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커뮤 로그
부링클님 커미션, 23.07.14 작업물
길흉화복은 꼬아 만든 새끼줄 같은 거라고 하던데, 성화는 자신이 대체 무엇을 누렸기에 평범했던 일상의 악의적 돌출부를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 생각한다.
‘그러니까,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면 저희가 어떻게 조치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럼, 집 앞에서 내리 죽치고 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보라는 건가요? 저한테 손찌검까지 한 사람인데?”
성화의 목소리가 분노로 들뜰 기미가 보이자, 수화기 속 경찰은 황급히 말을 가르면서 수습에 나선다.
‘아유, 그런 뜻이 아닙니다. 저희가 출동하더라도 격리 조치밖에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안내해 드리는 거고…….’
“그러니까 그 격리 조치를 해달라고 말씀드리는 거라고요. 이게 대체 며칠째인지도 모르겠어요.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저 사람 때문에…!”
‘아, 예예. 알겠습니다. 우선 출동할 테니 진정하시고. 집 안에서 나오지 마세요. 아시겠죠?’
끝까지 뜨뜻미지근한 경찰의 응대가 끊어진 이후, 성화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침대 위로 내동댕이친다. 주인의 히스테릭한 반응을 똑똑히 지켜본 루디는 차박차박 걸어와 염려스럽다는 듯이 낑낑거리며 성화의 다리를 핥는다.
“그래, 루디. 괜찮아. 언니는 괜찮아.”
반려견을 괜히 불안하게 만들어봤자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성화는 겨우내 입매를 끌어 웃으면서 루디의 얼굴을 훑어준다. 실제로 괜찮다는 감상으로부터 튀어나온 발화라기보다는 이렇게라도 되뇌며 마음의 평안을 찾고자 하는 자가 세뇌의 가까운 주억거림. 루디의 머리를 훑어주면서 숨을 고르던 도중, 적막한 집안에 초인종 소리가 가득 울린다.
“언니, 저예요. 희연이.”
성화는 못내 가라앉았던 기분이 아주 조금 떠오르는 것을 인지하면서 현관문을 연다. 희연은 문을 열자마자 특유의 예의 바른 미소를 얼굴 가득 머금으며 웃는다.
“언니, 혹시 마라탕 좋아해요? 언니만 괜찮으면 마라탕 시키려고 하는데. 같이 먹을래요?”
희연에게서 부드럽게 제안하는 목소리가 기분 좋게 굴러 떨어진다. 눅눅한 집안을 한순간에 화사함으로 채우는 기운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는다.
“그럼 나야 좋지. 어서 들어 와.”
“고마워요, 언니.”
희연은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정신 급하지 않을 정도의 템포로 성화에게 이것저것 되묻는다.
“좋아하는 재료 따로 있어요? 저는 가리는 게 별로 없으니까 언니가 원하는 걸로 시켜요. 이왕이면 끌리는 거 먹는 게 좋잖아요.”
“음……. 나는 청경채, 아 그리고 숙주도. 마라탕에 들어간 채소 먹는 거 좋아하거든.”
전 남자친구와 한 차례 일을 치른 이후, 희연은 집 밖으로 거동하지 않게 된 성화를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저녁마다 찾아와 식사를 함께하기도 하고, 불안해하는 성화와 담소를 나눠주기도 하는 사소한 배려를 귀찮아하지 않았다. 실상 같은 맨션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다른 사람이 겪은 사소한 폭력이란 뉴스 구석에 지나가는 짤막한 꼭지 헤드라인이나 다를 바 없어서, 그냥 무시하거나 모른 척해도 그 사람이 어느 날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드라마틱한 상황의 변화가 아닌 이상에야 일말의 양심도 책임도 묻지 못한다.
하지만 희연은 성화가 마치 자기 혈육이나 친족이라도 되는 듯이 한결같이 성화를 챙겼다. 성화의 입에서 나온 사정을 미주알고주알 떠들고 다니지도 않았으며, 서러움에 눈물짓는 성화를 고요히 기다려 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손찌검당한 앞뒤 맥락을 알게 된 희연은 그런 사람인 줄 몰랐냐는 무심한 비수 대신 ‘언니, 너무 고생했어요. 무서웠겠다.’라며 성화를 격려해 주었다. 그 상냥한 에너지를 피부로 느끼다 보면 경찰조차 손 벗고 나서주지 않는 꼬인 관계를 제 손으로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는 무모한 용기마저 샘솟는 것이었다.
“자, 됐다. 채소 가득 넣은 마라탕으로 시켰어요. 40분 뒤 도착이라고 나오네.”
“일부러 신경 써서 챙겨줘서 고마워. 사실 식사 생각이 없었는데 마라탕 이야기 들으니까 먹고 싶네.”
“이웃끼리 서로 돕고 살아야죠. 안 그래요?”
