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마감 글 커미션' 완성본

[엘소드] 비고트 HL 드림

토깽님 커미션, 23.08.22 작업물

"비키세요, 퇴마사 씨."

"그럴 수는 없어요."

아인은 오늘도 자신의 앞을 막아선 채로 곧은 눈빛을 거두지 않는 지젤을 보면서 고요하게 입매를 비튼다. 엘의 힘을 이용하려 들었던 잡배들을 심판하려 할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는 방해꾼은 평소 유약하기가 이를 데 없어 자신의 어문 하나하나에 눈치를 보고 몸을 움츠리는 주제에, 아인이 살생을 저지르려 할 때만큼은 누구보다 강인하게 버티면서 아인을 설득하려 들고는 했다.

"이건…… 이건 옳지 않아요. 이 사람들은 그냥 한낱 도적일 뿐이잖아요."

"한낱 도적, 맞는 말이죠. 고작해야 도적 주제에 엘의 조각을 취하려던 시정잡배들. 그들에게는 고귀한 명분도 거창한 대의도 존재하지 않아요. 그 주제에 감히."

감히, 여신이 내려준 엘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탐하려고 들다니. 심판과 처단을 내리기엔 부족함 없는 상대임은 물론이고 저런 하찮은 생명 따위 사라지는 게 엘리오스의 미래를 위한 길일 것이었다. 애초 인간의 탐욕이란 끝이 없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 되풀이하는 것을 끝도 없이 지켜보지 않았던가. 아인은 탐욕에 눈이 멀어 오만하게 힘을 취하는 인간들을 그저 두고 보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같은 길을 걷지 못하게 된 동료들을 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으며, 이 손을 피와 살점으로 물들이는 것도 기꺼웠다. 하다못해 이토록 타락해버린 신의 사도를 보다 못한 여신께서 언젠가 단죄를 내리리라는 생각마저도 끝도 없는 기대감으로 수렴하고는 했다. 하지만, 사사건건 제 앞을 막아서는 이 유약한 성정의 퇴마사를 함께 멸하는 것만큼은 내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말하겠어요. 비키세요."

"싫어요."

지젤이 거부의 의사를 밝히는 순간마다 살생을 거두고 돌아서기를 몇 번 반복한 탓인지, 지젤은 이제 아인 앞을 막아서는 행위에 두려움을 붙이지 않았다. 자신 또한 잿더미 중 일부가 되리라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않는 것처럼. 그 확신에 반하여 그녀를 향해 공격을 퍼붓고 싶다가도, 저 강인한 얼굴이 무너지고 뒤틀리며 무력하게 오열하는 모습을 목도 하고 싶다고 느끼면서도 기어이 손을 거둔 채 뒤돌아서고야 마는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에는 저 방해꾼이 나타나기 전에 결착을 치르리라 다짐하면서 지젤이 찾아오지 못할 곳으로 영영 떠나버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날도 예외는 없었기에 아인은 무기를 거두는 대신 도적들의 아지트를 산산이 조각내 그들이 당장 거처를 강구하는 것 외에는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게 만든 채 뒤돌아간다.

"…… 들어줘서 고마워요, 아인."

자신을 향해 감사를 표하는 지젤의 목소리를 끝까지 모른 척한 이유는 자신을 막아서는 그녀를 향한 치기 어린 분노의 파편이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요. 퇴마사 씨."

그날 밤 같은 지붕 아래로 돌아온 지젤의 차림새는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은 물론이고 분명 사람의 칼날이나 손길에 의한 것이 분명한 상흔이 옷자락 곳곳에 남아있었다. 사람 여럿을 파멸시키고자 했던 아인의 앞을 막아선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기가 죽어서 슬그머니 한쪽 동공을 굴리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적나라한 비웃음이 입가에 스민다. 지젤과 원치 않은 동행을 하게 된 지도 꽤 오래되었는지라 아인은 대답하지 않는 지젤이 기어이 입을 열게 만드는 방법을 몇 개 꿰고 있었다.

"무시하는 건가요, 퇴마사 씨? 나 같은 살인귀는 이제 말을 섞을 가치도 없나 보군요."

