라고 불린 사람과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붉은 머리의 여성은 기어이 사과 한마디 없이 자리를 떠났다. 상황이 종료되자 구경거리를 찾아 몰려들었던 군중 또한 은근슬쩍 해산되었다. 파도처럼 들이닥친 소란에 순식간에 휩쓸린 미유키는 붙들렸던 팔을 주무르며 엉망이 된 테이블을 돌아보았고, 같은 판에서 노름하던 사람들이 자신의 판돈을 들고 홀랑 튀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허망해졌다. 당차고도 기이한 붉은 머리 여성의 윽박, 그게 엽견 테루코와의 첫 만남이었다.
...
순간적 만남이 하나의 관계가 되기 위해서는 단순한 일시적 충돌을 넘어 화학적 유기변화에 필요한 매개가 존재해야 한다. 엽견 테루코와의 만남은 명백히 전자에 수렴하는 경험이었고, 미유키는 자신을 도박판에 내던져 판돈을 쓸어 담는 동안 허공에서 물결치던 붉은 머리를 서서히 잊었다. 정확히, 그가 방문했던 천공 카지노의 정문이 박살 나기 전까지는.
"네 이놈!! 너 아주 잘 만났구나."
"예? 저요?"
미유키는 여느 때처럼 유명한 카지노를 찾아서 도박을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카지노에서 소란이 일어나든 말든 손님으로서 즐거움을 누릴 자격이 있었으나, 평소보다 큰 소음의 정도와 엽견 운운하는 가드들의 흥분 섞인 밀집을 발견하고는 제 팔을 꺾어 잡았던 여성의 붉은 눈동자를 떠올리고 말았던 탓에 소란의 중심가로 걸음을 옮기는 우를 범했다. 예상했다고 해야 할까, 소요의 한가운데에는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엽견 두 사람이 있었다.
"미야베 미유키, 네 놈!! 우리를 버리고 도망갈 셈이냐! 아주 의리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이로구나!"
붉은 머리의 엽견은 미유키를 발견하자마자 냅다 두 사람 사이 모종의 관계를 유추하게 만드는 발언을 청산유수로 쏟았고, 그 순간 엽견을 잡으려고 벼르던 가드들의 시선이 미유키에게로 집중되었다.
"네놈도 엽견이냐?! 이 자식들이 우리 카지노를 털려고 아주 작정하고 왔구만?!"
"아니, 나는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저놈도 잡아라! 엽견이라면 한 놈도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해!"
"내 말 좀 들으라고요!!"
진짜 엽견을 둘러싼 인원 중 절반 정도가 미유키를 에워싸기 시작한다. 사람들 사이로 얼핏 비치는 붉은 머리칼이 기회를 잡은 것처럼 재빠르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면서 미유키는 실로 오랜만에 기가 찬다는 감각을 이해한다.
"아, 정말. 섣불리 나서고 싶지 않았는데."
"저놈을 잡아! 족쳐버려!"
"이렇게 된 거 어쩔 수 없지."
미유키는 조용히 손가락을 그러모은다. 보통 카드를 섞는 데 사용하는 손가락이 허공으로 튕기는 순간, 비산하는 피 냄새를. 엽견 두 사람은 영영 모를 것이었다.
...
"저 진짜 할 말 많습니다."
"도와줘서 고마웠다네!"
"……다짜고짜 그렇게 선수를 치면 항의하기도 애매해지는데요."
뒤쫓아오는 가드들을 해치우거나 따돌리는 방식으로 다시 평화를 되찾은 세 사람은 카지노 바깥에서 조우한다. 붉은 머리의 여성은 미유키를 보자마자 감사를 표했고, 미유키는 웃는 낯에 침 뱉는 꼴이 되고 싶지 않아 속에서 끓어오르던 항의의 말을 꾹 눌러 참길 택한다.
"대체 무슨 일이었길래 카지노 가드들이 다 당신 둘을 붙잡지 못해 안달 난 건가요?"
"사정이 좀 있었네. 자세한 사정을 일반인에게 함부로 떠벌릴 수 없으니 대충 그렇게 이해하도록."
"그 일반인에게 추적을 떠넘긴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아무튼, 자네가 아니었으면 아주 큰 일 날 뻔했다네! 무사히 나온 것을 보아하니 내 판단은 틀리지 않았던 게로군."
"어휴……. 이렇게 말씀하시니 뭐라 항의하기도 좀 그렇고. 고마우면 그냥, 밥이라도 한 끼 사시죠?"