희연은 개의치 말라는 것처럼 손을 내젓는다. 성화는 희연이 방문하기 전까지만 해도 경찰의 속 터지는 대응을 듣고 배알이 뒤틀려서 식사를 거를 생각까지 했음에도, 희연이 언급한 마라탕을 생각하니 절로 군침이 돌았다.
고작해야 이웃집에 살고 있을 뿐이면서 굳이 시간을 들여 한 사람의 돌연적 불운을 보듬어 준다는 선택이 얼마나 사려 깊은 배려인지 알기에 성화는 종종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감동과 감사를 마음 한편에 품을 수밖에 없었다.
희연이 바깥에서 들어왔다는 것은 분명 맨션 바깥에서 죽치고 있을 전 남자친구를 발견했다는 뜻일 텐데, 희연은 일부러 성화의 불안을 돋우고 싶지 않은 것인지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채 그저 성화가 일상의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섬세하게 뻗어 나온 배려는 사람을 이토록 안정감 있게 만들어 주는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라탕이 도착하고 같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이어가던 도중, 다시금 초인종 소리가 집안을 울린다. 순간적으로 자신에게 닥친 가장 큰 불운을 떠올리고 만 성화의 표정이 희미하게 굳자 희연이 먼저 선수를 친다.
“누구지? 언니, 제가 나가볼까요?”
“어… 미안,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
“그럼요. 언니는 집 안쪽에 숨어있어요.”
희연이 태연하게 현관으로 나가는 동안 성화는 품 안에 루디를 안고 조용히 숨을 죽였다. 혹시라도 진짜 전 남자친구가 집 위치까지 깨달은 것이라면 당장 경찰을 부르리라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손에 꽈악 쥐었으나 열린 현관에서 들려오는 것은 아예 다른 목소리였다.
“아, 뭐야. 놀랐잖아요.”
“어라, 누나는 어디 갔어?”
태일의 목소리였다. 희연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돕는 데 적극적인 사람. 전 남자친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성화가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어, 누나! 안녕! 둘이 같이 있었네? 나 들어가도 돼? 내가 누나를 위해서 간식 사왔지롱.”
태일은 환하게 웃으면서 아이스크림 봉지를 달랑거린다. 디저트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던 두 사람은 기꺼이 태일을 집안으로 들였고, 실례한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들어온 태일은 마라탕 냄새를 맡고 군침을 삼킨다.
“저녁 먹고 있었구나. 냄새를 보니 마라탕?”
“응. 희연이가 같이 먹자고 해서 식사 중이었어. 넌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아니, 집 앞에 경찰 있길래 혹시나 해서. 뭐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경찰?”
그제야 성화는 희연이 오기 전, 자신이 경찰에게 보냈던 연락을 기억해 낸다. 빈도 잦은 신고가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하더니 그래도 세금 떼어먹는 족속들이라고 일은 하러 나왔나 보다. 하지만 성화의 신고 사실을 알 리 없는 희연은 의아하다는 것처럼 묻는다.
“경찰이 왜 왔는데요?”
“왜긴 왜야. 그 미친놈 잡으려고 왔지.”
“아, 언니 전 남자친구?”
희연은 지긋지긋하다는 것처럼 고개를 내저으며 혀를 내두른다. 혀끝에서 굴러떨어지는 말투는 성화의 불안을 주욱 긁어 뗄 정도로 시원시원하다.
“경찰은 그 사람 구속 안 하고 뭐 하나 몰라요. 이 정도로 들러붙고 집까지 찾아오면 완전 스토킹 아냐.”
“그러니까 말이야. 계속 훈방 조치하는 것도 웃겨. 저 정도로 들러붙으면 구속이든 뭐든 해서 누나 좀 안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지. 아, 자자. 일단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얘기해요. 원래 속 터지는 얘기할 때는 시원한 걸 먹어줘야지.”
“나도 먹어도 되나요?”
“그럼 당연하지! 두고두고 먹으라고 좀 넉넉하게 사왔어.”
밝게 조잘대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바깥에서 경찰과 씨름하고 있는 전 남자친구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것만 같다. 만약 집안에 혼자만 있는 상황에서 바깥에서 소란이 일어났다면 성화의 기분과 정신은 오갈 곳 없이 널뛰었을 것이다. 불안해하지 말라고 찾아와 준 거구나. 태일의 생색 없는 배려에 성화는 희미하게 미소 짓는다.
삶을 살다가 정말 진부하기 짝이 없는 악의라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일은 서럽다. 서러운 게 당연하다. 아픔은 사라지지 않고 상처는 낫기 위해 존재하니까. 성화는 종종 뾰족하게 벼려진 불안에 이따금 손끝을 찔릴지라도 이유 없는 선의를 내미는 사람에게 손을 뻗는 일은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내일은 낙엽 가득한 가을 하늘을 오랜만에 올려다보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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