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마감 글 커미션' 완성본

[페이트] 아처 길가메쉬 HL 드림

유리님 커미션, 23.08.05 작업물

아처, 제가 살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햇빛조차 들지 않는 곳에 갇혀 나 자신이 마스터로서 무능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곱씹는 상태로 정녕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버린 패 취급은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요. 적어도 서번트에게는 인정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라요. 저는 그래도 서번트와 함께하는 마스터라고 인정받길 바랐나 봐요. 제가 많은 것을 원했나요. 저는 그 정도도 누리면 안 되는 사람인가요? 아처는 저보다 현명하니까 분명 뜻이 있었겠죠. 아무 생각 없이 이런 일을 저지르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아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뿐더러, 인제 와서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네요. 당신이 어떤 의도로 행동했든 간에 그건 저에게 독이었어요. 제 마음이 넝마가 되는 것 따위 아처는 신경조차 쓰지 않겠지만요. 갇혀 있는 동안 수도 없이 생각했어요. 이래서야 내 목숨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영령을 소환했다는 그 얄팍한 자격을 걷어내면 제게 대체 무엇이 남는지. 결론은 언제나 곁에 있었더라고요. 다만 제가 외면하고 있었을 뿐. 아처, 당신이 어째서 그런 표정을 짓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말 한마디에 돌아설 만큼 허술한 각오로 이 자리에 서지 않았어요. 이건 아처를 향한 제 소소한 복수예요. 다음에 만날 마스터에게는 부디, 이러지 마세요.

 

 

조심스레 돌아가던 문고리는 어느 순간 덜컥이며 멈춘다.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 문고리를 힘주어 잡아당기거나 몸으로 한껏 밀어보던 류리는 이내 지친 듯이 한숨을 내쉰다. 역시나 잠겨있구나. 출구는 여기 하나뿐인데, 대체 어떻게 잠가놨길래 꿈쩍도 안 해. 류리는 오늘도 깊은 무력감을 맛본다. 이 씁쓸한 감정은 어째서 곱씹을 때마다 새롭게 쓰디쓴지. 스스로 소환한 서번트에게 감금된 지 얼마나 지났지? 몇 주? 몇 달? 시계도 달력도 하다못해 햇볕을 쐴 수 있는 창마저도 없는 방안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측정할 수가 없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제 특별히 알고 싶지도 않다.

푹신한 침대와 서적 몇 개가 꽂혀있는 책장, 소파가 전부인 단출한 방안을 천천히 둘러본다. 몸 하나 누이는 건 어렵지 않은 방이나 몇 주 몇 달을 묵기에는 지독히도 좁아터진 방. 류리는 언제나처럼 침대 위에 엎어져 깊은 한숨을 내쉰다. 오늘은 아처가 언제 돌아오려나. 알 수 없는 일이다. 성배전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지? 그 또한 알 수 없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꼬였을까. 류리는 이미 몇 번이고 곱씹은 소환의 날을 회상한다.

성배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소환의식의 날은 달빛이 매우 창백하고 고왔다. 시와 때를 맞추어 마법진을 그리고 주문을 외우며 마력을 불어넣었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마법진을 그리는 순간마저도 류리는 자신이 성배전쟁에서 우승할 수 있으리란 일말의 희망도 없었다. 류리는 자신의 재능이 출중하지 않다는 것을 똑똑히 자각하고 있었고, 그 사실을 가문에서도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가문에서는 류리에게 기대와 믿음을 주기는커녕 압박만을 넣었고, 누구의 축언도 듣지 못한 채로 류리는 홀로 소환의식을 거행했다. 류리는 가문이 자신에게 부여한 운명에 순응하여 성배전쟁의 마스터가 되는 길을 택했다. 기대 없이 읊조린 주문 끝에 나타난 영령은, 다름 아닌 길가메쉬였다.

