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창작, 윤호시문
흑미님 커미션, 23.07.11 작업물
바다 요정의 이름을 가진 조각상은 사후에 대양으로 돌아가는 대신 수증기가 되어 조각가의 곁에 남았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가 손가락 관절을 파고든다. 활을 당길 때는 팔의 힘이 아닌 상체의 힘을 이용하여 시위의 탄성을 통제하고 하체 전반으로 몸의 균형을 잡는다. 호흡 하나라도 틀어지는 순간 현의 탄성은 엉뚱한 곳으로 치솟고 화살의 명중률은 현격히 하락한다. 물리적 반성을 저항하는 것을 넘어 활과 팔의 경계마저도 희미해질 때까지 몰입하지 않으면 손을 떠난 화살은 올바른 기로를 찾지 못한다. 양쪽 시야를 이용해 목표를 포착하고 바짝 긴장한 시위를 걸림없이 놓는 순간 고요한 허공을 가른 화살이 어설프게 그린 종이 과녁 한가운데에 꽂힌다.
"와, 텐! 텐이에요! 역시 형은 대단하다니까."
구윤호가 가볍게 박수하며 경탄 섞인 칭찬을 쏟아내었으나 시문은 답 없이 활시위를 한 번 더 매긴다. 구윤호는 자신의 목소리가 시문에게 일말의 방해조차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입을 닫고 침묵으로 응원한다. 고요하게 집중하는 흑색의 눈동자, 억센 시위를 힘껏 걸어 당기는 손가락, 잘 빼어진 조각상처럼 한 치 틀림없는 자세. 일견 경건함마저 불러일으키는 몰입을 쏘아 보내자 날카롭게 날아간 화살은 다시금 텐을 꿰뚫는다. 종이로 대충 만들어 낸 과녁은 이미 정중앙이 너덜너덜하다. 시문이 참았던 숨을 천천히 고르자마자 낯선 목소리가 공기를 뒤흔든다.
"시문!"
시문과 윤호의 시선이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한다. 함께 안전지대로 들어온 동창 중 하나다.
"배급 시간 다 됐어. 얼른 밥 먹으러 가자. 다른 애들이 너 좀 불러오래."
"그래. 곧 갈게."
"헉, 벌써 식사 시간인가? 오늘의 연습은 여기까지네요. 그래도 고생했어요. 형!"
윤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시문은 답 하나 없이 자리를 정리한다. 수많은 화살의 수렴점이 박힌 종이 과녁을 떼어내면서 다시 종이를 구해 새 과녁을 만들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거친다. 공터에 어설프게나마 마련한 양궁장을 떠나면서 배급장소로 걸음을 옮긴다. 묵묵히 자리를 떠나는 시문의 뒤에는 언제나처럼 윤호가 따라붙었지만, 시문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안전지대 내부에서 주어지는 평화는 소위 말하는 통제와 안전을 상호 맞교환하는 형태에 지나지 않았기에 배급 시간을 어긴다면 그날의 식사는 공을 치는 격이었다.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주어진 식사를 받아낸 시문은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향하면서 자원 하나하나가 빠듯한 안전지대 내부에서 필수품도 사치품도 아닌 종이 한 장을 어떻게 구할지 골몰한다. 공터를 연습장으로 얻어낸 것도 좋고 분쟁의 화촉이 될 수 있는 화살과 활을 빼앗기지 않은 것도 좋았으나, 운동신경이란 마치 시시각각 풍화되는 무른 암석과도 같아서 수시로 연마하지 않으면 하등 쓸모없는 짐 덩이가 되고 만다.
후배가 그에게 맡긴 남은 생을 위해서라도 시문은 한시도 게으를 수 없었다. 시문은 배급으로 받은 버석한 군용 빵을 씹으면서 과녁을 향할 때만큼은 흡사 맹수처럼 빛나던 후배의 올곧은 눈동자를 떠올린다.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일말의 흔들림 없던 굳건함과 강인함에 대해 생각한다. 육신이 사라져 자유를 얻은 후배가 자신의 곁에 남아 내리 조잘거리는 것도 모르는 채.
"와, 여기는 왜 밥을 맨날 군용 빵으로 주는 거야. 정말 어이없지 않아요, 형? 굶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건 알겠는데 이건 너무 하네! 저희는 한창 무럭무럭 자라는 성장기의 청소년인데. 그렇죠? 아, 형은 곧 성인이니까 청소년 소리 듣기에는 좀 억울하려나?"
제 한 몸 부지하기 어려운 생자와 달리 오롯하게 자신의 의향 만에 집중할 수 있는 윤호는 하루 종일 시문을 바라본다. 애초 수다스럽지 못한 그의 선배가 찌푸린 미간 속에 어떤 상념을 담아두고 있을지 고민하면서. 구윤호는 행복을 알려주겠다던 자신의 말이 남궁시문에게 가 닿았기를 바란다. 그가 자신이 했던 말을 잊지 않기를, 결코 절망하지 않기를, 동시에 죽은 사람을 향한 죄책감 따위 없이 찬란한 생을 마저 살아주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가끔은 제 생각을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마음은 어떤 구문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어이, 시문 학생."
