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무제

ⓒ 사유

0.

체르나는 이따금 일루미나의 군인은 지하성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일루미나는 아스트라 대륙 최전선에서 암귀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거창한 말 과 달리 실상은 언제 전장으로 보내져 어디서 죽을지조차 알 수 없는 처지와 같다. 당장 어제 말을 걸었던 동료가 오늘은 답을 줄 수 없는 상태로 돌아온다. 전선과 맞닿아 있다는 건, 죽음이 항상 곁 을 지킨다는 뜻이며⋯ 따라서 그가 자신을 소모품으로 여기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일개 군인 한 명의 목숨값은 과연 얼마나 할까. 보고서에 사망이라는 말이 적히기라도 하면 감지덕지다. 적어도 시체는 수습되었단 뜻이니까. 이렇듯 일루미나는 수많은 부품이 모여 움직이고, 사라지고, 교체되는 방식으로 생존을 거듭해왔다. 암귀를 저지하고, 대륙을 수호하면서. 하지만 그런들 부품이 부품이 아니게 되는가? 부품이라 묶어 말하고 있지만, 이곳에 있는 이라면 누구든 모든 부품이 다 같은 가치를 부여받지 않음을 안다. 어 느 부품은 사라지면 이 거대한 지하성을 멈추게 할 테지만, 어느 부품은 움직임을 멈추어도 누구 하 나 눈치채는 이가 없을지 모른다. 체르나는 자신이 후자에 가깝다 여겼다. 언제 작동을 멈추어도 이 지하성 어디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달리 말하자면 언제 교체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부품.

1.

한 번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목구멍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미 던져 버린 말에 이유 를 찾는다고 해도 의미는 없다. 오랜만에 공방을 찾은 손님에게 꺼내기 적합한 화두가 아니었다. 뒤 늦게 후회한들 소용이 없었고, 제 말을 들은 눈앞의 하얀 사내는 말 없이 자신의 노트를 꺼내 조용 히 무언갈 적기 시작했다. 제 말이 그의 노트에 적힐 정도로 대단한가 싶었지만, 사내의 버릇과 의 도를 분간할 만한 능력 같은 건 그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노트를 덮어 품에 넣을 때까지 멍하 니 있던 체르나는 결국 아나톨리가 시답잖은 일루미나의 사건·사고에 관해 이야기할 무렵에야 정신 을 차리고 입을 열 수 있었다. 결국, 그가 예의 바른 인사와 함께 떠나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을 때까지도 그가 노트에 무어라 적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2.

며칠 뒤, 공방으로 돌아온 사내는 의외의 말을 꺼냈다. 저는 사람이 하나의 부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방의 낡은 악보지를 집어 든 그는 평소와 같은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사람은 음 표에 가까워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제각기 다른 소리를 이루고, 하나라도 사라지는 순간 음악은 본래의 음을 잃고 만다고. 그건 체르나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기보단 스스로가 확신을 가지고자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마치 그 스스로가 답을 구하는 사람인 양 느껴져 체르나는 구태여 말을 더 보 태지 않았다. 다만 그가 떠나고 홀로 남은 공방에서 낡은 피아노의 먼지를 대충 털어내고, 덮개를 열어 익숙한 지점을 더듬어 손가락으로 꾹 눌렀을 뿐이었다. 너덜너덜해진 악보를 위에 대충 놓고, 자리에 앉아 몇 번이고 연주해 귀에 익은 멜로디를 천천히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가 말한 부분에서 연주는 돌연 끊겼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그의 말이 손목을 붙든 탓에 멈칫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체르나는 누르지 못한 음을 내버려 두고, 연주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의 말 을 필사적으로 증명하는 사람처럼, 느리지만 확실하게 한 음씩 힘을 주어 눌렀다. 기어이 악보의 끝 에 다다르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계속 숨을 참고 연주를 이어나갔던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숨을 몰아 내쉬며 체르나는 아나톨리의 말을 다시 곱씹었다. 그에게도 자신이 하나의 음표로 남을 수 있 는지를 의문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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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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