그 순간의 당혹을 대체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주어진 성유물도, 타고난 재능도, 가진 마력도. 결단코 길가메쉬를 소환할 깜냥이 되지 못했다. 어째서 이토록 강력한 영령이 소환된 건지 의아해할 새도 없이, 길가메쉬는 마스터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곧장 땅을 박차고 달려들어 류리를 기절시켰다. 어찌나 순식간이었던지. 어떻게 기절했는지조차도 기억이 아득하다. 명치를 맞은 것 같기도 하고, 목덜미를 가격당한 것 같기도 하고. 정신을 차려보니 류리는 최소한의 세간살이가 갖춰진 좁은 방 안에 갇혀있었다. 그게 전부다. 길가메쉬는 일언반구도 없이 다짜고짜 류리를 기절시켜 감금했다. 도저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행인지 비극인지 길가메쉬는 주기적으로 류리를 보러 왔다. 올 때마다 류리의 의사와 질문을 깡그리 무시하고 잡종이라 호칭하며 대놓고 하대하다가 홀연히 떠나버리는 걸 보러 온다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다. 류리는 감금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시점에는 길가메쉬에게 참 많은 것을 물었다. 갑자기 왜 이러세요? 저를 왜 가두신 거예요? 대체 언제 놓아주실 건데요? 성배전쟁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죠? 수많은 질문의 결론은 오직 하나다. 시끄러운 잡종이군. 네놈이 알 필요 없으니 닥치도록. 류리가 길가메시의 고압적 태도에 지쳐 모든 걸 포기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류리는 성배전쟁의 진척도, 감금의 이유도, 길가메쉬의 생각도 알 수 없는 채로 그저 유리관 속 인형처럼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도 없는 감금에 지친 류리는 기어이 영주를 사용해보기도 했다. 첫 번째 명령은 이곳에서 내보내 달라. 두 번째 명령은 이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설명해라. 영주까지 내버린 것이 무색하게도 류리의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첫 번째 명령을 받은 길가메쉬는 류리를 방 안에서 내보내 주기는 했다. 대략 10분 정도. 지형지물을 전혀 파악할 수 없는 곳으로 떨어진 류리가 당혹하는 동안, 길가메쉬는 처음 만난 날 그러했듯이 류리를 기절시키고 다시 방안에 감금해두었다. 두 번째 명령의 결과는 그보다 조금 더 절망적이었는데, 질문을 들은 길가메쉬는 간단하게 일축했다. 몰라서 묻나? 네놈이 방해되기 때문이다.

류리는 성배전쟁이 제 인생을 극적으로 바꾸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무능을 체감하게 되리라고도 생각하지 못했다. 제 주제에 맞지 않은 서번트를 소환한 것은 사실이었으나 그게 어찌 제 잘못이던가. 저조차도 어째서 길가메쉬를 소환할 수 있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없는데. 류리는 그 어떤 해답조차 찾지 못한 상태로 하루하루 말라갔다. 자신은 방해되는 존재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류리는 기어이 가장 최악의 결론을 내리고 만다.

온전히 고립된 이후에야 깨달았어. 이 땅에서 내 목숨은 그저 서번트를 불러낼 수단 하나에 지나지 않아. 그것도 더 훌륭한 대체품이 가득한,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선택할 이유가 없는 불량품.

생의 모든 자극이 차단된 인간은 시시각각 추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서번트 길가메쉬는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군."

"……물어봐도 대답 안 해줄 거잖아요?"

"잘 알고 있군."

저렇게 말할 거라면 뭐하러 말을 거는지. 류리는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 소파에 기대앉은 자신의 서번트를 힘없이 흘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신경전도 귀찮고 무용하다는 것처럼 류리는 조용히 침대 위로 올라가 몸을 모로 눕힌다. 이유도 상황도 묻는 것을 그만두었고, 자신이 성배전쟁에서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도 접었다. 그저 변할 것 없는 지겨운 일상이 어서 종결되기만을 바랄 뿐.

나는 불량품이자 방해물이야. 그 생각에 매몰된 류리는 끝도 없는 우울감에 사로잡힌다. 자신의 목숨에 남는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함몰된다. 과한 비탄은 사람을 갉아먹는다. 그러나 지고한 자아를 가진 길가메쉬는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저 앞으로 남은 성배전쟁에서 완전무결한 승리를 얻기 위해 판 위의 수를 읽는 데 집중한다. 그렇게 서번트와 마스터라는 관계는 이해할 수 없는 골만 깊게 파인다. 이미 되돌리기엔 늦어버린 균열을 메울 수단조차 묘연해진 채로.