붉은 머리의 엽견은 미유키의 발언을 듣자마자 날카로운 눈매를 찡그리며 답한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엽견 나리들이 도망치는 걸 돕느라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어버렸어요. 저 진짜 힘들었는데 밥 한 끼 못 사주세요? 그 정도는 괜찮잖아요."
하관으로 보이는 엽견은 붉은 머리의 여성을 염려스럽게 바라보였지만, 부장님이라 불린 여성은 가소롭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면서 손을 든다.
"타치하라, 먼저 들어가라."
"하지만 부장님…!"
"걱정하지 마라. 저놈이 설령 딴 맘을 품더라도 이 몸이 쉽게 질 성싶으냐?"
붉은 머리의 엽견은 대화 대상이 눈앞에 있다는 것을 추호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발언을 내뱉으면서 타치하라를 먼저 퇴근시켰다. 정말이지 당당함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사람이로구먼. 미유키는 입 밖으로 냈다간 따끔하게 면박을 받을 듯한 생각을 속으로 삼키면서 근처에 자리한 단골 식당으로 향했다.
...
"식사는 좀 어떠세요? 입맛에 맞으시나요?"
"썩 나쁘지는 않다."
"그 말은 좋다는 뜻이죠?"
"이 몸이 말하면 말하는 대로 이해할 것이지 참 쓸데없는 사족이 많은 놈이로구나."
"원래 식사할 때는 적당한 수준의 담소가 필요한 법이죠."
자신의 이름을 테루코라 밝힌 붉은 머리의 엽견은 식사하는 내내 미유키를 대놓고 관찰했다. 하지만 애초 탐색과 감지를 내포한 시선을 받아내는데 이골이 난 미유키는 노골적인 시선에 불쾌감을 표하는 대신 자신의 일부를 기꺼이 관찰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미유키의 용인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테루코는 식기로 향하는 수저를 멈추지 않았으며 식사 내내 불쾌하지 않을 수준의 대화를 시도하는 미유키를 무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유키를 관찰하는 붉은 눈동자는 혹여 존재할지 모르는 일말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미유키가 정말 극악무도한 범죄자이며 능청과 화술로 갈무리한 속내를 일시에 내보인다든가, 적당히 외진 곳에 있는 식당 내부의 인원이 전부 한통속이라든가 하는 진부한 삼류 누아르 영화적 상황을 고려하며 식사 중이라는 사실이 미유키의 눈에도 훤하게 보였다. 미유키는 자신을 향한 오해가 완전히 종식되진 않았음을 인지했음에도 별말 없이 테루코의 의지를 존중한다. 엽견이란 애초에 수많은 범죄자를 만나오면서 그들의 목숨을 거둬가고 단죄하는 것이 업인 사람들 아니던가. 사람을 판단하는 촉과 육감이란 곤두세우기는 쉬워도 도로 눕히기는 어렵다. 언젠가는 저 경계가 허물어지는 날도 있으려나 가늠하던 미유키는 테루코의 식기가 거의 다 비워졌음을 깨닫고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다.
"저 신뢰 못 하시는 모양이네요."
"당연하지. 네놈이 어떤 놈일 줄 알고 섣불리 신뢰하느냐."
"그래도 아까 그 가드들, 저한테 떠넘긴 걸 보면 제가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셨나 봐요?"
물음표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그 본질은 느낌표에 가깝다는 것을 미유키도 알고 테루코도 알았다. 테루코는 답 없이 입가를 끌어올려 웃었고, 그 의미는 수긍보다는 우스움을 향해 수렴하고 있었으나 미유키는 잘 빼어진 입가의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래, 그런 쪽으로 생각하거라."
테루코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신의 책무를 다했다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난다. 미유키는 때를 놓치지 않고 딱 한 보의 능청을 곁들인다.
"이 식사는 저번에 오해받은 값으로 달아둘게요. 오늘 엽견의 일을 떠맡긴 값은 나중에 받겠습니다."
뻔뻔하게 훗날을 도모하는 행동에 테루코는 답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것처럼 등 돌려 자리를 떠난다. 실제로 테루코와 다시 식사할 수 있으리란 기약 따위는 추호도 없었으나, 미유키는 오늘의 값을 결코 잊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패가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 판의 궤도와 흐름을 파악할 것. 다른 사람의 손에서 내려오는 패를 이용해 상대가 짜놓은 판을 통찰할 것. 미유키는 관계라는 판 안에서 자신이 내려놓아야 할 패와 숨겨야 할 패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미유키는 조바심을 내려두고 호기심을 손안에 쥔다. 들이치는 시류에 섣불리 발이 젖지 않도록, 그러나 가랑비에 옷 젖는 것 모를 만큼 확실하고 잔잔하게. 미유키는 자신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테루코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택했다.
