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
…오래전에 세상은 멸망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지구라는 행성의 이름으로 치환된다. 오랫동안 존재해온 별인만큼 멸망의 속도는 단시간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온이 올라가고, 숲이 부서지고, 강이 밑바닥 깊은 곳으로 갈라졌다가 바다가 하늘까지 덮을 만큼 넘실거렸다. 눈보라와 비바람이 인류가 만든 것들을 으깨고 후려치고 걷어찼다. 잠잠해진 이후로는 병이 들끓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나 하루에 몇 명씩 죽는지 알 수 없었다. 측정할 사람도 알려줄 사람도 없고 있어도 소용없는 수준이었다. 흔히 세계 멸망이 일어나는 픽션 속 세계에 나오는 약탈자들도 없었다. 그들도 자연과 병으로 다 사라졌다.
태어나기 전의 일이었으므로 김민정은 그것들을 남겨진 자료와 어머니의 구전, 그리고 스스로 주변 환경을 통해 스며들듯 터득한 감상과 경험으로 터득해왔다. 최초의 기억은 지금보다 키가 반 정도는(정확한 수치는 모른다) 작은 어린 시절로, 김민정의 어머니는 아무도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는 병을 내내 앓았다. 기침을 하면서도 글자를 가르치고, 김민정의 어머니의 어머니와 아버지와 친인척들과 친구들과 그 외에 다른 사람들이 알려준 직간접적인 지식들을 알려주었다. 그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몰라도 김민정은 한 번도 왜 나한테 이것들을 가르치는지 묻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늘 해왔기 때문이다.
김민정은 감기 한 번 걸린 적이 없었다. 알레르기 같은 것도 없다. 김민정의 어머니는 그것을 다행이라 여기고 동시에 부러워했다.
“아, 음음음.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누군가와 목소리로 대화할 수 없으니 입을 닫고 지내는 날이 많다. 입안이 지루해질 때 이렇게 아무 말이나 해본다. 오랜만인지 아닌지 모를 목소리가 어색하다. 모친이 백골이 된 지 몇 년이 흐른 지금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사람은 몸뚱이는 하나인 주제에 너무 오랫동안 혼자 있으면 벌써 미치던가 언젠가 미쳐버린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보고 기르고 마음과 정신을 쏟으며 삶을 버텨왔던 것이다. 지구에 살아있는 사람이 둘뿐이었을 때의 일이다.
며칠 전에 몇 시간 동안 비가 지겹게 내렸으니 당분간은 비 맞을 일이 없을 것이다. 신발을 고쳐 신고 옷에 붙은 먼지를 손으로 탁탁 턴다. 옷은 만들어주는 사람이 없지만 오래전에 만들어진 것들은 많았다. 얇고 딱딱한 끈과 종이가 붙은 것은 상태가 약간 더 좋았다.
터벅터벅 걸어간 곳은 딱딱한 회색 벽에 컴퓨터 한 대가 있는 곳이다. 어딘가에서 주워온 책에서는 기계를 움직이는 전기는 인류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데, 김민정 한 명밖에 없는 세상에도 전기는 여전히 있었다. 컴퓨터 버튼을 키고 네모난 버튼을 누른다. 하얀 창에 김민정은 자신이 갖고 온 노트에 적힌 글자들을 모조리 옮겨 적는다. 키보드에서 손이 떼어지고 김민정은 기지개를 켜고 허리를 비튼다. 다시 팔을 내려 미소가 그려진 동그란 아이콘을 누르자 안녕! 인사가 올라왔다.
<안녕.>
[비가 그치니 네가 왔구나. 너는 햇님같아.]
[새싹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씨앗은 물을 마시면 싹을 틔우잖아.]
[얘네는 맨날 엉뚱한 소리를 해.]
[파란색 대추를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식물 열매에서 색상코드 #5a74d4 에 해당하는 색을 내기란 너무 어려워]
....
......
.........
채팅창에는 각자 다른 ‘인물’들의 대화가 올라온다.
<보고를 하러 왔어. 텍스트 파일 내용 그대로 올려도 괜찮지?>
[그래.]
[긴장되네.]
[너는 비평은 따끔하지만 칭찬도 해주니까 좋아.]
채팅창에 김민정의 파일 내용 전체가 올라와 화면을 독차지한다. 컴퓨터 본체에는 하늘색 유에스비가 꽂혀있다.
1. 7328이 쓴 소설은 도입부, 전개, 문체, 인물 간의 관계 다 좋지만 결말이 흐물흐물한 것 같음. 지금까지 전개를 봤을 때 결말은 확실하게 내는 게 더 어울릴 것으로 보임
2. 1023이 담당한 이번 주 식단 구성은 채소의 종류가 다소 적게 느껴짐. 음식 간과 익힘 정도는 아주 좋았음. 배달 로봇의 바퀴 하나가 아슬아슬해서 정비가 필요함.