"……아처."

"또 뭐냐."

"저를 찾는 사람은 없나요?"

미약하게 잠긴 목소리로 묻는 말을, 길가메쉬는 단칼에 매도한다.

"네놈을 대체 누가 찾는다는 말이냐."

"……가족이나, 그런 사람들 말이에요."

가문에서 귀염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성배전쟁에 패로 내놓은 마스터가 감쪽같이 사라졌는데, 정말 그 누구도 찾지 않는단 말인가. 류리는 실낱같이 희박해진 희망을 찾는다. 하지만 길가메쉬의 입에서 내려오는 것은 잔인한 통보다.

"없다. 너는 성배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박혀있기만 하면 돼."

일상을 영위하게 만들던 마지막 실낱이 어둠 속으로 추락한다. 인간의 삶을 유지하는 가장 큰 톱니바퀴는 다름 아닌 희망이라는 사실을, 그 순간의 길가메쉬는 미처 몰랐다. 류리는 무언가를 묻는 것도, 바라는 것도, 심지어는 이 목숨을 유지하는 것의 의미조차도 찾지 못한 채로 눈을 감았다. 잠든 이후,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앞으로 두 번의 기회가 남았다. 이번에 실패한다면 다음 기회가 마지막. 하지만 다음 기회까지 넘어가게 두지 않으리라.

길가메쉬는 도심의 야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위치에 서서 남은 서번트의 전력을 생각한다. 마스터의 명령 없이도 길가메쉬는 강했다. 그는 마스터 없이 차근차근 승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마지막 기회가 남아있지만, 길가메쉬는 이번 성배전쟁에서 배수의 진을 쳤다. 마스터와 단단히 엇갈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번 기회를 마지막 삼는다.

"……류리."

본인 앞에서는 절대 불러줄 수 없는 이름을 조용히 읊조린다. 길가메쉬는 류리를 마주할 때마다 반사적으로 마스터라는 호칭이 나오려는 것을 억눌러야 했다. 의식적으로 잡종이라 불러야만 한다. 호칭은 가장 효과적이고 즉각적인 하대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어긋나는 길을 택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류리가 길가메쉬를 볼 때마다 한숨을 참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길가메쉬의 심기도 썩 편치는 않았으나, 여러 차례 거듭한 실패를 원천 차단하기 위해서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다.

이번으로 몇 번째 회귀였던가. 다섯… 아니, 여섯 번째다. 여섯 번째 시간선이라는 것은 류리가 그의 앞에서 총 다섯 번 죽음을 맞이했다는 소리다. 최강의 서번트인 이 몸이 고작해야 인간 하나의 목숨을 지키지 못해서 같은 시간을 여섯 번이나 반복했다. 이번에도 실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섯 번째 죽음을 지켜보게 된다면 최강의 서번트라는 명명이 운다.

무슨 운명의 노릇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마스터인 류리가 죽는 순간 세계가 회귀한다. 마스터의 목숨을 지켜낸 채로 성배전쟁을 무사히 마쳐야만 회귀를 막을 수 있다. 무한정 회귀할 수 있었더라면 차라리 긴 시간을 빌미 삼아 하나의 유희 거리로 삼았을 터인데, 주어진 기회는 총 일곱 번. 기회 내에 끝을 보지 못한다면 마스터는 영원한 죽음을 맞는다. 세 번째 회귀에 도달할 때까지는 이 몸의 마스터인 주제에 약해빠진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직접 베어 죽였다. 네 번째에는 다른 서번트의 손아귀에서, 다섯 번째에는…….

마스터라는 호칭도 좋은데요. 류리라고 불러주는 게 더 좋아요.