미유키는 하루가 멀다고 손에 카드 패를 쥐는 사람이었으며 본디 카지노란 장소는 인간의 욕망과 추악함이 고여 썩어가는 곳이다. 테루코는 길을 잘못 든 범죄자를 탐색하는 후각이 발달한 엽견이며 삶의 막장을 본 생명을 거둬들이는 사람이다. 닿을 곳 없는 평행선의 기울기가 미묘하게 한 점을 향해 수렴하며 기약 없던 만남이 차곡차곡 수를 더해간다. 함께 먹은 끼니의 수가 한 손으로 꼽기 어려워졌을 때쯤, 미유키는 테루코의 시선 속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경계가 차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두 사람이 같은 밥상에서 식사한 지 딱 일곱 번째 되던 날, 미유키는 카지노 앞을 지나치며 다소 충동적으로 테루코에게 묻는다.
"도박은 안 하시죠? 같이 카드 패를 돌리면 제법 재밌을 것 같은데."
"……이 몸을 뭐로 보는 것이냐. 나도 노름은 조금 할 줄 안다."
그날 테루코는 일말의 변덕을 부린다. 이는 테루코의 감각이 기본적으로 경계의 그늘 안에서 성장했기 때문인데, 모든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반동적 직감과 더불어 자신에게 해가 되지 않을 사람을 솎아내는 촉 또한 발달한 덕분이다. 테루코는 더 이상 미유키의 속내를 가늠하며 싸구려 삼류 영화를 그리지 않는다.
"도박도 즐기시는 줄은 몰랐네요. 그러면 잠깐만 패 좀 돌리다 갈까요?"
즐긴다고 말할 정도의 흥미를 갖진 않았지만 테루코는 기꺼이 카지노로 입성하여 패를 잡고 판을 돌린다. 미유키는 딱 한 판의 노름을 통해 그녀의 안목이 판을 통찰하는 방향으로는 발달하지 않았음을 인지한다.
"음… 도박패를 안 잡은 지 꽤 오래되셨나 봅니다."
"시끄럽다! 이번 판에는 네놈의 패가 과하게 좋았기 때문이니 다음 판에서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야!"
테루코의 확신이 무색하게도 그로부터 5판 내리 미유키가 완승한다. 테루코는 애초 얄팍하던 흥미를 완전히 연소한 채로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만 가보겠다. 직접 즐겨보니 이런 것에 빠져 사는 놈들이 이상하다는 생각만 드는구나."
"제가 초심자에게 너무 과했나요. 조금 져드릴 수도 있습니다만 제 신조가 노름판 앞에서는 장난치지 말자! 라서."
"진심이냐?"
"농담이에요."
"재미없구나."
테루코는 싱거운 농담에 콧바람 들린 미소를 지었으나 미유키는 일순 지나가는 표정을 통해 자신을 향한 경계가 완전히 산화되었음을 깨닫는다.
"바래다 드릴게요. 제가 원래 여성분을 숨 쉬듯이 데려다주는 제비는 아니지만 오늘은 제가 특별 대우 해드리는 겁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공치사를 늘어놓는구나."
테루코의 입에서는 됐으니 들어가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수락의 의미를 내포한 핀잔을 가볍게 들어넘긴 미유키는 카지노의 문을 잡아 열어주면서 미리 적어두었던 종이쪽지 하나를 건넨다.
"나중에 또 즐기고 싶으시다면 연락하세요. 그때는 적당히 져드리겠습니다."
"대단한 자신감이로구나. 다음에는 내가 이길지도 모르는 일 아니더냐."
"초심자에게 승리를 빼앗길 만큼 만만한 놈은 아닙니다, 제가."
"그러니까 나는 초심자가 아니래도!"
날카롭게 대답한 테루코는 한 마디 기별 없이 카지노를 나선다. 미유키는 입매에 떠올린 웃음을 거두지 않으면서 테루코의 뒷모습을 향해 손을 흔든다. 테루코는 카지노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을 위치가 되어서야 자신의 주머니에 찔러넣어진 종이쪽지를 꺼낸다. 시원하게 휘갈긴 글씨로 적혀있는 이름 몇 자와 연락처. 테루코는 그것을 그대로 바닥에 떨궈버리려고 했으나, 처참한 패배로 마무리된 도박판의 말미가 견인하는 일종의 호승심에 휘말려 쪽지를 도로 주머니 안에 집어넣는다. 이것 또한 한갓진 변덕의 일부일 뿐이라고 여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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