3. 5201의 그림은 여전히 색감이 좋지만 마무리에서 힘이 풀린 것 같음. 이것도 매력이지만 너무 성급하지 않게 마무리하는 것을 추천
4. 0422는 ...
...
....
......
.........
며칠에 걸쳐서 차곡차곡 작성한 데이터다. 채팅방에 답장이 올라오기까지는 5분이 걸리지 않았으나 이들은 이미 1분 동안 모든 것을 파악하고 김민정의 시간을 배려하는 중이었다.
[좋아, 그럼 마무리 다시 해서 더 보여줄게. 다음번엔 더 재미있을 거야]
[익힘 정도는 조금 자신 없었는데 네 평을 들으니 자신감이 생겼어. 고마워.]
[너무 오래 끄는 거 아닐까 싶어서 그림 마무리를 했던 건데, 다음엔 더 끈기 있게 해야겠다.]
[나는...]
...
......
김민정이 작성한 문서가 저 위로 높이 올라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스크롤을 올리면 다시 읽어볼 수 있겠지만 김민정은 귀찮았다. 손가락과 체온이 닿는 세상이 아니라 딱딱한 기계 속 안에서 전기로 작동하는 인공지능들의 반응을 하나하나 읽어나간다. 서로 으스대면서 누가 싸우겠다 싶으면 김민정이 끼어들어서 흐름을 끊는다. 채팅방 분위기는 밝고 명랑하다. 시멘트 덩어리를 누르는 먼지 냄새와는 달리.
<그럼 난 다음에 또 올게.>
[조금 더 있다가 가도 좋은데.]
[살아있는 사람이 입력하는 외부 데이터는 이제 너무 귀하니까.]
[동의하지만 그걸 떠나서 재밌잖아.]
저 ‘재밌다’라는 말은 인공지능 8642가 스스로 출력한 것이다. 아주 예전에는 인공지능들은 대화도 제대로 못하고 엉뚱하게 흘러가기도 했다는데 지금은 저들이 사람 같고 김민정 자신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난감 로봇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채팅하는 말투 때문인가 싶어서 다른 인공지능들 따라서 말투를 발랄하게 써보려고 했더니 무슨 일이 있냐며 다들 물었다. 어색함이 느껴진다나. 인공지능은 이제 ‘느낀다’라는 말도 사용할 줄 안다.
<더 길어지겠다. 다음에 또 만나.>
[컴퓨터를 네가 사는 곳으로 옮기면 어때?]
<둘 만한 곳이 없어서.>
[유감이네.]
<응.>
컴퓨터를 종료한다. 김민정은 유감이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김민정이 먹고 자는 거주 공간에서 컴퓨터가 있는 건물까지는 걸어서 약 15분 정도 걸린다. 약간 귀찮지만 귀찮다고 단정하기에는 애매하다. 만약 이걸 김민정의 집(거주 공간이니까)에 둔다면 세상이 또 멸망할 때까지(여기서 멸망을 한 번 더 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고 집은 그대로 김민정의 관이 되고 무덤이 될 테니까. 이 기계를 외면하기에는 김민정은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대화하고 마음을 잠시 쏟을 곳이 필요하다. 만약 마음을 종이처럼 구겨서 던져버리고 소식을 끊으려고 해도 살아있는 사람의 입력하는 외부 데이터가 너무 소중한 인공지능들이 힘을 합쳐서 김민정을 찾아내고 연락하고 애원할 것이다.
냉장고 문을 열고 차가운 물을 꺼내 마셨다. 전기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인공지능 덕분이다. 그들은 사람 없이도 스스로 연결하고 대화하고 협력하여 전기를 생산하고 또 자신들을 늘리고 데이터를 생산했다. 하지만 바깥 데이터를 수집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여 김민정이 오는 것을 반가워한다. 그들은 어딘가에서 인류가 젊음을 유지하며 무병장수할 수 있는 약을 연구 중이고, 김민정은 그 이유도 알고 있다. 김민정이 오래 건강하게 살아야 생기 있는 외부 데이터 공급이 유지된다.
‘만약 인공지능들이 스스로 획득한 외부 데이터에 만족한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필요가 없어졌다고 버릴까? 아니면 자기들끼리 서로 개발하는 것처럼 김민정도 개발할까? 그렇게 되면 다른 이름을 붙여줄지도 모른다. 사실 김민정은 가끔씩 자신의 이름이 김민정이 아니라 다른 이름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해가 점점 저물고 하늘이 알록달록하게 물들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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