다섯 번째에 이르러서야, 손대면 죽을 것처럼 나약한 인간은 길가메쉬의 마스터이자 류리가 되었다. 그 시간선에서 끝을 봤어야 했는데. 모든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빼곡하다. 무엇보다 강렬했던 지난 회귀에서 길가메쉬는 비로소 서번트와 마스터라는 관계를 용인하였으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고작해야 마스터라는 책임 하나 때문에 이용당해 죽었다. 물러빠진 실수를 두 번 반복할 수는 없었다. 이젠 기회가 많이 남지 않았으니 수단 방법을 가릴 겨를이 없다. 회귀를 끝내고 마스터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강경책을 택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두어 버린다면 적어도 남의 손에 죽어갈 일은 없을 것이다. 남의 책략에 이용당하는 꼴도, 품 안에서 차갑게 식어가는 꼴도 마주할 일 없으리라.

길가메쉬는 이미 여러 번의 실패를 맛보았다. 그의 자존심은 한계치까지 시험당했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으리라고, 회귀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 신경이 팔린 길가메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돌보지 못했다. 인간의 내면이 곪아가기 시작했다면 외면을 지키는 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사실을, 언제나 머리 위에서 군림하던 왕좌의 주인은 알 수 없었다.

 

 

류리는 실감한다. 사람이 죽음을 결심하는 계기는 생각보다 간단하다고. 무력, 허탈, 허망, 비탄. 이 목숨을 끊을 이유는 수백 가지에 달하는데 생을 이어갈 이유는 하나를 찾기 어렵다. 이미 말라버린 생의 의지는 비쩍 갈라진다. 류리는 이미 갈라져 버린 대지에 물을 대고 씨앗을 뿌릴 의지 전체를 소실한다. 생이라는 땅을 비옥하게 지켜낼 의향, 삶의 목적이라는 씨앗을 틔울 인내. 모든 것을 포기한다. 결심이 굳어지던 날, 류리는 마지막 남은 영주를 사용한다.

도시의 야경이 보고 싶어요.

길가메쉬는 마지막 남은 서번트와 싸움을 끝내려는 찰나에 영주의 발현을 인지한다. 영주를 사용했다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사소한 명령에 마지막 강제력을 쓰다니. 어리석기 짝이 없군. 하지만 이번 명령만 행한다면 더 이상 방해받지 않을 테니. 오직 그 사실만을 보고 길가메쉬는 칼을 거둔다. 한순간에 류리의 곁으로 돌아온 길가메쉬는 기꺼이 류리를 도심의 빌딩 위로 데려가 주었다. 지상이 아득할 정도의 높이. 손에 닿을 듯한 창공. 거세게 부는 바람과 도심을 가득 수놓은 휘광들. 실로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쐰 류리는 희미하게 웃는다.

"……아름답네요."

"이토록 하찮은 명령 때문에 이 몸의 단죄를 방해하다니. 도통 도움이 되지 않는 잡종이로구나."

"제가 아처를 방해했나요."

"몰라서 묻는 건가."

"모르니까 묻죠. 저는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조금 가시가 박힌 말투에 길가메쉬는 미간을 좁힌다. 하지만 류리는 그에게 행할 수 있는 강제권마저 사라졌음에도, 고요한 낯을 잃지 않았다.

"승리에 가까워지셨나요?"

"당연히. 너처럼 덜떨어진 잡종의 도움 따윈 애초에 필요 없었다."

"그렇군요."

나 없이도 승리에 가까워졌구나. 나는 정말 발목을 잡는 마스터일 뿐이구나. 이미 충분한 비탄을 맛보았음에도 주어진 사실이 더욱 날카롭게 가슴을 후벼판다.

"아처,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지겹군. 이 몸에게는 네놈의 의문에 답할 의무가 없다."

"그럼 듣기만 하세요."

이 질문 이후에는 아처에게 어떤 것도 묻지 않을 테니까.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목소리는 드높은 돌풍에 가려진다. 류리는 길가메쉬에게 내보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패를 등 뒤에 숨기고, 되묻는다.

"아처, 당신은……."

제가, 살고 싶을 거라고 생각하셨나요?