"아, 아니에요…!"

"아니라면 왜 답이 없죠? 설마 내 말의 뜻을 파악하지 못한 건가요? 꼴이 왜 그러냐는 뜻으로 꺼낸 말이라는 걸 친절히 읊어드려야 하는 모양이군요."

지젤은 어수선하게 자신의 옷가지를 털어내고 찢긴 부분을 감추는 데 급급했지만 고작해야 손바닥 두 장으로 가려질 정도의 손상이 아니었다. 아인은 냉랭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로 답을 종용했고 지젤은 길어지는 침묵을 견디다 못해 입을 열었다.

"무너진 건물을 배상해달라고, 싸움이 이는 바람에……."

"호오, 아까의 그 도적놈들 말인가요? 그놈들이 너에게 배상해달라 말했다고요?"

웃기지도 않는군. 아인은 눈매를 대놓고 비틀어 마뜩잖다는 심경을 만면에 띄운다. 그녀가 내 앞을 막아서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도 그녀에게 배상 따위를 운운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지 아니면 염치도 예의도 없는 건지, 둘 다인 건지 알 수가 없군.

"우리의 유약한 퇴마사님은 배상해드릴 돈이 없었겠군요."

도적 이름이 어디 가지도 않는데 누가 무뢰배들 아니랄까 봐. 엉뚱한 사람에게, 그것도 보호해준 상대에게 돈을 뜯어내는 추잡한 도둑질을 당했음에도 지젤은 그 사실에 대해 상처를 입은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짜증조차도 찾아볼 수가 없었으며 그저 빌미를 제공할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는 곤란만이 확연하다. 그 사실이 도리어 아인을 자극한다.

"예에……. 숙소를 잡을 돈은 드리겠다고 말해도 막무가내여서."

"힘으로 제압했나요?"

"…… 어쩔 수 없었어요."

"하, 그러게 내가 날려버리겠다고 했을 때 순순히 비키지 그랬어요. 만약 그랬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런 무뢰배들 따위 죽게 두지 그랬냐는 말에 지젤의 기가 죽은 눈빛은 한순간에 결연한 의지라도 품은 기색으로 뒤바뀌어 고개를 젓는다.

"그럴 수는 없어요. 저는 아인 씨가…… 살육하게 두지 않을 거예요."

"그건 알량한 양심 때문인가요?"

"…… 그렇다고 할게요."

"한심하기 짝이 없네요."

"죄송해요."

지젤이 사과를 입에 담자마자 아인은 조용히 끓던 속이 새삼스레 뒤틀리는 감각을 느낀다. 드세지 못할 거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기라도 하든가. 아인이 조금이라도 적개심을 드러낼 때는 지레 겁먹고 미안하다 죄송하다 읊는 주제에, 무언가를 파괴하려 들 때만큼은 세상에 이보다 더한 사명은 없다는 듯이 강인하게 구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경우가 드물긴 했지만, 자신이 보호하려 들었던 상대와 싸움이 붙어 엉망인 꼴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한심하다 못해 지겨웠다.

"퇴마사 씨는 스스로가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미처 모르는 모양이군요. 네가 그렇게 손발 벗고 나서서 날 막아봤자 너에게 고마워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 것 같나요?"

아인의 힘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애초 여신에게 창조되어 여신의 뜻에 따라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진 수족인 만큼 일반인의 기준에서는 감당할 수 없는 무력을 지니고 있었다. 애초 인간에게 호의적으로 다가가지 않고 힘을 드러낼 때는 무언가를 멸할 작정인 아인과 달리, 그를 막아서는 지젤은 겉보기엔 그저 연약한 아가씨에 불과했다. 화풀이하기 좋은 것을 찾는데 도가 트인 인간들은 재앙의 근본인 아인은 두려워하고 지젤은 원망했다. 지젤이 아무리 아인을 막아서고 설득해봤자 인간들은 왜 진즉 지켜주지 않았느냐 내지는 입은 손해를 보상해달라는 뻔뻔함을 내비치고는 했다. 이와 같은 일이 한두 번 있었던 것도 아니다. 애초 엘의 힘을 이용하고자 하는 무리는 정도에서 벗어나 있는 경우가 많았고, 힘에 취한 잡배들이 으레 그렇듯이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하다. 지젤의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일반인에게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하나의 패착으로 작용하여 아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를 지젤이 수습하려 들면 곱지 못한 소리를 듣는 건 물론이고 아인이 물어야 할 책임을 지젤에게 떠넘기려 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도 지젤은 약자들 앞을 가로막았다. 이건 옳지 않아요. 제발요, 아인 씨. 애달픈 애원을 입에 담는 와중에도 당신이 기어이 마음을 돌리지 않겠다면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당신을 막겠다는 의지가 만연하다는 사실이, 처음부터 끝까지 아인의 신경 줄을 불태웠다.