겹칠 일 없이 평행선을 달리던 두 사람의 깊은 상념을 깬 사람은 웬 군인 하나다. 총기를 맨 모양새를 보아하니 막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품새다.
"슬슬 교대 시간이야. 식사 다했니?"
"예. 곧 가겠습니다."
분란의 싹을 잘라내다 못해 뿌리까지 불태우는 안전지대 내부에서 화살이라는 무기의 개인적 소장이 허락된 이유는 시문의 활 실력이 안전지대 경계 순찰에 쏠쏠히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하게 청년 태가 나는 어린 학생이라 순찰 보조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안전지대와 바깥을 가르는 방호벽 위에서 멍하게 주변을 살펴보는 일과는 하루의 일부가 된 지도 오래되었다. 홀로 있을 때마다 그를 남겨두고 먼 곳으로 떠나보낸 후배가 생각난다는 사실은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아아, 오늘도 순찰 시간이네요. 또 몇 시간 동안 같은 곳에서 풍경 구경만 하겠네. 선배는 그거 지겹지도 않아요? 나 같으면 지겨워서 혓바닥에 가시 돋았어요."
시문은 얼마 되지도 않는 식사를 일찍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죽은 자들이 남긴 순간을 딛고 일어서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이미 생을 달리한 사람들의 추억이 눈을 가리고 상념을 어지럽힐지라도, 그의 후배가 시문의 불운을 모두 끌어안고 죽어버린 이상 시문에게 남은 것은 꿋꿋하게 살아간다는 길 뿐이었으니.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의 방호벽 위에선 하늘을 덧칠하는 노을이 선명히 보인다. 붉은 노을 너머의 눈 부신 햇살은 후배의 머리칼을 닮았기에 시문은 종종 손을 뻗어보았다. 온기 없는 손가락이 그의 손끝을 매만지는지도 모르고.
"있죠, 형. 지금 혹시 내 생각 해요? 아, 이것 참. 기쁘기도 하고 조금 슬프기도 하네."
시문은 죽음 직전에도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기던 후배의 결의를 떠올린다. 하릴 것 없이 사라지지 않은 온정을 기억한다. 시문은 반평생 자신의 일생이 불운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후배의 목숨을 짊어진 현재를 불운 가득하다 치부하고 싶지 않았다.
"형, 다리 안 아파요? 몇 시간 동안 서 있었는데도 어떻게 다리 아프단 소리를 하나 안 해."
물론 나도 다리는 안 아프지만요. 유령이니까! 문득 구윤호는 생각한다. 갈라테이아의 사후 전승에 대해서. 바다 요정의 이름을 얻은 조각상은 제게 주어진 숨이 멎는 순간, 수증기가 되어 피그말리온의 곁을 지켰다고 한다. 갈라테이아의 영령은 자신을 빚어낸 조각가의 곁을 지킬 것이다. 생의 존재가 내쉬는 숨결이나 하찮은 손짓 하나마저도 애틋하게 여기면서. 이제 구윤호는 망설임 없이 확신할 수 있었다. 사랑은 시공간을 넘어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자, 생과 사의 경계마저도 뛰어넘는 것이라고. 당신 곁을 아주 오래 지켰음을 전달할 수 있는 날이 온다면, 갈라테이아의 목숨을 짊어지고 생을 살아낸 당신에게 참 수고했다고 애정어린 위로를 건네리라. 그러니 그전까지는 부디 행복하게 살아주기를.
늦은 새벽, 순찰을 마치고 돌아온 시문은 활을 내려둔다. 피로한 날이지만 섣불리 불평할 수는 없다. 어차피 살아남은 모두에게 삶은 재앙이었으니. 시문 또한 인생을 비관하던 순간이 있었지만 마치 태양처럼 빛났던 후배는 그에게 희망을 가르치고 불운을 떠안은 채 가장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렸다. 그 목숨의 무게만큼은 생을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
"오늘도 수고했어요, 형! 진짜 형은 대단하다니까. 오늘 하루도 고생했으니까 얼른 자요."
한 번도 쉬지 않고 속삭이는 윤호를 두고 시문은 활만 내려둔 채 바깥으로 향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윤호는 의아한 낯으로 뒤를 쫓는다.
"응? 형, 어디 가요?"
숙소 건물을 나가서 도달한 곳은 안전지대에서 사람이 잘 드나들지 않는 공터다. 주변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시문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윤호는 그 물건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말을 잃는다.
구윤호.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명찰이 실제 윤호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히 쓸어 넘긴 시문은 조용히 두 손을 모은다. 그 모습은 마치 신에게 간절히 요구했던 조각가의 헌상을 닮았다.
"……구윤호."
꽤 오래 묵념한 시문은 드디어 운을 뗀다.
"난 잘 지내고 있어. 그러니까 너도 걱정하지 말고."
시문 곁에 존재하는 갈라테이아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윤호는 비록 허락된 숨을 다하고 수증기처럼 남아 대지에서 떠돌게 되었지만,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던 조각가의 아름다운 눈을 결코 있지 못 하리라.
"형, 나도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은 안 해요. 형이 오래오래 살 때까지 계속 지켜볼 거다, 뭐."
상대가 들을 수 없는 영원을 약속하며, 오늘도 달이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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