 

 

영웅왕은 그렇게 여섯 번째 패배를 맛본다. 다른 누구의 손도 아닌 마스터의 의지 때문에. 어긋난 길을 걷더라도 꾸역꾸역 지키고자 했던 목숨이 가장 허무한 방식으로 결말을 맞는다. 그리하여 세계는 회귀한다. 오로지 모든 것을 기억하는 길가메쉬만을 내버려 둔 채.

 

 

창백한 달빛이 내리쬐는 밤. 시와 때를 맞춘 시기. 자신이 버린 패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의지를 꺾지 않은 마법사는 인생을 건 도박판에 몸을 던진다. 류리는 늘 그렇듯이, 소환된 영령이 길가메쉬라는 사실을 보고 놀란다.

길가메쉬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내려다본다. 기어이 자신에게 여섯 번째 패배를 맛보게 만든 모진 인간을 바라본다. 이 손으로 세 번, 다른 벌레의 손으로 두 번. 마스터의 손으로 한 번. 총 여섯 번 스러진 목숨이 다시 살아나 제 앞에서 살아 숨 쉬는 꼴을 응시한다. 이제 두 번 다시 이 순간으로 돌아올 수 없다. 이 몸에게 남은 마지막 기회이자 보루.

"……약해빠진 인간."

고작해야 감금 정도로 자신을 내던졌단 말이냐. 조금만, 정말 조금의 시간만 있었더라면 이 몸은 네게 승리를 안겨주었을 것이며 명예를 주었을 것이다. 대체 무엇이, 네가 스스로 목을 베도록 하였나.

길가메쉬는 속에서 휘몰아치는 수많은 말을 미처 건네지 못한다. 그와 달리 모든 것이 처음인 류리는 약해빠졌다는 단어에 꽂힌다. 자신의 재능이 출중하지 않다는 것은 알지만 소환된 서번트에게 이런 소리를 들을 정도라니.

"제, 제가 약해빠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저는 당신의 마스터잖아요."

"……그래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요."

길가메쉬는 5회차의 류리를 떠올린다. 처음으로 마스터라 불렸을 때의 보여주었던 웃음을. 때로는 제 이름을 불러 달라 요청하던 목소리를. 영령에게 정을 주는 바람에 적의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하고 품속에서 죽어갔던 마스터를. 동시에 이 몸을 향해 복수를 운운하던 6회차의 류리가 떠오른다. 이 몸을 볼 때마다 한숨을 참지 못하던 입가. 파리한 백열등 빛 아래서 놓인 안광 없는 눈동자. 야경을 바라보며 심호흡하던 작은 몸뚱이. 돌풍을 맞아 흩날리던 머리칼. 허공으로 비산하는 혈향을 연상한다.

길가메쉬는 갈피를 잃는다. 집착도 강압도 그들을 승리로 이끌어주지 않았다. 답이라고 생각했던 선택지는 칼날이 되어 그의 마스터를 꿰뚫는다. 이젠 무엇이 정답인지, 정답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지. 어쩌면 자신은 정해진 인과 안에서 이 인간의 죽음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긴 침묵을 지키는 길가메쉬를 의아하게 여긴 류리가 선명한 색채의 눈동자를 또렷하게 뜬다. 보랏빛 시선 안에는 애착도 원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이 눈동자에 맺히는 감정이 결말의 일부가 되리라. 지금까지 쌓아왔던 시간은 전부 무가 되었다. 긴 세월 영령으로 존재하며 단 한 번도 무력감을 느낀 적이 없었던 길가메쉬는 제 앞에 놓인 상황에 확연한 노기를 느낀다.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지. 원망을 뱉어낼 상대는 이미 사라졌다. 남은 것은 현재뿐.

"……좋다, 마스터."

무엇도 정답이 아니라면 곧 이 몸의 의향이 옳다. 마지막 남은 기회를 헛된 연기와 가식으로 흘려보내지 않으리라.

"이 몸이 마스터에게 승리를 안겨 주겠다."

승리를 쟁취하리라. 시간의 농간과 운명의 비소에 굴복하지 않으리라. 이 몸의 이름은 영웅왕, 길가메쉬.

"고로, 절대 무너지지 말도록."

이 시간선에서는 주어진 모든 역경을 굴복시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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