"내가 정녕 퇴마사 씨를 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지젤을 일반인처럼 쉽게 해치우지는 못하겠으나 치명상 내지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까지 밀어붙일 수는 있을 것이다. 독하게 마음을 먹는다면 삶을 빼앗아 무로 되돌리는 것도 가능하겠지. 하지만 아인은 끝끝내 그러지 않았다. 지젤이 그의 팔을 붙잡고, 힘을 가로막고, 이건 옳지 않다는 간언을 내뱉는 꼴을 탐탁지 않게 지켜보는 와중에도 힘을 거두고 물러나고는 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녀를 언제든 치워버릴 수 있으나 지금은 단지 그 선택을 유예해둘 뿐이라는 얄팍한 변명에 기대어서.

"이거 질문인데요. 내가 퇴마사 씨를 해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이렇게 행동하는 거냐고요."

"…… 아뇨."

"설득력 없는 대답이네요. 오늘도 그래요, 내가 너와 함께 그놈들을 없애버릴 작정이었으면 어쩌려고 무기 하나 꺼내 들지 않은 맨몸으로 제 앞을 막았죠?"

"설득하고 싶었으니까요."

무기를 들면 대화가 되지 않아요. 저는 아인 씨를 설득하고 싶은 거지 힘으로 대화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나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아인은 기가 찬다는 것처럼 헛웃음을 내뱉고 만다. 지젤에게는 아인이 어느 순간 광신에 빠져 파괴와 파멸을 맹신하는 타락한 신관으로 보일 것이다. 그녀는 아직 아인이 신의 사자라는 사실을 모르니까. 어째서 그가 여신이 사랑하는 엘리오스를 파괴하려 드는 것인지 모르니까. 알 수 있겠는가. 오직 하나뿐인 사명에서 태어나 그것만을 위해 허락된 생명으로 온 힘을 불태웠으나 사명을 내린 존재로부터 이어지는 거대한 침묵을. 그 적막으로부터 오는 절망과 비탄을. 한낱 인간이 알 수 있겠는가. 오갈 곳 모를 분노가 치솟았다. 흡사 산소와 땔감을 만난 화마와도 같이 번져가는 분노가 아인의 속을 불태운다. 그녀는 그저 아인을 설득하고 싶다고 말했을 뿐이나, 이는 아인의 오랜 고뇌와 고통을 한낱 말 몇 마디로 돌릴 생각이라는 모욕이나 다름없었다.

"퇴마사 씨는 그 대단한 눈동자로 사람의 심정은 통찰할 수 없는 모양이군요. 내가 설득당하리라고 생각하나요?"

"그래도 저는 포기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방해하겠다는 말인가요? 역겨워라."

아인의 입에서 거부감 가득한 막말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으나 지젤은 아인을 막아설 때와 같은 눈동자를 내비치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의 분노마저도 마땅히 감내하겠다는 초연함은 아인의 심정을 잘게 구긴다.

"방해할 생각이라면…… 꺾이지도 않고 그렇게 굴 생각이라면, 어째서 날 단죄할 생각을 하지 않죠? 물론 쉽게 당해주지는 않겠지만 퇴마사 씨는 길가에서 굴러다니는 시정잡배들보다는 힘이 있잖아요. 퇴마사 씨가 전력을 다해 덤빈다면 나는 지금처럼 제멋대로 행동하지는 못할 수도 있어요."

"아까도 말했듯이 저는 아인 씨와……."

