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마감 글 커미션' 완성본

[데뷔 못 하면 죽는 병 걸림] 김래빈 HL 드림

린더님 커미션, 23.07.24 작업물

기계 모니터 안에 나열된 음표들이 각자 다른 파형을 그리면서 하나의 선율을 자아낸다. 완성하지 못한 후렴구에 수없이 음을 덧붙이고 덜어내기를 반복하던 소희는 이내 미간을 좁히면서 두 시간 동안 공들인 음정을 완전히 삭제한다. 곡이 안 빠지네. 내일까지 납품해야 하는데. 이미 수분이 말라버린 모래를 쥐어짜고 있는 듯한 고갈의 감각이 밀려든다. 창작을 업으로 삼는다면 필연적으로 되풀이되는 저점이 하필이면 오늘이라니. 소희가 눈가를 꾹꾹 짓누르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래빈이 다가온다.

"뭐가 잘 안 풀려?"

"응. 안 풀리네. 내일까지 보내야 하는 음원인데."

음표를 배열하여 음원이란 이름의 점묘화를 완성하는 과정과 고뇌를 전부 알고 있는 래빈은 빈 모니터를 잠시간 들여다보다가 조심스레 말을 덧붙인다.

"내가 잠깐 손 좀 봐도 될까?"

각자의 작품에는 일절 손을 대지 않는 방식으로 서로의 작곡 과정을 존중한다. 같은 기로를 걷는 두 명의 천재가 묵인한 선을 잠시 넘어도 되겠느냐는 부탁에 소희는 조금 의아해하고 만다. 래빈은 소희가 작곡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잠시간의 기분 전환을 제시하는 편이었으니 오늘 그가 수용한 도움의 손길은 조금 낯설다. 하지만 소희는 열등감이라는 얄팍한 더께를 차곡차곡 쌓아가던 어린 날보다 성장해있었으므로 기꺼이 래빈에게 자리를 비켜준다. 래빈은 자리에 앉자마자 어렵지 않게 몇 개의 음을 조합하고 조율하여 하나의 선율을 창조해 낸다.

"이렇게 만들어보면 어때? 아까 들려줬던 도입부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래빈의 손을 거친 후렴구를 듣자마자 소희는 감탄하고 말았다. 운율이 진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사용되는 음 또한 도입부랑 궁합이 잘 맞는다. 음을 더하거나 뺄 필요도 없이 그대로 갖다 써도 될 정도로 완성된 운율에 소희는 재차 실감한다. 천재라는 말은 널 위해 있는 거구나. 역시 너는 정말 대단해.

"고마워. 너무 괜찮아서 그대로 써도 될 정도야."

예전의 소희라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작품을 손봐도 된다는 허락 자체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그 대상이 래빈이라면 더더욱. 소희의 손을 거친 작품은 단단한 자존심이자 자신감이었으며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팽창한 자아였기 때문에. 널 만난 이후로 나는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걸 깨달았지만 말이야. 소희가 안면 위로 거의 태가 나지 않는 씁쓸한 미소를 짓자 래빈은 부드럽게 입매를 끌어올리며 고백한다.

"이거, 네가 한 달 전쯤에 나한테 들려줬던 선율이야."

"……뭐?"

"기억 안 나는구나. 내 귀에는 너무 좋은 후렴구였는데 너는 마음에 안 든다면서 폐기해버리더라고.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음을 기억해두고 있었어."

소희는 그제야 자신의 작품에 손을 대지 않던 래빈이 스스로 돕기를 자처한 이유를 이해한다.

"지금 나 보고 천재라고 생각했지?"

"……응."

"이 운율을 처음 들었을 때 역시 너는 대단하다고 생각했어. 지금 네가 날 보고 굉장하다고 생각한 만큼."

소희는 속절없는 다정에 저도 모르게 웃음 섞인 호흡을 내뱉고 만다. 아무래도 이번 작품은 네 다정만큼 오래 기억에 남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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