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자캐 로그
샤오님 커미션, 23.08.07 작업물
세계의 근간인 수많은 지식과 인간에게 허락된 이치를 거스르는 지혜를 통달하였음에도 일평생 사랑이란 감정을 초월할 수는 없었노라. 이 책을 나의 유일한 반려 레이퀸넷에게 바치며.
수많은 마법 저서 중 역사에 길이 남을 명저라 불리는 『프리스틴 마법학』의 마지막 문장은 그렇게 마무리되고 있었다. 마법의 근간과 원리를 밝혀낸 역사적 위인이 평생을 바친 저서의 끝에 담은 지혜는 ‘사랑이란 감정은 초월할 수 없다’였다. 리엔시에는 서적 끝에 적힌 단순하고도 명료한 진리를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세계의 첫 번째 성녀라는 전생을 가진 리엔시에조차도 일생을 강타하는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니. 리엔시에는 읽고 있던 서적을 조용히 덮으며 제 앞에서 조용히 종잇장을 넘기는 세라엘을 바라보았다. 현시대의 성녀이자 과거 자신의 운명을 물려받은 소녀. 리엔시에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생명.
리엔시에의 시선을 느낀 세라엘은 말없이 시선을 들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느냐고 묻는 듯한 침묵에 리엔시에는 그저 웃음으로 답하며 속삭인다.
“그냥, 갑자기 얼굴이 보고 싶어서요.”
“시시하긴.”
세라엘은 단순한 어투로 일축하였으나 아까와는 달리 얼굴 겉으로 거의 태가 나지 않는 미소를 띠고 있었다. 입꼬리 끝에 걸린 미미한 애정을, 리엔시에는 똑똑히 인지할 수 있다. 그대로 세라엘의 독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리엔시에는 도서관을 함께 나서는 순간이 되어서야 세라엘에게 말을 붙인다.
“세라엘 님, 프리스틴 마법학 읽어보신 적 있나요?”
“당연하지. 그런 필독서를 읽어보지 않았을 리가.”
“그럼 그 책의 마지막 문장도 기억하시나요?”
세라엘은 생각을 뒤적이는 듯 조용히 고개를 기울인다. 명저라고 불리는 서적을 달달 꿰는 사람은 있어도, 실질적인 지식을 담지 않은 꼬리말조차 외우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리엔시에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으나, 세라엘은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어렵지 않게 답한다.
“반려에게 보내는 헌정사 아니었나.”
“어? 알고 계시네요? 이걸 물어봤을 때 대답한 사람은 세라엘 님이 처음이에요.”
“워낙 유명한 책이잖아. 읽기 전부터 서문과 맺음말을 어떻게 구성했을지 궁금했었어. 서문에서는 마법의 위대함을 주창했으면서 말미의 결론은 사랑이길래 조금 독특하다고 생각했지.”
독특하다고 생각할 법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기에 역으로 특별한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우니. 전생을 기억하는 리엔시에는 아직 삶의 고저와 파형을 충분히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쉽게 재단하기 어려운 원리야말로 삶을 관통하는 중심축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짙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세라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리엔시에의 예상을 뒤집는다.
“독특했지만, 그래서 오히려 좋았어.”
“오히려 좋았다고요? 왜요?”
“많은 진리를 통달한 현자가 가장 인간적인 감정의 중요성을 재창해준 거니까.”
나는 인간성을 등한시하는 것만큼 멍청한 건 없다고 생각해. 애정, 인정, 존경, 경외, 불쾌, 분노……. 그런 감정들이 결과적으로 사람을 움직이잖아. 사람이 사람으로서 기능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조차 인정하지 않으면서, 대체 무얼 통달할 수 있겠어.
“같은 의미에서, 나는 성녀라는 이름이 표명하는 모든 비인간성이 우스워. 성녀는 사치를 부리면 안 된다. 권력욕이 있으면 안 된다. 욕심을 버려라. 고결한 죽음을 곧 명예로 생각하라……. 하, 준 것도 없는 사람들이 바라는 건 왜 그렇게 많은지.”
현시대의 성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외압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세라엘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이는 리엔시에의 옛 인생에 대한 본질적인 위로다. 최초의 성녀라는 이름 아래서 죽어간 시에레인을 향한 직설적인 애도이자 추도사.
리엔시에는 새삼스레 자신이 어째서 세라엘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는지 실감한다. 순응하고 체념하는 대신 운명의 무게를 당당히 짊어지는 강렬한 자신과 고아한 자아에 대해서, 어찌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리엔시에는 조용히 세라엘의 손을 그러쥔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전할 수 없는 언어 대신 미소를 머금고 세라엘의 뺨에 가볍게 입술을 내린다.
“세라엘 님, 역시 당신은 멋있어요. 저는 그런 당신이 좋아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할 만큼.”
“새삼스럽게?”
“네. 새삼스럽게, 저는 당신을 영영 좋아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세라엘이 성녀인 이상, 그리고 리엔시에의 전생이 성녀였던 이상. 그 시기의 리엔시에은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떻게 엇갈릴지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채로, 세라엘을 향한 사랑을 읊었다.
- 카테고리
- #오리지널
- 페어
- #GL
댓글 0
추천 포스트
福
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