"싸우고 싶은 게 아니라고요? 내 입장에서 퇴마사 씨는 질리지도 않고 싸움을 거는 사람인데요."

지젤은 아인의 행적을 그저 두고 보지 못할 정도로 선한 주제에 그를 단죄할 정도로 모질지 못했고, 여리고 무른 성정으로 아인을 동정했다. 한없이 기껍게 여기면서도 안타까워 두고 보지 못하는 마음. 아인은 지젤이 그 앞에서는 결코 안대를 벗지 않는다는 사실을 진즉 눈치채고 있었다. 혼을 꿰뚫어 보는 눈동자로 그를 응시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결국 그의 본질에 대한 깊은 애도나 다름없었다.

"…… 그 안대, 내 앞에서는 절대 벗지 않더군요."

지젤은 인간의 혼을 볼 수 있었다. 그런고로, 아인이 지금껏 살육해온 생명이 여신의 곁으로 돌아갔는지 아니면 아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저주를 퍼붓고 있는지 똑똑히 알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지젤은 그가 없애버린 생명을 운운하며 공포를 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차라리 안대를 벗고 진실을 마주한 뒤에 협박해보지 그래요? '아인 씨를 둘러싼 수많은 원혼이 보여요'라고 말해보세요."

차라리 그런 꼴이 되었다면. 끝없이 침묵하던 여신이 수많은 생명을 멸한 신의 사자를 두고 보지 못하게 된다면. 그리하여 그토록 고대하던 응답을 얻게 된다면 차라리 기꺼울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 있는 퇴마사는 끝끝내 그를 응시하기를 거부한다.

"그 안대, 벗어보세요."

내가 정녕 여신의 눈 밖에 든 타락한 신관인지 고해보세요. 냉랭하게 쏟아지는 말에도 지젤은 고개를 흔들면서 거부를 표한다. 아인은 지젤의 두 눈을 마주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오기와 동시에 차오른 분노를 방아쇠 삼아 다가간다. 아인은 지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예고도 없이 안대를 뜯어내듯 벗겨버렸다.

"히익…!"

그 순간 지젤은 제 눈을 가리고 주저앉으면서 아인을 마주하는 것을 거부한다. 못 볼 것을, 이 세상의 이치 중 가장 괴악한 것을 마주한 듯한 반응이라 해석할 수도 있었지만. 말없이 떨기만 하는 행동으로는 파악할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았다.

"도, 돌려… 돌려주세요…!"

"싫어요."

아인은 지젤의 안대를 가볍게 불태워버렸다. 지젤은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타오르는 재의 향 때문에 상황을 파악한다. 한쪽 눈을 가리고 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간단하게 사라졌음을 깨달은 지젤은 숨을 들이켜며 눈을 가린 채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사사건건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방해물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쪼그라든 모습에 아인은 오갈 곳 없는 분노를 태우면서 입술을 깨문다. 고작 안대 좀 벗겨냈다고 패닉 하는 꼴이라니. 심기가 단단히 뒤틀린 아인은 그대로 그녀를 지나쳐 걷는다.

"…… 네가 오늘 지켜낸 무리를 처단하러 갈 겁니다."

당혹한 와중에도 아인의 말 만큼은 똑바로 들은 지젤이 여전히 눈을 가린 상태로 흠칫 놀란다.

"눈을 가린 상태로는 날 막기 힘들 걸요. 따라오기도 힘들 테고. 그래도 막고 싶다면 그 눈을 똑바로 뜨고 날 마주하세요."

당신이 기껏 지켜낸 것들이 폐허가 되는 모습을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리 말하고서 아인은 지젤을 내버려 두고 집을 나선다. 순전히 제멋대로 타오른 분노에 의한 과한 심술이었으나 아인은 같잖은 협박에서 멈출 생각이 없었다. 당혹한 모습에 괜히 오기가 샘솟는 것과는 별개로, 당신에게 보호받은 무리가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는 사실을 두고 볼 수 없으며 당신이 그런 꼴로 돌아온 순간부터 그놈들을 언젠가는 멸하고 말리라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그렇게 말한다면 지젤 파필리오가 그에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들릴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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