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에드거 앨런 포

Secret Garden b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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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제야 서랍에서 오랫동안 보관되었던 짙은 검정색의 새틴으로 포장된 상자를 조심스레 연다. 새틴에 먼지가 쌓이긴 했지만 크게 긁힌 자국이나 흠집이 없는 걸 보아 제법 소중히 간직한 물건일 게 분명하다.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을 만년필이 드디어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정성스레 금박으로 새겨진 이름Edgar Allan Poe이 불빛을 받아 반짝인다. 분명 언젠가 수상 기념으로 주문 제작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만년필일 것이다.

그는 가볍게 손을 놀리며 원고지를 채워간다. 깔끔한 글씨로 흐트러짐 없이 한 줄을 채우기도 하고, 때로는 만년필이 종이에서 떨어지지 않은 채 몇 줄을 연이어 쓰기도 했다. 원고지가 몇 페이지를 넘기도록 줄바꿈이 하나 없던 부분이 있는가 하면, 서너 문장을 묶어 한 문단이라 칭하는 때도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작가라는 건 많은 직업과 닮아 있다.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원고지라는 캔버스를 단어라는 물감으로 채우는 화가이며,

범인을 잡듯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는 경찰이며,

겨우 한 사람의 상상력으로 이루어진 원석을 다듬어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조각가이며,

때로는 원고지를 재단하고 그 원단을 이어 옷을 만드는 재봉사였다가,

소설이라는 교과서로 독자라는 학생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교사가 되었고,

그 끝에는 책이라는 세계를 창조하고 마음껏 변형할 수 있는 신이기도 하다.

신.

그렇다. 이능력을 통해,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단순히 비유적이고 과장된 표현이 아닌, 온전히 책 속의 세계를 현실로 구현해낼 수 있는 건 오로지 포이다. 에드거 앨런 포만이 그 자신의 세계를 비로소 이 세계에 현신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능력은 인간과 불가분하여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든 사람에게 흔적을 남기고, 앞으로 나아갈 길에 이정표를 세우거나 장애물이 되기도 하며, 많은 시간을 거쳐서야 이윽고 인간은 이능력과 공존할 수 있다.

이능력에는 옳은 사용이 존재할 수 없다. 모두에게 옳더라도 단 한 사람일지라도 그 내용에 반대한다면, 그걸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이 납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옳은 사용인가?

그는 올곧은 사람이며,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관철한다. 이능력은 그 과정에서의 도구에 불과하다. 친구를 도와 사람을 구했고, 그 친구를 위협으로부터 막았으며, 작전을 성공시켰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살려냈다. 그게 그의 정의일 것이다.

해가 지고도 한참이 지나 달이 휘영청 밝은 때, 바쁘게 놀리던 손을 멈추고 원고지의 한 구석에 이름을 휘갈긴다. 에드거 앨런 포, 원고지 위에 지어진 거대하고도 미시적인 세계의 신, 그리고 이 세계에선 작가이자 이능력자. 그리고 무엇보다, 한 라쿤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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